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좋은 상식

천국의 국경을 넘다

예인짱 2009. 3. 5. 01:53

제1화 팔려가는 조선의 딸들_두만강 심청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 두만강. 2007년 10월 22일 새벽, 하얗게 뜬 달빛을 받으며 문윤희(당시 25세·가명)씨가 강을 넘었다. 낯선 사내 손에 이끌려, 폭 40m도 되지 않는 검푸른 강을 건넌다. 그녀는 팔려가는 길이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중국 농촌 노총각한테 씨받이로 팔려가는 길이다. 사내는 북한의 인신매매 브로커. 매서운 강바람에 갈대가 비명을 지르는데 중국쪽 강둑에 올라선 그들, 아랫도리에 입고 있는 옷은 팬티뿐이다. 바지와 신발은 보자기에 들어 있다. 야밤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강 건넌 탈북자임이 금방 드러난다.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들, 그래서 아랫도리는 입지 않는다.
브로커는 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갔고, 은신처로 안내된 그녀에게 물었다. "왜 넘어왔어요?" 윤희씨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미공급(未供給·1990년대 후반 식량난 시절) 때 상(喪)하고, 어머니는 못 먹어서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꿔다먹은 '강냉이, 콩, 쌀' 같은 곡식 빚이 300㎏이라고 했다. 심청이처럼, 눈 먼 어머니와 남동생을 위해 그녀가 팔려간다. 브로커는 몸값으로 곡식 빚 절반을 갚아줬다. 350위안. 한국 돈 4만6000원에 '조선의 딸들'이 팔려간다.

▲ 검은 두만강을 벌거벗은 사람들이 건넌다. 한 사람은 인신매매 브로커, 한 사람은 팔려가는 북한 여자다. 2007년 10월 22일 밤, 취재팀 눈앞에서 북한의 여성이 중국으로 팔려가고 있었다. 적외선 렌즈로 찍어 전체적으로 화질이 좋지 않다. /정인택 PD rjs0246@chosun.com

중국~북한 국경지대 인신매매 현장이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에 의해 확인됐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식량난 이후 급증한 탈북 사태(沙汰)가 인신매매라는 반(反)인권적인 형식으로 악화됐음이 확인된 것이다. 특별취재팀은 2007년 5월부터 10개월 동안 중국, 러시아, 라오스, 태국 등 세계 9개국을 돌아다니며 탈북자들의 삶을 취재했다. 한국, 북한, 그리고 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이들은 강제북송의 공포와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가 중국 정부에 탈북자의 인권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왜 세계가 그토록 탈북자들의 인권에 주목하는지, 그 이유를 조선일보가 집중보도한다. 

 

윤희씨를 만난 곳은 중국 투먼(圖們) 근처 두만강변, 보름을 사흘 앞둔 새벽이었다. 팔려가는 윤희씨와 스물 다섯은 5000위안을 달라며 정액제를 강조하던 인신매매 브로커, 그 현장을 취재했다 

 

                          [동영상] "스물다섯 살은 5000위안(약 68만원)…"

취재팀이 윤희씨를 만난 곳은 중국 투먼(圖們) 근처 두만강변, 보름을 사흘 앞둔 새벽이었다. 갈대밭이 비명을 질렀다. 강은 바람과 달빛으로 일렁였다. 쏟아지는 달빛에도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다. 중국·북한 국경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지 네 시간. 희끄무레한 물체 두 개가 강 너머 갈대밭을 뚫고 강물에 들어섰다. 하나는 앞에 서고 다른 하나는 뒤에 섰다. 벌거벗은 사람이다.

적외선 렌즈 녹색 화면 속으로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랫도리를 모두 벗은 한 남자와 팬티만 입은 여자. 벌거벗은 남녀가 강을 건너고 있다. 야윈 다리가 출렁이는 강물을 힘겹게 헤쳤다. 남자는 뒤따르는 여자 손목을 이끌고 앞장서 걷는다. 어느새 강물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강물을 바라보던 여자가 갑자기 제자리에 섰다. 현기증이 난 모양이다. 남자가 주위를 잽싸게 둘러봤다. 손에 힘을 주고 여자를 세차게 당겼다. 불과 40m의 강을 건너는 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남자는 북한의 인신매매 브로커, 여자는 그의 '상품'이다. 국경을 넘은 그들은 온몸을 떨었다. 서둘러 손에 들고 온 옷을 입었다. 왜 옷을 벗고 왔을까. "물에 젖으면 안 되니까." 브로커는 곧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 옷이 젖으면 의심을 받을 게 분명했다. 여자도 옷이 젖으면 당장 중국에서 갈아입을 옷이 없다. 그들이 벌거벗은 이유다. "이름이 뭐예요?" "문윤흽니다, 문윤희." 여자가 덜덜 떨며 말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다.

 

"스물다섯인데 5000원은 줘야지." 중국 돈 5000위안은 한국 돈으로 약 68만원이다. 가격을 흥정하려 하자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스무 살부터 스물넷까지는 7000원, 서른이 넘으면 3000원이야. 깎을 거면 다른 데로 가란 말이오." 그는 정액제를 강조했다.

윤희씨가 보자기를 끌러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동안 누군가가 브로커에게 돈을 건넸다. 국내 탈북지원단체 두리하나선교회에서 온 사람이다. 이 단체는 여자를 사려는 중국인들 대신에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여자들을 탈출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브로커가 돈다발을 셌다. 5000위안. 굶주림을 피한 대신, 스물다섯 살 처녀가 씨받이와 품앗이로 평생을 보내야 할 대가가 한국 돈으로 68만원이다. 북한 한 달 월급의 30배. 이 가운데 윤희씨네 곡식 빚의 절반, 4만6000원을 빼고 전액이 브로커에게 돌아간다. 브로커가 흡족하게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잘 돌봐주오." 지켜보던 취재팀 누군가가 내뱉었다. "뭐, 잘 돌봐달라고?"

다음날 은신처에서 윤희씨를 만났다. 그녀는 이미 탈북을 한 번, 강제북송을 한 번 경험한 여자였다. "내가 직접 브로커한테 가서 팔아달라고 했어요. 빌린 곡식이 300㎏인데, 갚을 방법이 없었어요. 브로커가 빚 절반을 갚아준대서리…. 그 남자는 같은 동네 사람이요. 집도 중국 집처럼 부자고, 밭도 있고 소파랑 TV, 냉장고도 있어요. 군대도, 보위부도 그 사람이 여자 파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왜? "돈이 있는데, 왜 처벌 받겠습니까?"

▲ 팔려가는 조선의 딸들 / 한용호AD

그날 아침, 윤희씨는 브로커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점심을 먹고 강변 야산에 들어가 둘이서 숨어 있었다. 새벽이 되자 "산 아래 북한쪽 군대에서 불빛 신호가 왔다"고 했다. 그리고 달빛에 의지해, 옷을 벗고, 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이번이 두번째다.

"이천공육(2006)년도에 처음 팔렸습니다. 산둥성에 서른넷 먹은 한족(漢族) 남자한테 팔려갔는데 6개월 지나니까 어느 날 밤 12시에 공안이 왔습디다. 어떻게 나를 잡아가나 하고 물으니까, 동네 사람이 꼬장질(신고)해서 그리했다는 겁니다." 윤희씨는 곧바로 중국 단둥 교도소에 갇힌 뒤 두 사람씩 수갑에 엮여 신의주로 압송됐다. 북한 보위부에서 보낸 한 달, 그녀는 몸을 떨며 이렇게 증언했다.

"성병을 검사한다면서 피를 한 바가지 뽑았다. 여자들은 옷을 모두 벗기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성기 속까지 조사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20번 정도 반복하면 안에 있는 게 모두 나온다. 임산부도 있었는데 중국 놈 아이를 가졌다고 강제 유산시켰다. 사람 먹으라고 강냉이 밥이랑 찬 하나가 나왔는데, 한 번 먹고선 중국 감옥에서 먹던 밥이 그리워지더라."

윤희씨는 함북 청진에 있는 탈북자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하루 17시간씩 강제노동을 하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윤희씨는 또다시 브로커에게 몸을 맡겼다.

두리하나선교회 사람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을 한족에게 팔아먹으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한국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나 맨 처음에 사 간 한족 남자한테 돌아갈랍니다. 한족이랑 배불리 살면서 돈도 모아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낼랍니다." 그녀는 한국행을 거부했다. 고향에 남은 눈먼 노모(老母)와 남동생을 위해, 그녀는 중국에 남기로 했다. 두리하나선교회는 그녀에게 겨울 옷가지 몇 점을 사주고, 안녕을 빌고, 그녀와 작별했다. 문윤희. 그녀는 지난 10개월 동안 취재팀이 만난 인신매매의 피해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 두만강변에서 얼어죽은 북한여성 시신 / 한용호AD

2008년 1월, 취재팀은 중국 투먼(圖們)의 두만강변에서 얼어 죽은 북한 여성 시신 하나를 발견했다. 신발도 없이 발싸개로 발을 싸매고, 얼어붙은 두만강 한가운데에 엎드려 죽어 있었다. 3월 2일 현재까지 두 달이 지나도록 그녀는 아무도 거두는 사람 없이 외롭게 강에 엎드려 있다. 현지 조선족은 "북한 식량난 이후 10년 만에 처음 보는 시신"이라며 "형색을 볼 때 혼자서 탈북하려다 돌부리에 걸려 죽은 여자가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2008년 중국-북한 국경지대. 살아 있는 여자의 인신매매 시장이 수시로 열리고 죽은 여자의 시신은 아무도 거두지 않는다.

 

윤희씨를 한족(漢族)에게 떠나 보내고서 정확하게 한 달 뒤. 취재팀은 손미영(가명·여·41)씨를 만났다. 미영씨는 조선족 사내 이호영(가명·45)씨가 4000위안(52만7000원)을 주고 산 여자다. 이유가 놀라웠다. 그는 미영씨를 '대한민국행 비자를 얻기 위한' 도구로 구입한 것이다. "북한 여자가 남한에 가면 한국 사람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혼비자로 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다." 2007년 11월 21일 밤 40대 여자 브로커 손을 잡고 미영씨가 두만강을 건넜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아랫도리는 맨살이었다.

다음날 호영씨 집에서 미영씨를 함께 만났다. 그녀 아버지는 "중국이 조선보다 낫다"고 했다가 어디론가 끌려갔다. 평양에 살던 가족은 모두 함북으로 쫓겨났다. 언니 가족은 예전에 탈북했다가 중국 국경수비대에 잡혀 북송됐고, 형부는 6개월 고문 끝에 죽었다고 했다.

 

"나랑 한국 가서 돈 벌고 삽시다." 호영씨가 말을 꺼냈다. 여자는 단칼에 거절했다. "중국에 혼자 남은 어린 조카를 꼭 찾아서 돌보기 위해 이번에 강을 넘었습니다. 고아가 된 조카에겐 유일한 혈육이지 않소. 꼭 찾아서 내가 언니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무슨 남한에 가겠습니까? 내가 거기 가서 뭐 하겠습니까?"


취재팀 눈치를 보던 그녀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울었다. "모르는 줄 아십니까. 당신들 특무 아닙니까, 중국 나온 동포들 잡아넣는 특무." 그녀는 취재팀을 비밀경찰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한국 보내주겠다' 해서 기자회견시킨 다음에 달랑 잡아서 끌고 갈 거 아닙니까." 여자가 울부짖었다. "나는 주머니에다 독약을 넣고 다니면서 그 자리에서 먹고 죽겠습니다."

열흘 뒤 미영씨는 호영씨 집에서 도망가 버렸다. 사내는 화가 잔뜩 났다. "북조선 사람은 다 이렇단 말이야. 짐승도 이렇게 배신을 하진 않는단 말입니다." 남자는 한국으로 가는 인간 티켓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제 곧 26살짜리 처녀가 넘어올 겝니다. 때려서라도 한국으로 보낼 거란 말입니다."

▲ 두만강에서 넘어올 여자를 기다리는 호영씨 / 김영관 AD

 제2화 "유령"이 된 아이들_버려진 성룡이

무국적 유랑… 태국에서 우는 성룡이, 엄마는 강제북송 후 사망, 조선족 아빠는 서울에
한국대사관 "엄마가 탈북자라는 걸 증명해라" 

2007년 11월 17일 중국라오스의 국경. 울창한 나무 숲을 뚫고 18시간을 걸어 한 사내 아이가 도착했다. 4명의 탈북자가 동행했다. 모두 생명을 걸고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길이다. 아이의 이름은 김성룡(8). 아빠는 조선족, 엄마는 탈북자. 아빠는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났고 엄마는 북한으로 끌려가 죽었다. 아이는 아빠를 만나러 간다. 바윗돌에 채고, 계곡물에 발이 빠지고, 가시에 긁히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힘들지 않아요."

▲ '유령'이 된 아이들 - 버려진 성룡이

2003년 11월 7일. 아이가 보는 앞에서 엄마는 중국 공안에 끌려갔다. 5년전인 1998년 10월 두만강을 건너온 엄마는 공안을 두려워했다. 북한으로 보내질까 두려웠다. 엄마가 붙잡힐 때 아빠는 없었다. 엄마는 죽을 힘을 다해 발버둥쳤지만 공안은 냉혹했다. 아빠가 엄마를 구하러 갔다. 공안은 돈을 요구했다. 아빠는 돈이 없었다. 결국 1년 뒤 엄마는 북한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날 아빠는 성룡이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

▲ 장장 18시간의 산행길. 8살 성룡이에게는 힘겹기만 하다. 2007년 11월 17일 중국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하던 성룡이가 힘에 겨워 울고 있다./한용호 AD hoyah5@chosun.com

2006년 6월 18일. 아빠는 한국으로 떠났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돈을 벌기로 했다. 아빠는 떠나면서 전 재산 2000위안(26만7000원)을 털었다. 그 돈으로 아들에게 가짜 호구(戶口·호적)를 사줬다. 그 호구로 그제야 성룡이는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이후 아빠는 아들을 그리워하고, 아들은 아빠를 보고파 했다. 1년반이 흐른 2007년 11월 26일. 아이는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이제 곧 아빠를 만나리라.


그런데 아이는 지금 넉 달째 태국 이민국에 갇혀 있다. 한국 정부가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요구했다. "엄마가 탈북자라는 걸 증명해라." 성룡이를 탈북자로 가장한 조선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죽은 엄마를 어떻게 데리고 올까. 아이는 눈물만 흘린다.

한국에 남은 아빠는 외교부의 전화를 받았다. "중국 아이니까 직접 데려오세요." 밀입국해서 태국까지 온 아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주었던 중국 호구가 지금은 아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다. 중국 여권으로 한국 가겠다면 중국 정부가 가만히 있을까. 아빠의 질문에 담당 직원은 입을 닫았다.


5일 성룡이를 면담했던 한국 선교사가 말했다. "같이 태국으로 왔던 모든 사람들이 한국으로 갔는데, 성룡이는 철창 속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리하나선교회 천기원 목사가 주태국 한국대사관에 항의했다. 대답은 냉랭했다. "중국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외교통상부 담당자가 취재팀에게 말했다. "최근 인사 때문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전임자께 물어보고 전화를 드리죠." 7시간 만에 답이 왔다. "통일부 소관인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통일부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분이라도. "담당자가 한 명뿐이에요." 7일 0시45분까지 답은 끝내 없었다.


원죄(原罪)였다, 엄마가 북한 출신이라는. 취재팀은 중국에서 수많은 성룡이들을 만났다.

지난 3월 조선일보 지면과 케이블방송, 지역민방을 통해 소개됐던 탈북 10년 보고서 '천국의 국경을 넘다'. 10개월간의 취재 끝에 탄생한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 BBC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는 등 관심이 더욱 커져가는 중이다. 보도 이후 석 달. 기사와 영상에 소개된 탈북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들 가운데 세 사람의 뒷이야기를 취재했다.


▲이금희씨, "아들 데려올 꿈을 꿉니다"
뇌성마비를 앓는 아들 치료를 위해 지난해 10월 한국행을 택했던 이금희(30)씨는 지금 아들을 데려올 꿈에 부풀어 있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한 여행사에 취직했던 이씨는 회사 측 사정으로 임금을 받지 못해 발을 굴렀었다.
그러다 이씨 사정을 접한 한 게임회사 대표가 이씨를 특채했다. 하반기 중국 진출을 앞둔 이 회사는 이씨의 중국어 실력과 관광가이드 경력을 보고 면접 기회를 줬다.

▲ 뇌성마비 아들 치료를 위해 혼자서 한국으로 탈출한 이금희씨. 여러 독지가 도움으로 취직도 하고, 아들을 데려올 꿈에 부풀어 있다. 김영관 AD tkkwan80@chosun.com

이씨는 "한국에 대해 잘 몰라 당분간 제가 하는 일이 한심해 보일 수 있다"고 말했지만 회사에서는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다"며 이씨를 채용했다. 4월 중순이다. 회사는 이씨에게 전담 직원을 붙여주고 각종 기초 교육을 실시 중이다. 또 아들 보송이를 데려올 비용을 전액 지원했다.

지난달 말과 이달 초 영국 BBC 월드뉴스를 통해 이씨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오스트리아 기업 Rokkors Nanotech nologies 대표 칼 슈바르츠씨도 BBC를 통해 보송이를 오스트리아로 데려와 치료해주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모자(母子)의 항공료·체류비도 모두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씨는 "그저 기적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며 "아직 한국 생활이 외롭고 서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도와 준 분들에게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

▲ 중국인과 결혼한 탈북 여성의 딸 옥평이. 사연을 접한 한국의 한 독자가 옥평이에게 날아가 가족의 인연을 맺었다.

▲할아버지 생기고 엄마는 사라진 옥평이


중국인과 결혼한 탈북 여성의 딸, 옥평이(10). 늘 엄마가 달아날까 두려워하던 옥평이에게 진짜 불행이 찾아왔다. 엄마가 사라진 것이다. 인신매매 피해자였던 엄마는 결국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났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중국에 팔려간 탈북 여성과 ‘무국적 자녀들’의 고통을 접한 독자 심재현(67)씨가 “직접 가서 보고 도움을 주겠다”며 지난 3월 말 옥평이네 마을을 방문했다가 알게 됐다.


한 지방 도시 병원에 근무하는 심씨는 “눈물 흘리는 옥평이 사진을 보고 미국 사는 손자가 떠올라 10분을 통곡했다”며 “탈북자 인권단체인 두리하나선교회를 통해 주소만 받고 날아갔는데, 속이 더 상했다”고 말했다. 심씨는 옥평이 호적 구입비와 생활비를 가족에게 건넸고, 매달 생활비와 고등학교까지 학비를 대주기로 약속했다.


심씨는 “귀국 후 가족들에게 옥평이를 손녀로 맞겠다고 선언했고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며 “몇 년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평생 옥평이를 위해 살겠다”고 했다.

▲ 탈북자 출신인 엄마(사망)와 조선족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성룡(왼쪽)이. 태국에서 억류됐다가 지난 3월말 한국에 왔지만 6월말에 추방될 처지에 놓여 있다. 김영관 AD

▲끝나지 않은 성룡이의 비극

탈북자 출신인 엄마와 조선족 아빠 사이에 태어난 김성룡(8). 성룡이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중국을 탈출해 지난해 말 라오스 국경을 넘어 태국에 도착했다. 다른 일행은 모두 올 초에 한국으로 왔지만, 성룡이는 지난 3월28일까지 130여 일 동안 방콕 외국인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엄마는 중국에서 공안에게 체포돼 강제 북송됐다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또 학업을 위해 아빠 김광철(45)씨가 돈을 주고 가짜 중국 호적을 만들어줘 국적도 '중국'이다. 주태국 한국대사관에서는 "아이가 탈북자 자녀임을 입증하려면 엄마가 있어야 한다"며 한국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룡이 같은 사례를 규정해 놓지 않은 실정법이 문제였다.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외교부는 일단 인도적 차원에서 지난 3월 29일 성룡이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성룡이 부자는 두리하나선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랜 수용소 생활에 성룡이는 처음 몇 주 동안은 자다가도 두세 번씩 잠을 깨곤 했다. 지금은 동네 초등학교의 배려로 1학년에 입학해 친구들을 사귀며 한국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방과 후에는 학교 복지관이 운영하는 공부방에서 한글을 배운다.

하지만 행복은 시한부다. 성룡이가 한국에 오던 날, 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성룡이에게 발급된 비자는 90일 체류가 가능한 방문비자"라고 통보했다. 공식적으로는 6월 말이면 성룡이는 중국으로 추방된다. 엄마가 북한 여성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렇다.

김씨는 지난달 5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 공안국으로부터 "조선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태어난 김혜숙(가명)이 1998년 8월 하이린시에 와서 김광철과 결혼했고, 2000년 2월 18일 김성룡을 낳은 후 2003년 11월 7일 불법월경죄로 하이린시 공안국에 체포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의 증명서를 받았다. 아빠와 아들은 이 증명서에 목숨을 걸고 있다. 김씨는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중국으로 가라고 하면 다시 목숨을 걸라는 이야기"라며 "제발 성룡이가 한국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어머니 약값을 위해 탈북했다가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온 권효실씨. 하지만 어머니는 북한에서 사망했고 그녀 자신도 갑상선암을 앓고 있다. 한용호 AD hoyah5@chosun.com

▲자유 찾아 왔더니 병마(病魔)가

중국 옌지(延吉)의 한 화상 채팅방에서 부림 당하다가 탈출에 성공한 권효실(가명·23)씨. 태국을 거쳐 지난 4월 한국에 도착한 권씨는 하나원 교육 도중에 갑상선암이 발견돼 수술을 받았다. 교육생 신분이라 수술비는 정부에서 지원했다. 지금 권씨는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회복을 기다리는 중이다. 얼마 전 문병왔던 동료 탈북자가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지난해 말 사망했다"고 알려줬다. 권씨가 북한을 탈출한 것은 몸 불편한 어머니 약값을 벌기 위해서였다. 탈북한 의미가 사라졌다. 몸은 병들었다. 퇴원하면 먹고 살 일이 까마득하다. 권씨는 취재팀을 만나서 계속 울었다.

을 탈출해 태국으로 왔지만 탈북 여성의 자녀임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넉 달째 방콕 이민국에 갇혀 있는 성룡(8)이<본지 7일자 A1면>. 성룡이는 탈북 여성 김순영(가명)씨와 조선족 김광철(45)씨의 아들이다. 엄마는 북송돼 처형당했고, 아빠는 한국에서 일하며 아들을 빼냈다.

7일 새벽, 아버지 김씨가 아들과 통화를 했다. 이민국 수용소에 휴대전화를 가져간 다른 탈북자가 도왔다. "같이 온 아저씨랑 아줌마가 다 가버렸어요. 아빠가 오면 안 돼요?" "조금만 참아, 알았지?" "아빠, 꼭 장난감 사와." 지난 5일 아이를 면회한 박오빈(가명·47) 선교사는 "철창 안에 있는 성룡이를 놔두고 돌아서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 태국 방콕 외국인수용소에 갇혀 있는 김성룡(8).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목숨을걸고 라오스~태국 국경을 넘었지만, 다 한국으로 가고 혼자 남아 있다. 방콕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이는 옷을 벗고 있다. 작은사진은 아들과 통화 중인 아빠 김광철씨. 휴대전화로 찍어 사진 상태가 좋지않다./두리하나선교회 제공
아빠 김씨는 "얼마 전 외교부라고만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 '중국 애니까 직접 데려와라, 중국대사관과 협의해보겠다'고 말했다"며 "'(안전은) 100% 장담 못한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전화번호는 외교부 대북정책 관련 부서 번호였다. 7일 통일부 관계자는 "아버지가 중국인이면 합법적으로 호구(戶口·호적)가 나오는 것 아닌가"라고 취재팀에 반문하며 "우리 업무라고 보긴 어렵지만 참 안타깝다"고 했다.

한국에 와 있는 탈북 여성 박진미(가명·33)씨는 "2004년 7월 함북 청진의 강제수용소에서 아이 엄마를 만났다"며 "내가 수용소를 탈출할 때 김씨가 '왕청에 있는 성룡이에게 엄마가 보고 싶어한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7일 새벽과 6일 오후 대구방송(TBC)과 강원민방(GTB)이 첫 지상파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를 방송했다. AGB닐슨코리아 집계 결과 시청률은 대구방송 3.8%, 강원민방 6.4%로 같은 시간대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제3화 조국이 버린 남자 _ 벌목공

외화벌이 주역에서 탈북자로… 시베리아 北벌목공의 절규
대졸출신… 월급은 노동자의 100배
北정부는 외화 챙기고 '돈표'만 줘

김만수(가명·42)씨는 탈북자다. 두만강 강물이 아니라, 시베리아 동토(凍土)를 헤맨 탈북자다. 스스로 조국이라 부르는 북한은 그를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파견하면서 '동토의 낙원'을 약속했다. 1993년 5월이었다. 결혼 3년째, 만삭인 아내를 뒤로하고 그는 북한 평균 임금의 100배를 번다는 말에 시베리아행 열차를 탔다. 시베리아 틴다 지역 북한 제16벌목소였다.

▲ 벌목공 출신 탈북자 김만수(가명)씨가 취재팀과 함께 다시 한 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열차는 그가 탈출했던 므르뜨 깃 제16 벌목소로 가는 길이다./한용호 AD hoyah5@chosun.com
죽으라고 일했다. 선발 심사에서 당 간부에게 바친 뇌물까지 벌충해야 했다. 아름드리 나무에 깔리고 부닥쳐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언젠가 시체가 한꺼번에 열 구가 나왔는데, 간부들이 뇌물 받아 산 피아노를 화물칸에 넣는 바람에 관들을 벽에 기대 세워 싣고 가기도 했어요." 5년 동안 하루 15시간씩 악착같이 일해 1998년 7월 돈 대신 받은 '돈표'를 세 보니 목표했던 3000달러(약 298만원)가 달성됐다. "내 목숨을 걸고 모은 돈이었소. 집에 가져갈 생각을 하니까 너무 좋았지. 그런데 벌목소에 돈을 달라고 하니까 없다고 하더라고." 벌목소는 러시아로부터 받은 현금을 모조리 북한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김씨는 이듬해 1월 벌목소 담장을 넘었다. 조국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도망자 인생이 시작됐다.

▲ 시베리아에 숨은 북한 자치구, 제16 벌목소 내부 모습.
북한의 젊은이들은 1960년대 대한민국의 파독 광부들처럼 벌목공을 자원해 시베리아를 찾았다. 한때 낙원이요 천국으로 불렸던 벌목소는 1990년대 후반 북한의 경제난과 함께 지옥으로 변했다. 10년 도망자 생활 동안 결혼만 다섯 번. "먹고 살기 위해, 신분증을 얻기 위해 한 결혼"이라고 했다.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곤궁한 삶이었지만 돈이 모이면 15년 동안 이별한 북의 아내에게 인편으로 돈을 부쳤다. 그리고 최근 유엔난민고등판무관으로부터 난민 판정을 받고 꿈꾸던 제3국 탈출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으로만 본 아들, 그리고 기억에만 남아 있는 아내 역시 탈북시켜 15년 만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 곧 므르뜨깃에 도착한다. 북한이 만든 러시아 제16 벌목사업소가 있는 곳이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김만수씨(42)가 휴대전화에 저장됐던 가족 사진을 지웠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잡히면 어머니가 위험해지니까." 므르뜨깃에서 가까운 틴다 역에 내리겠다는 계획도 변경했다. "위험이 느껴져서 그러지. 러시아 경찰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을지." 김만수씨는 9년 전 이곳을 탈출해 러시아를 떠돌았다. 기억하기도 싫은 장소로 그가 돌아가는 길이다. "범을 잡자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야지." 목소리가 비장했다.
2007년 10월 24일. 모스크바의 한인 민박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인사 대신 팔뚝을 내밀었다. 한반도 지도와 '조국통일'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가 말했다. "조국이지요, 내 조국…. 곧 러시아를 떠날 겝니다. 북한이나 한국은 아닙니다." 조국을 말하면서 왜 한반도를 버린 것일까. "같은 민족한테 눈밖에 나 살 거면 차라리 다른 민족한테 천대 받고 사는 게 낫지요."

▲ 조국이 버린 남자들 - 벌목공의 절규

김씨는 1993년 5월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왔다. 하지만 벌목공 생활은 힘들고 비참했다. "장재차(나무 싣는 차)가 굴러서 사람 4명이 죽은 적도 있어요. 나만 살았지. 팔, 다리가 어딨는지 못 찾겠더라구."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러시아 마을에 몰래 내려가 물건도 팔았다. 1998년 7월, 3000달러어치 돈표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기죠. 5년을 완전히 당한 거지." 한푼도 받지 못했다. 1999년 1월, 김씨는 사업소를 탈출했다.


2007년 11월 3일 새벽, 취재팀은 김씨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탔다. 시베리아를 향하는 횡단열차는 며칠 뒤 시베리아 초입, 스코보로지노 역에 내렸다. 북한 임업연합 본부가 있는 틴다까지 택시를 탔다. 영하 35도. 들숨과 날숨 속에 믿기 힘든 한기가 밀려왔다. 검문을 피하려 후미진 얼음 길을 골랐다. "나는 절대 (카메라로) 찍지 말고. 염소 같은 경찰들이 모조리 검사한다고." 김씨는 더욱 예민해졌다.


틴다에 들어섰다. 사업소를 갓 탈출한 벌목공을 찾기로 했다. 러시아 백인들 사이에서 동양인이 보였다. 잽싸게 택시에서 내렸다. "림업(林業) 하오? 돈 필요하지 않소?" 그는 말없이 북한 임업연합 19사업소가 발급한 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여권은 당이 보관하니 운전면허증은 그의 유일한 신분증이다. 거래는 500루블(한화 2만2500원)에 이뤄졌다. 그의 탈출 이유는 김씨와 같았다. "로임(월급)을 안주고 국가가 먹으니까. 사업소가 일곱 개에서 열네 개로 늘었단 말이에요. 근데 한 개 사업소가 옛날 같지 않아요. 자동차가 한 백대씩 됐는데 다 폐기되고 열댓 대밖에 안되니까는. 돈 벌자고 나왔는데, 이제 갈 데가 없어요." 40대 사내가 울컥 하며 차에서 내렸다.

므르뜨깃은 해발 2000m. 러시아 택시가 산길을 올라갔다. 가도 가도 설산과 자작나무 숲밖에 보이지 않더니, 날이 어두워질 무렵 취재팀 눈앞에 너무나도 낯익은 풍경이 나타났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 만세!'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시베리아 동토에, '지상 낙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판박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풍경을 본 김씨가 입술에 침을 묻히며 재촉했다. "빨리 찍으라구. 그러지 않으면 당장 잡힐 거니까."

몰고 온 택시를 타고 벌목소 안으로 들어갔다. 빠른 속도로 한 바퀴를 도는 데 20분이 넘게 걸렸다. 벌목소는 김일성 만수탑(萬壽塔)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한쪽엔 아름드리 나무를 쌓아 놓았다. 다른 쪽엔 바퀴 달린 벌목공들의 숙소가 줄을 이었다. '빵통'이라 불리는 숙소는 차에 매달아 이동하며 작업을 한다. 전조등을 올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고드름이 매달린 지붕 위로 김정일의 대형 사진이 걸렸다. 그 밑으로 붉은 글씨의 구호가 가득하다. '결사관철!' '모두 다 당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 최초로 공개된 제16 벌목소의 빵통(벌목공 숙소)내부. 당 간부들 머리 위로 김일성·김정일 부자 초상화가 붙어 있다./한용호 AD
벌목공 서너 명이 취재팀이 탄 차 속을 힐끗거렸다. 경비병이 없는 틈을 타서 잽싸게 택시를 몰고 나와 뒷문에 차를 세운 뒤 러시아 택시기사와 함께 빵통 안으로 들어갔다. 간부 숙소다. 김씨는 택시에 남았다. 카메라를 팔러 온 상인으로 가장했다. 빵통에는 근육이 다부진 간부 벌목공 5명이 북한 중앙방송을 보고 있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초상화가 머리 위로 보였다. 카메라를 돌려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를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이, 동무…!" 위기다. 우리는 뒤돌아 빵통을 나왔다. 쌓인 눈을 밟으면서 차를 향해 뛰었다. 김씨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줬다. 길섶에는 여전히 벌목공들이 다녔다. 기사가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숨이 막혔다. "미친 놈들!" 김씨가 취재진에게 던진 한마디였다. 그날 밤, 김씨가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조각을 꺼냈다. '하나님 지켜주시옵고 시련과 악에서 구하여 주세요. 감사합니다.' 꼬깃꼬깃한 종이가 땀에 절었다. "너무 무서워서, 꼭 쥐고 있었어요."

이튿날. 스코보로지노에서 하바로프스크행 횡단열차를 탔다. 열차를 탄 취재진에게, 40대 탈북자는 굵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탄 취재팀은 노보시비르스크, 스코보로지노, 틴다, 므르뜨깃을 거쳐 하바로프스크에 내린 뒤 항공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8년 2월 12일. 그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닌가 했어요. 15년 되니까 목소리도 잊어버리고." 북한 국경까지 온 아내와 통화를 한 김씨는 신이 났다. 행복은 딱 이틀 갔다. 전화선 건너 아내는 탈출을 거절했다.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야~ 이건 피멍을 들게 하는 고통, 나도 어찌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목에 걸리고." 그런 아내에게 그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분명히 국경까지 데려온 놈하고 눈이 맞은 게지." 다음날 저녁, 그는 국경의 아내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왜 오겠다 해놓고 말을 바꾸나." 김씨의 설득은 힘에 겨웠다. 이미 15년이 지났다. 아내는 남편을 만나는 대신 자식에게 줄 돈을 요구했다.

지난달 18일, 다시 모스크바를 찾았다가 떠나는 취재팀에게 그가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자유세계로 가서 또 다시 만납시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납시다." 이번에도 40대 사내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 러시아 므르뜨깃 제16 벌목소는 시베리아에 숨은 북한 자치구다. 벌목소 입구는 북한의 붉은 구호로 뒤덮여 있었다./용호 AD hoyah5@chosun.com

 제4화 1만Km탈출 대장정_낙오하면 죽음

외화벌이 주역에서 탈북자로… 시베리아 北벌목공의 절규
대졸출신… 월급은 노동자의 100배
北정부는 외화 챙기고 '돈표'만 줘

19살 이영화씨는 2006년 두만강을 건넜다. 한 해 먼저 두만강을 건넌 엄마 박순심(41)씨는 옷 수선을 하며 돈을 모아 딸을 탈출시켰다. 오늘은 2007년 8월 16일. 전날 탈북에 성공한 남동생 영규(17)와 함께, 가족은 이날을 절대 잊지 않기로 했다.

북한에 살던 한 가족이 선양(瀋陽)이라는 중국 도시에서 함께 모이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리고 오늘, 영화씨가 중국을 탈출한다.

 

딸의 출발 시간은 오후 8시. 가족은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영화씨는 짐을 둘러멨다. "딸은 잘 다녀오겠습니다." 웃으며 거수 경례를 했다. 엄마와 남동생은 다시 돈을 모아 영화씨 뒤를 따르기로 했다. 바깥엔 비가 내렸다. 영화씨가 길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엄마, 그동안 잘못해서 미안해. 내가 꼭 잘될 수 있으리라 믿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울지 말려고 했는데. 엄마~" 그녀가 울먹였다. "엄마를 보는 게,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같은 시각. 이 도시의 또 다른 은신처. 7명의 또 다른 탈북자가 출발을 기다린다. 명단은 일주일 전에 확정됐다. 정철(8), 민영미(21), 성금자(23), 박영실(20), 조희영(20), 정현민(21), 김명순(57). 철이 빼고 모두 여자다. 탈북자 지원단체인 두리하나선교회 소속 선교사가 신신당부했다. "잡히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안돼요. 혼자 잡혀야지, 다른 사람 있다고 하면 다 잡혀가잖아."

▲ 1만㎞ 탈북 대장정 - 낙오하면 죽음

작별시간이다. 영미씨의 언니 금미(23)씨와 형부, 두 살배기 조카는 다음에 가기로 했다. 일행 수가 늘어날수록 공안에게 걸리기 쉽다. 친자매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울음소리가 나면 옆집에서 신고를 해요." 선교사가 말했다.


오후 11시 선양 역에서 베이징(北京)행 버스가 출발했다.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공안이 올라탔다. 일순간 침이 말랐다. 영화씨가 취재팀에게 속삭였다. "신분증 검사를 하면 어떻게 하죠?" 다행히 공안은 슬쩍 둘러보고 그냥 내렸다. 베이징에 도착하기까지 검문은 3번 이어졌다. 그때마다 일행은 잠든 척하며 검문을 피했다. 쿤밍(昆明)행 기차는 다음날 오후 4시30분 베이징 서역(西驛)에서 출발한다. 일행은 각자 흩어져 그날 밤을 보내기로 했다.


역 광장에 모이기로 한 8월 17일 오후 2시.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모두 모였다. 기차는 2박3일 동안 달렸다. 모두 다른 칸에 자리 잡은 일행. 하루에 한두 번씩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다. 기차에 타고 있는 공안들이 언제 신분증 검사를 할지 모른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8월 19일 새벽 4시. 영화씨가 탄 객차에서 느닷없이 신분증 검사가 시작됐다. 손님 누군가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영화씨는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한 시간도 넘게 있었어요. 사람들이 문을 두들겨도 귀를 막고 열어주지 않았어요." 모두가 각각 다른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고 했다. "공안한테 잡히면, 그냥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잡히느니 죽는 게 나아." 금자씨가 말했다. 오전 8시 50분. 기차가 쿤밍 역에 도착했다.


곧바로 국경 마을로 달려야 한다. 일행이 수배했던 미니버스 주인이 역 광장에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이다. "선교를 위해 왔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북쪽 동포죠? 며칠 전에도 공안에 잡혀 가는 걸 봤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속 100~120㎞로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 저편에서 불심검문이 시작됐다. 그가 재빨리 핸들을 꺾어 비포장길로 들어갔다. 숨죽이던 영화씨가 말했다. "난 잡히면 약 먹고 죽을 거야. 왜 이리 많이 떨리지." "죽을 거야"라는 말. 아무도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비포장길 9시간 만에 드디어 국경이다. 선양에서 따라왔던 안내자가 돌아갔다. "꼭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잡히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일행을 인수 받은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은신처로 갔다. "아무 질문도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내일 8시간만 걸으면 됩니다. 그럼 죽지 않아요." 입맛은 전혀 없었지만 모두 밥을 입에 밀어넣었다. 내일의 강행군을 위해서는 필수다.


8월 20일 오전 10시. 차량 두 대에 일행이 나눠 탔다. 11시간 동안 아무도 안내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차 타는 데에 익숙지 않은 탈북자들은 차에만 오르면 멀미에 시달렸다. 어린 철이가 먹은 걸 모조리 토했다. 오후 9시 일행이 도착한 곳은 국경의 작은 움막. 길 안내자는 경비 상황을 보러 떠났다. 다음날 새벽에 시작된 산행은 8시간이 아니라 18시간이 걸렸다.


라오스 국경으로 넘어간 뒤 밀림을 헤치며 강물을 걸었다. 작은 소리에도 몸을 숨기기 바빴다. 숨이 턱밑까지 차 올랐다. 힘겨워하는 동료에게 서로 손을 내밀었다. "살더라도 같이 살고, 죽더라도 같이 죽자." 걷고, 뛰고, 헤엄치고, 차를 타고. 라오스 국경의 비밀 숙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 생명을 건 탈출을 하는 동안 각자 먹은 것은 계란 1개와 소시지 2개. 하루를 자고 라오스~태국 국경을 향해 또다시 달렸다.


8월 24일 새벽 5시. 이제 메콩 강만 건너면 태국이다. 태국은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국가다. 일행의 상태는 말 그대로 만신창이다. 철이는 쓰러졌다. 영화씨는 차멀미에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나머지는 복통과 고열에 시달렸다. 탈북자 수백명을 안내해본 중국인 안내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강물을 그냥 먹어서 말라리아에 걸린 거야."


메콩강변 수풀에 몸을 숨긴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도를 했다. 영화씨가 물었다. "철아, 뭐라고 기도했니?" 철이가 대답했다. "엄마한테 무사하게 가게 해달라고." 탈북자인 철이 엄마는 이미 한국에 와 있다. "누나는?" "그래,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


저 멀리 강 너머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태국 경비병이 자리를 비웠다는 신호다. 길 안내자가 손짓을 했다. "빨리 뛰어!" 모터 달린 쪽배 두 척이 다가왔다. 폭 1m, 길이 4m. 쪽배 바닥에서 강물이 올라왔다. 모터가 돌자 누군가가 목소리를 억누르며 소리쳤다. "몸을 흔들지 마. 배가 뒤집히면 다 죽는단 말이야. 악어 밥 되고 싶어?" 쪽배는 심하게 흔들렸다. 영화씨는 중심을 잡기 위해 몸에 힘을 주고 뱃전을 붙들었다. 강을 건너는 데 딱 15분이 걸렸다. 배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태국이다. 일행은 부둥켜 안았다. "이제 살았어요, 우리 살았어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태국 방콕, 8월 25일. 일행은 주태국한국대사관 앞에 모였다. 악몽 같은 8박 9일의 여행이 끝났는데, 그런데, 또 끝이 아니라고 했다. 대사관 직원이 일행을 돌려세웠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근무를 안 합니다. 월요일 오전에 오세요." 영화씨는 풀이 죽었다. "힘들게 왔는데. 우리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에요." 이틀 뒤 다시 대사관 앞에 모였다. 영화씨가 중국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 미안해. 나만 살았어." 그리고 울었다. 취재팀이 동행했던 탈북자들은 방콕 외국인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모두 올 초에 한국으로 왔다.


 

 

 제5화 무너지는 국경_"무엇이든 팝니다"

밀매꾼, 비닐로 싼 마약 입에 넣고 알몸으로 강 건너
"돈 되면 다 팔아… 朝·中국경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곳"

 

국경지대 백성들은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국경을 지켜야 할 군인들은 밀수꾼으로 전락했다. 국경 경비를 포기한 것이다. 취재팀이 만난 한 조선족이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곳이 바로 중-조 국경"이라고. 가난한 나라의 국경. 돈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판다. 여자도, 마약도.

중국의 한 국경도시, 2007년 6월 17일 밤 10시. 마약 밀매상인 탈북자 김상만(가명·51)씨를 만났다. 그는 질 좋은 북한 마약을 매우 안전하게 건네 받는다고 자랑했다. "해군 경비정이 운반한단 말이야." 오늘은 김씨가 경비정을 만나는 날이다. 취재진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김씨가 전화를 걸었다. "형님, 대체 어딨는 거예요? 안보이니까 불빛을 비추라구요." 갑자기 강에서 번쩍하고 불빛이 나타났다. 경비정이 다가왔다. '둥~둥~둥~둥~.' 엔진 소리가 강을 울렸다.

그가 강변으로 뛰어갔다. 10여분 뒤 그가 차 문을 열자 배 떠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하얀색 고체를 수건으로 소중하게 싸더니 운전석 밑에 숨겼다. "얼음이야." 얼음은 필로폰 계열의 북한산 마약이다. "그게 얼마죠?" "미국 달러로 1만1000달러(1100만원)가 좀 넘어. 아주 싸게 산 거야."  

2007년 7월 14일 오전 11시. 국경에서 경비정을 만나 마약 대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김씨는 미국 달러와 오토바이 1대를 준비했다. 경비정이 도착해 대기 중이다. 낡은 경비정엔 짧은 머리 사내 6~8명이 서 있다. 하얀 런닝셔츠에 국방색 바지를 입은 군인들. 두 명이 배에서 내려 긴 나무판으로 배와 육지를 연결시켰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않고 돈을 받은 뒤 오토바이를 배 위로 올렸다. 군인들은 배 상판을 열고 오토바이를 밀어 넣었다. 10분 만에 경비정은 떠났다. 김씨가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국경은 이미 무너졌어."


▲ 거래를 끝내고 오토바이를 받은 북한 군인들이 경비정 위에서 사방을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다. / 정인택 PD
중국 카이산툰(開山屯), 2007년 9월 20일 새벽 2시. 가는 비가 내린다. 국경수비대 건물을 지나 두만강으로 내려갔다. 강둑은 콘크리트로 깨끗하게 정리됐다. 10m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만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다. 북한 인신매매 브로커 강철(가명·27)씨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타났다. 옷은 비닐에 넣어 테이프로 묶었다. 옷이 젖으면 북한으로 돌아간 직후 다른 이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입 속에서 비닐로 접은 작은 물건을 꺼냈다. "이거 약입니다. 이게 뺑꿉이라는 겝니다." 뺑꿉은 얼음의 또 다른 이름. 어디서 구한 것일까. "저쪽 평성 아래 남포라는 데 있습니다. 남포에는 우리나라에서 계획적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거는 개인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한 겁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라에서 계획적으로' 마약을 제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약 견본 500g을 500위안(약 7만원)이라고 했다. 취재팀이 동행한 조선족 브로커가 돈을 건넸다. "청진에 있는 우리 형네 집에 한 키로(㎏)가 있습니다. 가격은 1만5000달러." "수비대에게는 500위안만 주면 됩니다. 강 건너에 소대장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강씨는 1년 전에 제대했다. 군 복무 중에도 인신매매 브로커의 월경을 눈감아주고 돈을 벌었다. 소대장과 손잡고 직접 마약과 여자를 팔기도 했다. "그때 사람 좀 했습니다. 돈 좀 벌었습니다." "일주일 안에 연락을 주시란 말입니다. 물건 준비해놓겠습니다." 강씨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 북한의 마약 브로커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가고 있다. 벌거벗고 강을 건너왔던 브로커는 취재진에게 마약 거래를 제안했다. 그는 북한 국경 수비대 소대장과 손잡고 마약과 여자를 판매한다고 했다. /한용호 AD hoyah5@chosun.com

▲ 무너지는 국경 - '무엇이든 팝니다'

▲ 두만강에도 인간 사파리는 존재했다. 뱃사공이 던져준 먹을것이 한시간도 안되어 빈 봉투만 강위를 떠 다니고 있었다./ 정인택 PD

먹을 것을 던져주고, 그것을 주워먹는 모습을 즐기는 관광이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서 소리 소문없이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