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난 기독교를 믿는다.
기독교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복음을 들은 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기쁨에 겨워 일생을 기쁨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난 기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어릴 때부터 난 슬픔의 유전자를 키웠다.
슬픔을 좋아하고, 슬픔의 노래를 좋아하고,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난 슬픔의 기초위에서 지냈다.
애통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 되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
우는 자는 웃을 것이요,
그 슬픔의 추억이 나를 우울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살게 하고,
남을 비판하고, 자신을 학대하면서 사는 나의 뿌리가 되어 버렸다.
그 뿌리는 내 삶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나를 괴롭히고, 나를 비관하게 하는 나쁜 조직으로 내 속에 자라가고 있었다.
난 행복도, 축복도, 낭만도, 기쁨도 모르는 그냥 주어진 주제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무감정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b.
그러던 내게 큰 변화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무너지고, 내 존재가 무너지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그 후로 나는 누구인지?
예수님은 누구신지?
예수님 앞에 있는 나는 누구인지?
이런 생각들로 혼선의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내 존재도 없고, 내 삶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는 내 존재 자체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 주셨고,
예수는 내 존재의 모든 값,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것 보다도 더 귀한 것을 다 포용하시고, 나의 부족보다도 더 많은 부족을 다 포용하시는, 하늘 보다 높은 분이요, 바다보다 깊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내 존재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런 내 존재의 값은 영원히 다 이룸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존재하는 나의 존재의 값이라는 무엇인가?
어떤 doing도 존재의 값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럼 존재의 가장 소중한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 가치가 바로 내면의 가치임을 알게 하셨다.
평온.
기쁨.
사랑.
무엇보다도 이런 주제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 내게 일어난 질병,
MRI를 찍어도 알 수 없었던, 그래서 얼굴의 신경을 짜를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게 들려준 음성,
평온하라.
라는 음성은 나의 존재의 가치를 바꾸어주는 절대적인 음성이었다.
c.
그 후 난 바꾸기 시작했다.
평온을 막는 것을 사탄이라고 생각하며 그것과 싸워 나갔다.
그리고 그 싸움의 대상이 바로 나임을 알게 되었다.
내 생각,
내 기준에 근거해서 살아갈때 수 많은 정서적 혼란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하셨다.
평온 훈련이 끝난 후(약1-2년)
하나님은 내게 또 다른 주제를 주셨다.
기쁨 훈련이었다.
그 때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계셨다.
아들은 집을 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배신감과 불안감에 허덕이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순종해야 하는 과제가 부여된 것이다.
이 주제는 내겐 너무도 무겁고 힘든 주제였다.
기쁘기는 커녕 오히려 기쁨을 생각하면 슬픔과 분노가 치미는 그런 악순환을 반복했다.
지금도 밤길을 걸으며 혼자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기쁨을 갖지 않으면 슬픔과 분노를 갖게 될테고,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기쁨훈련,
그 훈련을 하며 깨달았다.
기쁨은 내가 만들 수 없는 주제요,
내 기준을 담을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의 인도로만,
성령의 이끌림 속에서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난 그렇게 기쁨을 추구했다.
그러나 기쁨의 내면과 기쁨의 언어, 기쁨의 마음은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다.
내면적 기쁨은 분명하지만,
쉽게 화내고, 쉽게 삐지고, 쉽게 좌절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전에는 그것이 전부였다면 이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조가 좀더 발달되어 있는 흐름이었다.
지금 난 내 존재의 절대가치를 심어나간다.
섬김.
섬김의 가치이다.
섬김이라는 주제는 내가 숨을 쉬듯이, 내가 살아있듯이 내 속에 자리하는 절대주제이다.
이 주제안에서 기쁨의 훈련의 주제는 많은 정서적 전환이 있다.
섬김이라는 쪽에서 보는 기쁨의 주제는 그 폭과 내용의 깊이가 훨씬 더 깊고 진지하다.
더 많은 자기 희생과
더 많은 자기 감정의 억제를 배우고 있다.
더 많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을 절대적으로 섬긴다는 기준이 더 크게 자라가게 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섬김도 기쁨도 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쁨의 원칙
무조건적인 섬김.
그 섬김을 이루기 위해서는,
1. 열등감 버리기
내가 부족하다고,
내가 무시당한다고,
내가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기쁨은 날라간다.
섬김도 날라간다.
오히려 뒤집어 엎는다.
열등감을 버려야 한다.
있는 것을 봐야 한다.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2. 기대치 버리기
섯부른 기대치가 사람을 죽인다.
나를 죽이고 상대를 죽인다.
무언가를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이것만큼은 해주지 않겠나 하는 최소한의 기대치를 가질 지라도,
그 기대치의 끝은 처참한 배신감으로 나를 괴롭힌다.
기대치가 나를 죽인다.
기대치가 상대를 죽인다.
기대치가 섬김을 막고, 기쁨을 막는다.
하찮은 존재로,
끝자락에 앉는 존재로,
침 뱉음을 당한 예수님처럼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3. 섬김의 원칙 고수하기
어떤 경우에도 섬기리라는 원칙을 갖는 것이다.
섬기면 하나님이 이긴다.
섬기지 못하면 사탄이 이긴다.
어떤 경우에도 섬김의 원칙에 근거하여,
섬기려는 마음을 가질 때,
이해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참게 되고,
참게 된다.
섬김의 시작과 끝은 참음이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오래 참고 참고 참고 참을 때, 그것이 섬김이다.
이런 섬김의 삶을 살길 소망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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