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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이야기-신라<新羅>

예인짱 2010. 3. 5. 00:09


  왕릉 이야기 · 신라 · 新羅 · BC 57 ~ AD 935
    왕릉 이야기 · 신라 · 新羅 · BC 57 ~ AD 935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 신라! 신라는 뱃길을 통해 해상 왕국의 꿈을 실현했고, 종교를 통해 불국토의 이상을 꿈꿨으며 황금의 나라로 불릴만큼 번성한 문화와 과학을 가졌던 나라다.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지켰던 천년왕국. 그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 피웠던 왕들의 삶과 죽음이 신라 왕릉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신라는 시조인 박혁거세로부터 제56대 경순왕으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했다. 992년간 천년 왕국을 이룩한 역대 56명의 왕, 그들의 마지막이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중심으로 한 ..

  출처: 문화재청 | 국가 문화유산 탐방
신라 · 新羅 · BC 57 ~ AD 935
역사 :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하나. BC 57년부터 AD 935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여 대동강∼원산만 이남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단일민족통일국가를 세웠다. 신라라는 국호는 역사서에 따라 사로(斯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뜻은 동방의 나라, 새로운 나라, 또는 성스러운 곳이라는 <수풀>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에서 신라로 확정하였다. 《삼국사기》 찬자에 의하면 이 신라의 <신>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하였다고 한다.

성립 : 시조 설화에 의하면, 시조는 BC 1세기 무렵의 박혁거세(朴赫居世)로서 그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6부족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추대되었다고 한다. 신라 초기의 왕들은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 가운데에서 추대되었는데, 이들은 6부족 중 특히 우세하고, 또 서로 밀접한 혈연적 관계를 가진 3개촌의 부족들이었다. 신라는 4세기 중엽 부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통합하면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 때부터 왕호로서 마립간(麻立干)을 썼으며,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왕위의 교립(交立)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안으로 정치체제를 변혁하고 왕의 칭호를 개정하는 등 발전을 꾀하는 한편, 밖으로는 고구려·전진(前秦)·일본 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는데,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 병사 5만 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하여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신라의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했으며, 특히 427년(고구려 장수왕 15) 고구려가 평양(平壤)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꾀하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발전 :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은 6세기 초부터였다. 법홍왕(法興王;재위 514∼540)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고,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하는 등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다음의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 때에는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이 추진되었다. 532년(법흥왕 19) 김해(金海)에 있던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병합한데 이어 562년(진흥왕 23)에는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를 공략·멸망시킴으로써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강 상류지역의 죽령(竹嶺) 이북과 고현(高峴;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이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昌寧)·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에 있는 4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丹陽)에 있는 적성비(赤城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진평왕 후반기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침략이 강화되고 선덕여왕이 즉위한 뒤 한층 가열되자 신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唐)나라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였다. 당나라의 무력에 힘입어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668년(문무왕 8)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삼국통일 뒤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 때에는 강력한 전제왕권이 구축되었다. 신문왕은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따른 중앙·지방의 여러 행정·군사 조직을 완비하였다. 그리하여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 때에는 전제왕권하에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쇠퇴와 멸망 :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 이후는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왕위쟁탈을 중심으로 한 난리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동란을 맞게 되었다. 중앙의 문란한 정치가 지방에까지 번져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결과 국경지방의 백성들이 중국·일본 등지로 몰래 도망하는 예가 많아졌고, 일부는 해적이 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의 약 50년간은 중앙정부의 부패에 따라 지방의 호족세력이 다시 대두되어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도지방에 국한되고 전라도 방면은 견훤(甄萱)이 차지하여 후백제를 세웠으며, 강원도 북부와 경기도·황해도·평안도 지방은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후고구려를 세워 다시 3국 정립(鼎立)의 형세가 되었다. 918년 궁예를 쓰러뜨리고 고려 태조에 즉위한 왕건(王建)이 한동안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함으로써 신라는 그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후백제에 대해 절대우위의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여 신라는 멸망하였다.

정치 ·사회·경제 :
중앙의 통치조직은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516∼517년 무렵에는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며, 531년에는 귀족회의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으로서 상대등제도가 채택되었다. 그 뒤 544년(진흥왕 5)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稟主)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각 창설되었으며, 586년에는 의례·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잇따라 창설되어 관제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진덕여왕 때에는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의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 직속의 최고관부로서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신라의 관제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집사부는 귀족연합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당나라제도의 채용은 통일 이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중앙에 집사성(景德王;집사부가 개칭됨)·병부·창부(倉部)·예부·승부(乘部)·사정부·예작부(例作府)·선부·영객부(領容府)·위화부(位和府)·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 등 많은 관청이 마련되었다.

행정 : 신라의 행정체제는 그 영토의 확장에 따라 변천되어 갔는데, 지증왕 이후에 주요한 곳에 주(州)를 두고, 그 장관으로 군주(軍主)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 군주 밑에 여러 성주(城主)가 있었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영토는 낙동강 유역과 동해안지방, 그리고 북으로 한강 유역까지 뻗쳤는데 낙동강 상류의 중심지인 상주(尙州)에 사벌주(沙伐州), 중류지역의 중심지인 창녕에는 비사벌주(比斯伐州)가 설치되었으며, 새로 편입된 한강유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후에 漢山州, 南川州로 개칭)를 두었고, 강원도 춘천(春川) 방면에 수약주(首若州), 삼척(三陟)·강릉(江陵) 방면에 하서주(河西州) 등이 설치되었다. 삼국을 통일하여 확장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지방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685년(신문왕 5)에는 9주가 마련되어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가 설치되었다. 주의 장관은 문무왕 때에 군주에서 총관(摠管)으로, 다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것은 군사적 성격에서 차츰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해간 것을 의미한다. 주 밑에는 군(郡)·현(縣), 그 아래로 하급 행정단위인 촌(村)·향(鄕)·부곡(部曲)이 있었다. 그리고 수도가 남동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그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5소경(小京)을 요지에 두었다. 소경에는 장관인 사대등(仕大等) 이하 여러 관직이 있었는데 중앙의 귀족들이 여기에 살며 지방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동시에 지방세력의 통제를 위한 역할도 담당하였다.

군사 : 신라의 군사제도는 정세의 변천에 따라 여러 번 변화했다. 통일 이전에 부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6정(停)은 통일 후에 크게 변화하여 중앙군으로서 9서당(誓幢), 지방주둔군으로서 10정 및 기타 여러 부대가 편성되었다. 9서당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다른 부족까지도 포함하였는데, 이는 반란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다른 부족에 대한 근심을 덜고, 나아가 중앙의 직속부대의 병력을 강화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10정은 9주 중 가장 지역이 넓고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에만 2정을 두고 다른 주에는 각각 1정씩을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에 배치된 10정은 국방과 경찰의 임무를 아울러 담당하였다.

사회·경제 :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통치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제는 개인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가옥의 크기·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등 일상생활에까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는 제도로서, 성골(聖骨)·진골(眞骨)·6두품(六頭品)·5두품·4두품 등이 있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자격을 갖춘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며,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나 성골이 소멸되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진골 아래 6개의 신분 중 6두품·5두품·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3두품·2두품·1두품은 그것이 불가능하여 일반 평민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골품제와 관직관계를 보면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 하여 진골 다음가는 신분으로 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 승진의 한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한편, 신라의 토지제도는 토지국유제를 전제로 마련되었다. 사원(寺院)에는 사전(寺田)이 지급되었으며, 관리들에게는 녹읍(祿邑)을 주다가 689년(신문왕 9)에는 이를 폐지하고, 그 대신 조곡(租穀)을 주기로 하였으나 뒤에 다시 녹읍이 부활되었다. 삼국시대에 사전(賜田)·녹읍 등을 준 것은 개인에 의한 대토지소유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삼국통일 이후의 토지 및 농업인구의 증가, 생산력의 향상, 잉여생산물의 상품화 등의 사회상황은 대토지소유의 가능성을 한층 더 촉진시켜 토지사유화의 경향을 조장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주는 대가로 조·용·조(租庸調)의 의무를 부담하도록 했다. 신라의 기본적인 산업은 농업이었다. 주요 농산물로는 보리·조·수수·콩·마 등으로서 쌀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공품으로는 술·기름·꿀·간장·베 등이 있었고, 농촌에서도 어느 정도 농기구를 만들어 썼다. 무덤의 유물에 의하면, 귀족사회에서는 고대로부터 금속공예품이 쓰였으며, 자체 내에서 금·은·철·구리의 공예품이 제작되기는 6세기 초기부터인 듯하다. 그러나 철의 산출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3세기 전부터 낙랑·대방·일본 등지에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509년(지증왕 10)에는 경주(慶州)에 동시(東市)가 열렸고, 7세기 말에는 서시(西市)·남시(南市)가 열릴 정도로 상업이 번창하였다. 삼국통일을 전후해서는 행상(行商)도 나타났으며, 무역은 대외관계가 시작되면서 행해졌는데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때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한 때 해상권을 독점하였다.

학문·종교·예술 :
교육 : 신라시대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花郎道)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 뒤 682년(신문왕 2) 유교적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國學)을 설립, 3과(科)로 나누어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국학은 원래 특권층 자제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기관이었는데, 788년(원성왕 4)에는 이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제도를 설치하고, 성적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유교교육기관 이외에 천문루각(天文漏刻)·의학·율령 등 직업화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도 있었다.

국사편찬 :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545년(진홍왕 6)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다. 이 국사편찬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異斯夫)가 상주하여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서 국가의 큰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시가·음악 : 왕자 우로(于老)나 박제상(朴堤上) 등에 관한 설화문학과 함께 민요·향가 등 다양한 시가문학이 전해지고 있다. 민요풍의 시가로는 <서동요(薯童謠)> <풍요(風謠)>가 있고,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진성왕 2)에는 왕명으로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미술 : 신라의 미술은 고분과 불사(佛寺)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일 전의 신라 고분양식으로서는 돌무지덧널무덤·독무덤·돌방무덤 등이 있다. 또 경주 황남동(皇南洞)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여러 고분에서 나온 출토품들은 매우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신라미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은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석굴암은 그 안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나한상·인왕상 등을 배치하여 불교세계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하여 앞쪽에는 청운교·백운교 등의 돌층계와 범영루 등이 있다.

종교 :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 고구려로부터 전해졌으나 당국의 박해로 전파되지 못하다가, 521년 중국 양(梁)나라 무제가 승려 원표(元表)를 보냄으로써 정식으로 진해졌다. 그러나 법흥왕 때 귀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전파에 실패하였고,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법홍왕 14)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북방계통과 공인 뒤에 양·진(陳) 등을 통하여 교류된 남방계통의 불교가 비교적 빨리 합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약 100년간은 백제·일본 등지의 불교와 같이 왕법적(王法的) 색채가 강한 것이 특색이었다. 구법사상(求法史上) 한 시기를 그은 원광(圓光)을 비롯하여 자장(慈藏)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율종(律宗)을 들여왔다. 원효(元曉)는 경론(經論)을 해석한 책 81부를 지었고 해동종(海東宗;淨土敎)을 열어 민중불교를 일으켰으며, 의상(義湘)은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 밖에 유식론(唯識論)에 원측(圓測)·경홍(憬興)·도증(道證)·대현(大賢), 화엄종에 승전(勝詮), 율종에 진표(眞表) 등이 나타나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신라 말기에는 선종(禪宗)이 성행하였는데 신라의 선종은 7세기 전반에 법랑(法郎)이 처음 전한 것으로, 이를 이어 8세기 후반에는 신행(神行)·도의(道義) 등이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을 차례로 들여왔다. 이로 말미암아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의 신앙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9산(山)이 성립, 5교(敎)와 대립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도교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도가(道家) 내지 신선(神仙)사상의 영향은 화랑도에서 추측할 수 있는데 신라 통일 뒤 태평시대에는 도교의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