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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루터 성지순례

예인짱 2017. 10. 16. 11:43

마틴루터 성지순례

Wittenberg (비텐베르크)


마틴루터 성지순례 3편으로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Wittenberg 을 소개한다. 필자의 블러그에 도시, Wittenberg 는 자세하게 인물편 '루터' 에서 소개되었다. 오늘은 중복되는 설명을 피하면서 종교개혁 가운데 이 도시에 흩어져있는 루터의 개혁과 관련된 문화재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인물들을 소개한다.


Wittenberg 는 Sachsen-Anhalt 주에 속해진 49,100 명의 주민을 가진 루터의 도시이다. 독일의 수도 베르린에서 남서쪽 100km 이며, Leipzig 북동쪽 70km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나즈마한 농토로 이미 만년전부터 인류가 이 지역에 살았다는 인류학적근거가 있으며, 1174년 백작인 Thiedrich von Wittburc 의 이름에서 Wittenberg 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1486년에 제후인 ,'Friedrich der Weise (프리드리히 현자)' 가 다시 선제후라는 명칭을 받게되는데, 신성로마제국의 7인 선거단으로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그의 왕궁이 여기에 자리잡게된다. Residenz (제후의 성)을 도시 가운데 지으며, Allerheiligen 교회(시교회), 루터가 설교하는 성당, 을 세운다. 1502년 프리드리히현자는 이 곳에 대학을 세우는데, 당시 대학등 교육기관들은 성당등 종교단체에서 지어 운영하는 것이 통상이였으나, 지역의 군주가 교육에 관련된 시설을 만드는 것은 이 대학이 처음이다. 대학으로 인하여 인근 석학들이 모이게 되며, 유능한 젊은 청년들이 도시로 모이면서 도시는 개혁적인 성향이 강해져 가게 된다,


이도시는 루터 종교개혁의 고향으로 긴역사의 시간가운데, 중세의 어두움을 벗는, 세계의 종교개혁의 출발지로서 지루하다시피한 긴 중세의 역사를 아주 짧은 시간에 바꾸는 도시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단 한편에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설명될 인물도 많고, 설명될 역사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 이번 편으로는 역사적인 사실을 늘여서 소개를 하고, 다음편으로는 인물을 중점적으로 소개를 하여 나누려한다. 종교개혁이 이 도시에서 일어남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개혁에 맞는 사회로 바꾸어져 있음에, 신의 섭리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작센의 군주 '프리드리히현자' 가 제후에서 황제선출 권한이 있는 선제후로 오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넓은 대지 가운데 작센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국가로 나타난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그는 대학을 직접만들어 인물을 키우며, 답답하고 어두운 사회를 교육으로 만 바꿀 수 있음을 아는 군주이였다.


종교개혁 관련 연도별로 나누면... ,

1507년 4월 4일 루터가 신부 서품을 Erfurt 돔성당에서 받는다.

1508년 가을 루터는 자신의 고해신부 'Johann von Staupitz' (스타우피츠, 수도원의 원장)의 추천으로 Wittenberg 대학 신학과에 가게 된다.

1511년 루터의 로마여행, 이 여행을 통하여 루터는 마음에 동경하던 로마의 신앙적 모체, 하나님의 성전을 몸으로 경험하였으며, 그는 이여행 가운데 로마교황에 다하여 매우 실망하고 , 충격을 받게된다. 이 경험은 루터의 개혁에 중요한 열쇠가 되며, 그는 평생을 통하여 이 로마여행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1511년 루터는 Wittenberg 에 정착하며, 그를 끌어준 고해신부 Staubitz 는 그가 숨을 두는 날(1524년)까지 루터의 친구, 동지로 평생을 함께한다.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이때에 루터는 Wittenberg 대학에 자리를 잡으며, 죽을 때까지 대학에서 일을 한다.

1514년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감독으로 임명되며, 이 자리는 아래로 11명의 지방을 담당하는 신부를 두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고향, Erfurt 도 자신의 관할지역이 된다. Erfurt 에 1516년 자신의 친한친구인 Johannes Lang 을 책임자로 보내, 후에 개혁의 동지로 함께 활동하게 된다.

1515년 대학에서 로마서 강해중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고민가운데 구원의 뜻을 성경에서 깊이있게 느낀게 된다.

로마서 1,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하박국 2,4)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517년 9월 4일, 루터는 당시 구교의 잘못된 점 97개조항을 적어 서면으로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리게 된다.

1517년 10월 31일, 97개 조항 가운데 로마교황과 교회, 신앙에 관련된 조항 95개를 Wittenberg 궁정교회 문에 망치로 박는 역사적 종교개혁 시작을 알린다.

1518년 4월, 루터는 von Staupitz  의 추천으로 Heidelberg 에 참석해 자신의 논제를 설명하게 된다. 이 논제의 자리에서 루터는 평생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얻는다.

1518년 10월 12-14일, 제국회의 Augusburg 에 참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다시 확인함.

1519년 6월 28일 칼황제가 등극하였으며, 황제는 루터에게 60일간의 시간을 주어 루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 교회에서 퇴출할 것임을 협박함

1520년 루터는 레오교황에게 자신의 저서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 를 보내면서 교회와의 협상을 제안하게 된다.

1520년 12월 10일, 로마교황은 루터의 책을 불지르고 천주교 신부에서 추방하는 결정을 하며, 거의 같은 시간에 루터는 Wittenberg 성 엑스터문 아래에서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교황의 친서와 교회책자를 태우면서 개혁의 불을 당긴다.

1521년 4월21일, Worms (보름스) 제국의회, 새로 등극한 칼황제앞에서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압력을 받으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버리지 않아, 결국에는 법의 보호를 받지못하는 심판을 받는다.

1521년 5월 21일, 노상에서 프리드리히 현자의 군인들에게 납치되어 Wartburg으로 피신하게 된다.


지금까지 루터가 Wittenberg 에서 개혁을 시작하면서 성격을 번역하는 장소인 Wartburg 까지의 기록이다. 이 기간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더 자세하게 소개를 하면, 테첼의 면죄부판매에 대한 반대의 설교를 루터는 이미 종교개혁날 일년전에부터 설교시간에 교인들에게 설교하며 잘못된 가르침임을 알리고 있었으며, 이 잘못된 점들 97개의 사항을 적어 인근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게 알려 고쳐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전혀 자신의 뜻이 재고되지 않자, 그는 자신의 95개 반박내용을 당시 시민들이 보는 게시판과 같은 궁정교회정문에 붙여 공고하게 된다. 이 날은 제성기념일 (신앙의 본이된 모든 성인들의 날) 하루전 1517년 10월31일에 붙이게 된다.


그 후 1518년 4월, 로마카톨린교회는 그의 논증으로 인하여 교회내 분란이 일자, 혼란을 잠재우기위해 그를 Heidelberg 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사실 이모임을 통하여 종교지도자들은 루터의 이론을 잠재우려 시도를 했으나, 오히여 루터는 자신의 신학을 깊은 신학적인 논리로 설명하여 그의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광의 신학' 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하는 신학' 은 더 빠른 속도로 인근의 신학자들과 신학교도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현자는 로마로 소환되는 루터를 도와 독일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당시 추기경, 카예탄의 신문을 받게된다. 추기경은 로마교황의 교령으로 인하여 진행되는 면죄부는 교황의 권위에 상당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루터의 순종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임을 주장한다. '수동적의인칭의론 ( 이신칭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 는 이론으로 자신의 뜻을 굽하지 않았다. 이 변론 이후부터 교회와 루터는 침묵하기로 합의를 보아 당시 황제선출로 인한 복잡한 권력구도가운데 이 문제를 표면화하지 않을 협의를 하게 된다.


그 유명한 Leipzig 논쟁으로 루터는 자신의 동지를 얻었으며, 또한 많은 적을 만들게 된다. 서로의 약속된 침묵을 깨고 Eck 는 다시 루터를 공격하게 되는데, 루터는 자신의 동료 칼슈타트와 함께 Leipzig 대학으로 가 그와 논쟁을 하게 된다. 비텐베르크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과의 경쟁관계를 이용한 엑크는 이 곳에서 루터를 곤경에 몰 계획을 하게 되는데, '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고 반박하며, 교회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으며, 에베소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루터는 공의회 권위마저도 부정한다는 이론으로 인하여 교황과의 단절은 공개적이되고 말았다. 이 논제으로 인하여 작센의 게오르그 공작은 루터의 적이되며, 반대로 멜랑히톤과 같은 동지를 얻게되었다.


엑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을 로마에 보고하여 루터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받아낸다. 이 때 교황 레오는 루터에게 마지막으로 60일간의 시간을 주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기회를 준다. 이 기간동안 자신을 회개하지않으면 루터를 포한 주변의 친구, 동료모두를 파문할 것임을 위협한다. 교황은 루터의 작품가운데 41개 발언등을 열거하면서 ' 이단적이고 위협적인 거짓' 이라 단죄하며, 루터의 모든 책들을 불태울 것을 명한다. 이에 루터는 교황의 교서가 도착하기전 도시입구, 엘스터문에서 교황의 교서와 로마교회법전을 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로마천주교로 부터 깊은 상처를 입은 루터는 자신의 모든 철학이나 움직임들은 로마교회와 교황에 대한 충성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 자신을 파문하는 로마교황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교황은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 단정하면서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현자를 비롯하여 루터를 보호하는 영주들은 루터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를 통해 변호를 할 기회를 얻었으며, 당시 새로 선출된 황제 칼5세는 루터의 신변안전을 보호를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초청장을 보내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될지도 모를 보름스방문에 루터는 죽음에 이를지라도 진실은 밝힌다는 결단으로 거행하게 된다. 황제앞에서 루터는 자신이 쓴 책과 이론에 대한 철회를 종용받으나, 그는 하루의 여유를 구하였으며, 결국엔 자신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리는 유명한 루터의 말을 공표한다.

"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과 교회 공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몸을 도우소소서, 아멘!!"

이러한 설교를 한 이후 루터는 법의 도움이 없어지는 형을 받는다. 누구라도 루터를 살해하여도 죄가 되지않는다는 판결이다. 그후 루터를 보호하려는 작센의 선제후가 군사를 보내, 그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거리에서 납치하듯이 잡아, 바트부르크 성에 은신시키게 된다.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은 이 루터의 도시를 다시 건축하였다.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보호되지 못하던 환경인 동독시절엔 문화재이든 종교적인 흔적이든, 거의 방치가 된 상태였다. 독일은 이러한 역사가 담긴, 지금도 역사의 호흡을 하는 이러한 도시와 시설들을 다시 복구하게 된다. 이 도시도 그 당시로 다시 복구가 되었는데, 도시입구에 들어가면서 순례의 길, 숙연함을 느낀다. 도시 전체에서 느끼는 편안함, 무거운면서 안정이 되는 숙연함이 깊다. 도시 처음에서 부터, 예전엔 성의 문을 통하였을 입구에서 부터 루터와 친구들, 도시민 전체가 추구하던 개혁의 힘을 느낀다. 눈에 보이는 높은 교회의 종탑, 궁중교회, 그리고 곧게 뻗힌 중앙도로, 인도에 박힌 작은 돌하나하나에 까지 개혁의 역사를 느낌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비텐베르크 시청사, 시청광장, 루터와 메랑히톤 동상, 그리고 시교회의 모습이다. 왼쪽 흰색건물이 시청사, 건너편 교회가 루터가 집례한 시교회이다.


위 2개의 사진은 1991년 통일이 된 당시의 비텐베르크시의 모습이다. 동독은 이러한 역사적 유물들을 손을 댈 경제적여유가 없음에 동독에 보전되었던 유물들을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 보전된다.

루터의 95개 조항을 걸었던 궁중교회의 모습이다. 당시 제후나 양반들이 다니던 성당으로, 도시내에 건의 사항등을 전통적으로 교회의 나무 문에 걸게 되어있다. 그러한 이유로 루터도 자신의 주장인 95개의 조항을 교회의 문에 걸게 되는 것이다. 성당의 모습을 보아 루터 찬송가 " 내주는 나의 성이요!" 에 영감을 주는 단단한 성곽과 같은 느낌이다.


궁전교회와 지금 교회문에 새긴 95개조항, 95개 논제.

루터의 집이다. 예전 수도원을 받아 그는 이 곳에서 결혼하여 6명의 자녀을 둔 가장으로 생활한다.

Wittenberg 대학이다. 예전 건물들을 전부 새롭게 수리, 건축한 대학의 모습이다.

루터의 동지 가운데 가장 친하며, 루터가 죽은 후에도 루터관련된 역사를 밝혀 알리면서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활을 한 멜랑히톤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