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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예인짱 2012. 10. 31. 05:13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대립의 배경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애초 논쟁과 대립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오래 전부터 새로운 신학이 출현하고 또한 토론이 붙는 하나의 온상, 즉 탁월한 기독교 사상사들이 유태교나 기독교적 전거와 더불어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둔 방법론을 사용하여 그들의 신앙을 변호하고 해명했던 곳이었다. 
 
한 세기 전, 동시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고 아버지와 연합하여 있으나, 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만 못하다고 선언하여 대단한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예수가 여러 면에서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종속’(subordination) 개념은 동방 제국의 상당수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용된 반면, 서방성직자들은 거부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이가 지긋했던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알렉산더와 교리 논쟁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대립하게 된다. 반면에 젊은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주교 밑에 있던 수석자였다.
 
 
왜 아리우스는 예수를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로 보질 않았는가
 
흔히 많은 사람들은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인성만 인정하고 신성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신성을 인정한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리스도 선재설>까지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 바로 그 결정적 차이다.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오히려 아리우스에게는 더욱 철저한 <유일신 사상> 있었다. 그가 보기에 예수도 아버지와 똑같다고 할 경우, 신이 둘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리우스에게도 역시 성서적인 근거가 있었다.
 
만일 예수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면, 어떻게 선하신 창조자가 유혹을 받고, 지혜를 배우며, 덕을 키우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가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인간처럼 죽을 수 있겠는가.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장 46절)라고 울부짖을 때,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태 24장 36절)고 했을 때 그는 단순히 겸손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요한 5장 30절) 게다가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한 14장28절)이라고 했을 때, 아리우스의 입장은 바로 이 말씀 그대로를 의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 주교 밑에 있던 젊은 아타나시우스 입장의 핵심은 간단하다. 구원자가 어떻게 인간으로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냐는 것이다. 구원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와 그 동조자들을 ‘사벨리아누스주의’(Sabellianism) 라고 비난했다. 사벨리아누스주의는 하나님과 예수가 나누어지지 않는 동일한 실체의  단순히 서로 다른 측면들(혹은 이름들)이라고 주장한 이단이었다.
 
 
당시 각 주교회의의 입장들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했던 알렉산더 주교는 이집트의 주교들을 불러들여 알렉산드리아 회의(318)를 소집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다. 다소 아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한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은 권력을 잡은 알렉산더 주교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었다. 318년의 일이다. 이로써 아리우스 논쟁이 종식되는 듯 했다. 하지만 실은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입은 자들은 여전히 많았기에 이 문제는 단시일에 끝나질 않았었다.
 
즉,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당시 그리스어권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존경받던 자였다. 그 역시 비트니아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니코메디아 회의(319/320)서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주교에게는 아리우스를 받아들일 것을 편지하였다. 319-320년의 일이다. 또한 321년 혹은 322년에 있었던 캐사리아 회의(321/322) 역시 아리우스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캐사리아의 유세비우스를 비롯하여 오리게네스 신학을 따르던 자들은 아리우스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를 위해 파견된 호시우스와 황제에게 전한 두 주님설
 
따라서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특사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였다. 호시우스는 황제의 기독교 자문역을 담당한 자였지만, 단순한 자문 정도의 역할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통치자의 성질을 때때로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제국 내의 몇 안되는 신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호시우스가 직접 이 문제를 알아보자, 그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상황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곧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다. 그는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황제에 알렸고 황제는 그를 신임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본래 정치적 통일에 관심이 많았지 교리적 논쟁에는 당연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은 당시 역사를 조금만 깊게 보았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한 그가 나중에는 자신의 별장인 니케아를 빌려주면서까지 이 문제에 깊숙히 관여한 이유가 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그 같은 교리적 논쟁이 그 자신의 정치적 통일에 지대한 영향이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교리적 논쟁에 관심이 없었던 초기에는 아타나시우스파든 아리우스파든 한쪽으로 통일이 되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로마의 통일이 가장 우선적이었다. 그러한 그가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으로 기울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호시우스의 <두 주님설>이었는데, 이 점에선 호시우스의 기지가 빛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두 주인을 내려보내서 섬기도록 했는데, 그 첫 번째가 정치적 왕국의 주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왕국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때 전자가 현재 로마의 황제라면, 교회 왕국의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 신과 같은 동일 존재냐 아니면 신에 가까운 인간이냐 라는 논쟁으로 있다는 것이다.
 
호시우스의 이 얘기는 어느 쪽으로 결판나든 한 쪽으로 통일되는 것에만 관심있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할 만한 얘기였다. 즉, 호시우스가 황제에게 전한 이 얘기에는 황제가 볼 때 매우 관심할 만한하고 탁월하게 여길만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만일 교회왕국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과 신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다른 한 쪽의 정치왕국의 주인인 현재의 황제 자신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의미가 된다는 점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제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에게도 단순한 문제로서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애초 자신의 관심사였던 질서와 통일, 안정성의 유지를 결국 이러한 방향으로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 개최 (325년)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400여 명의 주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본래 아나톨리안 고원지대의 안키라로 가고 있던 당시의 주교들을 호시우스의 그 같은 얘기로 인해 별안간 수정하여 장소를 니케아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황제는 그 중간에 일일이 전부 메신저들을 보내어 니케아로 다시 불러들이게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니케아는 황제 자신의 화려하고 안락하게 지어놓은 어마어마한 별장이었다. 아마도 로마 황제 역사상 전에 없던 융슝한 대접들을 주교들에게 받게 한 것이다. 혹자는 이를 마치 하늘나라에 와 있는 것처럼 비유했을 정도이니. 이 니케아 회의의 사회자가 바로 아타나시우스 입장에 서 있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였다.
 
물론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니케아에서 일어날 일의 변화과정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어쩌면 심지어 명령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로서는 빨리 결론을 매듭짓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과 대립의 뿌리와 함의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다는 것을 알기에 함부로 이 논쟁에 개입했다가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역시 그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은 어찌되었든 알렉산더와 반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끝내야하는 한다는 점에서 그는 호시우스에 동의했다. 문제는 어떻게 주교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의 분열 상태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로 니케아를 떠날 수 있게 이 과제를 달성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해결의 관건을 쥔 것 중 일부는 시간이었다. 수적으로는 강세인데다 그 감정의 골이 깊은 유세비우스파를 고려할 때, 문든 참석자들이 아리우스를 반대하고 아타나시우스쪽으로 일치 단계에 이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 해 여름의 대부분을 니케아에서 보낼 준비가 되어 있도록 했었다. 주교들과 수행원들은 5월초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토론은 6월 초 시작되었으며 7월 말에 끝났었다. 한 회의를 이렇게 장장 2-3개월을 한 것이다. 그것은 같은 입장에 있는 자들끼리 서로 용의주도하게 전략을 짜가면서 회의를 진행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시간이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채택된 성서 밖의 용어, homo-ousios 동일본질
 
니케아 회의의 결정적인 지점은 결국 유세비우스가 황제가 제안하기도 했던 동일 본질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데 있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애초 유세비우스 신조는 사실 알렉산더-아타나시우스나 아리우스 입장에서 볼 때 양측 모두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시우스를 비롯하여 알렉산더-아타나시우스의 입장에선 좀더 아리우스를 압박할 수 있고, 보다 분명하게 명시할 수 있는 표현들을 고안해내고자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일본질(동일본성)이라고 번역되는 homo-ousios 였다.
 
그런데 이  homo-ousios는 성서 어디에도 없는 그리스 철학 용어다. 그렇기에 유세비우스는 이 개념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었다. ousia는 통상 ‘본질’ 혹은 ‘본성’으로 번역되며, homo는 ‘똑같다’는 의미이다. 그리스어에서 ousia라는 단어만큼 다의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거의 없다. 그리하여 homo-ousios는 동일 ‘본질’(essence)을 의미할 수도 있었으나, 또한 동일 본성(substance), 동일 실체(reality), 동일 존재(being), 동일 양태(type)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플라토니안 철학자 포르피리우스는 인간과 동물의 영혼은  homo-ousios(동일한 보편적 양태)라고 기록한 바 있다. 만약 이것이 니케아서 사용된 그 단어의 의미였다면 아리우스파 중에 이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우스파는 하나님과 예수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신적인 존재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아리우스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였던 유세비우스가 이 개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님의 아들, 아버리로부터 출생한, 유일하게 출생한, 즉 아버지의 ousia(본성)으로부터 온,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 만들어지지 않고 출생한, 아버지와의  homo-ousios, 그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게 된 분"
 
물론 homo-ousios가 아리우스파를 불쾌하게 만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실 이 개념은 심지어 아타나시우스조차도 그 회의가 끝나고 20년 동안은 그의 저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한 hypostasis(개체), 혹은 본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벨리아누스주의(Sabellianism)의 냄새가 났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니케아 회의의 입장 확정
 
그럼에도 호시우스는 그렇게 채택된 문건을 가지고 대다수의 주교들에게 끝까지 서명을 받도록 하였다. 서명을 하지 않은 주교는 아리우스에게 헌신적이었던 리비아의 지지자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명하였다. 물론 둘은 유배를 가게 된다. 그 리비아의 주교들은 회의장에서 나오던 중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앞에 멈추어 황제의 뜻에 굴복한 그를 심하게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콘스탄티누스의 압력이 암묵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리우스파에게 내려진 유배형은 콘스탄티누스를 반대한 결과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캐시리아의 유세비우스는 자신이 서명한 것에 대해 나중에 해명을 할 정도였다. 그는 회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homo-ousios가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공유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라고 얘기하였었다.
 
또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그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은 니케아 신조의 내용에 긍정하기는 했지만,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저주는 거부한다고 했었는데, 그 편지 때문인지 그는 니케아 회의가 다 끝나고 3개월이 지난 뒤 그를 니케아의 테오그니스와 함께 유배를 당하기도 했었다. 

 
니케아 회의 이후
 
주교들이 니케아를 떠나기 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누구도 쉽게 잊지 못할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325년 7월25일에 열린 이 축제는 황제의 아우구스투스 즉위2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리하여 즉위 20주년과 대회의의 종결을 동시에 축하하기 위해 주교들을 초대했던 것이다.
 
물론 황제는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이 함께 내린 결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대립을 해결하려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했었다. 확실히 그는 통일된 안정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아리우스를 유배 보내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가 생각한 신학적 일치를 강행하려 한 그의 결심은, 결국 종교 논쟁에서의 승리자는 이제 그의 적들을 무찌르기 위해 로마제국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 진영이 추방됨에 따라, 혹자는 논쟁이 사실상 끝났다고 볼 지 모른다. 그러나 3년이 지나지 않아 반아리우스파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그의 동료 유배자들을 다시 교회로 맞아들였다. 유세비우스는 다시 아타나시우스에게 아리우스를 그 도시의 교회에서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유배를 가고, 아리우스주의는 동방 제국의 지배적인 신학이 되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만큼 이 대립과 논쟁은 적어도 50년 동안을 오래갔었다. 그것은 애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생각한 효과와는 정반대의 효과이기도 했었다.
 
 
니케아 보다 더 큰 회의였던 리미니-셀루키아 회의
 
니케아 회의를 세계적인 회의로 알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케아 회의는 흔히 카톨릭 교회의 첫 번째 세계적인 회의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 후 몇몇 회의들은 니케아보다 규모가 더 큰 전체 교회를 대표할만한 것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리미니-셀루키아(Rimini-Seleucia, 359) 합동회의였는데, 그 규모는 니케아 회의의 두 배나 되는 5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동방과 서방 양쪽으로부터 참석했다. 그러나 그 회의 결과물은 아리우스 신조의 채택이었기에 결국 “세계적인 공회의”라는 꼬리표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공식적인 교회 역사에서 사라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니케아 회의가 교회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은 주로 이 회의가 니케아 신조를 채택한 결과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 (381년)와 종교적 폭력
 
또 하나, 오늘날 기독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신조는, 주로 니케아 신조에 기초하기는 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에서 채택한 신조의 수정본이다. 물론 그 수정은 근소한 것이며 전반적으로는 니케아 신조와 동일한 것이다.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은 니케아 회의로 끝나질 않았고 그때까지 계속 이어져 왔었다.

그렇지만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는 친니케아파였고, 그는 기독교의 정통 수호자로 자처하였다. 예컨대 아리우스파 주교인 데모필루스에게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유배를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과 압력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소신을 굽히지 않은 성직자들은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테오도시우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친니케아파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히게 했다. 결국 381년 테오도시우스는 150명의 선택된 동방주교들을(서방은 제외) 수도로 초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381)에 참석하도록 하였고 아리우스파의 입장은 정죄되었다. 
 
이후 오래지 않아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주장하거나 아리우스파 저술을 소유하는 행위는 사형죄에까지 해당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는 동방의 문제였지만, 서방에서 열렸던 381년 아튈레이아 회의 역시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파문하고 면직시켰다. 적어도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이제 아리우스주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 정통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인 잔인한 황제였다. 국가권력은 실제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를 진압하는 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시우스는 마치 로마의 크롬웰이나 나폴레옹, 혹은 스탈린처럼 역사의 무대 윙에 나타났다. 말하자면, 그는 기독교 혁명을 보수화하여 이를 더욱 강화하고, 이것을 기존의 사회적 현실에 적용하여 궁극적으로는 국가 군력구조에 통합하는 사명을 가진 전제군주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시작한 운동은 완전히 한바퀴를 돌게 되었다.
 
더 끔찍한 일은 이제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에 대해 폭력과 살인들을 마구 저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명분은 이교도들에 대한 죄값과 징벌로써 말이다. 유대교 회당을 불사르고,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및 북아프리카 등등 많은 종교적 폭력의 물결이 이어졌다. 사실 니케아 기독교의 승리가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는 종교적 폭력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역사상에서 종교 분쟁은 언제나 폭력과 방화 그리고 전쟁을 동반했던 것이었기에!

 

 

<자료출처: 창골산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