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대구지역 개척 선교사 아담스(Adams) 부부

예인짱 2017. 10. 26. 14:02

대구지역 개척 선교사 아담스(Adams) 부부 
 
    대구시 중구 동산동 424번지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은혜정원)에는 대구·경북지역 선교 개척자로 활동한 미국 북장로교 아담스(Adams, Nellie Dick) 선교사 부인을 비롯하여 부르엔, 소오텔, 스위처와 구세군, 침례교 선교사 등 10기의 묘가 있다. 조사에 도움을 준 계명대 동산의료원(이명수), 대구제일교회(빈태유) 신명학교(권순욱)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대구 사과를 보급한 제임스 E. 아담스(1867-1929) 선교사

 

크기변환_제임스 아담스(J. E. Adams) 2.jpg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Adams, James Edward, 한국명: 安義窩)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에나 주 맥코이(McCoy)에서 출생했다. 1888년 터피커(Topeka)의 워시번(Washburn)대학을 졸업하고, 존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894년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Cormick)신학교를 졸업하고 넬리 딕(Nellie Dick)과 결혼하였으며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1895년 5월 29일 내한하였다.


   내한 초기 부산에 머물었다가 베어드(Baird) 선교사 후임으로 1897년 11월 1일 대구로 옮겨와서 선교부를 개척하고 1898년 12월 18일 대구제일교회를 시작했다. 1900년 11월 11일 대구에 설립된 희도(喜道)학교는 근대학교의 효시이며, 설립자 겸 교장으로 활동했다.


   1906년 10월 15일 계성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12년 12월 19일, 경상노회(제5회) 노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전도로 1914년, 경산군 평사(平沙)교회를 비롯하여 1921년 연일군 중감(中甘)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특히 대구 사과를 보급(1900년 경)한 공적이 있다. 대구 사과의 보급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존슨(W. O. Johnson, 張仁車) 선교사가 미조리 주에서 묘목으로 처음 수입하여 선교부 뜰 안에 심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담스 선교사가 캔자스(Kansas) 주에서 접가지(接枝) 나무로 처음 수입하고 능금나무에 접목하여 교인들에게 보급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아담스는 농업 개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과실나무를 대구선교부 구내에 재배했다. 그는 사과나무 접가지(Cuttings)를 수입해서, 재래종 능금나무에 접을 붙여(Grafted to the indigenous) 교인들에게 분배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결국 두 선교사가 한국에 사과를 들여온 배경은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과실나무를 현지 교인들에게 보급하여 선교 효과를 얻었다는 선례에서 비롯하여, 대구선교부 한 울타리 안에 각기 사과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존슨은 사과나무를 묘목으로 수입하고, 아담스는 접가지로 수입하여 토종 능금나무에 접을 부쳐 개량종으로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존슨의 묘목수입은 지속성에 한계가 있으므로, 아담스가 택한 접목 방법이 대구 사과의 보급에는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밖에 그는 경북지역 교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1921년 7월 13일 선교사 직을 퇴임했다. 그리고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192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Berkeley)에서 62세로 별세하였다.


   경북 기독교인의 어머니 넬리 D. 아담스(1866-1909) 선교사

 

소스 이미지 보기  

넬리 딕 아담스(Adams, Nellie Dick)는 미국 터피커에서 1866년 9월 15일 출생했다. 그곳 YMCA 간사로 활동했으며 1894년 아담스와 결혼했다. 1895년 장남 에드워드(Edward, 安斗華, 계명대 창설자)를 낳았으며, 같은 해 5월 29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산에 도착했다.


   1897년 11월 1일 남편과 대구로 이동하여 대구제일교회 부인 주일학교교장으로 활동하고 유년주일학교도 창립했다. 전도부인 담임, 부인사경회 인도와 순회전도를 비롯하여 신명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활동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선교 관련 논문도 발표했다.


   그는 대구에서 벤자민(Benjamin N., 안변암)과 죠지(George J., 안두조) 두 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임신 중 유산하고 심한 후유증으로 인하여 1909년 10월 31일 43세로 별세하여 대구 최초의 순직자로 동산의료원 구내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경상북도 기독교인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한 존경하는 기독교인에 대한 사랑의 찬사는 아무리 더해도 지나치지 않다. 존슨의사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1909년 10월 31일 아침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장례식은 부르엔이 맡았고, 선교사들은 관을 만들었다. 여성 교인들은 명주 끈으로 관을 묶고, 남성 교인들은 고인의 생존일자를 새겼다. 2-3천명의 조문객이 울면서 장지까지 따랐다.


   묘비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She is not dead but sleepth)라고 썼다. (2009. 3. 14. 교회복음신문 / 글·신호철 장로 양화진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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