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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 열두 기초석(보석-계시록 21장)

예인짱 2012. 10. 31. 05:09

 

새 예루살렘 열두 기초석(보석-계시록 21장) 

 

1. 영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벽옥'

 

첫 번째 기초석은 '벽옥'입니다. 천국 새예루살렘 성벽의 재료도 벽옥이라 했는데, 성벽의 재료로서 벽옥이 상징하는 믿음은 '믿음의 5단계,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기초석으로써 벽옥이 상징하는 믿음은 '영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중심에서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 번 믿은 것을 변함없이 믿고, 하나님 말씀을 변함없이 믿기에 항상 순종의 행함이 따릅니다. 반대로, 육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이론과 지식에 맞는 것만 믿습니다. 육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엔 믿는다 했으나 응답이 오지 않으면 계속 그것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한두 번 하다가 그만두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말씀을 변함없이 믿고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축복의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그러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급기야 자신과 아내 사라도 나이 많아(경수가 끊어져)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고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견고해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롬 4:19-20).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은 아브라함은 결국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보석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찬란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한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합니다. 독자 이삭을 통해 무수한 후손을 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 12절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어 그 믿음의 열매는 육으로도 풍성히 맺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기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영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자기 생각에 맞지 않아도, 그대로 행하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것 같아도 온전히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이처럼 참 믿음을 내보이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자녀들이 믿고 의지한 하나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양의 고기를 잡게 해 주셨고,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성전세로 낼 동전을 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믿음은, 사람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도 얼마든지 가능케 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이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 중 첫 번째를 차지한 것입니다.

 

 

 

2. 곧음과 절개를 의미하는 "남보석"

두 번째 기초석은 "남보석"입니다. 남보석은 일명 사파이어라고 불리는 투명한 남색의 보석입니다. 남보석에 담긴 영의 마음은 "곧음과 절개"입니다.바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한번 뜻을 정했으면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진실 자체의 마음입니다.

남보석과 같은 진실의 빛이 마음에서부터 곧게 뻗어 나온 대표적인 인물은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하나님 뜻에 어긋날 때에는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았지만 한 번 정한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니엘의 믿음과 절개를 매우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심으로 다니엘이 조금도 상하지 않게 지켜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어떻게 믿음의 절개를 지켰는지 나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붙잡혔습니다.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실 분이시기에 그들은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우상에게도 절하지 말라" 율법에 명시하셨으니,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곧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질 상황에서도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살기등등한 왕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다니엘 3:17-18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의는 저버릴 수 없다는 이들의 마음에서 초연하면서도 곧고, 짙푸른 남보석의 빛깔처럼 숭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을 걸고 의를 지킨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풀무불에 던져진 이들이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을 정도로 지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왕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더욱 높임 받게 되었습니다.

 

 

 

 

 

 

3. 결백과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옥수"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세 번째 기초석은 "옥수"입니다. "옥수"는 회색, 청색, 적색을 띠는 것 등도 있지만, 보통 "반투명한 백색"을 띠고 있습니다. 옥수가 상징하는 영적인 마음은 "결백"과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결백(潔白)"하다는 것은 행동이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아무런 허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허물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 이것이 바로 옥수에 담긴 영의 마음입니다. 물론 썩어 없어질 육의 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란, 내 것을 다 내어주되 돌아올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직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줄 때 미련을 갖지 않으며 아낌없이 다 내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면서 나중에 이만큼 돌려받으리라 계산하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자녀가 훌륭하게 성장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도 자녀가 성인이 되면 대부분 무언가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기대치만큼 자녀들이 해 주지 않을 때에는 서운해하기도 하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게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노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바라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여 희생한 듯 했지만, 변질되는 육의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 육의 사랑은 상대를 위해 희생한 만큼 자신도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받지 못하면 섭섭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가 야속해 지고 미워져서 점점 상처받고 아파하다가 결국은 허무함만 남습니다.

이처럼 희생이 결여된 육의 사랑은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기도 합니다. 정말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면, 진리 안에서 내 것을 다 내주더라도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주는 것은 이미 희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 허물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룻입니다. 룻은 모압 지방에 살았던 여인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지만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에서 이주해 온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결혼한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며느리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친정인 모압 지방에 남을 것을 권합니다. 한 며느리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결국에는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이고, 시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전적으로 룻이 섬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잘 섬기면 받을 수 있는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부모라 해도, 아무 대가없이 계속 자신을 희생하는 자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룻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과 같은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이러한 룻의 희생적 사랑은 단지 인간의 도리를 좇은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 안에서 나온 영적 사랑을 한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이스라엘에 도착한 후에도 참으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열심히 들에 나가 일하고 얻어온 양식으로 정성껏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룻의 진심어린 선행은 자연히 그곳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친족 중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를 통해 많은 복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낮추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희생하거나 자신을 낮추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 허물없는 깨끗한 마음, 즉 어떤 사심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러납니다. 그 마음 안의 선과 사랑이 영적인 빛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희생적인 사랑의 빛을 셋째 기초석인 "옥수"의 빛깔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4. 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을 의미하는 "녹보석"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네 번째 기초석은 '녹보석'입니다. 녹보석은 '에메랄드'라고 불리는 초록빛 보석입니다. 녹보석이 상징하는 영적인 마음은 '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5장 9절에 나오는 '빛의 열매'의 빛깔과 같습니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어우러진 빛깔이 바로 녹보석의 영적인 빛깔과 같다는 뜻입니다. 선(善)과 의(義)와 진실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의가 성립됩니다. 선만 있고 의가 결여되어서도 안 되고, 의만 있고 선이 결여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과 의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은 참이며, 참은 변함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과 의가 있어도 진실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선과 의와 진실함이 함께 어우러진 참된 의의 빛을 낸 성경상의 인물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 왕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적장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이 일을 통해 다윗이 백성의 사랑을 받자, 이를 시기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하게 사울을 대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피해 오랜 시간 도망 다녔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함께한 장수들이 사울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이 만류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6절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해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사울을 임의로 해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월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의로움은 선(善)과 함께 나왔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지켜 줬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과 행실로 갚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선과 의는 참이었고 진실 자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윗은 똑같이 선을 행했습니다. 사울이 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또 다시 그를 살려 준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과 의를 변함없이 나타내 보였습니다. 만약 다윗이 처음에 사울을 죽였다면 고생도 덜 하고 더 빨리 왕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육으로는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으면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차원도 달라집니다. 다윗이 직접 사울을 해하지 않았어도 사울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보장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강성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날에까지도 이스라엘 역대 최고의 왕으로 꼽힙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녹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다윗의 정의롭고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롭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인물입니다. 에스더는 유다인으로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바사 제국의 신하 하만의 계교로 유다 민족이 멸절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에스더는 자신에게 화(禍)가 미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 혼자만 살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살아도 자기 민족과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왕에게 담대히 나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대 반전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유다 민족을 멸절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고,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한 원수 하만 족속과 적들을 멸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끝까지 의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께서도 절대 저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로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면, 어떤 큰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순간을 넘기지 못하여 큰 축복과 응답의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순간이 되면 마음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의를 지키려던 마음이 약해져 타협하거나, 심지어 불의한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악인의 꾀를 좇아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겨울철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도 홀로 푸르른 빛을 발합니다. 이처럼, 술수와 거짓이 난무한 이 세상에서 녹보석 같이 푸른 정의의 빛을 내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5. 충성을 의미하는 "홍마노"

'홍마노'는 보통 '붉은 줄무늬 마노'로 불리는데, 이것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충성'입니다.
만일 어떤 분야에서 자신이 맡은 것만 딱 해놓고 손을 뗀다면, 이것은 충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급여를 받는 일꾼이 자기 업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바를 한 것일 뿐입니다. 자신의 업무는 물론 시키지 않은 일까지도 마음을 쏟아 성실하게 이뤄 낼 때, 비로소 충성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가장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일 뿐, 충성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아내로서, 또는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을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성이 그가 속한 모든 곳에서 이뤄질 때, 온 집에 충성한다고 인정하십니다.

이러한 영적인 충성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로운 마음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는 마음,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기를 원하는 마음, 직장이 번창하기를 원하는 마음, 가족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 등과 같이,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도 잘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의로운 마음과 함께 나를 희생하는 마음이 있을 때라야 충성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하든 말든 나만 잘 믿으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교회를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충성을 찾아볼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도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반면, '이처럼 복된 소식을 나만 알고 믿을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발전하도록 해야겠다' 하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는 사람은 영혼 구원과 교회를 위해 충성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명이 없어도 열심히 전도하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지런히 심방합니다. 열심히 영혼들을 돌아보며 사랑과 정성을 다하고, 자신에게 써야 할 물질까지 영혼들을 위해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의로운 마음 위에 희생하는 마음이 더해질 때 충성이 나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그 이상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러한 충성이 온 집에 충성이 되기 위해서는 선(善)한 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 군데만 치우치지 않습니다. 마음에 선이 임하면 예전에는 몰랐거나 소홀했던 분야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서너 가지 사명을 맡으면, 각각의 사명에 따라 나름대로 경중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일반 회원으로 몸담고 있는 모임이나 사명보다, 자신이 머리인 모임이나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 사명을 맡았더라도 그 모든 분야에 충성합니다. '나는 A모임의 머리니까 B모임에 못 가도 이해해 주겠지' 생각하면서, 자신이 B모임에 못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B모임의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느냐, 안 해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B모임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속의 선을 통해 느끼면서, 설령 B모임에 가지 못한다 해도 B모임의 일원으로서 충분한 도리를 하려고 노력하며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에 쌓인 선의 분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에 선함이 적으면 자신이 소홀한 분야가 마음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선한 사람은 마음에 걸리는 일은 그냥 무시하거나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인 줄 알면서 행하지 않고 있으면 스스로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이 악을 발할 때 시원한 것처럼,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해야만 시원하고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자연히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도 자신이 마땅히 할 바를 하지 않으면 금방 마음에 걸림이 생기므로 이유를 대거나 핑계거리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직책을 맡은 여장년 성도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위한 시간은 줄어들게 됩니다. 선한 마음으로 온 집에 충성하는 분이라면, 이럴 때에도 가족에게 베푸는 사랑은 줄어들지 않게 합니다. 비록 가족을 위해 보내는 시간은 줄었다 해도, 아내로서,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소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일로 얼마나 바쁜지 알죠? 그러니 잘 못해도 이해해 주세요." 하면서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줄어든 만큼 더 진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섬기고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내가 더 마음을 쓰자' 생각하며 항상 최선을 다해 정성껏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러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점점 그 마음의 진실한 향을 맡게 되고, 선과 사랑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이해하고 도와주려 하게 되면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마음으로 온 집에 충성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해 민수기 12장 7절에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 노릇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애굽의 백성을 죽이고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돌아갔다가 붙잡히면 어떤 형벌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다가 갑자기 이렇게 큰 사명을 맡을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맡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충성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만 60만 명으로서, 어린이와 노인, 여자까지 합하면 200만 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 많은 백성들은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툭하면 모세에게 불평했고, 때론 대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끝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한 번은, 백성들이 큰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의 자손으로 큰 나라를 이루겠다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어도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1-32절에 기록된 대로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충성의 마음을 '홍마노'라는 보석의 빛깔로 나타내셨습니다.

 

 

 

6. 열심을 의미하는 "홍보석"

'홍보석'은 홍옥수나 루비처럼 진한 붉은 빛이 나는 보석입니다.
저는 1982년도에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하다가 환상으로 천국의 홍보석을 본 적이 있는데, 핏빛처럼 아주 붉으면서도 매우 투명했습니다. 당시 주님께서는 제 손에 홍보석을 쥐어 주시면서 "때가 이르면 네가 이 뜻을 알리라" 말씀하셨는데, 계시록 강해를 풀어 받던 1989년에 이르러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보석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열심'으로서, 뜨겁게 사명을 감당한 자, 정성을 다한 자에게 주신다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홍보석에는 '열심과 정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열정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홍보석과 같은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 생명이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행함을 보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1차, 2차,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많은 영혼을 구원하며 여러 교회를 세웠고, 로마에서 순교 당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걸었던 길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기록된 것처럼 매우 고되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위험을 겪으면서 여러 번 죽을 뻔 했고, 유대인들에게 끊임없는 훼방과 핍박도 받았습니다.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수많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 길을 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 잠시만 쉬고 싶다' 생각하지도 않았고, 마음이 요동하거나 두려워 떤 적도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백한 대로, 자신보다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염려할 뿐이었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사도 바울의 뜨거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로마서 9장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골육의 친척'이란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구원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지옥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심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 열심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홍보석의 붉은 빛으로 비유하셨습니다.

 

 

 

7. 자비를 의미하는 "황옥"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일곱 번째 기초석은 '황옥'입니다. '황옥'은 영어로 'Chrysolite(크리솔라이트 : 귀감람석)'인데, 올리브빛을 내는 'Olivine'(올리빈 : 감람석)도 황옥에 해당합니다. 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자비(慈悲)'입니다. 자비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풀어주신 영적인 뜻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선으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황옥이 상징하는 '자비'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자비가 마음에 임한 사람은 편견이 없습니다.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당연히 원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백히 드러난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할 때도 긍휼히 대합니다. 이처럼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이해해 주며 포용하여 포근히 감싸주는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이러한 자비가 가장 크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음에는 열두 보석의 마음이 모두 임해 있는데, 그중 자비에 해당하는 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길 사람이란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배척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으로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것처럼, 오히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능히 용서하는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에게도 이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마음에는 어떤 미움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열매가 온전히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자비의 마음을 황옥이라는 보석의 빛깔로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도 모든 사람을 이해하며 포용하고 선대할 수 있는 마음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8.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녹옥'은 영어로 'Beryl(베릴 : 녹주석)'이라고 하는 연한 청록색의 보석입니다. '녹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오래 참음'이란 힘들게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참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참기도 합니다. 분노, 혈기, 원망, 탄식, 미움 등이 마음에서부터 올라오지만, 표현하지 않으려고 눌러 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악이 없고 오직 선만 가득하여 '참음'이라는 단어 자체도 필요 없는 마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오래 참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이나,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오래 참음도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차원의 오래 참음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개인적으로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것'인 반면,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을 포함하는 더 큰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녹옥에 담긴 '오래 참음'은 이처럼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인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오래 참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이뤄지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시며, 변함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받았다면 그것이 이뤄지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다면 응답이 올 때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축복을 주어야 가장 좋을지까지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끔 "나는 열심히 철야하고 금식도 했는데 응답을 못 받았어요" 불평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는 농부가 씨를 심어놓고 곧바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땅을 헤집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씨를 심었으면, 싹이 나고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는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잡초를 뽑아 주고 해충을 막아주는 등 땀 흘리며 가꾸는 수고를 합니다. 이처럼 우리 편에서도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믿음, 기쁨, 기도, 감사, 충성, 계명, 사랑이라는 일곱 영에 합당한 분량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오래 참음의 시간은 온전한 응답을 받기 위한 시간임을 아셔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믿음에 맞춰 합당한 분량을 채우면 하나님께서는 지체 없이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 후반에 보면,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 속에서 어떤 상대라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믿어주고, 참아주며, 잘 될 것을 바라봐 주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반대로 행동해도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해 주고, 감싸 주며, 용서해 주고, 양보해 주려면, 결국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잘하는 분들을 보면, 이런 오래 참음이 많이 임해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가 나를 싫어해도, 심지어 욕하고 핍박을 해도 웃으면서 다가갑니다. 저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도 대상자에게 선과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의 본을 보이면, 결국 전도 대상자를 붙들고 있던 원수 마귀 사단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전도자가 끊임없이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니 그 빛으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 대상자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결국 구원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

3) 자신의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

'마음을 개조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을 뽑아내고 진리와 선을 심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개조할수록 믿음이 성장하는데, 갓난아이의 믿음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이어서 청년의 믿음, 아비의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비의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개조하는 작업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꼭 필요합니다.

이 작업은 밭을 개간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내고, 때에 따라 흙을 갈아엎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을 심더라도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마음 안에서 악을 발견하여 벗어버리는 만큼 좋은 마음 밭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가 심겨질 때 금방 싹을 내고 잘 자라나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또 밭을 개간할 때 힘쓰고 애쓰며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하듯이, 마음을 개간할 때는 힘쓰고 애써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아 묵은 땅과 같은 육의 마음이 개간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고 때론 낙심하며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가 더디게 보일지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면서, 다시 힘을 내 마음 밭을 개간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언젠가는 되겠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밭을 온전히 개간했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바라보며 더욱 감사함으로 일궈 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오래 참으면서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진 참 자녀로 변화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양선을 의미하는 "담황옥"

담황옥은 토파즈라 불리는 붉은 오렌지색의 투명한 보석입니다. 이 담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양선(良善)'입니다. 양선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고 착함'인데, 영적 의미에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도 양선이 있는데, 담황옥이 상징하는 양선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하나인 양선은 영적 의미가 같습니다. 양선의 영적 의미는 '성령 안에서 선(善)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세상에서는 '양심(良心)'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서, 시대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양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말씀, 오직 그것만이 변함없는 기준입니다. '내가 보기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은 영적 양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이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바로 영적 양선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5절 전반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했습니다. 영적 양선이 임한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 나오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옵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만 선을 추구하는 것은 양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한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주변에 덕과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선입니다.

1) 진리 안에서의 선

하나님은 선이시기 때문에, 말씀인 성경도 선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담황옥의 빛깔, 곧 영적 양선의 빛깔이 유독 강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양선의 기준이 되는 '진리 안에서의 선'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신의 양선의 분량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빌립보서 2장 1-4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자기 생각과 맞지 않고 자기 성품에 맞지 않아도 마음을 같이해 주고 뜻을 합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양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봤지만 그냥 피해서 가버렸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양선이 없으니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떠나면서 만약 돈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에게는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내 물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는데, 바로 예수님의 양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양선한 사람은 들레지 않으며 아무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또한 겉모습에서도 양선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은 흠이 없고 교양을 갖춘 참으로 온전한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 모습을 떠올리며 모든 몸가짐과 행실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잠언 22장 11절에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한다면 입술의 말도 달라지기 바랍니다.

2)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마음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했습니다. 이는 '양선'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상한 갈대'란 '악한 세상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그 심령이 상한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양선의 절정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는 양초나 등잔불 등에서 불을 붙이기 위해 실이나 헝겊을 꼬아 꽂아 놓은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 간다면 불씨는 남았어도 불꽃이 점점 시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서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육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 일이 민망하고 부끄러워 다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신앙 안에서 먼저 되었으나 지금은 영적으로 나중 된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도 사랑 받고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잘 안되니 때로는 속상하여 악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 양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흑백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논하여 상대를 꺾으려는 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진정한 양선입니다.

 

 

 

 10.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비취옥은 옥수의 일종으로 반투명하며 청록색 빛이 나는 보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하여 옛 여인들이 귀하게 여겼지요. 이러한 비취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절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하면 오히려 고통을 받습니다. 운동도 절제하지 못하고 과하게 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이처럼 육적으로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 후의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하물며 영을 추구하는 성도들이라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절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디도서 1장 7-9절에 보면 교회의 감독된 자의 자격이 나오는데, '절제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진리로 분별하고 매사에 절제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행하면,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할 수 있으므로 괜한 시험을 자초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곧장 바른 길을 가므로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치 못한 사람들은 일이 틀어지고 여러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도 절제를 통해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인 것도 절제가 모든 것을 적절히 조절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쁨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고, 사랑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도 마음에 온다고 해서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진리로 분별해 봐야 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부족한 사람은 성급히 굴다가 일을 망치거나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정확한 때를 맞출 줄 압니다. 이처럼, 영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절제는 꼭 필요한 열매입니다. 하물며 아직 육을 다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절제의 열매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목적을 마음에 새기고, 이 세상에서 삼가 절제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세례 요한

믿음의 선진 가운데 절제된 삶을 보여준 인물로 세례 요한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알고, 그것을 감당하기 전까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살았습니다. 홀로 광야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등 매우 절제된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된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11절 전반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나도 이제 절제된 삶을 위해 깊은 산속이나 외딴곳으로 가야겠다'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마음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들어오기 전이라면 육신의 정욕을 철저히 절제하고 오직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영으로 들어온 후에도 절제를 통해 때에 따라 영의 각 마음의 강약을 조절하여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비취옥'의 빛깔은 바로 이런 절제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11. 청결함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청옥"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열한 번째 기초석은 '청옥(Jacinth)'입니다.청옥은 청색을 띠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청결함'을 상징합니다. '청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맑고 깨끗함'인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가 없는 상태', 즉 '어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청결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의 유전을 따라 먹기 전에 깨끗이 손을 씻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시며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19, 20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손이나 몸을 청결히 하려면 물로 씻듯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영적인 물로 씻어야 합니다. 영적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깨끗한 참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버리라', '하지 말라' 하신 대로 순종하면, 점점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이 씻겨 나갑니다. 또한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면, 세상 죄악에 다시 물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맑은 물을 공급받아 늘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는 복이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복이 주어집니다. 이는 최소한 3천층,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본다'는 진정한 의미는 단지 '본다'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 도우심을 체험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청결한 마음을 이루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물로는 에녹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보면, 65세 때부터 300년 동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옮겨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도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자, 이 땅에서도 늘 동행하시다가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올리신 것입니다. 그때 에녹의 나이는 365세였는데, 그 당시는 사람들이 900세 이상 살던 때이므로 오늘날의 나이로 환산해 보면 대략 30대 초중반입니다. 하나님께서 한창 젊은 나이에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보다는 아름다운 천국에 있게 하시고, 하나님 곁에 더 가까이 두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도 어느 날 갑자기 성결된 것은 아닙니다. 65세까지 나름대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5장 19절에 보면, 에녹의 아버지 야렛은 그를 낳은 후에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많은 형제들 중 누구와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형제들보다 더 가지고자 하지 않았고 항상 양보해 주었으며, 자신이 더 인정받으려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다른 형제가 더 사랑받는 것을 보아도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시기, 질투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물론이고, 부모님에게도 항상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나 사사로운 감정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뤄갔습니다. 이렇게 청결한 마음을 만들어 가면서 65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에녹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음은 물론, 세상 어떤 것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순종하며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었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또한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에녹이 하나님을 심히 사모하며 찾고 갈망함으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어린아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이들의 깨끗함이 보는 사람에게도 전달되어 마음을 상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자꾸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께서 보고 싶어 하시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12. 아름답고 온유함을 상징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마지막 열두 번째 기초석은 자수정이라고도 불리는 '자정'입니다. 자정은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그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온유'를 아름답다 하십니다. '온유'는 사랑장에도, 팔복에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에서는 '온유'를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온유한 마음은 이런 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온유한 마음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마음'으로서, 솜털같이 포근하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 모든 것을 선으로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마음속에만 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으로 선과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고 따뜻함을 느끼며, 마음의 쉼을 얻게 해 주는 '덕(德)'도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포근히 안길 수 있습니다. 마치 더운 여름 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큰 나무와 같아서, 편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이처럼 큰 나무같이 크고 넓은 마음으로 온 가족을 포용한다면,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아내 역시 솜털같이 부드러운 마음이라면, 남편은 편안함을 느끼고 쉼을 얻으며 더욱 아내를 사랑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들은 포근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힘을 얻으니 혹여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난다 해도 이를 잘 이겨내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이처럼 영적인 온유를 이룬 사람을 통해, 주변의 영혼들은 쉼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을 참으로 '아름답다'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물질을 공급해 주기도 하고,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육적인 방법으로 진심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 자기 필요에 의해 도와주다가도 상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자연히 깃들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평안을 느끼고 힘을 얻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굽히고 들어와 그 안에 머물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영혼이 깃들게 되는데, 이것이 곧 영적인 권세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땅', 곧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을 많이 얻는다는 표현으로써 많은 영혼을 품어 진리로 인도한 상급으로서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고, 광야에서 약 40년을 인도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 수많은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들을 갈무리 하는 사명은 물론, 그 어떤 사명이라도 온유한 마음으로 감당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환경에서 각각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자라기 때문에, 똑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진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 속에서 나를 비우고 다른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온유한 마음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본 내용은 이재록 목사의 [천국 45편]중에서 발췌, 정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