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일기

고난주간을 맞으며 갖는 생각

예인짱 2011. 4. 19. 12:18

 

 

 

오늘까지 예수님을 믿으며,

지금처럼 예수님의 깊은 마음과 사랑을 실감하는 때가 없다.

내게 예수님이 계심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 수록 깊고 깊은 신앙의 비밀들이 내안에 들어옴이 너무도 놀라운 사랑이요, 축복임에 감격스럽다.

 

2011년 고난주간이다.

내게 떠오르는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회개와 금식을 하며 보낸 고난주간이다.

언제부턴가 내 속엔 순결한 신앙이라는 주제가 늘 자리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나는 늘 순결하지 못한 신앙을 하는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난 늘 그렇게 괴로워하며 몸부림 치는 신앙을 반복했다.

고난 주간엔 특히 그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신앙의 본질을 놓친 신파극의 신앙을 했는지를 보며 가슴이 아프다.

 

내가 처음 신앙을 할 땐 정말 좋았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뛰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나를 사로잡는 언어는 영생이었다.

영원히 안죽고 산다는 것이 내겐 너무도 놀라운 진리였다. 내 생명이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진리였다.

 

그보다 더 나를 황홀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예언기도였다.

난 교회에서 하는 집회를 통해 목사님들로 부터 예언기도를 받았고, 그 때마다 목사로 너를 택했다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를 모세같이 바울 같이 들어 쓰신다는 음성은 나를 황홀경에 빠져들게 했다.

 

온 세상에 어디에서도 가질 수 없는 자존감과 행복감에 취해 살았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황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 시절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난 그 때를 꼽을 수 있을만큼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난 마치 내가 목사가 된 것처럼, 마치 부흥강사가 된 것처럼 의식과 행동을 가지며 살았다.

그때 학교에서의 내 별명은 목사님이었다.

 

그 황홀한 시기가 지나고 난 정말 신학대학에 갔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은 병들기 시작했다.

인생의 문제, 삶의 문제,

모든 문제앞에 속수무책으로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나를 가장 좌절시킨 것은 신학대학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었다.

본 받을 만한 교수, 본 받을 만한 교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 학교, 그 교회가 아니었다.

그 혼란을 뭐라 말해야 할지, 난 모든 것이 포기된 존재로 살아야 했다.

 

대학 3학년 때,

난 스스로 신학대학을 그만둘 결심을 가졌다.

더 이상, 신학의 의미도, 목회의 의미도 다 포기된 상태였다.

10.26사건이 있은 후, 대학은 다 휴교가 되었고, 난 모든 삶을 정리하고 군대에 가기고 결심을 한다.

다시는 신학대학에 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따리를 쌓다.

그리고 집에서 보낸 6개월동안 난 한 없이 까불림을 받아야 했다.

 

이성적 세계와 영성적 세계사이에서의 갈등,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길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길의 갈등이 이어졌다.

사실 내가 본 목회의 현장은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도와주는 그런 리얼한 영적현장이 아니었다.

마치 교회라는 현장에서 장사를 하는 듯한 모습에 학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신앙의 근본을 없애기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양심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음성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날 목회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은 한편의 소설을 읽으면서이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을 읽으며 석 순옥의 사랑을 보며, 나도 석 순옥 같은 사랑의 삶을 살고 싶었고, 그것을 하는 길이 목회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다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렇게 군대생활을 하고,

제대를 하고, 우연한 기회에 대학교를 찾게 되고,

그러다가 갑자기 대학에 복학을 하게 된다. 대학원을 다른 곳에 다닐 결심을 갖고,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꿈꾸던 것 처럼  대학원에 입학 한다.

그런데 대학원은 내가 찾던 그 대학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갈등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고, 결과적으로 오히려 이전 것을 찾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난 갑자기 목회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

이런 저런 과정을 겪으며 난 목회의 길에 접어든다.

나름대로는 준비를 했지만 하나님 앞에 준비된 목사는 아닌 채,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때 내 가슴속엔 오직 하나의 주제만이 있었다.

사랑의 목회,

그래 예수님이 사랑해 주신 것처럼 나도 사랑해 주자.

사랑하는 목회를 하자는 결심을 가졌다.

 

그리고 교회를 했다.

존중과 사랑, 헌신과 수고의 목회를 시작했다.

결과는 우호적이었다. 시골교회를 새로짓는 대 역사가 일어났다.

교인도 늘었다. 그러나 내 속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난 진실이 없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교인이 미웠다.

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을 사는 목회가 너무도 허무했고, 한심했다.

난 개척을 결심했다.

 

그래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해보자,

하나님 앞에 참된 교회를 해 보자라고 결심했다.

그런 마음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처럼 교회가 되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목회의 아클레스 건이 흔들렸다.

목회의 일번 주제는 교인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를 발견하고 있었다.

 

기도원에 갔다.

1989년 1월 7일

청천 다락원에서 금식기도를 드린 3일째다.

 

정말 기도가 안되었다.

찬 바람에 발이 시려서 발을 오그리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보다라고 생각하며 나 자체도 포기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 기도일이기에,

오늘이 지나면 그나마 기도할 수 없기에,

한 밤중에 대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다.

 

행동을 중지하라.

행동으로 내게 나아오지 말라.

내가 찾는 것은 너다.

 

이 음성을 세번 들었다.

처음 들을 땐, 마귀의 음성인줄 알았다.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 소리인줄 알았다.

 

그런데 세번 반복되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지금까지 행동주의 신앙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기도가, 성경 읽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었다.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께 가는 것이었다.

그런 신앙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던 내게 행동을 중지하라. 내가 찾는 것은 너다라는 음성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난 기도 너머에 계신 하나님

성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찾는 것은 기도하는 나, 성경 읽은 나만이 아니라,

나 자체가 하나님이 관심 갖는 대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내 속에 자리하는 신앙의 주제가 되었고,

모든 신앙의 세계가 살아있는 세계가 되었다.

 

스스로 있는 자

출애굽기3:14절의 말씀은 내게 주신 최고의 진리였다.

유일한 유, 유일한 생명, 절대자,

모든 가설을 뒤엎고, 모든 종교를 뛰어넘는 절대 파워의 진리를 만나게 되었다.

 

난 존재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내 존재가 어떤 존재의 뿌리로부터 생겨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내 존재가 지금 어떤 생명세계 앞에 있는 존재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내 생명의 사실,

이 우주의 사실,

이 사실이라는 단어가 내게 위대한 힘을 주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하였다.

 

난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진리를 가진자로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의 진리안에서 모든 복음은 너무도 정확하게 펼쳐지게 되었다.

그안에 예수님도, 성령님도 다 해석되었다.

 

난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런데 내가 무엇때문에 왜 살아야 하는지를 깊게 정리하지 못했다.

내 속엔 생명얻은 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적리더, 사회적 리더, 경제적 리더를 세우는게 목표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2005년 내 인생의 가장 치욕의 해였다.

아니 그 때 난 이미 죽었다.

아니 하나님이 나를 죽였다.

 

난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되냐고,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냐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그게 문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신 분명한 음성이 있었다.

내가 한다고,

너는 가만히 있으라고,

 

난 하나님이 다 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다 말아먹고 말았다.

철저히 졌고, 철저히 망했다.

 

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나쁜 사람입니다.

나를 벌하십시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니다. 넌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죠. 저를 아시죠,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아시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니다. 넌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얼마나 오랬동안 난 나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휩싸인 채 휘둘린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 속에 들어오는 위대한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셨다.

 

내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내가 잘나서 나를 사랑하심도 아니요,

내가 못나서 나를 사랑하심도 아닌,

예수님의 변함없은 사랑이 내안에 자리하고,

그 사랑이 영원히 나를 감싸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내 존재의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분으로 내 곁에 계심을 알게 되었다.

 

일만달란트의 탕감,

20만년을 갚아도 못 갚을 빚을 탕감받은 존재,

내가 아무리 잘못 하여도 그분안에 있는 존재요,

내가 아무리 잘 나도 그 분안에 있는 존재임을,

그분의 값,

그분의 공로로 구원받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게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을,

이게 하나님이 만드실 영생안에 사는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너무도 깊게 깊게 절감하게 하셨다.

 

난 눈물로 밤을 지샜다.

이 세상에 나를 진정으로 지지해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너무도 깊게 실감했다.

나와 더불어 먹으시는 예수님,

나의 낮은 상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난 그 때,

내 존재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내 삶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난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이다.

이 자체가 나의 존재의 값을 다 지불한 자리이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목회의 자리가 처음으로 떨쳐 버릴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목회와 내 존재는 언제나 일치된 언어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목회가 내 존재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난 이미 얻은 자가 되었다.

난 영원히 예수안에 속한 자가 되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예수안에 속한 자요,

내가 아무리 못나도 예수안에 속한 자가 된 것이었다.

 

이 자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예수안에서 동일한 은혜안에 있는 자임을 뼈져리게 각인하게 되었다.

 

예수안에 있는 나는 모든 것을 얻었다.

이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자이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은 내게 요청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기쁨이었다.

기쁨, 평온,

이런 주제가 내게 그렇게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난 상상도 못했다.

 

하나님은 이 주제에 부족한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질병을 주셨다.

세상에 치료할 약이 없는 병을 주셨다.

사랑이 약한 나를 고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뼈아픈 상처가 되는 현장을 만들어 주셨다.

 

난 결심했다.

내 생애의 목표로 이것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기쁨, 평온의 삶을 살겠노라고,

그 기도 후엔 몸은 씻은듯이 나았다.

정말 기적이었다.

 

난 그날 이후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사랑이라는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기쁨이 도적질 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고,

그 뒤에 얼마나 무서운 사탄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

 

그 과정속에서 깨달은 위대한 진리가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더 풍성함, 더 풍요함을 주시는 위대한 인격이시요,

그 인격이 지금 내 속에 계시고,

그 성령의 인도함안에 사는 것이 모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셨다.

 

왜 몰랐을까,

성경에 그렇게 분명하게 제시하신 길인데,

왜 그걸 이렇게 돌아서, 돌아서 찾는 것일까?

 

그런데 너무도 감사하다.

이 진리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무장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이 진리로 나를 세움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우리 성도들에게 이 사람을 만들고, 이 삶을 살게 하는 현장을 주게 됨이 너무도 기쁘다.

 

2011년 오늘,

난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예수님을 만난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이렇게 글로 고백함이 나의 행복이요, 축복이다.

이 진리안에서 맞는 고난주간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고 귀하다.

 

나에게 주신 생명,

나에게 주신 더 풍성함,

내게 없애주신 어둠의 영,

내게 가득히 입히시는 성령님

모든 것을 얻게하신 시작,

예수님의 고난,

그 현장에 오늘 있음이 나의 행복이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그 희생과 사랑 주심을,ㅠㅠ

그 십자가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십자가 사랑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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