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동산병원 마팻선교사

예인짱 2018. 8. 8. 11:09

[그의 삶 그의 꿈]

의료선교사 마펫, 열악했던 동산의료원 번듯하게 일궈내…일생 바쳐 지역민에 무한한 의료혜택

<44> 의료선교사 마펫

2018.06.04

마펫은 서른 한 살의 나이에 대구에 와 45년을 대구경북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펴고 자신의 유해마저도 대구에 묻힐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br> 그는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보인 대구인이었다.<br>
마펫은 서른 한 살의 나이에 대구에 와 45년을 대구경북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펴고 자신의 유해마저도 대구에 묻힐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그는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보인 대구인이었다.

한국이름 마포화열(馬布和悅). 미국명으로 하워드 에프 마펫(Howard F. Moffett)박사는 한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48년 정부수립 직후, 31세의 청년으로 동산의료원에 파견돼 일생을 바쳐 지역에 봉사한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76세의 노인이 돼 미국으로 돌아가 97세로 숨졌다.
그는 유골을 대구에 묻어달라고 유언, 2013년 계명대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장됐다.
마펫은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써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보인 대구인이었다.
 
식민지배를 벗어났으나 경제적으로 극도의 가난을 겪었고 뒤이은 6ㆍ25전란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대구는 콜레라가 창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전쟁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지만 의료수준은 너무나 빈약했다. 
대구에는 그 때도 의과대학과 병원이 있었지만 넘쳐나는 환자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 미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대구에 온 마펫은 도착 6개월 만인 1949년 6월 제7대 동산병원장에 취임, 대구ㆍ경북민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물론 정부의 복구사업과 경제개발계획의 도움도 있었지만 선교사로서 지극한 헌신을 통해 엄청난 금액의 해외모금과 주한미군의 지원 등으로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했던 것이다.
취임초 68병상의 작은 동산기독병원은 이제 어엿한 1천여 병상을 가진 대규모 종합병원인 동시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을 가진 학구적 의료기관이 됐다. 
병원시설도 대구를 넘어 영남지역 곳곳에 분원을 두었고 국내 뿐아니라 해외에까지 의학적 영향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그가 기독교의 사랑으로 이룬 기적같은 의료계의 위업은 대구ㆍ경북민이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일임은 분명하다. 
아울러 그의 일에 동지적 헌신을 했던 부인 마가렛 델피아 맥켄지 여사와 이 사업에 헌금한 독지가들, 그리고 미북장로교단체 등의 기독정신이 기념비처럼 남긴 계명대 동산의료원체계에 대한 감사의 마음 또한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 


◆대를 이어 선교사의 길로 

그는 1917년 8월 16일 평양에서 사무엘 오스틴 마펫(마포삼열: 1864~1939)선교사의 5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마포삼열은 한국장로교의 아버지로 추앙받을 만큼 유명한 한국의 초대선교사였다.
그는 평양에서 1천여 교회를 설립하고 10만여 교인에게 전교했으며 300여 소학교와 숭덕ㆍ숭실ㆍ숭의 등 중학교와 많은 기독교학교를 설립해 계몽기 한국인의 교육과 교회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하워드 마펫은 이같은 아버지의 영향 아래 18세까지 평양에서 자랐고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공부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미국으로 유학, 1939년 시카고의 휘튼대학을 졸업하면서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에 입학 1943년 졸업했다. 
휘튼대학 재학중 부인 마가렛을 만나 노스웨스튼 의대재학시절 결혼을 했다.
이 무렵 마펫 부부는 함께 기독학생운동에 열정을 바쳤다.
그는 인턴과정을 마친 후 1944년부터 해군의무장교로 3년간 복무하고 1947년 선교사로 근무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파견됐다. 
그가 한국으로 바로 오지못한 이유는 미국장로교회 규정에 따라 선교사의 자녀가 해외선교사로 파송될 때는 본인이 태어난 나라에 바로 가지못하고 다른 나라 선교지를 경험토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남경대학과 연계된 기독병원에서 일하게 됐지만 당시 그 곳 상황은 2차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기 직전이어서 매우 불안했다.
1년 남짓후 남경마저 공산세력에 장악되는 바람에 상하이로 피신했는데 그 때 마침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곧바로 인천을 거처 대구의 동산기독병원으로 오게 됐다.
인천에서 대구로 오는 동안 부인과 두 아들이 함께 기차에서만 3일을 보냈고 시레이션으로 끼니를 때웠는가 하면 화물칸에서 새우잠을 자는 고통을 겪었다고 그의 후일담은 전하고 있다.


◆동산병원 원장 취임과 6·25전쟁 
동산병원 입구에 서 있는 마펫. 뒤로 갓을 쓴 이가 병원을 나서는 모습이 이채롭다.<br>
동산병원 입구에 서 있는 마펫. 뒤로 갓을 쓴 이가 병원을 나서는 모습이 이채롭다.

의사 및 간호사들과 농촌에서 무료진료를 하고 있는 마펫. 한복 차림의 환자가 진료를 받고 있고 그 뒤로 초가집이 보인다.<br>
의사 및 간호사들과 농촌에서 무료진료를 하고 있는 마펫. 한복 차림의 환자가 진료를 받고 있고 그 뒤로 초가집이 보인다.
1948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그가 일생을 바치게 될 동산기독병원의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이 병원은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한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문영복 임시 원장으로부터 병원장직을 인계받은 로이 케이 스미스 박사가 갓 집무를 시작했을 때였다.
그러나 스미스 박사도 6개월 후 은퇴하고 귀국하자 마펫은 1949년 6월 제7대 동산병원장에 취임했고, 부원장은 피츠버그 의과대학을 졸업한 황용운 내과과장이 맡았다.
당시 병원에는 의사 12명, 약사 1명, 그 외 일반직원을 합해 120명이 근무했으며 하루 120명 정도의 외래환자가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일하기 전에 아침 예배에 참석했고 직원수가 적어서 모두 한가족 처럼 지냈다.

그가 병원장이 된지 1년만에 6ㆍ25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모든 의료 및 선교활동이 중단되고 부산에 임시병원을 설치했다. 
자신은 참전군의관으로 활동하는 등 엄청난 시련에 부딪혔다.
특히 그는 미군의 계획에 따라 일본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면서 병원과의 관계가 단절된데 대해 많은 고심을 했다. 
다시 대구로 오기 위해 예비역 해군이었던 그는 재입대 방법으로 미군과 함께 동산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동산병원의 일부 사택은 미국대사관과 미공군이 사용하는 바람에 천막생활을 하게 되었고 전쟁중 동산병원은 경찰병원 경북분원으로 사용됐다. 
전쟁 동안 동산병원을 황용운 부원장에게 맡겨두고 군복무를 했던 그는 종전과 더불어 다시 병원으로 복귀했다. 

병원으로서는 전후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전쟁고아들의 질병과 상해치료였다.
넘쳐나는 어린이 환자들을 돌보는 아동병원의 시설이 급박했는데 당시 가장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은 선명회(현 월드 비전) 회장 피어스 목사였다.
동산병원에 5만 달러를 기부했고 마펫원장은 여기에 유엔한국재건단과 주한미군 대한원조처의 원조를 받아 1953년 10월 한국 최초로 아동병원을 준공하고 고아들을 무료로 입원치료했다.
그후 이 병원의 혜택을 입은 고아들 가운데는 성인이 돼 병원을 찾아 감사를 전하고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을 전하는 등 보은으로 감동을 주기도했다. 


◆피나는 모금활동, 동산병원 일궈 
병원 원장실에서 일하고 있는 마펫.
병원 원장실에서 일하고 있는 마펫.
그는 재임중 줄곧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및 기독교 구호기관으로부터 모금한 자금과 주한미군 대한원조처의 건축자재를 다량 원조받아 많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아동병원에 이어 1955년에는 건평 655평의 외래진료소와 인턴기숙사 등 병원재건사업을 진행했다. 
신축건물로 입원실이 200병상으로 늘어나게 돼 전문과를 모두 개설하여 비로소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췄다. 
그는 병원의 장기발전계획을 세우고 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최고의 병원을 목표로 의료진과 사무직원들의 능력을 국제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전쟁이 끝난 직후 임상 과장들과 행정직 과장들을 미국에 유학시켰다. 
미국유학이 매우 어려웠던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해외연수비용은 그가 모금해서 주선했고 연수간 직원들의 급여도 가족이 받도록 배려했다.
이와 함께 최신 의료장비를 도입함으로써 연수에서 돌아온 국내 최고 실력의 의료진과 더불어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미국에서 선진 경영기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행정직도 이 병원을 미국식 의료시스템으로 바꿔 60~70년대에는 우리나라를 선도하는 우수병원이 됐다.
그는 현대의학의 병리기술분야 발전을 따라잡기 위해 1958년 이 병원의 부속 병리학교를 개설해 1992년 이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많은 우수한 병리기술사를 졸업시켜 국내는 물론 해외 주요국에 진출시켰다.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1967년에 세운 병원발전 5개년계획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독지가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상을 뛰어넘는 기부금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초현대식 병원을 신축하고 최신 의료장비를 도입한 것이다.
그는 모금액이 너무 커서 걱정이 됐다. 
무모한 계획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했지만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사랑하는 어려움에 처한 한국인을 위한 것이란 생각에 지치고 힘들어도 참고 추진했던 것이다.
그의 부인은 후원자들에게 후원금이 쓰여진 내용과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힘든 일을 맡았다.

밀려드는 후원금으로 외래진료소를 신축했고 연결병동을 지었으며 병원의 분원을 확장하고 개선했다. 
이 밖에도 의료장비를 구입, 교체하고 직원주택을 신축하는 한편 해외연수, 나환자사업강화, 의료도서구입 등 병원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후속계획을 수립했다.
이 때 그의 의료선교에 감동한 후원자들 가운데 시카고 보험회사 사장 스톤씨가 보낸 거금 등으로 지은 신관 입원병동(남병동)은 스톤기념병동이라 명명되기도 했다.
당시에 신축한 간호학교와 기숙사는 한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고 새 병동에 설치한 수세식화장실은 환자들이 사용법을 몰라 간호사들이 사용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뺄 정도였다고 한다.
1970년 9월 서독개신교협의회의 지원 등으로 준공한 8층 규모의 외래진료소는 전국의 최우수병원 건물이란 소문이 퍼져 많은 의료인들이 견학을 다녀갔다.
급증하는 환자의 입원실 문제 해결을 위해 1972년 7월 준공한 서병동은 당시 기금을 만들어 그를 후원했던 미국인 맥고우를 기념해 맥고우관이라고 불렀다.

그의 부부가 벌인 피나는 모금활동에 힘입어 이같은 병원현대화 외에도 수많은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할 수 있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한국인들 사이에 숱한 일화로 남아있다.


◆나환자에도 눈돌려…37년 간 애락원 봉사 
1973년 무렵 동산의료원 전경.
1973년 무렵 동산의료원 전경.
2004년 계명대 간호대학 개교 80주년에 참석한 마펫 부부.
2004년 계명대 간호대학 개교 80주년에 참석한 마펫 부부.


2013년 9월25일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서 열린 유해안장식 모습. 마펫 원장의 막내아들 샘 마펫과 외손자 이안 테일러가 헌화하고 있다.<br>
2013년 9월25일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서 열린 유해안장식 모습. 마펫 원장의 막내아들 샘 마펫과 외손자 이안 테일러가 헌화하고 있다. 
그는 고통받는 나환자의 진료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1949년 애락원 제5대원장으로 취임한후 이사장과 원장 등의 직을 번갈아가며 37년간 봉사했다. 
음성환자의 생활안정을 위해 달성군에 정착촌을 마련하는 한편 음성환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당시로는 국내 유일의 정형외과 수술관을 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197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의과대학 설립 붐이 일면서 동산의료원도 의대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그는 같은 설립이념을 가진 계명대학과 재단합병을 결심하고 동산기독병원, 동산간호학교, 대구애락보건병원 등 3개 기관을 계명대학교에 병합하는 사업을 성사시켰다.
대구에서 의료선교의 위업을 이룬 그는 1993년 자신의 어머니 고향인 캘리포니아 바닷가 카핀테리아로 돌아갔다가 2013년 6월 2일 생애를 마쳤다. 

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마펫 연표

ㆍ1917.8.16 평양서 출생
ㆍ1935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ㆍ1943 미국 일리노이주 Northwestern의대 졸업
ㆍ1941.8 마가렛 델피아 맥켄지와 결혼
ㆍ1948 중국 남경 종합병원 선교사 근무
ㆍ1948.12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근무
ㆍ1949.4~1976.6 대구 애락보건병원 원장  
ㆍ1949.6~1976.6 대구동산기독병원 원장 
ㆍ1961~1973 대구 동산기독병원 간호학교 교장 
ㆍ1962.8 공익표상(대통령권한대리 박정희)
ㆍ1965.5 대구시 명예시민증 수여
ㆍ1968.6 명예법학박사(미국 일리노이주 휘튼대학)
ㆍ1975.6 대통령 표창(동백장)
ㆍ1976.6~1978.4 대구 애락보건병원 초대이사장 
ㆍ1976.7 대구 동산기독병원 유지재단 이사장 
ㆍ1978.12~1981.10 학교법인 계명대학 이사장 
ㆍ1979년 인도장 금장 표창(대한적십자사)
ㆍ1987.4~1993.1 계명대학 동산의료원 협동의료원장 
ㆍ1993년 국민훈장(모란장) 수여
ㆍ2013.6.2 하워드 마펫 소천
ㆍ2013.9.25 마펫 부부, 동산의료원 내 은혜정원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