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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이해

예인짱 2009. 1. 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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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학문의 주류에서 밀려나 있다.

어떤 사람은 종조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더구나 주자학은 이미 지나가 버린 그리고 잊혀져버린 과거의 세계관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구의 사고방식을 배우며 자라난 세대로서, 특히 과학적이란 말에는 거의 절대적 박수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적 세계관도 훗날에는 지나가 버린 세계관이 될 것이다. 주자학이 그랬듯이...

주자학도 조선조 500년 동안 부동의 학문적 중심에 자리잡았던 패러다임이었다.

분명 유학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을 일러 부유(腐儒)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학 자체를 무조건 폐기하는 것이 적절한 일일까?

그렇게 볼 때 우리는 과거를 통해 오늘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의 교훈과 새로운 안목을 얻을 수도 있다.

어제는 오늘을 비춰주는 거울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가지 염두에 두고 과거를 바라보고자 한다.

 

첫째는, 기존의 미시적 분리에서 벗어나 거시적 통합의 개념으로 성리학을 바라보고자 한다.

즉, 누구는 주기(主氣)고 누구는 주리(主理)니 또는 이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고 저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니 하며 분리할 수도 있지만, 불교와는 다른 학문이란 입장에서 크게 보면 또한 하나이므로 각각의 차이는 살펴보되 전체적 조망을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너무 분리하고 파당을 형성하여 마침내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이단시하는 사고의 경직성을 불러왔고, 새로운 학문적 시도를 위축시킨 점 등, 결과적으로 볼 때 내부적 힘의 소모와 낭비가 너무 커서, 외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율곡이 동서붕당을 없애고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자 그토록 애쓴 점을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둘째는, 과거를 단순히 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창조하고자 한다.

그랬던 사람으로는 여럿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율곡이 있고, 또 다산이 있다.
 율곡의 시대에는 불교와 노장이 있었고, 다산의 시대에는 서학이 있었는데, 두 분 모두 새로운 것을 접하여 알아보고 자기만의 세계로 새롭게 재창조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기존의 것은 절대시하고 숭배하면서도, 새로운 것은 알아보기는커녕 무조건 이단시하고 배척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은 율곡과 다산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판이 넓고 다양한 동서의 학문이 교류하며,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는 새로운 영감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구슬이 서말 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고 했다.

지금 세상에는 무수한 구슬들이 있다. 동양에서 나온 구슬, 서양에서 나온 구슬, 그리고 새로 태어난 구슬 등등...

그 구슬들을 서로 꿰어서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아름다운 보배를 만들어야겠다.

 

셋째는, 단순히 학문적 공리공론적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 실제적 이야기를 통해 일부만이 누리는 학문이 아니라 누구나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마당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힘에 부치는 매우 힘들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만 꼭 해내야만 하는 부분이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

실제로 성리학뿐만 아니라 학문은 거의 항상 특수한 일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것은 학문상의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괜히 어려운 말로 표현하여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치, 의도하여 그들만의 세계로 만든 데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례로 성경의 번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전이라고 하면 무조건 딱딱한 문체와 엄숙하고 권위적인 말씨로 일반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확한 뜻의 전달을 위한 표현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괜히 범접하지 못할 것인 냥 권위를 세우고 자기를 높이는 것은, 성현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율곡이 유학의 경전인 사서를 우리말로 번역, 해설하여 일반인들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외에도 우리말로 작품을 남긴 점은 본받아야 할 일이다.


성리학이란

 

성리학은 경학의 일종이다.
즉,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을 떠나서 따로 성리학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리학은 유학의 일종이므로 효제의 실천을 위시한 인륜적 실천이 핵심이다.
이기심성론이 아무리 복잡하게 전개되더라도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를 떠난 보다 근원적 세계로의 형이상학적 초월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성리학은 기존의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의 특징은 효제의 윤리를 위시한 인륜적 가치를 불변의 진리로 간주하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도덕적 당위에 대해 인간 세계의 범위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광대한 자연 세계의 지평 안에서  깊이 사유했다는 점이다.(불교와 도교의 영향)

이 시대의 유학이 신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차원을 넘어 자연적 지평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자연 도덕주의, 도덕 형이상학)

성리학은 논리적 사변이 아니다.

이기심성론은 순수하게 언어와 논리적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합리적 사변이 아니다.

따라서 이기심성 논의는 논리적 분석만으로는 진의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즉, 매우 논리적인 듯하지만 논리적 정합성이 결여된 곳이 많다.(논리적 정합성보다 유가 철학의 근본적 요청에 충실하려함 때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적 깨달음때문. 등등이 원인)

결국 이기심성론은 논리적인 논의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기도 하다.

성리학은 비체계적인 철학이다.

주자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과 어록 그리고 경서에 대한 주석을 남겨 놓았지만, 자신의 철학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주자는 독자적인 철학 체계의 수립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경전 주석가였다.
그러나 주자의 각 단편들 속에는 분명 일관된 정신이 흐르고 있다.


성리학의 인물들

 

기본 설계자들


렴계 주 돈이(周敦이, 1017-1073)

자는 무숙(茂叔)이며 세칭 염계(廉溪) 선생이라고 불렸다.

그는 30여 년간 관료 생활을 하였는데 항상 청빈하고 강직하여 중앙의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유교 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특히 {주역(周易)}과 {중용}에 뛰어난 관심으로 우주의 본체를 규명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완성하였다.

그는 또한 '성(誠)'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근거로 보아 강조하였다. 정치 학설에 있어서도 유교의 전통적인 덕치주의(德治主義)에 입각하여 어진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는 상현주의(尙賢主義)를 역설하였다.

그는 정명도, 정이천 선생을 제자로 길러 냈으며 훗날 송대 성리학의 새로운 장을 연 모태가 되었다.

그의 태극도설을 읽어보면 그의 철학은 기의 철학이고, 음양 오행의 발생원으로서 태극을 생각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사람과 만물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명도 정 호(程 顥, 1032-1085)

동생 정이(程이)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며, 그의 시호를 따라 정명도(程明道)라고도 불린다.

그는 한 때 관직에 있으면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노자와 불교의 사상에도 능통하였다.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여 유교에 심취하였고 주렴계 선생의 태극(太極) 개념 대신 건원(乾元) 개념을 사용하여 유교의 본체론을 심화시켰다.

그의 유교 이론은 왕수인(王守仁)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동생 정이와 함께 송대 성리학의 대표자로 손꼽힌다. 저서로는 {명도문집(明道文集)}과 {어록(語錄)}이 있다.

그는 철학적 사고로는 기를 기초로 하고, 그것을 생명력이라는 방면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즉 기를 단순히 만물의 소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생의(生意)를 더하여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의 근원으로서 건원(乾元)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염계의 태극에 해당하는 것인데, 다만 음양의 상위에 놓여진 것이기보다는 직접 만물을 낳게 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는 성을 기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성즉기, 기즉성. 다만 선악이 성에 혼재하는 것이 아니고, 성으로서는 항상 하나인 것인데, 중(中)과 과불급에 의해 선도 되고 악도 되는 것이다.


이천 정 이(程 이, 1033-1107)

정명도 선생의 아우로서 이천(伊川)지방을 한 때 다스렸기 때문에 정이천(程伊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형과 함께 주렴계 선생에게서 유교를 배웠으며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그의 유교 이론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여 '기' 중심의 사상에서 '이' 중심의 사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또한 성(性)에는 기품지성(氣稟之性)과 천연지성(天然之性)이 있다고 하여 훗날 주자가 본연지성(本然之性) 이론을 세우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형인 정명도와 개성이나 학풍이 다른 점이 많았다. 형이 덕(德)을 중시한 반면 이천은 주지적(主知的) 성격이 강했으며, 형의 학문 방법이 직관적 . 연역적이었던 반면 선생은 경험적 . 귀납적 . 분석적 성격이 강했다.

이천의 철학적 특색은 리의 설정이다.

리는 절대적 존재이고 사물에 있어서는 항상 법칙이 되고 규범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사 일물에도 반드시 내재한다.(절대리와 일사 일물의 리)

사물의 존재도 운동도 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의 심성설은 성즉리의 설이다. 그는 때로는 심즉리 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경우의 마음이란 성의 의미로 쓰여서, 정(情)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정자의 학문과 주희의 학문을 통칭하여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저서로는 {역전(易傳)}, {춘추전(春秋傳)}, {이천문집(伊川文集)} 등이 있다.


강절 소 옹(邵 雍, 1011-1077)

 시호가 강절(康節)인 까닭에 소강절(邵康節)로 잘 알려져 있다.

평생토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심취하였던 그는 특히 상수학(象數學)에 정통하였다.

그는 상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주역}을 연구하여 만물의 생성이 태극(太極)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수리 체계를 세웠다.

그의 상수학은 그 체계가 극히 정밀하면서도 포괄하고 있는 내용은 전 우주를 포괄하는 실로 광대한 것이었다. 이는 결국 중세기의 수학적 정신과 철학적 지혜를 결합한 것으로서 성리학의 체계화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등과 함께 북송 오자(北宋 五子)로 불리며 저서로는 {황극경세서(黃極經世書)}와 {관물외편(觀物外篇)} 등이 있다.


횡거 장 재(張 載, 1027-1077)

 자는 자후(子厚)이며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횡거진(橫渠鎭) 출신으로 고향의 지명을 딴 횡거 선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독학을 하였으며 이정자(二程子)를 만난 이후 유교에 심취하였다.

후에 관직에 몸을 담았으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강학과 유교 발전에 주력하였다.

그는 주돈이의 태극도설, 소옹의 선천설(先天說), 정이의 이기설(理氣說) 중 어는 것도 취하지 아니하고 독자적으로 '태허(太虛)'라는 개념으로 우주를 설명하였다.

이 태허 속에서 물체의 생멸이 이루어진다. 그는 그것을 기의 집산에 의해 설명한다.

즉, 기가 응집하여 물체가 생기고, 물체의 기가 흩어지므로 물체가 소멸한다.

그는 또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태허'의 응집으로 해석하여 '물아일체(物我一體 : 만물과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의미)'를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氣)' 중심의 학설은 주자에 의해 부분적으로 흡수되었을 뿐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명(明)나라 말 왕부지(王夫之)에 의하여 재조명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저서에는 {정몽(正蒙)}, {횡거역설(橫渠易說)} 등이 있다.

 

집대성자


회암 주희(朱 熹, 1130-1200)

자는 원회(元晦)이며 호는 회암(晦庵)이고 본관은 휘주(徽州)이다.

선생은 북송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 계승하는 한편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를 섭렵함으로써 송대의 유교를 집대성하였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28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약 20년 동안 유교 학문에만 정진하여 성리학을 완성시킴으로써 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이로 인해 맹자 이후 1,400여 년간 끊겨 왔던 유교의 도통을 성리학에 다시금 접목시킴으로써 침체되었던 유교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의 철학 체계인 '주자학(朱子學)'은 성리학의 진수를 종합한 것으로서 그 이론이 매우 정밀하고 또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의 유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그의 유교 이론이 조선 시대 전반을 통하여 정설로 인정되고 과거 시험의 학과로 채택됨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것은 그의 글들을 모아 놓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이 있다.

 

 

 

중국

장재 : 기에 대한 해석으로 현상세계를 설명. 구체적 개념

정호, 정이 : 이의 개념을 확립하여 우주의 이치를 설명. 추상적 개념

주자 : 둘을 모아 이기설을 완성.

 

우리나라

서경덕 : 장재의 영향으로  기개념 확립

이황 : 주자의 영향으로 이개념 확립

율곡 : 둘을 취하여 독창적 이기설 완성.

 

역사적 배경

 

유학은 공자에서 비롯되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맹자에게로 그 맥이 이어졌다.

이후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

유로 시련을 겪게되지만 한대(漢代)에 이르러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이후 중국 한족 문화의 기본 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하자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전개되고, 다시 위나라가 통일하면서 바로 서진시대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현실 도피적인 노장사상이 귀족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노장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불교는 쉽게 사회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위진 시대 이후로 세습 귀족화된 지식인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인간과 인간을 둘러 싼 자연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는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사회의 혼란이 극심하였으며 도교의 청담사상이 유행하고 불교가 융성하였다.

또한 유교적인 토양에 뿌리내리고 있지 못하던 북방의 여러 국가들은 중국사회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자 불교에 의해 국가적 통치이념의 확립과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과 아울러 사상적 혼란이 심화되는 시기에 중국사회에서 급격하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새로이 중국을 통일한 수(隋)는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선택하였고, 당唐)나라 대에는 승려를 관직에까지 등용, 불교는 국가종교로서의 색채를 강하게 띄게 된다.
수(隋)·당(唐)시대에는 경론(經論)을 위주로한 교종 종파가 확립되면서 국민들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에 입각한 불교의 성립을 보았으며, 이 시대는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경론을 위주로한 교종은 서서히 현실과 유리된 논리와 논쟁으로 일관하게 되었고, 또한 왕실과의 결탁으로 사회적 지위를 굳건하게 차지한 승려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자 교단은 더욱 관료화되고 권위주의화되었다.

한편 지배집단은 불교가 왕권에 완전히 복고되지 않은 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대한 위협과 지배이념으로서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이제는 도교와 함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고려시대에도 불교는 사회통합을 위해 권장되었지만, 지배이념은 유학이었다.)

이후 당이 쇠퇴하자 후양, 후당, 후진, 후한, 후주 5왕조가 10년 간격으로 번갈아 바뀌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게 되며 이 5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송이 다시 중국을 통일한다.

송(宋)은 초기에는 정치적인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고 새로운 통치이념이나 문화적 세력도 아직 확립되지 않고 있었다.

북송 후기에는 왕안석이 개혁을 시도하면서 생겨난 여러 당파의 치열한 갈등, 파벌 싸움의 결과로 정치적 비관주의가 팽배하였고, 지식인의 실질적 관심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철학적 관심의 초점도 역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으면 지식인으로 취급받지 못했지만, 후기에는 지식인들은 관직을 떠나 삶 자체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 때는 불교와 유학 사이의 대화가 일상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때의 지식인은 이미 인간의 본성, 도덕의 원천,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관한 물음을 접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내면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이처럼 그 이전과는 정치적 또는 학문적 사회체제가 달라져 있었던 만큼, 기존의 유학은 현실적으로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몇몇의 유학자들은 이전 유학(儒學)의 맹자, 중용 등이 인간의 본성과 도덕의 내면적 원천, 우주와 인간의 관계와 같은 중심 문제들을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유학의 체계를 새로이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이다.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그의 생존시에는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한 후 원,명대(元明代)에 이르러 비로소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는 등 크게 번성하였다.

명대에는 다시 양명학이 대두되고, 청대(淸代)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전하면서 성리학은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높았다.

 

사회적 배경

 

송나라는 건국 이후 전통적으로 한족에게 속해 있던 영토를 이민족에게 빼앗긴 채 지내왔다.
이민족의 북방 지배는 한족에 대한 정치적 위협임과 동시에 지식인들에겐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위협이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는 부패하고 부도덕하며 당파싸움이 치열하여 많은 지식인들이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한족의 문화적 전통이었던 유학은 이미 불교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었다.

특희 선가(禪家)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는데 그 가르침은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이것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심각한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 모두 이민족의 교의에 무릎을 꿇게 되면 한족의 유학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이민족의 득세와 정치적 혼란, 그리고 불교의 융성은 당시 사회의 심각한 정신적, 도덕적 침체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주자는 그러한 침체 상황 속에서 유학의 도를 부흥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즉, 유학의 학문을 바로 세우고 전달하는 일이 주자의 전 생애에 걸친 작업의 핵심이었다.

주자가 보기에 당시의 학문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당시의 유학자들의 학문은 과거의 위대한 성인의 학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주자에 따르면, 성인은 "도덕의 원리를 깨우쳐서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자신이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장하는 것"을 학문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는데, 당시의 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심오한 사상가로서의 명성, 문학가로서의 명성, 심지어 부귀와 같은 천박한 목표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주자는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말씀 가운데,

"공자가 말씀하시길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 공부했지만, 요즘의 학자는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해 공부한다 : 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논어 헌문 25장 )"

 에 영감을 받아서 두 가지 대조적인 학문, 즉 자기 자신의 도덕적 함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주자가 살던 12세기 중국의 지식인 사이에 유행했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한 학문'이었다.

그럼 당시 지식인 사회에 유행했던 흐름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지식인들은 '고원함'과 '독창성'을 통해 명성만을 추구하였고, 진정한 깨우침을 위한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주자는 그러한 추세가 경전을 읽는 데 끼치는 영향을 우려하였는데, 왜냐하면 추상적인 것과 고상한 것에만 매달리는 학생들은 "정도를 벗어나 이설에 빠지는" 더 큰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전을 토론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네 가지 병폐가 있다.
본디 저속한 것을 끌어 올려서 숭고하게 만들고,
본디 비천한 것을 끝까지 캐물어서 심오하게 만들고,
본디 비근한 것을 미루어서 고원하게 만들고,
본디 명확한 것을 굳이 희미하게 만든다.
이것이 오늘날 경서를 토론할 때의 커다란 근심이다.(주자어류, 학오 권11, 122조목)"

 

둘째로, 주자는 문사(文詞)만 너무 강조하는 당시의 추세 역시 해로운 것으로 보았다.

물론 주자 자신도 세련된 문체를 좋아하긴 했지만, 당시 사람들이 미사여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내용부분을 잃어버릴까 깊이 걱정하였다.
당시에 '진기한', '색다른', 그리고 '고상한' 이라는 말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야망이 있거나 적어도 좋은 작가로 불려지고 싶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기록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기록한 글이 경전의 진정한 의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주자는 어려서부터 학생들이 그러한 풍토에 익숙하여 그들의 도덕적 본성을 무시해 버리지 않을까 근심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대구가 되는 문장을 짓도록 가르치고, 조금 커서는 허망한 문장을 짓도록 가르치는데, 모두 그 본성의 바탕을 무너뜨립니다."(주자어류, 학일, 12조목)

즉, 글쓰기의 목적이 이전과 달라진 것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더 이상 도의 미묘함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문기술을 과시하거나 교양인 내지는 명문가의 혈족으로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극도의 문학적 심미주의에 대한 주자의 비판 가운데 상당부분은 동파
소식(蘇軾)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소식은 오로지 문체에만 관심을 기울였으며, 도덕적 원리에 대해서는 어쩌다 한 번 언급할 뿐이었다.

"도(道)는 문장의 뿌리이고, 문장(文章)은 도의 가지이다. 삼대의 성현의 문장은 모두 그러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문장이 곧 도(道)였다.

주자는 소동파가 능란한 기교로써 환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부추겨서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좋은 문장이란 이치의 완전한 깨우침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철저히 연구된 화려한 문체를 연습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려는 것이니,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주자어류 권139, 8책, 3319쪽)

 

셋째로, 참된 학문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은 역설적이지만 유학에 바탕을 두었던 과거제도였다.

왜냐하면 과거제도가 제공하는 입신양명의 미래는 학생들을 학문의 진정한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과거에 합격한 이후의 보상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특권과 공직, 권위와 권력 그리고 실질적인 부귀 등이 함께 주어졌다.
그래서 학생들은 과거공부에 쉽게 이끌렸고, '자신을 위한 학문'은 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요즘의 학문도 취직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주자는,

"배울 때는 반드시 자신을 위해 살펴야만 자기에게 절실하게 깨닫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은 단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한 목적일 뿐이다."  " 오늘날 학생들은 부귀와 지위를 탐할 뿐이지 도(道)와 정의(正義)는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주자어류 학5, 권11, 42조목)

라고 한탄하였다.

최근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과거시험 경쟁률은 엄청나게 높아서 성공확률이 1%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과거 급제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좇는 듯했다.

과거준비 때문에 학생들은 유가 경전의 진정한 의미에는 무관심했고, 오직 문체와 문장을 검열하는 채점관의 주의를 끌기 위해 경전에 대한 '기이하고 색다른' 해석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또한 성현이 경전 자체보다는 오히려 시험용 답안을 아예 통째로 외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한 과거공부는 주자가 말한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한 학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자는 과거제도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는 과거제도가 재능 있고 도덕적인 인물을 끌어오는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여겼다.

그는 당시 과거제도의 기준과 실행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과거제도의 정상적 기능을 위해 과거 응시자를 위한 이상적인 교과 과정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선비된 사람은 먼저 과거와 독서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 분별해야 한다. 독서에 70%의 힘읠 쏟고 과거에 30%의 힘을 쏟으면 괜찮지만, 과거에 70%의 힘을 쏟고 독서에 30%의 힘을 쏟는다면 장차 반드시 과거공부에 정복당할 것이다. 하물며 모든 의지를 오로지 과거에만 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주자어류 학7, 권13, 141조목)

주자는 참된 학문과 과거 준비가 서로 방해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영성의 교육화'보다는 '교육의 영성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들려고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을 제대로만 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있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제도를 잘 할 수 있으랴!)

"과거가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다."(주자어류 학7, 권13, 157조목)

주자가 보기에 학생들은 일단 과거 급제를 좇게 되면 대부분 거기에 사로잡혀서 참된 학문에의 의지 자체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주자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지방의 공립학교가 학생들의 과거에만 신경 쓰는 경향에 적어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미래의 관리 양성을 목표로 삼았던 지방 학교들은 대체로 학생들의 과거준비를 위해 고안된 교과 과정을 제공하였다.
지방학교들은 시험 준비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느끼고 있을 압박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래서 주자는 지방의 공립학교에서 행해지던 교육에 실망한 나머지 사설 서원에서의 교육에 많은 시간과 생각을 투자하였다.

 

넷째로, 주자는 당시의 학생들이 대부분 참된 학문에 몰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주자가 보기에 불교는 많은 학생들에게 학문은 실제로 훨씬 간단하며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는 지름길이 있다는 잘못된 사실을 믿도록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방법에서는 책을 읽거나 이치를 탐구하지 말라고 말한다. 불교는 학생들을 영원히 모호하고 신비한 것에 마음을 고정하게 만들고, 어느 날 우연히 갑작스런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주희집 답허생 권60, 3090쪽)

주자는 진정한 지혜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학문은 멀고도 험한 과정으로서, 올바른 정신을 갖고 적절한 순서를 밟아 나가야만 어느 순간에 우주의 이면에 놓여 있는 하나의 진정한 이치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는 제자들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했으며, 아무 노력도 없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라고 하였다.
그는 불교가 송대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허황된 기대감을 물리치려고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주자가 12세기의 학문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쇄 혁명이 당시의 학문에 끼진 숨겨진 악영향에 관한 것이다.

목판 인쇄술은 8세기에 발명되어 송대에는 전국에 인쇄 기술이 보급되었는데, 대량 인쇄는 책값을 훨씬 싸게 만들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책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주자는 이러한 인쇄 혁명의 결과를 반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근심을 표명하였다. 왜냐하면 책을 쉽게 접하게 되면서부터 학생들은 더 이상 책을 암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독서는 훨씬 나태해졌고 일관성을 결여하였다.(주자가 독서법의 중요성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책을 소홀히 읽는 이유는 인쇄된 책이 많기 때문이다. ... 대체로 옛 사람은 책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하게 외워야만 비로소 그 내용을 얻을 수 있었다. 강학하여 암송할 때도 역시 전부 외운 뒤에야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요즘 사람들은 베끼는 것조차도 번거롭다고 싫어하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도 소홀히 한다."(주자어류 학4 권10, 67조목)

한편으로 많은 책이 널리 유포되면서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쉽게 포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문화적 압박감이 너무 커졌기 때문인데 오늘날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성리학설(性理學說)

 

태극도설(太極圖說) : 우주론

주렴계(周濂溪) 선생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니, 태극(太極)이 움직여서 양(陽)을 낳고, 움직임이 지극하여서는 고요하나니, 고요하면 음(陰)을 낳는다.

고요함이 지극하여서는 다시 움직이나니,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된다.  음(陰)으로 나누고 양(陽)으로 나누어 양의(兩儀)가 성립되나니, 양(陽)이 변하고 음(陰)이 합하여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를 낳는데, 이 오행(五行)의 기질(氣質)이 차례로 분포되어 사시(四時)가 운행하니라.

이 오행(五行)이 생성함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하나니, 무형(無形)의 진리와 이기오행(二氣五行)의 정기(精氣)가 묘하게 합쳐 엉켜서 건도(乾道)는 남(男)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女)를 이루나니, 음양의 두 정기가 사귀어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므로 만물이 낳고 낳아서 변화가 끝이 없다.

오직 사람은 그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령명(靈明)하나니, 형체(形體)가 이미 탄생함에 정신이 지각(知覺)을 발휘하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성(五性)이 감동하여 선악(善惡)이 나뉘이며, 만사가 생기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그것을 중정인의(中正仁義)로서 규정하여 정(靜)에 주장해서 인극(人極)을 확립하였노라.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하늘 땅과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치며, 4시(四時)와 더불어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鬼神)과 더불어 그 길흉(吉凶)을 합치나니, 군자(君子)는 그것을 닦아 길(吉)하고, 소인(小人)은 그것을 어그려뜨려 흉(凶)하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의 도(道)를 규정하여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를 규정하여 강(剛)과 유(柔)라고 하며, 사람의 도(道)를 규정하여 인(仁)과 의(義)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본시(本始)를 규명하면 종말(終末)에 돌아가니 그런 까닭에 죽고 사는 이치(理致)를 안다고 하나니, 위대하도다.  주역(周易)이여!  이것이 그 지극함이로다.

 

서명(西銘) : 인생론

장횡거(張橫渠)  선생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다.  나의 이 조그마한 모습은 이에 혼연(混然)히 그 가운데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것은 나의 형체(形體)요, 하늘과 땅의 거느리는 이치(理致)는 나의 본성(本性)이다.  인류(人類)는 나의 형제(兄弟)요, 만물(萬物)은 나의 더부사리이다.

임금은 우리 어버이의 큰 아들이요, 그 대신(大臣)들은 큰 아들의 가신(家臣)들이다.  나이 많은 이를 존경하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원리요,  고아(孤兒)와 약자(弱者)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접하는 원리이다.  성인(聖人)은 그 덕(德)을 합일(合一)한 사람이요,  성인(賢人)은 그 빼어난 이 이다.  무릇 세상에 불구자(不具者)와 병자(病者), 고아(孤兒)와 무자자(無子者), 홀아비와 과부는 우리 형제(兄弟)의 쓰러져서 어려운 이들로 하소연 할 데가 없는 사람이다.

항상 인간성을 간직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경건함이요, 즐거워하면서 또한 근심하지 않는 것은 효도(孝道)에 순수한 사람이다.  그 어버이에게 친하는 천륜(天倫)을 어기는 것은 패덕(悖德)이요, 인덕(仁德)의 인간성(人間性)을 해치는 것은 도적(盜賊)이다. 흉악(凶惡)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재질(才質)이 없는 사람이요, 그 생긴 모양대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오직 본래와 똑같은 사람이다.  천도(天道)의 조화(造化)를 알면 어버이의 일을 잘 이룰 것이며, 인류(人類)의 정신(精神)을 살펴 깨달으면 어버이의 뜻을 잘 이을 것이다.

모퉁이 방의 은밀(隱密)한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면 욕(辱)됨이 없을 것이요,  양심을 간직하여 덕성을 기르면 게을러지지 아니할 것이다.  맛있는 술을 싫어 하였던 것은 우(禹)임금이 어버이 봉양(奉養)할 것을 돌아보심이요,  영재(英才)를 기르는 것은 영고숙(潁考叔)처럼 효심(孝心)을 남에게 까지 미치게 하려 함이다.  어버이 섬기는 수고로움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를 기쁨에 이르게 한 것은 순(舜)임금의 그 노력이요,  도피할 곳이 없어 아버지의 삶아죽임을 기다렸던 것은 신생(申生)의 공손(恭遜)함이다.

한 몸을 어버이에게서 받아 죽을 때까지 온전히 하여 돌아간 것은 증삼(曾參)이요, 따르는데 용감(勇敢)하여 맨발로 어버이의 명령(命令)에 순종한 것은 백기(伯奇)이다.  부귀(富貴)하고 복택(福澤)함은 장차 나의 인생(人生)을 두텁게 할 것이요, 빈천(貧賤)하고 우척(憂戚)함은 나를 옥(玉)처럼 아름답게 이룰 것이다.   내가 살아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어버이를 섬기고, 내가 죽어서는 마침내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편안할 것이다.

 

사물잠(四勿箴) : 교육론

정이천(程伊川) 선생

안연(顔淵)이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조목을 물은대,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예(禮)가 아니면 보지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하시니, 이 네가지는 몸의 작용이라, 속에서 말미암아 밖으로 응하나니, 바깥을 제어하는 것은 그 안을 기르는 방법이다.

안연이 이 말을 섬긴 것은 성인(聖人)으로 올라가는 까닭이다.  후세에 성인을 배우려는 사람은 마땅히 가슴속에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잠(箴)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노라.

그 보는 것을 경계하는 말에 이르기를 마음이란 본래 허명(虛明)하여, 사물에 응함이 자취가 없는지라.  붙잡아 간직하는데 요체가 있으니 보는 것이 그 준칙이 되나니라, 은폐물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면, 그 속마음이 곧 옮기나니, 그것을 바깥에서 제어하여 속을 편안케 하므로서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여 오래되면 참될지니라.

그 듣는 것을 경계하는 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떳떳함을 잡음이 있는 것은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나 지성이 유혹되어 물질로 변화되면 드디어 그 바른 것을 잃어버린다.  탁월한 저 선각자는 최선에 머무를 것을 알아 뜻을 정함이 있는지라.  사망(邪妄)함을 막아서 성실을 보존하여 예가 아니면 보지 아니하니라.

그 말을 경계하는 말에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이 움직임은 말을 통하여 드러나나니, 발언함에 저급하고 망령됨을 금지하여야 속이 고요하고 한결 같으니라.  하물며 이것(言語)은 선비의 중추 기틀이라 전쟁도 일으키며, 좋은 일도 나오나니, 길과 흉, 영화와 모욕이 오직 그 부르는 바이다.  하기쉬움에 다치면 속이고, 번잡에서 다치면 지리하며, 몸이 방사하면 사물이 거스리게 하고, 나가는 말이 어그러지면 오는 말도 어기나니, 법언(法言)이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야, 성현이 가르치는 말을 공경하라.

그 행동을 경계하는 말에 이르기를 철인(哲人)은 기미(幾微)를 알아 생각에서 성실하고, 지사(志士)는 행실을 힘쓴지라 일하는데서 지키나니, 이치에 순응하면 편안하고, 사욕을 좇으면 오직 위태하다.   순간에라도 잘 생각하야 두려워하고 조심해서 스스로 보존하여 간직하라.  습관이 성품과 더불어 완성되면, 성현과 같은데 돌아가리라.

 

소학제사(小學題辭) : 초등교육론

주자(朱子)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천도(天道)의 법칙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간본성의 강령(綱領)이니라,  무릇 이 천성은 그 처음에 선하지 아니함이 없어 가득히 사단(四端)의 감동을 따라서 나타나니라,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하는 이것을 일컬어 사람이 잡은 떳떳함이라 하나니, 순리로 대응함에 있는 것이요, 억지로 하는 것이 없느니라.

오직 성인(聖人)은 본성대로 하시는지라.  넓고 넓은 저 하늘과 같으시니, 티끌만치의 노력을 보태지 아니하여도 모든 선이 풍족하니라.  대중은 어리석어서 물욕(物慾)이 서로 가리어 이에 그 강령(仁義禮智)을 무너뜨리고 자포자기하는데서 편안히 여기니라.  오직 성인이 이것을 불쌍히 여겨 학교를 건립하고 사도(師道)를 세워 교육하여, 그 뿌리를 북돋우며 지엽(枝葉)을 통달되게 하시니라.

소학의 방법은 물뿌리고 쓸며 응대 잘하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공손하야 행동함에 어느 때나 거슬림이 없게 할지니 자기할 일 다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어서 생각에 혹시라도 넘어감이 없게 할지니라.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고 몸을 닦는 것은 사학(斯學)의 큰 일이다.  밝은 천명(天命)은 빛나고 뚜렷해서 안과 밖이 있지 않으니, 도덕이 숭고하고 사업이 광대하여야 이에 그 처음 본성을 회복하리니, 옛날에도 그 본성이 부족함은 아니었으니, 이제 어찌 남음이 있으리오.

세대가 멀어지고 성인(聖人)이 없어서 경전(經傳)이 쇄잔하여지고, 교육이 해이하여 어린이가 단정치 아니하고, 자라감에 더욱 불량하여 시골에 선속(善俗)이 없고, 세상에 인재가 말라 이욕(利欲)이 어즈러이 이끌며 이단(異端)의 말이 시끄럽게 공격하니라.  다행이 이에 사람이 잡은 떳떳함(本性)이 하늘을 다할 때까지 떨어짐이 없는지라.

이제 옛날 들은 것을 편집하여 거의 후생을 깨우치려 하노니 아! 어린이들아 경건하게 이 글을 받아 배워라. 나의 말이 노혼(老昏)하여서가 아니라, 오직 성인의 가르치신 것이로다.

 

정성서(定性書) : 심성수양론

정자(程子)

횡거(橫渠)선생이 명도(明道)선생에게 물어 말하기를 정성(定性)이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외물(外物)에 얽히는 것 같으니 어떠하오?

명도선생이 말하기를 이른바 정(定)이란 것은 동(動)하여도 또한 정하고 정(靜)하여도 또한 정하야, 보내고 맞이함이 없으며, 안과 밖이 없나니, 참으로 외물로서 밖을 삼아 자기를 이끌어 그것을 쫓는다면 이것은 자기의 성(性)으로서 안과 밖이 있게 함이고, 또한 성(性)으로서 밖에 사물을 따르게 되며 그것이 밖에 있을 때를 당하여 무엇이 안에 있게 되리오, 이것은 밖에서 유혹함을 끊어버릴려는 뜻이 있어서 성(性)의 안팎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미 안과 밖으로 근본을 둘로 나누면 또한 어찌 문득 정(定)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

대저 천지의 항상됨은 그 마음으로 만물을 두루하되 사심이 없고, 성인(聖人)의 항상됨은 그 정(情)으로 만사를 순응하되 사정(私情)이 없나니, 그런 까닭에 군자의 학문은 확트여 대공(大公)하고, 물(物)이 옴에 순응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나니, 주역함괘 구사효사(周易咸卦 九四爻辭)에서 말하기를 정정(貞靜)하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을 것이고, 마음이 동(動)하여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면 단지 벗만 너의 생각을 쫓으리라 하였는바, 참으로 밖에서의 유혹만을 제거하려고 꾀한다면, 장차 동쪽을 멸(滅)함과 동시에 서쪽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오직 날이 부족할 뿐 아니라 그 실마리가 끝이 없으니 능히 다 제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정(情)은 각각 가리운 바가 있는 까닭에 도(道)에 나아갈 수 없나니 대개 병통(病痛)은 스스로 사사로우며 지술(智術)을 쓰는데 있다.  자기의 사사로움으로 하면 의식이 있는 것으로서 사물을 응함에 자취가 없을 수 없고, 지술을 쓰면 밝은 지각으로 자연스러울 수 없나니, 이제 외물(外物)에 이끌리는 마음을 싫어하여 물(物)이 없는 경지를 관조할 것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거울을 뒤짚어서 비추기를 찾는 것이다.

주역 간괘 괘사(周易 艮卦 卦辭)에서 말하기를 그 등에 머무르면 머무를 데에 머물러서 그 몸을 보지 못하고 그 뜰에 다녀도 '다니면서 머무른 것'이라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고 하며 맹자(孟子)가 또한 말하기를 지술에 대하여 미워하는 바는 그 억지로 하는 것이라 하니 밖을 그르다하고 속만 옳다고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속과 밖을 모두 잊어버린만 같지 못하다.

안팎을 모두 잊어버리면 징연(澄然)하여 일이 없으리니 일이 없으면 정(定)하고 정하면 명(明)하나니 명한 즉 오히려 어찌 사물(事物)을 응함에 얽힘이 있으랴.  성인(聖人)의 기쁨은 물(物)로서 마땅히 기뻐하고 성인(聖人)의 성냄은 물(物)로서 마땅히 성내나니, 이것은 성인의 희노(喜怒)가 마음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물(物)에 매여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성인이 어찌 물(物)에 응함이 없으랴.  어찌 능히 밖을 쫓는 것을 그르다하고 다시 안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으로 옳다하리오.

이제 자기의 사사로우며 지술(智術)을 쓰는 희노(喜怒)로서 성인(聖人)의 희노의 바름을 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대저 사람의 정(情)은 폭발하기는 쉽고 절제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오직 성냄이 더욱 심하니 바야흐로 성이 날 때에 문득 그 성냄을 잊어버리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살피면 또한 밖의 유혹이 족히 악한 것만도 아님을 깨달으리니, 도에 생각이 나감이 반이나 되리로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理氣論)이 나온 이유


왜 고전적 유학에서 이기론(理氣論)이란 새로운 개념의 정립이 필요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자가 살던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보아야할 것이다.

송대에 와서 공맹의 유학을 재해석한 신유학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주자는 이 신유학을 집대성하여 유학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시대사조 상 단지 옛 것만을 외칠 순 없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미 도교와 불교의 우주론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에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주자는 이러한 사회조건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저, 주자는 유학의 부흥을 위해 당시 지배적 사상인 도교와 불교사상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우주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유학은 사람들에게 단지 수양(修養)과 위정(爲政)을 위한 학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자는 당시 어지러운 사회상을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유교적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전인 남북조 시대의 도가의 청담사상이나 수당시대의 불교의 전파는 그 참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평등관과 방종을 일삼게 만들었다.

이것을 지켜본 주자는 문란한 당시 사회의 도덕적 폐단을 바로 잡고자 했으며, 이렇게 해서 나온 개념이 이(理)인 것이다.
결국 이(理) 개념은 유교의 입장에서 도교와 불교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필요성과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상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해결을 위해 도입된 셈이다.

아무튼 이렇게 탄생한 성리학의 이와 기는 그 말은 비록 이전에도 있었지만 의미는 새롭게 부여되었던 것이었다.

 

이와 기의 본래 의미


우선 이(理)가 쓰이는 말에는 이념(理念), 이상(理想), 이성(理性), 이치(理致), 이해(理解), 이발(理髮), 심리(心理), 비리(非理) 등이 있다.

유교에서 이(理)는 본래 玉(구슬 옥)과 里(마을 리)가 합쳐진 형성문자로써 옥석의 맥리(脈理)를 말하였다.
옥을 다듬고 다스리는(가공하는) 사람은 그 맥리를 살펴보았는데 그 뜻에서 이(理)가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다산학 제요 참조)
그래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理)에는 형이상학적 개념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기(氣)가 쓰이는 말에는 기운(氣運), 기분(氣分), 기상(氣像), 기절(氣絶), 기후(氣候), 감기(感氣), 용기(勇氣), 인기(人氣), 향기(香氣) 등이 있다.

기(氣)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생명활동을 영위해나가는 에너지를 뜻한다.('물질=에너지'의 에너지와 비슷한데 살아있는 에너지이다)

따라서 기란 스스로 생성, 변화, 소멸의 힘과 질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외부의 개입이 없이도 생명활동을 영위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기에는 우리가 흔히 하느님이라 칭하는 우주의 주재자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기(氣)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자연(自然)이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으로 오늘날처럼 단순히 네이처(NATURE:천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또 기의 세계관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바위나 그밖에 모든 것들이 같은 재질로 이루어졌으므로 똑같다고 보기 때문에 선악(善惡)이나 미추(美醜) 등의 가치기준이 애매해진다.

 

이와 기에 새로운 의미부여


성리학의 이(理)의 개념은 불교 화엄(華嚴)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불교 화엄(華嚴)사상에는 4법계관(四法界觀)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 내용은 현상계를 의미하는 사(事)와 본체계를 의미하는 이(理)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교의 입장에서는 도교와 불교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우주관이 필요했던 바, 4법계관의 이(理)를 유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화엄사상에서의 이(理)와 성리학에서의 이(理)는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 즉, 화엄사상에서의 이(理)는 공(空) · 무(無)인데 반해, 성리학에서의 이(理)는 우주의 보편적 척도를 의미한다.

본래 기(氣)는 스스로 조화롭게 생명활동을 영위해나가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유가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그 자체로 조화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氣)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기(氣)는 맑고 흐리고, 열리고 막힌 편차가 있어서 순수하지 못하므로 조절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를 통제하기 위해 대두된 개념이 이(理)인 것입니다.
즉, 인간의 신체와 정신활동은 일정한 표준과 이념에 의해 제재, 간섭, 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한형조 님의 '왜 동양철학인가' 참조)

결국 스스로 조화롭고 평등한 기는 부조화와 불평등의 기로 그 의미가 바뀌었고, 이는 단순한 다스림의 의미에서 우주의 척도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바뀌었다.


이(理)에 대하여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의 개념은 무엇인가?

이(理)란 이치(理致), 즉 사물의 정당한 도리로써 '마땅히 해야할 바' 라는 의미가 있다.
주자는 이러한 이(理)의 개념을 통해 사회 속에서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많은 경우에 이(理)를 단순히 형이상학적 우주의 근원이라고만 하여 추상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理)에는 '당연히 해야 할 바' 라는 절대의 가치로서의 잣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의 통치질서인 법은 알면서도 통치자의 마음은 알지 못하여 법을 지키면서도 그 법을 왜 지켜야하는지는 모르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법을 어겨도 벌금만 내면 된다는 식이 될 수 있다.
법이 곧 통치자의 마음의 표현이고 그 마음이 곧 법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여기에 이기(理氣)론의 어려움이 있다.(신성한 이분법)

 

첫째 이(理)는 우주의 보편적 절대적 잣대이다.

이기론이 말하는 대상은 외형적 사물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잣대이다.
즉, 자연이란 인간이 본받아야할 모범으로써 최고의 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자는 이(理)에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을 통해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에 이르러야 한다.' 고 했다.

여기서 소당연지칙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준칙, 즉 잣대를 가리키며, 소이연지고는 그렇게 된 까닭, 즉 준칙의 존재근거를 가리킨다.
전자가 잣대의 현실적 가치론적 측면(용:用)이라면, 후자는 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측면(체:體)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둘은 이원화되지 않는다.

 

둘째, 이(理)는 존재가 지닌 뜻(의지와 의미)이다.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는 없고, 존재 없는 의미는 무의미하다.

모든 존재에는 뜻이 있으며,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천지의 운행과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뭇 생명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생명과 자연은 하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은 형이상학과 신학을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주자는 형이상학적 근원인 이(理)가 신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적 필요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주자는 시경, 서경에 나오는 상제로서의 인격신적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공자께서도 '귀신은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말라' 하셨듯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격신적 존재의 우주적 역사(役事)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理)가 무위(無爲)냐 유위(有爲)냐를 놓고 일어난 논란이다.

조선 유학은 이처럼 이(理)의 개념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려 함으로써 논란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가 이(理)의 유위(有爲)을 확신하였지만, 율곡은 이(理)의 무위(無爲)를 철학적 사유의 출발로 보았다.
즉, 퇴계는 신의 직접적인 역사(役事)를 믿었고, 율곡은 신이 직접 역사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아무튼 이기(理氣)의 관계와 선후를 논의하고,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을 따지는 조선시대의 유학은 한가한 공리공론이 아니라 우주의 의미와 삶의 지표를 찾기 위한 진지한 성찰(省察)과 구도(求道)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理)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임에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리, 사리의 이는 본체로서의 이와는 구별해서 해석해야 한다.

 

기(氣)에 대하여

 

기(氣)는 자연주의적 개념

기(氣)는 합리적 과학적이기보다 신화적 형이상학적 사유의 산물이다.

장자(莊子)』를 펼치면 다양한 생명의 신비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한대(漢代)의 일상적 인식의 집대성인 『회남자(淮南子)』는 생명의 끊임없는 변이(mutation)에 대한 지루하리만치 풍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생명의 유전과 변이에 대한 경이가 기(氣)의 사유를 물들이고 있다.

요즘도 기(氣)를 말하는 사람들은 무슨 신비적 생명력을 비의적으로 발양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생명의 에너지는 활동적이고 신비 그 자체이다. 양화와 분석, 한정적 가설과 실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근대과학은 그 빛나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의 소화과정의 수수께끼조차 속시원히 풀지 못하고 있다.

위장의 소화과정을 대체하기 위한 플랜트를 세운다면 경기도만한 크기의 정교한 공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결국 생명의 신비는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유전자 조작조차 생명 자체의 자발적 유기적인 생성력을 운용할 뿐, 창조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유기체의 신비가 수학이나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신비는 신비로 놓아두는 것이 더 정직하고 덜 위험할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과학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 자연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이 더욱 절실할 때가 아닌가.

기(氣)는 창조자나 조정자 없이 자체의 운동의 자연성에 의해 일정한 조직과 구성을 갖추어 나가는 추진력이다.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이 원리는 같다. 기(氣)의 사유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그 생명의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비활성조차 활성의 잠재적 형태로 인지한다.

그런 점에서 기(氣)를 matter(물질)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물질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정지에서 바라보는 인식의 산물이다. 그것은 기(氣)에 담겨 있는 자발적 변화와 변이를 포괄하지 못한다.

기(氣)의 사유는 세계를 정지가 아니라 활동에서,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서 파악한다. 계절의 순환에서, 생리의 흐름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 역(易)이 동아시아의 유구한 인식론적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氣)의 동적인 세계 모형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주제인 창조의 수수께끼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보이는 세계의 충만한 생명력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경외했다. 그들에게서 절대자는 바로 자연(自然)이었다.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은 기(氣)의 세계를 기술(記述)하는 양식이지 설명(說明)하는 양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근대 과학의 발흥에 필수적이던 실험과 가설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교육론

 

주자의 교육론은 실질적인 것으로 이론적인 이기론 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자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기론, 심성론 등을 먼저 생각하지만 실제로 주자는 이기론보다도 오히려 사회교육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가 만년에 죽기 직전까지도 대학의 글귀를 다듬고 있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까?' 에 그 만큼 고심하였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이 도를 깨달을 수 있는 보다 확실한 길잡이로서의 분명하고 상세한 교과 과정을 확립하는 것이 그의 철학적 목표의 중요한 부분이자 인생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주자가 신유학에 끼친 가장 커다란 공로는 이치를 공부하는 범위를 한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학생들이 가능하면 쉽게 이치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공부하는 데 보다 나은 길잡이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주자는 그의 교과 과정이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일종의 교양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공헌은 정이천의 추상적이고 산만한 이치와 본성에 관한 논의를 경전의 전통에 철저히 근거지워서 북송 때의 경전에 관한 공부와 도덕성에 관한 공부를 사실상 하나로 통합한 점이다.

주자는 경전이야말로 공부해야 할 대상이며,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주자가 교과 과정과 경전 해석법을 발전시키는데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가 경전에 해석을 달고 그것을 바로 잡는 데 인생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주자에 의해 오경시대에서 사서시대로 유학 전통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유학의 경전을 사서삼경으로 알 게 연유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주자는 교육을 통해 도학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교육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해답을 제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주자는 당시의 교육 현실에는 실망했지만, 교육을 통해 도를 회복하고 풍습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주자의 주된 관심은 철학에 흥미를 가진 소수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었지만, 다른 사회 구성원의 교육 또한 무시한 적이 없었다.(공교육의 실패로 사적인 엘리트 교육을 하게 됨)

 

주자의 교육은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요구와 관심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변하였다(맞춤형 교육의 실시)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인 <주자가례> 는 학자와 일반인이 가례(家禮)를 행할 때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책은 모든 백성이 읽을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

마찬가지로 주자의 <향약> 또한 집단 속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행동 방식을 알려주는 일종의 안내서였다.
중국의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각각의 개인에게 내적인 교화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지위에 알맞은 예법에 따라 행동하여 자신의 도덕성을 함양하는 일이었다.(단지 신분위계질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는 예절이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말에서 내려 인사함)

 

주자의 교육을 위한 노력은 교실 밖에서도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실질에 힘씀)

그는 도서관을 만들었으며, 뛰어난 인물을 기리기 위한 사당과 기념비를 세웠다.
주자는 사당을 통해 생전에 모범적인 도덕적 자질을 보였던 훌륭한 인물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러한 자질이 후대에까지 전수되도록 했다.

또한 주자는 관리로서의 지위를 활용하여 100개가 넘는 포고문(榜文)을 붙였는데, 그의 관할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교육받은 사람과 무식한 사람을 불문하고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주자의 의도는 포고문을 이용하여 보통 사람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폭넓게 교육하는 데 있었다.

주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제대로 교육을 베풀기 위해 지방의 국립 학교를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주자는 자기 관할에 있던 지방 학교의 개선을 통해 그곳이 진정한 유학 연구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과거시험에만 몰두하는 학생들이 거기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주자는 관할 지역의 학교에 4-5일 마다 찾아가서 그곳의 학생들과 활발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자는 지방 학교에서 행해지던 교육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이었다.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재건한 것은 관학(官學)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당시에 불교와 도교의 사원은 한 지역에 100개가 넘었지만, 유학을 교육하는 관학은 통틀어 겨우 3개에 불과했다.
특히 불교 사원의 압도적 우세는 유학의 가르침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주자는 서원의 건립이 불교의 막강한 영향력을 막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주자는 서원을 통해 학생들이 과거준비에서 벗어나 사심 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주자가 학생들에게 경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주자는 전 생애를 글을 쓰고 수집하며 편집하는 데 바쳤다.
그 목적은 언제나 같았는데, 도를 밝혀서 다른 사람들이 유학의 가르침에 접근하기 쉽도록 만들어서 그것을 보존하고 후세까지 전하려는 것이었다.

주자에게 학문이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려는 평생에 걸친 학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주자는 이전 시대에 설정된 영역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학의 전통을 확립했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배울 기회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 곧 성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