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좋은 상식

성리학

예인짱 2009. 1. 7. 11:51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고려대 윤사순 교수(한국철학)의 성리학 강좌 

 

 

윤 교수는 ‘조선시대 유학의 도덕철학: 한국 성리학과 실학의 윤리사상’을

5주 동안 소주제별로 나눠 강좌를 진행한다.

윤 교수는 ‘권선징악을 위한 성리학적 응보론’을 주제로

고려시대의 국가 기본 틀이었던 불교가 조선 초에 배척당하고

성리학이 꽃을 피운 배경을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를 통해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진다.

 

 


 


 (1) 조선이 유교사회로 바뀐 까닭은?

 

 

“유학자들은 고대부터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공자 이래 도덕설과 정치설이 다른 어느 정치사상보다 잘 발달되었으며

유학에서 이상적인 삶을 구현하려 할 때에는 도덕을 정치보다 앞세웠다.”

유학에서 도덕의 비중을 강조한 윤 교수는

조선 성리학이 도덕과 같은 특정 분야에선 중국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계속적인 논변과 비판을 통해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그 결과, 심성설과 같은 특수 분야에선 중국의 주희설보다 더 높은 수준에 올랐다.

도덕과 같은 일정한 분야의 성리학 이론을 철학차원에서 고찰할 때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이론을 빼놓아선 곤란하다.”

성리학이 전해지면서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심이 깨어났고

원나라의 배격과 함께 원에 예속된 고려가 숭상했던 불교까지 배척당했다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이런 경향은 조선의 성립과 때를 같이 해서 성리학이 새 왕조의 통치원리로 채택됨을 계기로

매우 적극화됐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초기부터 정책 이상의 이론 차원에서까지 불교를 배척했다.

조선 초에 집권층 성리학자들은 불교풍의 예속(禮俗)을 청산하고

이를 성리학적 예속으로 대체하려 했다.”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의 사상

고려대

윤사순 명예교수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바로 이성계 다음으로 실권을 행사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정도전이다.

이후 불교 배척의 근거로 삼은 정도전의 성리학 사상을 윤교수는 설명했다.

“그 시기까지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불교의 사원과 승려들의 폐해를

집중적인 불교 배척의 이유로 삼았다. 그 방법은 상소문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불교의 그런 폐해와 철학사상 차원의 이론적 약점과

폐단까지 철저히 비판하는 형식으로 불교 배척에 앞장섰다.”

정도전이 불교를 배척키 위해 지은 책은

심기리편(心氣里篇),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佛氏雜辯).

“심기리편에 따르면 정도전은 심(心-불교)은 의식의 작용으로

이는 기(氣-노장사상)의 작용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심보다 기가 더 근원적이며 기는 이치의 근원인 리(理-성리학)에 의해 움직이므로

불교보다 노장사상이, 노장사상보다 성리학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또 심문천답에선 불교의 중요 사상 중 하나인 ‘선악응보설’을

성리학의 리기, 심성 등의 용어로 대체하려 했다.”

또 대표적 불교 배척서인 불씨잡변을 인용, 인간의 심성(心性)까지도 공(空)으로 보는 불교사상과

모든 현상세계를 오행(五行)의 기(氣)로 보는 성리학과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했다.

“불교에선 공(空)한 이 세계를 인과(因果) 이론으로 이해하면서

인체는 가체지만 사망 후에도 정신만은 불멸,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일정한 기(氣)의 불량으로 생긴 병이 의술에 의해 치료되는 사례를 보면서

인과이론은 오류라고 주장한다.”

정도전의 불교사상에 대한 비판은 중요 사상인 응보설(應報設)에도 이어졌지만

복선화음(福善禍淫)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비슷하다는 것이 윤 교수의 주장.

“정도전은 심문천답에서

‘인간이 선행을 하면 하늘이 복으로 보응하고 악행을 하면 하늘이 화로 보응한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을 주장했다.

응보설을 불교설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그는

응보설에 담긴 선악의 도덕정신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항상 올바른 원리가 적용되지 않고 실제에선

악한 사람이 복을 받는 일(복선화음의 전도)도 있다는 점에서 그는 철학적 난제에 부딪혔다.”

윤 교수는 정도전의 응보설은

천국과 지옥 등의 보상심리 위에 세워진 불교의 타율적 원리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의 보응설은 ‘복선화음의 전도’라는 난제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깨달아 실천하는 자율적 원리를 통해 해결코자 했다는 설명.

“정도전은 복선화음이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은 인간의 물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복을 주는 하늘을 하느님(상재), 우주 또는 리(理) 등과 동격으로 본 정도전은

하느님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몸의 기로 말미암아 생기는 물욕은

경(敬), 성(誠), 의(義), 용(勇) 등의 유교 원리로 다스리고

태생적으로 타고난 리(理)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이므로

이 본성을 따르는 한, 복선화음이 뒤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비록 정도전의 성리학에 나타난 보응설이 이론적 한계를 갖지만

권선징악의 근거를 적어도 불교보단 더 합리적으로 제시,

조선 초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이 불교의 자리를 대신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말했다.

- 조행만 기자,  chohang2@empal.com
- 2008년 10월 20일, ⓒ ScienceTimes

 

 

 

 

 

 (2) 율곡은 천재형, 이황은 노력파 - 오륜체제의 연구

 

 

한국학술진흥재단 주최, 교육과학기술부 후원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인문강좌 그 두 번째 시간.  ‘오륜체계 확고화 성향의 이론’이라는 주제로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이 날 강의는 ‘조선시대 유학의 도덕철학: 성리학과 실학의 윤리관‘의 두 번째 강의로

조선 초 정도전과 함께 성리학을 이끈 권근(호는 양촌, 1352~1409)의 사상을 살펴보며

우리나라 성리학의 특징과 자부심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권근은 성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역사에 깊이를 더한 유학자다.

성리학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입학도설’을 출간해

성리학의 기본 이념과 이상을 보다 쉽게 풀이했다.

그의 ‘오경천견록’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예기천견록’은

십여 년에 걸쳐 완성돤 역작으로 ‘수양과 도덕’에 대한 연구를 풀어 쓴 책이다.

공자 · 맹자 사상은 성리학을 포함한 유교 전체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핵심은 ‘인(仁)’이고 맹자의 핵심은 ‘의(義)’인데, 이는 ‘리(利)’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권근은 여기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데

‘義’는 말할 것도 없고 ‘仁’만 하더라도 리(理)의 당연이라 하였다.

이는 공자의 정명사상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仁의 당연’이자 직분상 의무의 당연이라는 의무론적 도덕설을 주장한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 됨

권근은 ‘입학도설’에서 만물의 근원인 천(天), 인(人), 심(心), 성(性)을 이해시키고자

그의 책 맨 앞에 『천인심성합일지도』와 『천인심성분석지도』를 그려 넣고

위 개념을 구체화했다.

“『천인심성분석지도』에서 天자를 ‘一’과 ‘大’의 합성으로 보고

천과 인간이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주장하는 데서

도덕적 행위가 성리학의 궁극적 이상인 천인합일의 이상 아래서 추구되는 것이고,

천인합일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점이 권근의 사상에서 개성적이며, 철학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천’이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궁극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권근의 『천인심성합일지도』를 보면 천권에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써 놓았는데,

아마도 이것을 천도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행동은 바르게 곧 법칙대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인간이 본받아야 하는 준칙을 의미한다.


심성정과 사단칠정-인간은 선한 도덕을 행할 마음을 타고났다.

▲ 천인심성합일지도 

윤 교수는 “권근은 인(人)에 대해서도 인(人)은 인(仁)이라고 해석하는 독특한 면을 보였습니다.”라고 운을 뗀 뒤 심성정과 사단칠정의 개념에 대해서 강의를 이어갔다.

먼저 ‘심성정’의 개념에서 인(仁)이라 함은

“인(仁)을 체득하여 심덕을 온전히 함으로써 그 생의 리(理)를 항상 보존토록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견해이다.

공맹 이후 仁이 선한 본성으로 이해되지만 권근은 이에 ‘생성의 리’라는 개념을 첨가하여 ‘천인합일’에 ‘만물일체’의 형식으로 그 개념을 전환하게 된다.

심(心)에 대해서 권근은 정주의 성리학을 인용하는데 심의 발용을 의(意)로 보고, 앞서 얘기한 천즉리(天卽理)의 명제를 이어받아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다. 성(性)은 심(心)과 생(生)의 합성이며 하늘이 명하여 인간이 얻은 ‘생의 리’라고 정의한다.

선악과 관련된 심(心)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사단’과 ‘칠정’에도 권근은 주목했다.
이후 퇴계 이황과 기대승이 이 부분을 둘러싸고 극렬한 논쟁을 해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 있다. 

 

사단이라 하면 맹자가 인간의 선한 4가지 마음으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정이다.

또 칠정이라하면 『예기』에서 말한 일곱 가지 정으로

희(喜), 노(怒), 애(愛), 구(懼), 애(哀), 오(惡). 욕(欲)으로 선도 악도 아닌 자연의 정을 의미한다.

권근은 『천인심성합일지도』에서 사단을 정(情)의 영역에, 칠정을 심(心)의 영역에 써 넣고

그 둘을 분리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情)은 성(性)이 발한 것으로 곧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성의 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단은 맹자가 얘기한 선한 정만을 가려낸 것이고

이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구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칠정은 선하거나 악할 수 있는 비고정적 개념이다. 사단을 칠정과 구별한 것은

인간이 ‘선한 도덕’을 행할 본성을 타고났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


선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한 천명연구

유학에 도덕적 가치인 선(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본성(본연의 성)’과 ‘중절’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공맹사상에서 선한 본성이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있고

이러한 선한 본성은 하늘이 명의 형식으로 줬다고 말하고 있다며

윤사순 강연자는 ‘본성’에 관한 선의 방식을 논의한다. 칠정이라는 개념은

절도에 맞게 조화되어야 한다는 중절(中節)로서 선을 이룬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윤교수는 설명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선의 2가지 실현방식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 점이 우리의 성리학이 중국의 유학과는 다른 ‘독특하고 새로운 발전’을 이루게 되는 모습입니다”

추만 정지운,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같은 성리학자들은

『천명도』와 『천명도해』그리고 『천명도설』같은 도해식 연구를 발전시키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방식이다.

여기서 윤사순 교수의 재미있는 설명이 곁들여졌는데

“율곡은 독서당에서 한 달이면 남들이 일년 동안 쓸 글을 한번에 써내려간 그야말로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이황은 사랑을 쓸 때는 연필로 쓰라는 노래 가사처럼 반복해서 고치고

연구하는 노력파지요. 우리 같은 후학들이 인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학자입니다.(웃음)”

라고 말해 좌중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천명도』와 해설서『천명도해』의 제작은 정지운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천명도의 내용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믿음에 따라

天의 모양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땅의 모양인 검은 네모를 그렸다.

거기에 윗부분은 둥글고 아래는 절반의 모난 모양의 사람을 그렸다.

이는 사람의 절반은 하늘모양이고 절반은 땅의 모양으로

사람이 하늘과 땅의 소생이라는 『주역』의 관념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한 ‘천도(天道)’를 하늘의 영역에 적어 천일합일을 고려했다.

사람의 그림 한가운데 마음 心 자를 두고 그 둘레에 희노애락을 썼다.

가운데에는 네 개의 갈라진 신(信)자 안에 인 · 의 · 예 · 지를 그려 넣어

마음 속에 오성과 칠정이 전부 존재함을 의미했다.

그런데 여기서 천명을 오성에 연결시키는 통로를 만들어놓고

인간이 금수와 다르게 천명을 위해 살아감을 강조했다.

선악은 마음그림 밖의 의(意)자 밑에 그려 넣어 칠정과 연결시키고,

그 가운데에 ‘성찰’을 써넣어 선을 행하는 데 수양의 중요함을 상징했다.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에 대한 격렬한 논쟁

▲ 천명도 

정지운은 이황에게 『천명도』를 주면서 감수를 부탁하는데 ‘사단은 리(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라는 구절을 이황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사단은 理의 발이고, 칠정은 氣의 발이다”

이 해석을 두고 기대승이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맹렬히 비판한다. 이를 기화로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을 둘러싼 8년간의 유명한 논변이 일어나게 된다.

기대승이 비판한 점은

사단과 칠정이 별개의 정이 아닌 칠정 가운데 선한 정을 사단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분리함은 타당하지 않다.

또 정은 심과 마찬가지로 리와 기의 합으로 되었는데(理氣之合), 이황의 해석에 따르면 사단에는 理만 있고 氣가 없으며 칠정에는 기만 있고 리가 없는 듯이 보인다.

이에 이황은 "사단은 선한 정이고 칠정은 선악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악으로 쉽게 흐르는 정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함은 부당하지 않다"라고 했다.

또 "理는 氣와 더불어 상호 발용한다"라며 리도 사용할 때는 기처럼 작용성이 있다는 ‘호발설(互發設)’을 주장한다.

이후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고 이황이 기대승의 주장을 일면 받아들이기도 해 수정설을 내놓기도 한다.

“8년간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도 기대승은 개인적으로는 이황을 존경해

물고기를 얼려서 이황에게 선물하는 등 군자의 도리를 지켰습니다”라고 윤 교수는 말했다.

뒷날 기대승은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글에서

이황의 애초의 해석만을 ‘의미상’으로 인정하여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이에 이황도 기대승이 자신의 수정설을 긍정한 것이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사단칠정의 도덕적 함의

이황과 기대승이 합의하지 못했던 리(理)의 실제적인 발동에 대해서

후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으로 그 논변이 이어진다.

이 논변이 확대되어 주기파, 주리파 혹은 율곡학파, 퇴계학파라는 학파까지 생겨

중국에서는 연구되지 않았던 리기해석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있었고,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최대의 담론이자 특징이 된다.

과거 일본인 어용학자인 타카하시 도오루는 이를 두고

조선 민족의 사상의 무독창성을 드러내는 증거라며 사상의 사대성이라 매도했다.

이에 윤 교수는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주희설을 인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황의 ‘수정설’이나 ‘이기호발설’은 대단히 창발적 이론이며

이를 비판하는 율곡의 ‘리통기국설’은 주희보다 더 권위 있는 ‘성인’을 끌어들여

이론적 독창성을 과시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윤교수는 마지막으로 "왜 사단칠정의 해석이 있었는가를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시대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사단칠정을 『천명도』와 연관지어 발전시킨

성리학자들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명도』는 오성을 풀이한 그림이고, 정지운은 그의 책 『천명도해』에서

“오성이 오륜 즉 인의예지신으로 구현되는 바, 도덕원리로서 간주된다”라고 했다.

당시의 오륜체계를 공고화하기 위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맹자가 성선설을 증명하기 위해 도덕의 합리화를 주장했다면,

우리나라의 정지운, 이황 같은 성리학자들은 사단칠정의 理氣해석을 통해

당시의 도덕과 도덕체계의 확고화를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사상 부재의 현실 속에서 시대상을 고민하고 사상을 선도하여 문화를 발전시킨

우리나라의 성리학자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이번 인문강좌는 학문에 있어 자유로운 비판과 수용, 그 중에도 예의를 지키는

기대승와 이황의 논변을 통해 사상의 창의성과 발전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한 자리였다. 

- 차근민 기자,  chageunmin@naver.com

- 2008년 10월 28일, ⓒ ScienceTimes

 

 

 

 

 

 (3) 일제, 복상론(服喪論) 통해 조선 역사 왜곡

 

 17세기 조선은 중국 뛰어넘은 ‘예학 전성시대’

 

한국 유학사에서

좁게는 17세기, 넓게는 17~18세기 중반까지를 ‘예학시대(禮學時代)’라고 부른다.

예(禮)로써 한 시대의 명칭을 삼을 만큼, 유학자들이 예를 왕성히 ‘연구하고 정리’했던 시대였다.

이 시대 선비(士大夫)들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움직이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었다.

禮를 절대시해 그것을 바르게 행해야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君子)이고,

그것을 행하지 못하거나 어기면 곧 부족한 인간인 소인(小人)이라고 지탄했던 것이

이 시대의 풍조였다.

그러나 행위와 관련된 인격평가 풍조는 사대부 간의 붕당 원인으로 작용했다.

16세기 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진 데 이어,

17세기 들어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각각 나뉘어진다.

붕당의 발단은 예(禮)를 놓고 큰 다툼이 일어난 사대부 간의 송사(訟事), 즉 ‘예송(禮訟)’이었다.

1659년 상복을 놓고 발생한 1차예송(一次禮訟)은 윤선도(尹善道)의 함경도 유배로 마무리되고, 1674년 ‘복상의 기간’을 두고 발생한 2차예송(二次禮訟)은 서인의 실각으로 마무리된다.

그동안 17세기 조선 사대부 간의 큰 논쟁, 즉 예송에 대해 엇갈린 평가가 있어 왔다.

먼저 역사적 이해로 그 시대 관직의 수가 제한됐던 상황에서

관료생활만을 생계 수단으로 삼았던 양반 인구 증가로 말미암은 현상이

예송 붕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회적 이해로 임진왜란, 두 차례의 호란을 겪고 난 후

삼정(三政)의 문란, 경제 퇴락, 농촌사회 공동화, 민란 발발 등으로 인해

국가사회 안정책이 다른 어느 시대보다 요구됐으며,

이를 위해 사대부 지배층을 통해 예를 절대화하고, 그 실천을 강화하게 됐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 타카하시 도오루(高橋 亨, 1878~1967)의 예송관이 있는데,

그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과 예송을 함께 묶어

“이것들은 조선 민족이 본래적으로 지닌 ‘분열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고려대 윤사순 교수(한국철학)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를 통해

타카하시 도오루의 예송관을 반박하면서,

“예송은 성리학을 익힌 예학자들이 간직했던 ‘도덕적 명분의 합리적 사고’를

구체적인 정책에 투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예설, 본성설에 깃든 도덕의식’이란 제하의 강연을 통해

“(예송을) 그렇게 이해하면 예송이야말로 (당쟁으로서는 합리성 구비의식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매우 ‘세련된 정치형태’라는 평가가 절로 나온다”며

“세련 여부는 특히 같은 시대 이웃 국가인 중국, 일본 정치 형태와 비교했을 때

명백히 확인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당시 중국의 명(明)은 만주족인 청(淸)에 연달아 패퇴하면서도,

정권을 환관들의 농락 속에 빠뜨려 오직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일본은 에도시대로 무사(사무라이)들이 칼로 정권을 좌우하던 행태에 머물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 국가 중 어느 나라도 이성으로 합리성을 찾아 정치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조선은 예송을 통해 합리성을 찾는 정치 행태를 보였다”며

“예송을 가리켜 민족의 분열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하던 일본인의 이해는

완전히 식민지 사관과 맥을 같이 하는 악의에 찬 왜곡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예송은 겉으로는 정치현상임이 틀림없지만, 그 이면에는 성리학과 밀착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기 성리학은 통치원리로 채택된 지 2세기 반이나 지난 시점으로,

성리학의 지식과 연구수준은 고도로 능숙, 심화돼 있었으며,

그 응용에도 능술할 대로 능숙하게 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일본인 학자 타카하시 도오루의 주장은

“항상 분열만 하여, 단합에 의한 자주독립의 능력이 조선인들에게 없는 까닭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이른바 ‘보호해야 한다’는 식민지 합리화론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조선시대 예송을 단순히 붕당의 원인으로 단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큰 불만을 표명했다.


다음은 윤 교수가 조선시대 1, 2차 예송의 진행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시대 1, 2차 예송(禮訟)에 관해...

예송은 효종(孝宗)이 세상을 뜨면서 시작됐다.
효종이 1659년 죽자,

그의 계모이며 인조(仁祖)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상복을

‘어떤 종류의 복(服)’으로 정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생겼는데, 이 문제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남인 윤휴(尹?), 허목(許穆) 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서인들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복(朞年服)을, 남인은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궁중예의집성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일년 동안 복을 입는다”고 한 것과,

‘예기(禮記)’에 기년복설이 있음을 근거로 삼았다.

반면 윤휴는 ‘의례(儀禮)’ 참쇠장(斬衰章)의 주해에 적힌 차장자설을 논거로 삼았다.
거기에 적힌 “맏아들이 죽으면 적실 아내의 소생 ‘둘째 아들’을 뽑아 세워도
또한 맏아들이라

(이름)한다”는 것을 들어, 윤휴는 삼년복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여기서 “맏이가 죽었기 때문에 뽑아 세운 적실의 둘째도 맏아들이다”라고 한 것은

효종이 원래 적실의 둘째 아들로서 사망한 맏이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군왕인 현종과 조정은 결국 기년설을 시행케 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끝을 맺지 못한 채 이후 약 20년간 계속됐다.

이른바 ‘1차 예송’, 또는 ‘1차복상론(一次服喪論)’이었다.

2차예송(二次禮訟)은 ‘복상의 기간’을 두고 다툰 논쟁이었다.

현종 15년(1674) 2월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그 때까지 생존했던 인조의 비, 즉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가 또 다시 대두됐다.

예조에서는 국조오례의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 기년복을 잠정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 집권 세력이 9개월간 입는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자,

예조에서도 그것을 따랐다.

이는 장자의 아내와 중자(衆子) 아내의 복상기간을 달리 규정한 ‘의례’,

곧 고례(古禮 )를 따른 것으로, 효종의 비 인선왕후를 ‘중자의 아내’로 대우한 셈이었다.

이를 알게 된 남인 측에서 가만있을 리 없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효종 별세 시 효종을 장자로 처우한다면서

고례인 의례의 주해를 외면하고 국조오례의와 경국대전을 따랐다가,

이번에는 두 책에 명기돼 있지도 않고,

새삼 중자의 아내에 적용되는 ‘대공복’을 택함은 무었 때문인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왕이 영의정이자 서인인 김수흥(金壽興) 등을 불러 답변하도록 했으나,

분명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남인인 윤휴는 서인들이 효종의 비를 ‘중자의 아내’로 간주해 대공복을 변함없이 고집한다고

가차없이 비난했다.

이에 왕은 격노,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복으로 하라”고 명했고,

김수흥을 춘천으로 유배보내는 한편 예조판서를 비롯한 관료들에게도 죄를 물었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서인들은 실각하게 되고, 2차 예송(갑인복상론)은 매듭지어졌다.

- 이강봉 편집위원, aacc409@naver.com

- 2008년 11월 03일, ⓒ ScienceTimes

 

 

 

 (4) "땅덩이 둥글다" 양반지배사회에 충격

 박지원, 정약용 등의 인간평등주의로 발전

실학(實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조선시대 초기 성리학자들도 성리학을 가리켜 실학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헛된 학문’, 즉 허학(虛學)이라 칭하고,

불교와 비교해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자칭했다.

불교와 비교해 성리학은 예(禮)를 강조하는 등 현실과 직결된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왜란과 호란이 발생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등 성리학이 실학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17세기 초 ‘실학’이 대두하는데, 실학자들은 과거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했듯이

성리학을 현실 풍토에 맞지 않는 ‘비실제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와 비교되는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칭했다.

고려대 윤사순 교수(한국철학)는 ‘실학 속에 윤리관’이란 제하의 강연을 통해

17세기 초 등장한 실학자들은 당시 양반 지배층 중심사회를 개조할 ‘개혁안’들을 적극 모색하면서,

‘학문 방법’에 까지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초기 실학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은

성리학자들이 도덕원리 탐구만 옳은 원리이며, 나 자신을 위한 학문이라 하면서

그것에 탐닉하고 있는데 대해 못마땅해 하면서

이전까지 ‘잡학(雜學)’이라고 경시해왔던 ‘박학(博學)’을 나 자신을 위한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송나라 때 일어난 신유학인 정주학(程朱學)보다 더 상위에 있는 본원유학(本源儒學)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찍이 중용(中庸)에는 유학의 방법으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을 들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박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문방법론의 전환을 꾀하는 과정에서

공맹(孔孟)의 본원유학이 지닌 ‘실제성 중요시 정신의 회복’을 내세우는데,

이 경향은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을 비롯,

수사학(洙泗學)을 표방하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

박학을 중요시하는 경향에서 나온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設),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朴齊家 , 1750~?)의 북학의(北學議),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윤 교수는 이수광, 박세당 등 실학자들이 ‘본원유학의 정신 회복’을 주장했지만,

그것이 단순하게 본원유학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학사에서 고증학, 성리학 등 새로운 사상이 발흥할 때는

으레 공맹의 본원유학 회복을 빙자하는 것이 관례였다는 것.

실학자들의 학문 방법의 전환은 마침내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한 ‘정주학 이탈’ 현상까지 이어지고,
‘탈정주학의 내용(철학)’을 구축하게 되는데, 정주성리학에 반발하는 태도에 가차없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을 찍어 매장시키던 당시 상황에서 모험이었다.
윤휴와 박세당은 자신들의 견해로 정주의 경전주해에 ‘수정을 감행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끝에
결국 목숨을 잃게 되지만, 정주의 경학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은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홍대용을 거친 정약용에서 마침내 정점을 이루게 됐다고 윤 교수는 말했다.

이처럼 성리학적인 사고풍토가 팽배하던 상황에서 실학적 사고가 대두된 원인은

당시 시대 여건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새로운 천체관인데, 홍대용(洪大容이, 1731~1783)이 서학(西學)을 통해 소개한 ‘지구설(地球說)’과 ‘지동설(地動說)’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땅덩이가 둥글다”는 지구설은 종래 중국 본위의 ‘중화주의 세계관(中華主義 世界觀)’을 부정했으며,
성리학자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이른바 세계(天下)가 중국을 중심에 두고 편성‘된 것처럼 여기던 전통사고를

뿌리부터 뽑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윤 교수는 말했다.


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움직이기까지 한다는 이론은

성리학자들이 진리로 여겨오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 라는 관념들 버리게 하고,

“땅은 정지한 채로 있으며, 하늘이 움직인다(天動地靜)”는 성리학자들의 믿음마저

쓸모없게 만들었다.

홍대용은 지구설, 지동설을 근거로 중국 본위의 화이관(華夷觀)을 타파하려고 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인간과 타물들을 하늘같은 제 3의 입장에서 보면 균등하게 평가되지,

인간을 더 우월시하지 않게 됨을 지적하면서, ‘인간과 타물의 균등관’을 도덕적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이 시기 홍대용에게 지구설을 들었던 박지원에게서

‘양반전(兩班傳)’과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박지원이 두 작품을 통해 양반상민의 신분차별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귀천 관념에

도전했던 것은 홍대용 등 실학자들에게서 나온 ‘인간평등관의 싹’이 자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이강봉 편집위원, aacc409@naver.com
- 2008년 11월 10일, ⓒ ScienceTimes


 

 

 

 

 (5) “조선시대 유학은 현실을 이야기했다”

 윤사순 교수, 순수한 유학정신 계속 이어가야...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72)는 한국 철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광복 후 한국철학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철학의 실상을 밝히고,
한국 전통사상 연구를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세계에 한국 전통철학을 소개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81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이황(李滉)의 저작 중 도덕 법칙과 실천 문제에 관해 탐구한 논문 ‘존재와

당위에 관한 퇴계 이황의 일치시(一致視)’을 발표해 세계 철학계의 큰 주목을 받은 데 이어

이후 ‘퇴계 이황의 성선관(性善觀)’, ‘인성, 물성의 동이(同異) 논변에 대한 연구’ 등을

세계 학계에 발표하며 한국 철학의 위상을 높여왔다. 

▲ 조선시대 유학과 관련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종합토론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를 통해 지난 10월 18일부터 11월 15일까지 약 한 달간 진행된 강의에서
윤 교수는 조선시대 신유학이라고 하던 성리학, 그리고 성리학에 이어 발흥한 실학 등

한국 유학에 대해 그가 연구한 모든 것을 쏟아 놓았다.

11월 1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종합토론에서는

곽신환 숭실대 교수 사회로 이광호 연세대 교수, 최영진 성균관대 교수, 허우성 경희대 교수와

청중들로부터의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으며, 

윤 교수는 각 질문에 대해 일일이 사례를 들어 답변하는 열의를 보였다.

한국 유학을 ‘인간과 인류를 이롭게 하는(弘益人間) 정신’에 따라 이 위대한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한국인의 노력의 결과라고 정의하고,

“앞으로 이를 증명할 기회가 더 많이 있기를 강렬히 소망한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동안 당쟁의 시작으로 인식돼 온 조선시대 1, 2차 예송(禮訟)과 관련해서는

“비록 정치적으로 예송이 당쟁의 발단이 됐지만,

그것은 예학을 정치에 이용한 사람들(집권자들)의 문제이며,

禮를 통해 ‘왕실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따졌다는 것은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합례적인 행위였다”고 강변했다.

윤 교수는

‘조선시대에 이룬 성리학의 심연에는 과거 어느 나라 성리학보다 깊은 차원의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이론들’이라고 말했다. 같은 내용이라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독자적 발상에 따라

다른 나라 성리학에서 보기 힘든 형식의 이론들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심성설’에 있어 그 독창성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 고려대 윤사순 교수 

한편 행사 후 사이언스타임즈 기자와 만난 윤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려는 노력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오늘날 현실 상황과 맞지 않는 ‘훈구적’ 연구라는 지적을 자주 들었고, (개인적으로) 당연한 지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아무리 고귀한 진리를 논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삶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면 ‘생활상의 문제해결’이라는 철학의 학문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과거 조선시대 상황에서 유학이 결코 현실과 격리된 것이 아니었다고 윤 교수는 반박했다.

“예를 들어 오륜(五倫)의 경우 단순한 윤리, 도덕적인 특성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시대 사회계층을 유지하려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까지 내포한 규범”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정치, 교육현장 등에서 지금의 한국 상황과 비교해

유학을 과거의 것으로 돌리려는 풍조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일부 정치가들이 순수한 효(孝)와 충(忠)의 정신을 왜곡한 채 통치수단으로 활용한 점,

한국 유학을 학생들에게 전하면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같은 오래된 그림을 걸어놓고,

현대 감각에 맞지 않는 교육과정을 고집하고 있는 현실 등을 개탄하고 있다며

한국 유학의 근본적이고 순수한 정신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일반 대중에 전할 수 있는 풍조가 하루빨리 조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강봉 편집위원,  aacc409@naver.com
- 2008년 11월 17일,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