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선교사열전/ 대구 선교의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

예인짱 2018. 5. 17. 08:26
선교사열전/ 대구 선교의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안의와 선교사의 사역으로 대구는 미국 북장로교회 대표적인 선교지역으로 발돋움 하게 돼, 그는 당시 북장로교회의 3대 선교거점(평양과 서울, 대구) 중 대구의 선교 초석을 놓아
2014년 11월 12일 06시 4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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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배당의 성도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10)

아담스 선교사는 급한 마음에 사공들을 채근하였다. 낙동강 물길을 거슬려 대구로 올라오는 배편이 그리 쉬운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역의 현장에 한시바삐 당도하고 싶은 마음도 마음이지만, 현실적으로 날이 저물어 대구 도성의 문이 닫히기 전에 빨리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살을 헤쳐 가는 배의 속도로 보건대 제 시간에 대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생겼다. 그는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길 좌우로 붉게 물든 늦가을의 산하를 감상하면서 핏빛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골몰하며 기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담스 가족이 대구에 당도한 시간은 이미 성문이 굳게 닫힌 밤중이었다. 성문 밖에서 수문장에게 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한 번 닫힌 문이 다시 열리기는 쉽지 않았다. 조금 후에 성 안에서 왜 오늘 밤 안으로 성에 들어가야 하는가 그 이유를 물어 왔다. 



 
그때 아담스는 대답하기를 빨리 성안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 수문장은 이 소식을 관찰사에게 전하였고, 관찰사는 서양인도 부모에 대한 효(孝)를 알고 있으니 기특한 일이라며 문을 열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캄캄한 밤중에 굳게 닫혔던 대구 도성의 문이 열려진 것처럼 영적 어두움에 잠긴 대구가 복음의 사도 앞에 굳게 잠긴 빗장을 풀게 되리라는 징조는 아니었을까?

아담스! 미국 인디애나 출생인 그가 가족을 데리고 한국의 낙동강을 따라 대구로 오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19세기 말 미국은 말 그대로 부흥운동의 도가니였다. 

이때 수많은 백인 젊은이들이 선교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기와 말라리아의 나라로만 알려진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향하였다. 선교에로의 부르심은 아담스라고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위쉬번 대학과 존 홉킨스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진지하게 기도하는 중에 자신의 삶을 선교에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시카고에 있는 멕코믹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는 미국 북장로교회 교단 신학교로서 ‘중부의 프린스턴’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정통 장로교 신학을 담고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894년에 결혼과 더불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와 결혼한 넬리 딕 역시 선교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집안의 딸이었다. 딕의 언니가 먼저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났기 때문에 딕 또한 어릴 시절부터 가졌던 선교의 비전을 꿈꾸고 기도하던 중이었다. 

아담스의 집안 역시 선교에 열정적이었는데, 그의 누님이 이미 베어드 선교사와 결혼하여 한국의 부산지부 선교사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그 또한 한국의 부산지부 선교사로 임명이 되었고, 1895년 5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어학 공부와 더불어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대구 선교지부를 개설한 베어드가 서울로 떠나는 바람에 그의 후임으로 대구지부의 책임자가 되었고, 1897년 11월 1일에 배편으로 대구에 가족과 함께 들어왔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아담스의 선교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가 대구를 떠나는 192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이 땅에서 이룬 선교적인 업적은 후술하겠지만 한 두 마디의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그는 베어드가 닦아 놓은 터전 위에 선교의 집을 건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사역으로 대구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지역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북장로교회의 3대 선교거점이 평양과 서울, 그리고 대구였는데, 대표적 선교사가 마포삼열, 언더우드, 그리고 대구의 아담스였다.

아담스! 우리는 그를 일컬어 ‘대구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시작한 선교는 대를 이어서 자녀들까지 연결되었으니 대구, 경북의 교회는 알게 모르게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박창식 목사/ 달서교회, GMS부이사장, Ph.D(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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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아담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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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사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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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 아담스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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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선교사 부인 넬리 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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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선교사가 대구 지역에서 선교의 열정을 쏟고 있다>

크기변환_조랑말을 타고 대구 인근의 시골 전도에 나서는 애덤스 목사(오른쪽)과 존슨 의사(왼쪽)..jpg
 
<조랑말을 타고 대구 인근의 시골 전도에 나선 아담스 선교사>




김찬 기자 chantou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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