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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왕국 · 가야 · 伽倻 |
산세가 천하에 으뜸이요, 지덕은 해동에서 제일이라 대한 8경에 속하는 명산 - 가야산 2,000여년전 이 산의 주인은 철의 제국, 가야였다 산천이 일군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바닷길을 열고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 당당한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살았던 한반도의 잊혀진 역사, 신비의 왕국 가야가 깨어난다. 기원전 108년. 최초의 왕국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삼국시대)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 고대 국가로 기틀을 잡고, 마한 세력이 백제로, 진한이 신라로 합쳐진다. 이른바 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즈음 변한은 ‘가야’라는 이름.. 출처: 문화재청 | 국가 문화유산 탐방
역사 : 고대(古代) 변한(弁韓) 땅에 세워진 국가들의 통칭. 가야 (伽倻·加耶·伽耶) · 구야(狗耶·拘耶)·가라(加羅·加良)·가락(駕洛)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이 전하고 있다. 가야는 넓은 의미로 보아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중류지역까지 존재한 가야의 여러 국가를 칭하고, 좁은 의미로는 김해의 가야국이나 고령의 대가야국을 가리킨다. 가야에 속하는 국가들은 금관가야(金官伽倻;김해) · 대가야(大伽倻;고령)·소가야(小伽倻.고성) · 아라가야(阿羅伽倻.함안) · 성산가야(星山伽倻.성주)· 고령가야(古寧伽倻.함창) 등인데, 《삼국지》 《삼국유사》의 <5가야조>, 《삼국사기》의 <지리지>, 《일본서기》 등에 각각 다르게 나타나며 그 중 지명고증(地名考證)이 일치하는 것은 김해·함안·고성·합천·고령 정도이다. 가야의 건국설화로는 김해와 고령지방의 2종류가 전하고 있는데,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신화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고령에 전하는 대가야 시조신화는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등의 문헌사료에 나타난 가야제국에 관한 기록은 3세기까지는 신화·전승(傳承) 기록으로, 정확한 연차(年次)·국가조직·사회상황을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농경생산의 보급과 지석묘(支石墓)를 가진 사회형태 등에서 BC 1세기경에 초기형태의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서기 전후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변한소국(弁韓小國)들이 나타나 발전하였으며, 이들 소국간의 통합이 진행되어 2∼3세기에는 변한지역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前期) 가야연맹이 이루어졌고, 4세기 초 이후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여 4세기 말 5세기 초에는 거의 몰락하였다. 5세기 후반에 재통합의 기운이 일어나 고령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후기 (後期) 가야연맹이 형성되어 6세기 초에는 자기세력을 확립하였지만, 결국 56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전기 가야 : 한반도 남부 낙동강 하류지역은 BC 5∼BC 4세기 무문토기 계통 주민들이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농경생활이 계속되고 부(富)가 축적되면서 지석묘를 축조할 수 있는 세력기반으로 값비싼 청동기를 구입하여 소유할 수 있었다. BC 1세기경에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사회통합이 이루어져 소국단계로 발전됨으로써 대구·경주지역에 진한소국(辰韓小國)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전후 이들의 제철기술이 경상남도 해안지대에 보급·정착됨으로써 경상남도 해안지대는 풍부한 철산지(鐵産地)의 보유와 해운의 양호한 조건으로 상당한 부와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사회통합단위가 확대되어 소국단계로 발전해 나감으로써 변한소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3세기에 이르러 여러 소국들은 공통적인 문화기반 아래 대등하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권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당시 변한지역의 여러 소국 중 가장 우세한 세력은 김해의 가야국이었으며, 가야국을 맹주(盟主)로 전기 가야연맹(변한소국연맹체)을 형성, 대외적으로 주변지역과 교역에 임하기도 하고, 진한(신라)과 세력을 다투기도 하였다. 전기 가야연맹의 문화중심은 김해·함안을 둘러싼 경상남도 해안지대였고, 고령·함양의 내륙산간지방은 주변지역에 속한 채 후진(後進) 상태에 있었다. 4세기 초에 이르러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을 소멸시켜 신라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백제는 4세기 중엽에 황해도까지 진출하며 성장하자 한반도 남단의 가야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으며, 신라는 진한의 맹주로서 자기세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가야는 낙랑과의 교역단절로 타격을 입었으나, 백제와 상업교역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고구려·백제 사이의 패권 다툼으로 백제가 패하고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가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가야를 토벌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은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다. 이에 비해 고령·함양 등의 내륙산간 후진지역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신라에 가까운 가야지역은 신라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진한·변한 문화의 공통기반을 계승하고 있던 가야는 세력이 약화되어 고령 이남의 낙동강 서쪽지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후기 가야 : 세력이 축소된 가야지역은 5세기에 들어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서부 경상도 내륙지방의 고령·거창·산청·함양·남원 등의 세력은 급속히 발전하였고, 선진지역이었다가 퇴락한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김해·함안·사천 등의 세력도 복구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라는 5세기 전반에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 백제와 화친을 맺었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475년 백제를 쳐서 수도를 함락시켰고, 신라는 이 기회를 틈타 추풍령 너머까지 진출하는 등 국제환경이 크게 동요하였다. 5세기 후반에 주변정세가 급변하자 위기의식을 느끼던 옛가야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가야의 재통합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고령지방의 주체세력이었던 반로국(半路國;半跛國)이 주도하여 후기 가야연맹을 이룩하였다.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은 481년 고구려·말갈의 신라 침입에 대해 백제와 동맹하여 원병을 보낼 정도로 국제적으로 성장하였으며, 6세기 초에 와서는 신라·고구려·백제가 각각 변경정비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은 결속을 강화해 자기세력권을 정비하였다. 그 뒤 백제와 왜(倭)가 하동(河東)을 교역장소로 이용하려 하자, 대가야는 백제와 소백산맥에서 섬진강 하류까지를 경계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백제와 왜가 가야를 제쳐두고 교역을 빈번히 하자,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522년 신라의 법흥왕과 혼인동맹을 맺어 안정을 꾀하였다. 그 후 후기 가야연맹의 일국이었던 탁순·탁기탄 등이 신라에 병합되고, 가야 남부지역은 신라·백제의 쟁탈전에 휘말리다가 결국 신라에 병합되었다. 후기 가야지역 중에서 가장 우세했던 대가야는 자기 세력만으로 신라에 대항하였으나, 결국 56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문화 : 이전의 전기 가야시대의 문화는 김해를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기반을 복합적으로 영위하면서 발전하였으며,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시대는 경상남도 내륙산간지방을 중심으로 농경문화의 안정적 기반 위에 전기 가야의 해안지대 문화를 계승하였다.
전기 가야문화 : 전기 가야시대의 문화적 중심은 김해를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였으며, 패총문화(貝塚文化)와 널무덤[土壙墓(토광묘)] 등의 분묘유적이 상당히 분포되어 있다. 패총유적으로는 부산조도패총·마산성산패총·김해회현리패총·김해부원동패총·창원웅천패총·양산패총 등이 있고, 분묘유적으로는 김해양동리널무덤·고성송천리석곽묘·밀양내이동널무덤·동래노포동널무덤·부산화명동석곽묘 등이 있다. 전기 가야토기문화는 대체로 신라의 4세기 이전의 토기문화와 일치하며, 이는 경상도지역에 진한·변한문화의 공통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한다. 김해 가야국을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소국들이 상당한 부와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풍부한 철산지이며, 양호한 해운조건으로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들의 농경·어로 기반도 상당하여 이미 변한은 벼를 비롯하여 오곡을 재배하였다. 따라서 전기 가야문화는 농경문화와 어로문화를 기초로 하며 해운을 이용한 중계무역에 주력하면서 지속적으로 문화의 축적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후기 가야문화 : 후기 가야문화는 고령·합천·거창·남원 등 내륙산간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서부 경상도 내륙지방은 농경문화전통은 뿌리깊었으나 철기문화 파급이 늦어져서 문화발전이 늦었다. 그러나 전기 가야연맹이 와해된 5세기 이후 선진문화가 파급되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는 고령 이남의 수혈식석곽묘 계통의 고총(古塚)고분들이 있다. 그 중에서 고령지산동고분군·합천삼가고분군·함양상백리고분군·남원월산리고분군·거창말흠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정리해 보면 토기유물과 금속유물로 나눌 수 있다. 후기 가야토기유물 중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뚜껑굽그릇[有蓋高杯(유개고배)]·뚜껑목항아리[有蓋長頸壺(유개장경호)]·뚜껑접시[蓋杯(개배)] 등으로 단지[短頸壺(단경호)] 중심의 백제 토기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굽그릇과 목항아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라와 비슷하다. 후기 가야고분 출토 금속기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철촉·철모·손칼[刀子(도자)]·긴칼[大刀(대도)] 등의 철제무기인데 이는 후기 가야문화의 성격이 정복적인 것을 의미한다. 5세기 이후 후기 가야문화는 토기·철기의 면에서 전기 가야의 해안지대문화의 계승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토착농경을 기반으로 한 정복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교역이나 대외(對外)교섭능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여 후기 가야문화는 발전의 한계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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