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베어드 선교사

예인짱 2018. 5. 17. 08:09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7> 근대의 여명, 베어드 선교사

한 미국인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부산 근대화의 씨앗이 잉태됐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2-06 19:20:18
  •  |  본지 13면

   
1895년 초 베어드 선교사가 꾸린 한문서당의 학동들. 왼쪽 뒷줄에 베어드가 서 있고, 그 앞에 부산 경남지역 첫 전도자인 서상륜이 보인다.
- 구한말 5년을 부산에 머물며
- 선교·교육에 헌신한 베어드 부부
- 이들의 땀과 눈물이 밴 사랑방이
- 지금 초량교회의 모태다

- 그의 흔적이 남은 동네에
- 추모하는 기념비 하나쯤
-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부산 근대화의 씨앗

1891년 1월 29일.

   
1890년대 부산 영주동 일대에 들어선 외국인 선교사의 집들. 부산 근대사의 한 부분을 증언하는 사진이다.
훤칠한 한 벽안의 청년이 뱃머리에 서서 부산항의 어둠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머문 곳은 초량과 부산진 일대의 민촌. 그의 가슴 속에는 곧 사역(使役)하게 될 낯선 땅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때까지도 부산은 한적한 포구였다.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은 불과 15년 전, 일본의 강권에 못이겨 부산항을 열었다. 부산항은 접안시설을 확충하고 선박 출입을 늘리며 서서히 개항장의 면모를 갖춰갔다.

이 청년은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1862~1931), 미국 북장로회에서 한국에 보낸 선교사였다. 미국 인디에나주 태생인 베어드는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 안수를 받고 1890년 11월 애니 아담스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이들이 택한 신혼여행지는 멀고도 낯선 한국. 삶의 전부를 건 선교 여행이었다. 최고의 지식인이 고국의 안정된 삶을 마다하고 험난한 선교의 삶을 선택한 것은 어떤 계시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부산에 대한 베어드의 첫 인상은 이랬다. "한국인의 마을이라기보다 일본인의 마을같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전선줄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였고, 전보가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였다…."

베어드 부부는 그후 5년 가까이 부산에 머물면서 선교와 교육 활동에 헌신했다. 이들의 활동이 부산의 근대화의 씨앗이 되고 한국 개화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베어드는 대구, 서울을 거쳐 평양에서 숭실학당을 세워 민족주의자 조만식, 작곡가 안익태, 한경직 방지일 목사 등 굵직한 근대 지식인들을 키워냈다.


#한문서당과 선교사 마을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1895년 초 누군가가 찍은 사진 한 장. 왼쪽 뒷줄에 구레나룻 성성한 베어드가 서 있고, 그 앞에 의관정제한 선비가 보인다. 선비는 부산 경남지역의 첫 전도자로 알려진 서상륜이다. 왼쪽 앞줄은 베어드의 부인, 맨 오른쪽은 아담스 선교사, 그 옆은 한국어 선생이었던 고윤하(서울여자대학 설립자인 고황경의 조부)다. 그 사이에 낀 앳된 학동들과 청년들…. 눈빛들이 살아있다.

부산에 정착한 베어드는 미국공사 알렌의 도움으로 선교기지가 될 사택을 짓는다. 이름하여 '옴니버스 하우스(Omnibus house)', 만인을 위한 집, 이른바 사랑방이었다. 당시 부산해관 건물을 제외하면 부산 유일의 민간 소유의 근대 서양식 건물이다. 그 위치는 일본인 거류지의 끝 영서현(혹은 영선현), 지금의 부산 중구 영주동 코모도호텔과 메리놀병원 중간쯤으로 추정된다.

베어드는 1892년 말 이곳 사랑방에 한문서당을 열어 주민 교육과 전도를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들던 참가자는 1년도 안돼 100여 명에 이르렀다. 베어드는 1893년 6월 일기에 '처음으로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다'고 적고 있다.

1890년대 영서현(현 영주동 일대)에는 선교사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사진에는 베어드의 사랑방(한문서당)과 스미스 선교사의 사택, 어을빈 의료 선교사의 집과 병원 등이 뚜렷이 드러난다. 부산항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이 부산에 이식되고 있는 모습이 포착돼 있다.

이 땅의 외국인 선교는 베어드가 오기 전부터 시작됐다. 1884년 9월 14일 미국 의사 알렌이 부산에 왔고, 이듬해 4월 2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나란히 부산에 들어왔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훗날 각각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을 세웠다.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는 1890년 데이비스 선교사를 한국에 보냈으나 긴 도보여행 끝에 열병으로 죽자, 1891년 10월 매카이 목사 부부와 미혼 여선교사 멘지스 등 5명을 부산에 파송했다. 바야흐로 선교시대였다.


#부창부수 전도 여행

   
애니 베어드
베어드는 부산을 거점으로 경상도,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는 전도여행을 했다. 멀리는 전주 목포, 가까이는 안동 경주 대구 밀양 청도를 쉼없이 순회했다. 영남대로 황산도 삼남대로 등 조선의 옛길이 전도 루트였다. 유교 전통이 강한 경상도 지역의 주민 접촉은 순탄치 않았다. '한번 떠날 때마다 말 두필에 동전을 싣고 다니며 여행 경비를 충당했으며, 백성들은 외국인과 그들 종교와는 상관 하여선 안 된다고 써붙인 방(榜)도 볼 수 있었다.'('초량교회 120년사' 중)

1895년 10월 끔찍한 궁중사건이 일어났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이때 베어드는 부산에서 서울로 도보여행 중이었다. 일제의 폭력성과 횡포를 확인한 베어드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 왕이 억류되고 거리에서는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 왕의 요청으로 선교사들이 궁전에서 불침번을 서야 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조선 왕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선연하다.

이 시기에 베어드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딸 낸시 베어드를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는다. 이 아픔의 흔적은 베어드의 부인인 애니 베어드가 작사한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에 녹아들어 있다. 애니 베어드는 찬송가 번역사업은 물론,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등 한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고영규젼' '부부의 모본'이란 단편소설까지 쓴 다재다능한 지식인이었다.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애니 베어드는 안타깝게도 암에 걸려 1916년 한국의 선교 현장에서 생을 마쳤다.

평양은 베어드에게 또다른 기회의 도시였다. 1897년 베어드는 평양에 새로운 사랑방을 여는데, 그것이 숭실대학의 모태인 숭실학당이다. 숭실학당을 열 때 평양시민들이 가락지나 비녀 등을 팔아 건립비의 절반을 부담한 일화는 유명하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숭실대학은 1938년 자진폐교로 맞섰다. 베어드가 뿌린 교육 선교의 씨앗은 항일 민족의식으로 자라났다.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을 단순히 서구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봐선 안 되는 이유다.


#교회사를 넘어

   
베어드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출발한 부산 동구 초량교회.
동구 초량동 초량교회 2층 역사관. 마치 보물을 숨겨둔 것 같았다. 미로같은 통로를 따라 올라가자 20평 규모의 역사관이 나왔다. 부산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압축 파일처럼 소개돼 있고, 일제 강점기 교회의 저항, 굴곡의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정리돼 있다. 역사관 중간에는 초량교회 3대 주기철 목사의 강대상(설교대)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기철 목사는 3·1운동을 지원하고 뒤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중 순교한 인물이다. 백산상회를 이끈 독립운동가 윤현태·현진 형제와 안희제 선생이 이 교회의 중건을 위해 거액의 희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역사관을 안내한 곽원섭(67) 장로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와 베어드가 남긴 일기, 비망록 등을 보면 베어드의 사랑방이 초량교회의 모태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는 교회사를 넘어 부산의 근대사와도 연관이 된다고 말했다. 2013년 발간된 '초량교회 120년사'에는 1890년대 초 들어선 영서현 교회가 오늘날 초량교회의 모태라고 적고 있다.

베어드가 세운 부산의 첫 교회가 동구 좌천1동의 부산진교회라는 주장도 있다. 부산경남 교회사를 연구해 온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초량교회는 미국 북장로회가, 부산진교회는 호주 선교회가 관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1890년대 초 1년 상관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회가 개척됐기에 최초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보다는 베어드의 미션 루트와 자취, 그 의미를 캐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베어드는 1931년 11월 평양에서 소천했다. 베어드에 대한 기억은 교회의 역사일뿐, 일반인들의 관심에선 멀어져 있다. 초량교회의 베어드관, 부산진교회의 베어드 행적, 김해교회의 베어드 전도 표지석, 경북 팔조령의 청도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비, 대구 약전골목의 남성로 선교관, 국채보상로에 있는 대구제일교회의 베어드홀 등이 베어드를 부르고 있지만, 교회 바깥에선 소리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세워진 베어드의 묘비가 싸늘하게 와닿는 건 그를 너무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베어드의 발자취 일부는 교회사를 넘어 부산의 근대사를 구성한다. 근대사의 속살에 닿으려면 베어드의 진심을 만나야 한다. 배위량과 안애리. 이국 땅에서 한국이름을 갖고 온 생애를 던져 교육과 믿음, 섬김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베어드와 그의 부인. 영주동 코모도호텔 근처든 부산진교회 어디든 베어드 기념비 하나쯤은 세워야 하지 않을까. 종교를 떠나서 말이다.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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