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했다.
골로새서 3장에 근거해서 위엣것을 찾으라는 말씀이었다.
내가 관심 갖는 주제라서 경청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위엣 것이라는 막연한 방향제시가 위엣 것이 될 수는 없다.
죽었다는 말도 막연하게 죽었다는 의식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위엣 것을 찾으라의 위엣 것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첫째, 존재의 대 전환을 의미한다.
이전의 인간은 혼자 살았다.
고아같은 의식에 사로잡혀 고민하든, 교만하든 혼자의 의식에 의해 살았다.
그러던 내가 예수를 모셨고, 예수가 함께 하는 자로서의 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위엣 것을 찾는 사람의 제일 큰 변화이다.
혼자 있는 내가 아니라,
예수가 있는 나로의 전환,
그 안에서의 삶이 바로 위엣 것이다.
내 틀, 내 기준, 내 값에 의해 판단받는 삶이 아니라,
예수안에서 예수님께 감추어진 존재의 자유함안에서의 삶을 사는 자인 것이다.
둘째, 위엣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현재의 터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버려진 이 땅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진정한 천국이 임한 자로서의 삶의 자리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이 꿈꾸는 영생의 인간의 영원한 터는 천국이다.
그 천국의 사람으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있는게 바로 오늘의 내 존재의 자리인 것이다.
위엣 것은 죽음의 존재,
죽음의 땅의 인간이 아닌,
영생의 존재,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의 정체성속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이 사람이 위엣 것을 추구하는 자이다.
셋째, 위엣 것을 추구하는 자는 땅의 이미지속에 만들어진 옛 사람의 성품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성품,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이 세상 사람은 땅, 육체에 근거한 형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이 가지신 고유한 성품에 근거한 삶을 살아간다.
그 성품에 바로 항상 기뻐하라. 서로 사랑하라. 빛과 소금이 되라에 녹아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기쁨의 삶을 살아가고,
어떤 경우에도 사랑의 성품을 나타내며,
어떤 경우에도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애를 써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자리인 것이다.
이것을 추구하는 자가 바로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자이다.
오늘 늦은 밤,
이런 하나님의 구조를 가슴에 담게 됨을 감사드린다.
깊은 신앙의 세계를 깊게 각인하길 소망하고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