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삶/상담심리학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예인짱 2009. 1. 7. 11:58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 융의 생애

스위스 개혁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1875년에 태어나, 스위스 Basel에서 성장하였다.

Basel 대학교에서 의학학위를 취득한 후 Zurich에 있는 정신의학 연구소에서 심리학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단어연상검사를 연구하여 '콤플렉스'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정신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Jung은 이때 Freud 이론을 접하면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고 프로이트 역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1907년부터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5년 만에 중단되었다.

Jung은 Freud의 초기학설인 성욕 중심설, 즉 노이로제가 성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이론의 부적절함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둘의 갈등은 1912년 Jung이 Freud의 의견과 크게 다른 내용의 <무의식의 심리학>을 출판함으로써 심각해졌다. 결국 Jung은 독자적으로 무의식세계를 탐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은 스위스정신의학자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바젤대학교와 취리히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원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의 연구를 응용해 심리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전 연구자들의 시작한 연상검사를 응용하면서 자극어에 대한 단어연상을 연구하였다. 이 연상은 비도덕적이며 금기시되는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의식적으로 제외된다. 그는 이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해진 '콤플렉스' 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에 관련된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을 비판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수립하였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하게 하는 자기원형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심리피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고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개체화' 라는 자신의 신화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더 완전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취리히 연방과학기술전문대학의 심리학 교수, 바젤대학교의 의학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분석(성격) 심리학>>> 

 

스위스 개혁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1875년에 태어나, 스위스 Basel에서 성장하였다.

Basel 대학교에서 의학학위를 취득한 후 Zurich에 있는 정신의학 연구소에서 심리학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단어연상검사를 연구하여 '콤플렉스'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정신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Jung은 이때 Freud 이론을 접하면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고 프로이트 역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1907년부터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5년 만에 중단되었다.

Jung은 Freud의 초기학설인 성욕 중심설, 즉 노이로제가 성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이론의 부적절함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둘의 갈등은 1912년 Jung이 Freud의 의견과 크게 다른 내용의 <무의식의 심리학>을 출판함으로써 심각해졌다. 결국 Jung은 독자적으로 무의식세계를 탐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렀다.

 

칼 융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모두 목사였던 스위스의 북동부 투르가우주의 산간지방인 케스빌에서 태어났으며, 1961년 퀴스나하트의 호반에서 그의 역작 ‘분석심리학’을 탈고한지 10일 후 병들어 누워 영면하였다.

융은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냈으며, 융의 아버지는 감정을 쉽게 노출하여 자신의 불쾌한 감정과 초조감을 가족들에게 나타냄으로써 융의 어머니는 정서 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융은 어린 시절의 환경이 자신의 사고 기준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어린 융은 지붕 및 다락방에 올라가 자신이 나무로 깎아 만든 난쟁이 인형을 갖고 놀면서 난쟁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였고, 자기 마음 속의 비밀을 털어 놓곤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융은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일생 동안 동.서양의 여러 종교사상을 섭렵하였으며, 비교 종교학에 관한 모든 것들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융은 성장하면서 몇 차례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겪게 된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 꿈속에서 지하 사원에서 커다란 음경상을 한 신을 만난 꿈을 꾸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청년이 되었을 때 갑자기 지신의 집 주방에 호두나무로 만든 식탁으로 한가운데까지 쪼개진 것을 경험한다. 이 식탁은 너무나 딱딱한 나무로 쪼게 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었다. 세 번째로는 빵 바구니 속에 넣어 두었던 칼이 산산조각이 났는데, 이 역시 칼이 산산조각이 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 그의 분석심리학으로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융은 1900년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스위스 바젤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취리히대학 의학부 정신과 오이겐 블로일러 교수의 제자로 들어가 단어연상 검사를 연구하여 '콤플렉스'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이에 대한 정신 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한 심리학자로 프로이트와 동시대를 살면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융는 말년에 인간에게는 자아(ego)와는 다른 모든 것을 통합시키고 일치시키는 자기(self)라는 원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분석심리학의 연구체계를 완성하였다.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 인간 정신의 깊은 바다를 연 한 의사의 삶과 사상 ―                                      전철

                                            
출처:
http://theology.co.kr/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의 창시자이다.

1875년 스위스 북동부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스위스 바젤 대학 의학부를 나온 뒤 취리히 대학 의학부 정신과의 오이겐 블로일러 교수 문하에 들어갔다. 그곳의 교수직에 있으면서 단어연상검사를 연구하여 '콤플렉스'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이에 대한 정신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이 당시 프로이트 학설에 접하여 한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프로이트의 초기학설인 성욕중심설의 부적절함을 비판하여 독자적으로 무의식세계를 탐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자신의 무의식과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분석작업을 통해서 얻은 방대한 경험자료를 토대로, 원시종족의 심성과 여러 문화권의 신화, 민담,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종교현상들을 비교 고찰한 결과, 인간심성에는 자아의식과 개인적 특성을 가진 무의식 너머에 의식의 뿌리이며 정신활동의 원천이고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인 많은 원형(原型)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의 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자율적으로 보상하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케 하는 핵심적인 능력을 갖춘 원형 즉, 자기원형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병리적 현상의 이해와 치료뿐 아니라 이른 바 건강한 사람의 마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모든 인간의 자기통찰을 돕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 시대적 문화, 사회적 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신학, 신화, 민담학, 민족학, 종교심리학, 에술, 문학은 물론 물리, 수학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왔다.

융은 심혼(心魂)의 의사(Seelenarzt)로서 자기실현의 가설을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20세기 유럽이 낳은 정신 과학자 중에서 동양사상(東洋思想)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함으로써 동서(東西)에 다리를 놓았으며, 새 천년(千年)에 인류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 사람이다.

1. 칼 융과의 만남

 

저 창 밖의 보름달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 서 그 겨울밤에 찬바람이 잔잔히 흐르는 들녘에 나와 저 달을 향해 힘껏 후- 하고 따스한 입김을 보내주 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미한 잔상으로 기억 언저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더 군다나 지금의 삶은 그 어린 시절의 따스한 세계를 훨씬 이탈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세계에 대한 무조 건적인 친화력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나는 융을 만나려 한다. 융과 더불어 저 어두운 그늘에 고 여 있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건져내는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의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나는 1992년 대학 도서관에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1]을 통하여 융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융의 방대한 저서와 깊은 사상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하여 융과 제자들이 집필한 책이다. 지금 생각컨 데, 그 책에 대한 첫 인상은 여느 책과는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다양한 장면을 담은 사진과 그림과 미술작품, 심지어는 만화책에 나올 법한 낙서들 덕분인지, 글자가 정갈하게 배열된 여느 책과는 달리 매우 현란한 잡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앞 페이지에 있는 융의 시선은 나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어디에서부터 홀연히 다가왔는 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융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모든 만남은 이렇듯 우연한 만남일까. 그 때부터 지금 까지 융과의 만남은 나의 가슴을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이끄는 소중한 만남이 되었다. 이제 융은 마음 의 고향이자 삶의 풍요로운 자양분이 되어주는 커다란 그루터기이다. 그리고 그는 안개와 같은 내면의 세 계를 향해 길을 조금씩 열어주는 영원한 유혹이다.

 

우리가 심리학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머리에서 기억해 낼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만큼의 대중적 지명도가 없지만 그 또한 깊은 세계를 갖고 있 다. 게다가 융은 프로이트가 가장 아끼는 동료이자 제자였다. 이후 프로이트와 융이 결별을 선언한 후 프 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새 지평을, 그리고 융은 <분석심리학>의 새 지평을 심리학 분야에서 개척하였 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는 프로이트이고 오히려 융은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온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 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융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오묘한 진실을 감상하 려 한다.

 

2. 칼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우리가 기억의 그물로 건져낼 수 있는 최초의 경험들은 몇 살부터의 경험들인가? 융 은 놀랍게도! 자신이 유모차에 누워서 푸른 하늘과 황금의 햇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두 세살의 기억 을 떠올린다. 그것도 팔십 세가 넘은 나이에 말이다. 아무래도 그는 망각의 기능을 상실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나보다. 그는 역마살과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유 때문에, 소년시절에 많은 발작증세를 앓 았다. 실로, 마음은 감수성의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하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은 오히려 자기만의 내면의 세계로 발걸음을 인도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융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고독은 내면에 대한 탐구로 전이되었다.

 

융은 어느 날, 깊은 숲 속에 숨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융 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재산을 없앴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슬픈 일이 될 것이 라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아버지와 친구분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현실(現實)에 대한 최초의 경험 이 되었다. 융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 다. 그 와중에 몇 번의 발작증세는 융에게 나타났고, 결국 융은 굽히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후 융으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칼 융의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 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2]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 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으 로서의 자아는 무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이다.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 우리의 인식 속에 지각되는 현상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려 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와 나의 세계는 꿈을 통하여 이 어진다. 그래서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3]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 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 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 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의식적인 이성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 컴컴한 순간일 지라도, 인간의 무의식은 정확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4]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 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 것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융에게 있어서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 정은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 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는 여정이다.

 

하지만 중심으로 향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특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 일 수록 자아가 자기를 찾는 여정은 그만큼 힘겨워진다. 왜냐하면 분화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과 신화의 상실은 자기 상실이다. 이 러한 상실의 시대를 가로질러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 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깨달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은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 또한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 로 볼 때, 우리는 인류가 무의식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5]

 

인간은 문명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 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저 안개와 같은 인간 본성의 허다한 부분이 아직 어둠에 쌓여 있다. 그 자아의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세 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자연이 획득한 매우 새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직도 실험적 상태에 있다. 실로 의식은 불완전한 기능이다. 이렇듯 인류는 험난한 진화의 과정 을 통하여 자아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고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개성화Individuation, 그림자Shadow, 아니 마Anima, 아니무스Animus 등,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사뭇 조심스럽게 선보인 다. 사실 융이 인류를 향해 새롭게 선보인 개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앞으로도 쉽사 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은 이론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생동안 수 만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융은 분석가나 이론가이기 이전에 '영혼의 의사'로서의 순결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삶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서 삶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환자가 그의 생애를 그 자신의 뜻의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6]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병든 의사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융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융의 삶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삶이었고, 환자의 고통과 같이 하는 삶이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융의 사려깊고 진지한 노력은 그의 삶의 여러 곳에 스며있다. 특히 환자의 꿈에서 드러난 상징을 분석가(分析家)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자의 <상징>과 분석가의 임상 결과 에서 일반화된 <의미>를 쉽게 대응시키지 말라고 융은 당부한다. 융은 상징을 연구하는 데 반 세기 이상 을 보내 온 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 석가 개인의 일반화된 이론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회색 이론은 삶을 찢는다. 오히려 "나는 환자의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7]는 자세로 환자를 만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상징은 환자 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환자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야만 그 상징의 의미가 올바로 드러난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서 꿈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은 없었다. 환자의 삶만이 유일한 해석의 경전이 되었던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환자는 자신의 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만이 유일한 현실이다."[8] 이러한 융의 자세는 이후 프로이트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꿈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융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이해 위에서만 꿈의 해석이 가능 하다는 점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4. 신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동시성 현상

 

융의 일생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신의 불멸과 맞닿아 있는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믿느 냐고 질문을 하였다. 영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융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였다. 융은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저 대답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우 리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세계까지도 접근해 들어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 까. 마치 바울이 그러하였듯이(갈라디아서 2:20), 융은 자신으로부터 ?레야 떼어낼 수 없는, 마음 안에 내 재하는 신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융은 자신의 삶 가운데 죽음을 아주 가깝게 체험하곤 하였다. 실제로 융은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융은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다. 융은 밤중에 깨어 전날 장례를 치룬 친구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융은 죽은 친구가 방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친 구는 수 백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융을 데려갔다. 융은 그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친구는 서재에서 적색 표지의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너무도 기이한 체험이어서 융은 다음날 아침 죽은 친구의 서재를 직 접 찾아가서, 환상에서 가리킨 적색 표지의 그 책의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死者의 유 산>이었다.

 

융은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說法>[9]을 마흔 한살이 되던 1941년에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이 설법은 죽은 자들이 질문을 하고 융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융은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하였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문헌은 융이 죽기 바로 전에 어렵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있는 글자 수수께끼인 아나그람마(Anagrama)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암호의 열쇠를 공개하지 않고 융은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러한 기이한 느낌을 자주 체험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체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본인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경험을 자주 듣곤 한다. 융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환상과 희귀한 체험으로 채색되 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10]

 

어느 날 융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순간 뒷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자살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알은 마침 융이 심한 통증을 느낀 부 분에 박혀 있었다. 1918년 융은 영국인 수용소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자기(Self)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형 상화되어 나타나는 像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 그림은 황금의 성 모양을 한 만다라였다. 얼마 뒤에 리햐르 트 빌헬름이 융에게 보낸 책 안에는 융이 그렸던 만다라 그림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융은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11]으로 부르 고, 이와 같은 정신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한다. 사실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 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12]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 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13] 실로 융에게 있어서 텔레파시나 예언현상은 신비한 체험 이나 주관적 환상이 아니라 자명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5. 결론 : 칼 융이 주는 의미

 

첫째, 융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중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문명화된 의식이다. 의식 은 자아의 세계이다. 이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우리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중심인 자기를 향해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는 자아의 세계가 전부 로만 착각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의 세계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자아의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추방당하였다. 우리는 중심을 상실하였 다. 현대인의 마음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보헤미안의 서글픈 운명이 맺혀 있다.

 

융은 희미한 잔영으로만 남아있는 자기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해 왔고, 오늘 우리에게 그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건네주고 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자 기의 세계는 너와 내가 서로 넘나드는 화해의 세계이고 통합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보다 보편적이며 진 실한 세계이고 영원한 세계이다. 오히려 그곳은 그늘에 가리워진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다. 그리고 중심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꿈을 통하여, 신화를 통하여, 상징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에서 자아의 세계를 향해 건네주는 메세지에 우리는 귀를 모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의식의 치명적인 손실은 꿈에 의해 보완되 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저 깊은 내면의 무의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겠다.

 

둘째, 우리의 세계는 설명 가능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아의 세계 안에서의 '이성'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마음의 전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 다.[14]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면 할 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곤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하면 의식할 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15] 의식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겸허함을 상실한 채, 이성의 왕국으로만 전진하려는 현대문명의 기나긴 행렬은 사실 막대한 손실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 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었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성은 존 재하지 않는가. 단지 이성의 등불이 건져내지 못하는 심연의 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탑이 감내해야 할 불길한 징후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심연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치 빛이 소멸하고 어둠에 깃든 저 밤하늘에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 는 저 별만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연은 존재를 망각케 한다. 하지만 존재는 심연에 앞선다. 오히려 존재는 어둠을 품는다. 심연과 어둠 에 서 있는 존재는, 비록 설명되지 않을지언정, 자명한 존재이다. 그래서 은폐되어 있고 불가해한 존재 (essentia absconditus et incomprehensibilis)는 모르는 존재(essentia ignotus)가 아니다.[16] 사실 '비합리 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나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조차도 이름붙일 수 없을 것이 다.[17] 이름은 존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실로 융의 동시성 이론이나 죽은 자와의 대화는 우리의 이성 이 얼마나 빈약한 기능인가를 예증해 준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는 않고 설명되지는 않는 세계가 우리 가 까이에 있고, 그리고 그 세계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융은 말한다.

 

셋째, 융은 우리 각자의 生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심성의 뿌리에는 저 깊은 무 의식의 세계, 전체의 세계와 닿아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生은 결코 가볍거나 보잘 것 없는 生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生은 우주를 닮아 있다. 영원의 세계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生인 것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클레아투라의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사건이 生이다.[18] 우리의 生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 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生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 지향 이 바로 '개성화'인 것이다.[19]

 

우리는 융을 통하여 살아있음(生)이 결코 예사스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제 생은 환희이고

생명은 경 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자. 새는 날기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시 간동안 새가 되려는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얼마나 긴 계절을 인간의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백 년의 삶을 만나기 위하여 백 만년 동안, 그 한 순간 만을 꿈꾸어 온 존재이다. 백 만년 겨울잠 의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다. 우리 삶의 밑둥에는 백 만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 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 만년을 몸으로 살아 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그 순간,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지금 의 生이다. 그러기에 生은 저 영원의 빛의 드러남이다. 또한 지금의 生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 (Individuation)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꿈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예언한다. 꿈이란 자기와 자아가 체험하는 두 지대의 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심의 소리이다. 꿈은 삶의 해리를 통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고백하였다면, 융은 "꿈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지금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꿈을 타고 우리에게 건너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서늘하게 만났던 융에 대한 감정은 이제는 따스한 할아버지로, 예리한 관조의 시선을 통 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해 주는 영혼의 의사로, 오늘의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문명에 한 줄기 빛 을 선사하는 천상의 헤르메스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

꿈은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門)이며 그 문은 저 우주의 태고적 밤을 향하여 연다. 그것은 아직 자아의식이 없던 시기의 마음이었고 자아의식이 일찍이 도달할 만한 곳을 훨씬 넘어서 있는 마 음이 될 태초의 밤이다.[20]  

- 칼 구스타프 융 -



■ 각  주
 

[1] 융은 1875년 스위스 산간지방인 케스빌에서 태어났다. 이 저서를 쓴 시기가 1961년, 융은 이 저서를 탈고한지 10 일 후 병들어 누워 영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저서야말로 융의 유작이라 할 것이다. 융은 여든 일곱에 이 저 서를 기록하였다. 한 생을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여 살았던 탁월한 의사요 심리학자로서, 이 저서는 그의 인간이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융에게 있어서 이 저서는 모든 비전문적인 독자들에게 전하는 소 중한 삶의 언어이다. 그리고 융의 인간적인 면이 흠뻑 배어나오는 사랑의 언어이다. Man and His Symbols는 국내 에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다양한 번역서 가운데 추천할 만한 것은 집문당에서 출판한 이부영 역의 <인간과 무의 식의 상징>이다. 이부영 교수는 스위스 융 연구소를 직접 거친 독보적인 융 전문가(Jungdian)이다.

 

[2]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p.17.

 

[3] C. G. Jung,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Belief in Spirits, The Collected Works, vol. 8 (New York :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303-4.

 

[4] C. G. Jung, Answer to Job, The Collected Works, vol. 11, p.386.

 

[5] C. G. Jung, Man and his Symbols (London: Aldus Books, 1964), p.85.

 

[6] Ibid., p.58.

 

[7] 이부영, {분석심리학} (서울: 집문당, 1978), p.196 ; "I have no theory about dreams, I do not know how dreams arise. And I am not at all sure that - my way of handling dreams even deserves the name of a 'method.'" C. G. Jung, The aims of Psychotheraphy, The Collected Works, vol. 16, p.42.

 

[8] Man and his Symbols, p.58.

 

[9]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p.434-47.

 

[10]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Jung, Carl"

 

[11] 융은 동시성 개념을 {동시성: 비인과적인 연결원리}(Synchronicity: An Acausal Connecting Principle)이라는 논문에 서 발표하였다. 그 논문은 배타원리의 발견자인 볼프강 파울리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융은 파울리와 함께 무의식에서 보이는 동시성과 양자물리학에서 인과율의 파탄이 일어나는 현상 사이의 유사성에 주 목하였다. 그런데 이 논문은 부분적으로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의 논문 {연속성의 법칙}(Das Gesetz der Serie, Stuttgart, 1919)에 근거하고 있다. 카메러는 20세부터 40세까지 동시성 현상에 관련한 경험사례를 정리하여 {연속성의 법칙}이라는 저서에 100가지의 사례로 수록하였다. 융의 동시성은 주로 시간적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 시성을 기술하는 반면, 카메러의 연속성은 주로 공간적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시성을 기술하였다 ; Arthur Koestler(최효선 역), {야누스-혁명적 홀론이론} (서울: 범양사, 1993) 참조.

 

[12] 융이 깊이 엿본 동시성 현상은 결코 현대과학의 실재관과 유리된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신비적이거나 초월적인 현상이 아니다. 융이 지적한 동시성 현상을 지지하는 실재관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실재관은 실체적 실재관에 대한 관계적-유기적 실재관으로의 전환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첫째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이다. 둘째는, 양자물리학에서 비국소장에 관련된 EPR 사고실험이다. 그러 나 이 두 실재관은 아직도 현대과학이 해명해야 할 어려운 난제를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 전개에 있어서 우리 언어의 한계는 더욱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동시성 현상이나, 화이트헤드의 실재관이나, EPR 사고실험의 논의는 '정보소통'의 관점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할 필요가 있겠 다.

 

첫째,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동시적 세계는 정보소통, 즉 인식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식을 주체와 대상 사이의 정보소통이라고 한다면, 그 정보소통은 시간의 흐름에서 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보가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전달되는 과정, 즉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는 과거의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듣는 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 방 안에서 듣는 음악은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음악이다. 지금 듣는 비행기 소리는 몇 초 전의 비행기가 내는 소리이 다. 지금 듣는 천둥 소리는 몇 분 전의 천둥이 내는 소리이다. 우리가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의 태양은 8 분 20초 전의 태양일 뿐 현재의 태양이 아니다. 실로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세계는 빛바랜 과거의 세계이다. 우 리는 결코 현재를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과거의 세계는 동시적인 세계가 아니다. 동시적인 세계는 현재이기 때 문이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우주의 횡단면(橫斷面)인 동시적 세계 안에 포함된 정보는 결코 (주체에게)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과거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현재의 태양을 결코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우주의 횡단면을 화이트헤드는 지속(Duration)이라고 부른다. 지속은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현재의 우주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지속은 우선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의 현재의 횡단면인 지속의 두 성원 은 동시적이다. 둘째, 지속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과거에 있던가 미래에 있을 뿐이다. 셋째, 지속이란 지속 안 에 모든 성원이 상호간에 동시적인 계기들의 완전한 집합이다. 정보소통이나 세계 인식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 되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는 '정보'와 '인식'을 더욱 합리적인 언어로 새롭게 해명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둘째, EPR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EPR 사고실험을 통하여, 전자와 다른 전자 사이의 정보소통에 있어 서 시간의 개입이 없이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장소(field)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35년 아 인슈타인은 동료제자인 포돌스키(Podolsky)와 로젠(Rosen)과 함께 중요한 사고실험의 결과인 논문을 발표하였다 (Einstein/Podolsky/Rosen, 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n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cial Revier 47(1935)). 이 세 사람의 약자를 띤 실험은 초기 상태에서는 상호작용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서 로 분리된 양자적 대상인 S1과 S2의 두 체계를 상정하였다. S1과 S2는 물론 공간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 실 험의 요약은, S1에 외부의 영향력으로 인해 결과로서 S1이 변했을 때 아무 관계도 없는 S2가 동시적으로 S1의 변 화값만큼 변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 쌍둥이 형제 S1과 S2가 서울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하자. S1은 백록담으로 갔고 S2는 천지연으로 갔다. 백록담에 간 S1이 돌에 부딛쳐 이마에 혹이 났는데, 같은 시각에 천지연에 있는 S2는 돌에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이마에 혹이 났다. 이런 상황은 물론 상식적 인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일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서는 사고 실험이었으나 1982년 프랑스의 아스페(Aspect)의 세 번에 걸친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판명된 실험이었다. 그 결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실재가 알지 못할 상 관성이 있고 서로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관계로 직조된 세계라 는 것을 밝혔다.

 

그럼 융의 동시성 현상은 무엇인가. 소련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실험을 하였다. 어미 고양이를 바다 깊은 곳의 잠수함에 가두고 지상에서 새끼 고양이를 죽인 일련의 실험이다. 이 실험에서는, 지상에서 새끼 고양이를 죽이는 순간 잠수함의 어미 고양이는 움찔거리면서 매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가.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의 관계에 보이지 않는 내재적 상호작용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러한 작용은 동시성의 부분적인 증명사례이다. 우선 동시성은 동일하지 않은 시간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시성과, 동일한 시간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시성이 있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아버지의 교통사고를 꿈에서 보았는데 '그날 오후' 그 교통사고가 현실에서 일어난 경우이고, 후자는 부산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교통사고가 서울에 있는 아들 에게 '동시에' 마음에서 스쳐 지나간 경우이다. 특히 여기에서 논의하는 동시성은 후자, 즉 동일한 시간으로 연결 된 사건의 동시성만을 지칭하려 한다.

 

지금 이 순간 부산과 서울은 동시적 세계이다. 융의 동시성 이론에 의하면 한 순간에 부산에서 발생된 정보가 동 시적인 순간 서울에까지 전달될 수 있음을 밝혀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시성 현상의 외양은 EPR의 실재관을 근 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만약 부산에서 발생된 정보가 <동시적 시간>에 서울 에까지 전달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지상에서 발생된 새끼 고양이에 관한 정보가 <동시적 시간>에 깊은 잠 수함에 있는 어미 고양이에까지 전달된다고 할 수 있는가? 정각 12:00:00초에 부산에서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났 을 때, 12:00:01초에 아들이 그 정보를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 는 현상일 수는 있어도, 동시적 세계에 대한 정보소통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보소통에 있어서 1초라는 단위는 여전히 매개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엄밀하게 말하면, 아들의 인식은 1초 전의 과거의 정보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아들의 정보가 1초 전의 과거의 정보에 대한 인식일 지라도, 1 초 사이에 서울과 부산의 서로 떨어진 존재가 어떠한 의미있는 감응을 할 수 있음(!!)을 밝힌 최초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융의 동시성 이론은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우선 융의 동시성 현상은 결코 현대과학과는 유리된 사각지대의 현상이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동시성 현상의 근거인 실재관으로서 융의 동시적 세계와 EPR 사고실험을 말할 수 있다. 화이트 헤드는 관계가 진정한 실재이며 대상은 추상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EPR 사고실험의 아이디어 를 별 무리없이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엄격히 비교하자면, 화이트헤드의 실재관과 EPR 사고실험의 실재 관은 정면으로 대립될 수 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동시적 세계는 정보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입장과 정보소통이 가 능하다는 입장이 바로 그 지점이 된다. 이렇게 두 이론 사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화이트헤 드와 EPR 사고실험은 융의 동시성 이론을 지지하는 실재관으로서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pp.125,168,320 ;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 가 - 현대 자연철학의 이해} (서울:소나무, 1995년), pp.139-206.

 

[13] 융의 동료인 폰 푸란츠(Marie-Louise von Franz)는 융의 심리학과 과학과의 관련성을 Man and His Symbols 후반 부에서 개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푸란츠에 의하면 융이 전개한 정신현상에 관한 이론과 현대과학은 긴밀한 함 수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14] C. G. Jung, The Psychology of the Uncou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p.117.

 

[15]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344.

 

[16] Rudolf Otto, Das Heilige (Muenchen : Verlag C. M. Beck'sche Reihe, 1987), p.163.

 

[17] Ibid., p.164.

 

[18] 융은 우주의 대극쌍으로서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를 말한다. 융에게 있어서 플레로마는 원형의 세계이고 자기 (Self)의 세계이고 영원의 세계이고 무(無)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이 세계의 근원이자 뿌리이다. 그리고 플레로 마와 대극의 자리에는 크레아투라가 놓여있다. 크레아투라는 자아(自我)의 세계이고 의식의 세계이다. 융은 의식 의 기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해는 지(知)이고 그것은 분별(分別) 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의 세계인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분별의 세계인 클레아투라로 나아가려는 것, 그것은 플레로마 자신이 자신을 밝히 드러내어 보이려는 강렬한 의지이고 신념이다. 그런데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의 긴 장적 대극적 운동은 플레로마의 세계인 무로 와해되는 것, 그리고 클레아투라의 세계인 끊임없는 분열상으로 와 해되는 것을 동시에 지양한다. 클레아투라를 통하여 플레로마가 승화되어 드러나는 과정, 혹은 플레로마의 중심 인 자기로 향해 가는 과정이 개성화(個性化)이다. 이 개성화의 과정은 자기실현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평탄 한 길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을 거치지 않은 깨달음이란 또한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플레 로마의 무로 와해되지 않고 클레아투라의 구별로 와해되지 않는 고양과 상승의 과정으로서의 개성화는, 결국, 세 계를 배제하지 않고 수용한다 ;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p.365,466. C. G. Jung(이부영 역), {현대의 신화} (서울 : 삼성출판사, 1993), p.21 참조.

 

[19] 우리는 개성화(individuation)와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융에게 있어서 개 성화는 개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개인주의는 한 개인에게 부과된 고유한 기질의 단층이다. 또한 개인주의의 기 질은 한 개인의 사회적 실현을 간과하거나 혹은 억압한다. 하지만 개성화는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온전히 실현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특성에 대한 깊은 사려는, 더욱 성숙한 사회적 실현을 추구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 C. G. Jung, The Relations between the Ego and the Unco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p.171.

 

[20] C. G. Jung, The Meaning of Psychology for Modern Man, The Collected Works, vol. 10, pp.144-45.
 

■ 참고문헌

1. C. G. Jung, Man and his Symbols (London: Aldus Books, 1964).

2. ___________, The Psychology of the Uncou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3. ___________,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Belief in Spirits, The Collected Works, vol. 8.

4. ___________, The Meaning of Psychology for Modern Man, The Collected Works, vol. 10.

5. ___________, Answer to Job, The Collected Works, vol. 11.

6. ___________, The aims of Psychotheraphy, The Collected Works, vol. 16.

7. ___________(이부영 역), {현대의 신화} (서울 : 삼성출판사, 1993).

8.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9. 이부영, {분석심리학} (서울 : 일조각, 1982).

10.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Jung, Carl"

11.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12. Rudolf Otto, Das Heilige (Muenchen : Verlag C. M. Beck'sche Reihe, 1982).

13. Arthur Koestler(최효선 역), {야누스-혁명적 홀론이론} (서울: 범양사, 1993).

14.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 현대 자연철학의 이해} (서울:소나무, 1995년).
   

한신 23, 1996

 

 

<<<분석심리학 탐구:기본 개념>>>
 
1. 분석심리학의 기본 개념 

 

1. 원형Archetype 

 

 

(1) 원형과 본능

 

 칼 융은 마음이 병든 사람이 겪는 현상이 온 인류가 태고적부터 이어져오는 심상이나 상징의 집단전 저장고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다. 융은 '밤바다 모험(칼 융이 겪은 중년의 정신적 위기와 환상 체험)'을 통해 고대의 심상과 상징을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원형의 실체를 확인 하였다. 1919년에 융은 '원형'이라는 용어를 '밤바다 여행'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했다. 개인적 무의식에 덧붙여, 융은 본능과 원형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진 집단 무의식을 가정했다.

 

 본능이란 필요에 의해 특정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충동으로, 이런 본능은 새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귀소 본능과 유사하게 생물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본능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융은 인식 그 자체를 통제하는 선천적 무의식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원형으로 모든 심리적 과정의 필연적인 과정으로 일종의 직관이며, 이것은 모두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본능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처럼, 원형은 개인의 이해 방식을 결정한다. 본능과 원형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보편적이고 집단적이며, 모든 이가 유전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원형)에 의해 행동하고자 하는 충동이 결정되는 것처럼, 또한 원형을 통해 얻어진 무의식적 이해는 본능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한다. 한편 행동하려는 충동(본능)은 상황을 어떨게 이해할지(원형)을 지시해준다. 이와 같이 상호보충적으로 작용하는 원형과 본능의 관계를 융은 닭과 계란에 비유하였다.

 

 원형은 자신에 대한 본능적 인식, 즉 '본능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의식이 '객관적인' 생의 과정에 대한 내적 지각인 것과 정확히 일치 하는 것이다.

 

 (2) 원형과 심상

 

 그렇다면 인간은 원형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원형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며 오직 심상(image)의 형태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모든 세대와 문명에서 인류는 '현자의 원형'과의 교류를 가정하고 있다.

 

 우리 민담에서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돕는 산신령이나 고승, 융의 경우에는 빌레몬(밤바다 모험때 융의 꿈 해석을 지시해준 노현자)이 이에 해당된다.

 

 이처럼 영(Sprit)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심상을 통해 인류 전체에 공통적인 집단적 무의식의 실체가 있음을 말해준다. 융은 본질적인 실체인 원형과 원형적 심상에 구분을 두는데, 원형의 실체 존재는 정의상 무의식이기 때문에 단지 추론될 뿐이지만, 원형적 심상은 상징으로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며, 우리는 상징을 통해 원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2. 분석심리학의 기본 개념 

 

 

 

 (1) 상징Symbol

 

 융은 원형을 분석심리학에서 어떻게 적용하였나? 어느 젊은 처녀가 융에게 분석을 받으러 왔다. 처녀는 뱀의 환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녀의 꿈에서 뱀은 태왕과 곡괭이를 그리고 땅에 묻힌 십자가를 둘둘 감고 있었다. 이들 상징이 갖는 의미를 사전적으로만 해석해선 곤란하다. 그보다는 분석받는 이의 정서적 반응을 탐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분석받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상징의 의미를 거의 모르고 있다. 상징은 꿈꾸는 이의 의식에 통제를 거의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징들을 실마리로 삼아 무의식에 내재된 에너지를 내담자의 의식에 활성화 시키는 것이 분석심리학의 최대 목표이다. 이처럼 모호한 심상이나 고통스런 상징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무의식의 의식화'라 한다면,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하고 심혼의 건강한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을 '초월적 기능'이라고 한다.

 

 (2) 초월적 치료 기능Transcedent or Healing Fuction

 

 융의 분석 치료는 상징의 표현 과정에 있어 '환원주의적' 접근 보다는 '건설적' 접근을 더 중요시 한다. 건설적 치료란 내담자가 자신의 꿈에 나타난 상징과 고대 신화간의 병렬적 비교를 통해 스스로의미를 통찰하도록 길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하지만 도시화, 산업화를 거친 현대 문명에서 태고적 민담, 신화적 심상을 갖는 꿈을 찾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 처녀는 어떻게 태양을 감고 있는 뱀의 상징을 해석할 수 있었을까?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는 뱀에게 물린 사람은 우선적으로 사원에 데려갔다. 그러면 사제는 어둠의 뱀 아핌(appep)에 의해 위협받는 태양신 라(Ra)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경전을 읽어 내려갔다. 사제들은 뱀에게 물린 사람에게 경전을 읽어주는 것이 치료 효과가 있다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과연 그것이 치료 효과가 있을까? 현대인이 보기엔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에게 그림 형제 우화를 읽어주는 것처럼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 병든 사람에게 경전을 읽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신성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태양신이 뱀에게 고통 받는 것처럼 환자또한 뱀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며, 태양이 내일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자신또한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런 '심리적 진정 효과'를 통해 병든 사람은 자신이 고립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고, 내담자 또한 꿈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3) 적극적 상상

 

 융은 내담자에게 다양한 접근 방법과 기법을 사용하여, 꿈, 환상, 상징에 나타난 이미지를 집단 무의식과 재연결하도록 도와주는데 노력하였다. 이는 융 자신이 만다라를 그렸던 경험을 통해 치료적 효과를 스스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창조적 활동은 원형을 자극하고 조절할 수 있게 도와준다.

 

 굼의 심상이나 상징은 여러 방식을 통해 구체화 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춤, 그림, 글쓰기 등을 통해서 무의식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압력을 의식에서 덜어주고 내담자가 스스로 심혼의 중심을 발견하는 과정을 '개인화 과정'이라고 명명했다.

 

 (4) 중심화 과정Centering Process

 

 적극적 상상 과정을 통해 심상의 의미를 조절할 수도 있지만, 꿈의 상징은 거의 대부분 무의식에서 자동적으로 출현하며, 의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수동적이다. 상징은 꿈꾸는 사람이 잃어버린 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 젊은 여성 내담자는 자신의 꿈에서 "멋지게 장식된 고풍스러운 칼이 무덤의 봉분에 꼽혀 있는 것을 보았고, 누군가가(?은 남성으로 여겨지는) 그 칼을 뽑아 자신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융은 칼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칼은 여성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아버지의 칼이었던 것이다. 연상 기법을 통해서 여성의 꿈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게 됐음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이것은 '개인화 과정'에 도달한 완전한 "의식화"는 아니다.

 

 프로이트적 해석에서는 칼이란 명백하게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 '남근 선망'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분석심리학적 치료법은 보다 더 진취적인 것을 요구한다. 융의 건설적 접근법에서는 분석가와 내담자가 꿈 속의 상징과 관련된 유사한 이미지를 상징과 민담등을 통해 찾아내는 '확충적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 여성의 꿈에서 칼의 이미지는 그녀의 선조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켈트족계 영국인이었고, 켈트족의 민족적 정신은 매우 강렬하고 충동적인 기질이 있었다. 이것은 그녀 아버지의 성격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녀 아버지가 가졌던 성격을 자신의 무기로 주장해야 한다고 융은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이제 일상 생활의 모든 곳에서 뱀이 휘감고 있는 십자가 모양의 칼을 보게 되었고, 이것은 분석가인 융의 개인적 상징인 만다라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소극적이고 성적인 공상에 빠져있는 응석받이 어린아이였지만, 그녀의 켈트적 기질이 발견됨으로써 그녀의 삶은 달라졌다. 칼은 그녀 자신의 강점이자,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그녀의 진실이었다. 이렇든 삶에 대한 통찰과, 상징의 발견은 모든 인류가 지닌 오랜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분석심리학 기본개념3 : 그림자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 중에서 '그림자'는 특히 현대성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우리나라 말에 "저 잘난 맛에 산다"고 하거니와 '나'는 다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만 못살게 군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록 나는 나의 약점이나 결점을 못보는 것이다.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바로 '나'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기 마련이다. 착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때,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정의 수렁에 빠지며 도덕적이 결백을 신조로 내세우는 사람이 성적인 추문을 일으키며 자유와 고매한 정신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권력과 금욕에 눈이 어두어 뭇사람들의 손질을 자주 받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추구하고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나쁜 것'에 대한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이다. 위선자라든가 이중인격이라는 말은 자기 마음속의 검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낮에는 점잖은 의사이나 밤마다 포악한 괴물로 변하는 스트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좋은 예다.

 

 민간설화에 나오는 많은 대극적 인물 - 이를테면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가짜와 진짜, 등 무수한 쌍들은 바로 인간정신의 의식적 부분과 무의식적 부분, 명과 암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쌍은 보다 신화적인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 니체의 초인 '짜라투스트라'와 추악한 인간 '최후의 인간' 심지어는 그리스도와 마귀, - 이 모든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의 베일 뒤에 악하고 추하며 비천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 그림자들은 모두 앞의 것들의 반려자이다.

 

 그림자는 의식의 뒷면에 있는 여러가지 심리적 내용의 열등한 인격의 저장고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창고에 내버려진 곡식이나 연장과 같은 것으로 오래 두면 곰팡이와 녹이 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의식될 기회를 잃었으므로 미분화된 채로 남아있는 원시적인 경향, 심리적인 특징들이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그것이 외계의 대상으로 투사되거나 자아가 그것을 처음 의식할때는 부도덕하고 열등하나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들이어서 좀처럼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기 꺼려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늘에 가려 있어서, 다시 말해서 무의식 안에 버려져 있어서 '개성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며, 그것이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부정적 측면은 대게 상대적인 것이다.

 

 ( 그러나 모든 나쁜 것이 다 상대적이고, 모두 다 좋은 것으로 바꿀수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가끔 고칠 수 없거나 좀처럼 변화할 수 없는 '악한 성질' 이른바 '절대악'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이것은 억지로 뜯어 고치려 하기보단 왕왕 그것과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그 위험한 영향력을 방지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림자는 그것이 개인적인 성질이 문제인 한 조금만 반성을 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나, 그것이 원형으로서 문제 될 때는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상대적 악의 성지을 인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절대악을 인식하는 것은 흔한 일도 아니고 충격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칼 구스타브 융 )

 

 성서에 "남의 눈의 티를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를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림자의 투사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대게 자아의식의 좋은 면이 억압되었을 때, 스스로를 지나치게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좋은 것'은 남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아의식의 부정적인 면만이 억압된다면 '자기의 결점은 보지 못하고, 상대의 결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이러한 것을 투사라한다. 투사란 물론 자아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 하는 것이다. 자아는 단지 투사된 대상에 감정적으로 집착할 뿐이다. 이런 경우 자기의 무의식적인 내용이 투사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전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무의식적 내용의 투사현상에는 어느 경우나 강렬한 감정이 투사대상에 향하게 되며 대상에 대한 관심을 떼어 놓을레야 떼어 놓을 수 없다. 그 감정은 긍정적인 매혹, 감동의 느낌일 수도 있고 혐오감, 불쾌감일 수도 잇으나 그림자의 경우 후자가 많다. 그리고 모든 무의식의 투사 과정에 볼 수 있듯이 그 감정반응의 이유를 자아가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는 특색이 있다.

 

 그림자가 투사될 때 사람들은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모르게, 공연히 어떤 대상에 대하여 혐오감이나 그 밖의 부정적인 감정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림자는 자아의 바로 밑바닥에 놓여 있는 어두은 그늘의 심리적 경향이므로 그 특징은 상당히 자아의식의 특징과 닮아 있고 비슷하면서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경향을 띠게 된다. 그래서 그림자의 투사는 곧잘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같은 성(性)의 친구 사이, 형제간, 자매간, 동료 사이, 상사와의 관계, 같은 성의 가족 사이, 시누이와 올케 사이 등에서 왜 그런지 모르게 보기만 해도 싫다는 감정이 들 때, 여기에는 그림자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 싫은가"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꼭 들어맞는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사람이 '공공연히 잘난 체 하니까', '덮어놓고 저속하니까.' '뭔가 비굴하고 천해 보이니까,' '영악스럽고 교만해서', '너무 쌀쌀맞아서' 하는 등 상당히 적대적인 감정으로 채색된 성격내용을 골자로 한다. 물론 그림자의 투사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의 갈등이 노골화되면 실제로 이해관계에 얽힌 싸움이 표면화 될때, 본래의 투사가 더욱 강화되어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 이 사람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구나 " 하는 단정을 내리게 되어 자기 안의 그림자를 깨닫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 간의 갈등은 대게 그림자 투사에 의한 오해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 모두 개인마다 가지는 편견이 다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림자는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ㄱ이란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그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ㄴ을 미워할 경우도 있다. 또한 그림자가 긍정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면 어떤 사람은 친구 중에 ㄷ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ㅁ을 공연히 좋아한다. 이리하여 중, 고 시절의 '짝'이 형성되는 심리적 계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각자의 자아의식이 자기 나름의 가친관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맞지 않는 것들은 의식적으로 배제됨으로써 무의식에 그 그림자에 상응하는 특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작고 많은 무수한 집단이 있고 그 집단행동을 공고하게 결속시키기 위해서 집단에 공통되는 의식을 집단성원에 강요한다. 특히 개성의 발전보다는 집단에의 소속감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는 작게는 문벌, 동창, 동문회, 보다 크게는 지역적 파벌에 이르기까지 집단의식과의 동일시가 여러가지 모양으로 요구되는 만큼, 그 집단에 특유한 "집단적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는 집단적 편견을 가와시켜 집단으로 하여금 결속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다른 집단과 팽팽하게 맞서는 결과를 빚는다. 물론 집단활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한 집단을 형성하고,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편견에 의해서 형성되거나 배타, 독선을 바탕으로 삼을 때 여기에는 언제나 집단적 그림자의 형성이 가능해지고 그 투사로 말미암아 집단간의 불필요하고, 불행한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림자는 보통 개인적 무의식의 특징을 띤다. 그러나 때로는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인 "원형"을 상의 띠게 된다. 그것이 개인적 무의식에 머무르는 경우에는 그것이 "집단적 그림자"의 감정이 투사될 때만큼의, 무서운 파괴적 감정반응을 일으키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인간적인 감정내용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부간의 갈등이나, 상사와의 알력, 타인과의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불쾌감에 머무른다. 그러나 원형적인 감정의 내용이 투사될 때, 그 사람은 그 투사대상에게 형언할 수 없는 무서운 감정,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감, 혐오감을 느끼며 때로는 실제로 이 감정을 따라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선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화의 세계란 범속한 현실이 아니고 초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이기까지한 마읨의 여려 경향으로서, 이러한 그림자 원형이 투사되면 그 사람은 상대방을 '나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사람도 아닌 자', '사람의 탈을 쓴 짐승,' 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듯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인류의 태고적인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대량 학살의 현상은 원형적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를 바탕으로 실시되는 참극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귀신이나 마귀로 보일 때, 혹은 하잘것없는 파리 새끼 처럼 보일 때, 인간은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자아는 마치 정의의 화신인양 가장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인간은 스스로가 생사여탈권을 마음대로 누리는 초인이나 신의 권력과 동일시한다. 물론 이것으로 전쟁의 심리를 모두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쨋든 이런 현상은 정신질환자의 망상과 유사한 것이다. 정신분열증환자가 피해망상을 가질 때 박해자는 흔히 근원적, 즉 '원형적 그림자'의 성격을 띠며 가상적인 박해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그를 해치는 경우가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자 할 때, 환자는 그 의사가 마치 우주선에서 내려와 자기를 망치려고 하는 외계 행성의 과학자라 믿고 도망을 치거나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런 예에서 우리는 환자의 마음속에 잠재된 초인의 위치에까지 극대화된 현대 문명의 그림자, 즉 비인간적인 기술만능주의의 위력을 목격한다. 텔레비젼의 각종 공상영화나 만화에는 이런 원형적 상징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서 기계는 사람의 힘을 능가하고 마징가 제트또는 그밖의 인간형 기계 영웅은 사람의 탈을 썼으나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며 악을 물리친 헤르메스와 같은 초인적 속성을 마음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그 행위에 전혀 윤리적인 책임이 없고, 오직 파괴와 정복, 승리, 그 엄청난 능률성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원형적 그림자가 정신병환자나 전쟁 범죄자와 같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한 요소가 어느만큼 개체의 의식을 지배하며 의식이 어느만큼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라는 비관적 판단을 내리기 쉽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인간은, 마음 속에 '죽음의 본능' 즉 '타나토스tanatos'와, 생의 본능인 '에로스eros'가 투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융의 그림자란 이렇게 비관적인 타나토스와 같은 개념은 아니다. 융은 어떤 심리적 내용을 고정 불변의 틀에 의해 규정짓지 않고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림자의 개념도 그것이 그림자로서 악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선의 기능으로 바뀔 수 있는 요소라고 보았다. 창조적인 기능이 억압될 때 파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마치 동양의 음양설처럼, 양이 음이 될수도 있고 음이 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겉으로 보아 파괴적이며, 위험하며, 부정적인 작용르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어느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짐자의 존재를 깨닫느냐 노력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것이 깨달아질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며 그림자의 부정적 작용이 해소된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의 어두운 측면들을 통찰할 때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종국에는 완전히 그림자를 하나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인간정신의 심층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어둠속에 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인 것은 끝내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최후 비밀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시민족에게 그림자는 생명력의 일부로 소중히 여겨진다. 남의 그림자를 밟는다는 것은 커다란 불경을 뜻하며 전투 중에 적의 그림자를 창으로 찌르면 상대방은 미구에 죽게 된다고 믿는다. 그림자에 대한 믿음은 중국인에게도 있다. 장례에 하관할 때 묘혈에 자기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도록 참석자들은 조심스럽게 비켜서는 것이 동양 문화속의 그림자에 대한 지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가 없는 존재란 죽은 자, 즉 영혼의 특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같은 생각을 분석심리학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림자는 인격의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림자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아가 강한 의식성을 가지고 그 특수성, 개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가 뚜렷하지 않은 유아기적 상태에서는 그림자는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나와 너를 구별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기에 그림자는 자아의 도덕적 순수성에의 지향과 병행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는 인격발전의 필연적인 소산이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되는 그림자는 자아의 일방성 때문에 외계에 투사됨으로써 인격의 전체성을 실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외계에 투사된 그림자를 다시금 자아에 되돌려 나의 이루로 받아들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투사를 거두고 그림자를 자기의 일부로 깨닫는 작업은 반드시 분석가에게서 분석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아 반성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 그리고 그림자를 나의 일부로 동화시킨다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내안에 내가 비난하는 열등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통찰이지만, 내가 진정으로 나의 그림자를 나의 것으로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림자가 나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그림자가 되어 그것을 살려보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성과 관련하여 융의 분석심리학이 특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의식적으로 그동한 유치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하다고 느꼈던 어떤 것들을 적극적으로 살려서 체험해보고, 때론 즐길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것은 당연히 도덕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실현이란 때론 세속적인 도덕 규범과 갈등을 일으키며, 그것을 이겨내는 용기에 의해서 거두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그림자의 의식적 살림은 더 커다란 인격의 해리(분리성 인격 장애), 그림자에 의한 무의식의 지배를 막을 쑨 뿐만 아니라, 그림자에 숨겨져 있던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서 그림자는 의식화, 실천을 수반하는 체험적 수용을 통해 대부분 창조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축구, 격투와 같은 격렬한 스포츠나 헤비메탈과 같은 강렬한 음악을 너무 남성적, 폭력적이라 비난하고 매도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에서 수양만 하던 선비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되는 대로 버린 손톱, 발톱을 먹고 자기와 똑간은 모습이 되어 아들로 둔갑한 쥐를 만나 시비 끝에 쫓녀났다가 스님의 도움으로 고양이를 가져 가서 쥐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그림자문제와 그 극복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림자의 이와 같은 의식화는 분석과정 초기에 자주 겪는 어려움인 동시에 또한 보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림자가 원형과 관련될 때는 좀처럼 그 의식화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게 거의 하나의 자연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주의 깊고, 성실한 관조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림자 원형은 우리가 의식에 동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없애거나 그리하여 하나도 티없는 사람이 되려는 것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무서운 그림자를 깨닫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성숙의 첫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이론과 그 의미>>>

 

 



1, 들어가며 : 왜 동시성 현상이 문제인가?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아련한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 어떤 친구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아침에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아버님이 병으로 누우셨다는 말을 한다. 실로 인과율과 통계법칙으로 설명이 안되는 이러한 경험은 본인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속에 내밀하게 간직한 경험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만나는 이 생경하고 모호한 경험은 태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 가운데 면면히 축적된 사건이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그리 쉽사리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경험을 포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포용력은 경험의 생경함 앞에서 언제나 쉽게 좌절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강렬한 경험과 이미 타진해버린 나머지 빛이 바랜 청동거울일런지도 모른다.

 

칼 구스타프 융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경험 속에 산 사람이었다. 융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인과적으로 연결이 불가능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과거와 미래의 모호한 맞물림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직시하였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임상 사례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희귀한 체험과 환상'[1]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융의 담대함은 '희귀한 체험과 환상'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 던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쉽사리 해명될 수 없는 그 영역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진솔하게, 혹은 대담하게 돌파해 나아갔다는 점일 것이다. 당시 융은 의사의 가운을 입고 있었던 과학자였던 만큼, 서구의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쉽사리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을 건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2]

 

그러나 당시의 정상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과거와 미래의 뒤섞임, 인과율의 파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인생을 거쳐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여든 가까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글이 바로 <동시성 : 비인과적인 연결원리>Synchronizitat als ein Prinzip akausaler Zusammenhange (Zurich, 1952)이라는 논문이다. 여기에서는 이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융의 동시성 개념과 그 의미를 숙고하려 한다.

 

융은 이 논문에서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인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 1880-1926)의 논문에 많은 통찰을 얻었다. 카메러는 20세부터 40세까지 동시성 현상에 관련한 경험사례를 정리하여 <연속성의 법칙>Das Gesetz der Serie (Stuttgart, 1919)이라는 저서에 100가지의 사례로 수록하였다.[3] 여기에서 카메러는 물리적인 인과법칙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연의 원리에서 비롯되는 우연의 일치를 설명하려 하였다.[4] 융은 그의 논문 서두에서 카메러의 연구를 자주 언급하였고 특히 그의 개념인 <연속성의 법칙>에 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였다.[5]

 

동시성에 대한 카메러의 단초를 바탕으로 하여 융은 인과율에 의한 자연법칙을 단숨에 넘어서는 회귀한 경험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을 그의 논문에서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세계에는, 특히 정신세계에는 인과율의 파탄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히고, 그럼으로 인과율의 법칙을 넘어서는 또 다른 '법칙'이 존재할 수 있음을 융은 그의 논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2. <동시성>Synchronicity에 대한 융과 제자들의 개념정의 

 

융의 제자인 프란츠는 "동시적 사건"(Synchronic events)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동시적 사건은 비일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적 사건을 확고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인과적 법칙을 경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적 사건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6]

 

프란츠가 잘 지적하였듯이, 동시적 사건은 우리가 일상에서 결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통계적으로 입증되고 규칙적으로 재생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고, 경험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동시적 사건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시공연속체가 포함하고 있는 일반적 사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7]

 

그렇다면 융은 동시성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일단 그와 그 제자들의 개념정의를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동시성의 유형과 사례를 조명해 보도록 하자. 
  

정의 1 : "나는 그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나 그 사이에 같거나 비슷한 의미가 있으며, 또 시간적으로 일치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둘이나 그 이상 사이의 사건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은 두 가지 사건이 단순하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동시(synchronism)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동시성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계기에 한 개인의 정신적인 상태와 외부적인 사건 사이에 일치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8]

 

정의 2 : "동시성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사건들의 의미 있는 일치이다."[9]

 

정의 3 : "동시성은 우리 의식의 일상적인 차원과 근원적인 차원, 즉 두 정신적 차원의 순간적인 연합이다.[10]

 

정의 4 : 첫째, 동시성은 인과적으로 서로 결부되어 있지 않은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 혹은 상응을 묘사하기 위해서 창안한 개념이다. 그러한 동시적 현상은 예컨대 내적인 사건(꿈, 환상, 예감)이 외부적인 현실에서 상응한 것을 가질 때, 내적인 상(像) 또는 예감이 진실임이 판명된다. 둘째, 비슷한, 혹은 같은 꿈, 생각들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일어난다. 어느 하나도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무의식에서의 원형적 과정과 상호 관련된다.[11]


 

3.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과 그 사례
 




동시성 현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12]

 

첫째, 관찰자와 의식상태(M)와, 외부의 사건(과거/N)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이 첫째의 유형에 관한 융의 경험은 다음과 같다. 융은 지나치게 합리적이어서 치료에 강한 저항을 보이던 여자환자와 분석을 진행하고 있었다. 닫혀 있는 창을 등 뒤로 하고 앉아서 융은 이 환자가 자기의 꿈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환자의 꿈은 매우 인상 깊은 꿈이었는데, 누군가가 황금색 풍뎅이 모양의 고귀한 보석을 선물로 주는 내용이었다. 순간 등 뒤의 창 밖에서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융이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니 황금색 풍뎅이와 유사한 곤충이 방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이었다. 융은 창을 열어 그 곤충을 잡아 환자에게 "여기에 당신의 풍뎅이가 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건네 주었다. 이러한 사건은 환자의 냉철한 합리주의와 지적인 저항에 금을 가게 하였고, 이후에 그 환자에 대한 치료는 매우 원활하게 진행되었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13]

 

둘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관찰자의 지각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외부의 사건(N)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두번째의 유형에 관한 융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융이 언급한 이 사례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회고하였던 사례이고, 많은 문헌에 기록된 사건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스웨덴보그는 스톡흘롬에서 큰 화재가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환상은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순간에 스톡흘롬에서는 대 화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에는 투시, 텔레파시라 불리울 수 있는 것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고 융은 해석하고 있다.[14]

 

셋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미래/N)과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세번째 유형에 관한 융의 진술과 경험은 다음과 같다. 융은 1902년 봄에 던(I.W. Dunne)이 꾼 꿈을 인용한다. 던은 꿈에서 자신이 화산에 서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그 곳은 섬이었고 던은 화산 폭발의 위험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꿈에서 4,000명의 주민을 대피시키기 위하여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며칠 후에 던은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다음과 같은 신문의 헤드라인에 쏠리게 되었다. "마르티니크의 화산폭발―용암이 도시를 휩쓸어 갔다. 40,000명 이상의 인명 유실."[15]

 

또 다른 경험은 다음과 같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융에게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16] 
 
 

4. 동시성 현상의 역학과 의미

 

우리는 위에서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을 살펴 보았다. 이 유형과 사례를 바탕으로 동시성 현상은 어떠한 역학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해 보도록 하자.

 

첫째, 동시성은 무의식의 보완기제의 산물이다.

 

실로 <집중>은 의식의 특징이다. 우리는 의식적 집중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사리분별을 가하고 세계를 분명하게 파악한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집중의 강도가 높아지는 반면, 세계 전체에 대한 통전적이고도 온전한 수용력이 낮아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전체의 세계에 대한 조명을 쉽게 상실해버릴 우려가 있다. 이런 면에서 의식의 예리한 칼날은 무의식의 육중함에 비해 쉽게 소진되거나 마모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갇힌 의식의 감옥 철창 사이로, 끊임없이 온전하고 보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의식을 향해 암호와 메시지를 보낸다.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동시성의 경험은 무의식의 보완기제이며, 또한 개인의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험인 것이다. 빅터 만스필드(Victor Mansfield)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동시성 경험의 의미와 목적은 무의식적 보완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다. ... 동시성 경험은 개인적인 측면의 의미를 지닐 지언정, 그 경험은 원형적인 차원이며 보편적인 차원이다."[17]

 

둘째, 융의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에 기반하고 있는 정신 현상에 관한 해명이다.

 

인과론의 파탄 속에서도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해명한 융의 시도는 가히 예언자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에 기반한 정신적 현상의 한 면을 밝히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융의 동료인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는 융의 심리학과 과학과의 관련성을 <인간과 그의 상징>Man and His Symbols 후반부에서 개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프란츠에 의하던 융이 전개한 정신현상에 관한 이론과 현대과학은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고 한다.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융의 동시성 이론을 물리학적으로 해명하는데 매우 커다란 일조를 한 융디안 빅터 만스필드(Victor Mansfield)는 EPR 사고실험과 양자 파동과 데이비드 봄의 내장 질서(Implicate Order)와 동시성 현상과의 관련성을 심도깊게 논의하고 있다.[19] 

 

EPR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EPR 사고실험을 통하여, 전자와 다른 전자 사이의 정보소통에 있어서 시간의 개입이 없이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장(field)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동료제자인 포돌스키와 로젠과 함께 중요한 사고실험의 결과인 논문을 발표하였다.[20]

 

이 세 사람의 약자를 띤 실험은, 초기 상태에서는 상호작용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서로 분리된 양자적 대상인 S1과 S2의 두 체계를 상정하였다. S1과 S2는 물론 공간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 실험의 요약은, S1에 외부의 영향력으로 인해 결과로서 S1이 변했을 때 아무 관계도 없는 S2가 동시적으로 S1의 변화값 만큼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물론 상식적인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일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서는 사고 실험이었으나 1982년 프랑스의 아스페(Aspect)의 세 번에 걸친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판명된 실험이었다. 그 결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실재가 알지 못할 상관성이 있고 서로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인과율을 넘어선 관계로 직조된 세계라는 것을 밝혔다.[21]

 

만스필드는 인간의 내적인 정신의 영역이 바로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EPR이 작동하는 영역, 그리고 인과성과 확률을 동시에 고려하는 양자역학에 있어서 살아있는 내적인 정신의 영역을 양자파동(quantum wave)의 영역으로 해명하고 있다.[22] 또한 그는 현대물리학의 입장에서, 초심리학적인 현상은 자연법칙의 비인과적 표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서 초심리학[23]을 자연법칙의 일부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24] 

 

셋째, 동시성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무의식은 현존하는 인과적 시공구조를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영역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부영은 "무의식에는 의식의 제약된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이를 상대화 하는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25]고 본다. 의식은 4차원 시공연속체를 매개로 한 사태이지만 무의식은 4차원 시공연속체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초기에 융은 고전적인 물리적 세계상의 3요소인 공간, 시간, 인과성에 동시성을 결합시켰다. 이후 융은 물리학의 혁명의 영향과 파울리의 도움을 받아 시공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공식을 에너지(보존)―(시공)연속성으로 대치하였다. 이는 시공의 절대좌표 조차도 정신 안에서 상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라는 그 아르키미데스 점은 시공연속체 안에 있으면서 그를 넘어서는, 다차원적으로 열린 초점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정신은 시공 안에 있지만 정신은 시공을 넘어서 있다.
 

융은 구체적으로 그의 자서전 12장 <죽음 뒤의 생(生)에 관하여>에서 정신의 일부는 시공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시공간의 관념과 인과론이 모두 완전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완전한 세계상을 최종적으로 그려낼 때에는 이전의 관념과는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간, 공간, 인과론을 지닌 인간의 세계가 그 배후에 또는 그 이면에 있는 사물의 다른 질서에 관련되며, 그곳에서는 "여기와 저기"도 "이전에, 그리고 뒷날에"라는 구별도 중요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융은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 질 수록 그것은 절대성인 무시간성, 무공간성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고 술회하고 있다.[26]

 

동시성은 철학적인 견해도 아니고 인식에 필요한 원리를 제시하는 경험적인 개념이며 물질주의나 형이상학도 아니라고 융은 그의 글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하였다.[27] 그러나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동시성에 관한 융의 착상과 지론은 이미 경험과학으로서의 심리학 안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수위를 훨씬 넘어버린, 매우 중대한 신학적, 형이상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신학적으로는 신 인식에 관련한 신론과 닿아 있고 형이상학적으로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인식지평을 논의하는 인식론, 주체와 주체 사이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논의하는 관계론, 또한 주체를 근거지우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의 존재론과 닿아 있다.

 

융의 동시성은 인과적으로 상호 독립된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인 것과 지속에 대한 논의[28]가 융의 동시성 현상에 어떠한 관점을 제공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와 지속은 융의 동시성 현상에 대하여 다섯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1) 동시적인 것은, 동시성 현상의 기초가 되는 인과율로부터 독립된 사건들의 존재론적 기반을 형성한다. 동시적인 존재들은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해서 발생하는 존재들이다. 인과율에 저촉되지 않는 동시적인 영역의 확보는 절대시공간에서 상대시공간으로 넘어가는 융의 시공간 이해의 가장 구체적인 성과이다.

 

(2) 동시적인 것은, 동시성 현상, 즉 의미있는 사건의 우연적인 일치가 의식적 차원에서는 놀라운 경험일 수는 있어도, 결코 놀라운 경험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이라는 근원적인 지각양태에 바탕하고 있다. 모든 정보는 광속을 기준으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로 축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태양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어떠한 존재의 정보라도 7분 30초 이내에 <동시성 현상>으로 사건화되는 것은 결코 낯선 사건이 아니다. 인과적 효과성의 '강물'은 나와 너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한 Unus Mundus와 매우 가까운 영역이다. 의식적 지각의 후기양태로서의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은 인과적 효과성의 견실한 여건을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연장적 관계를 동시적인 영역에 투사시킨다. 우리의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는 우주 전체와 동시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의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는 나의 신체와 동시적인 영역에만 관계를 유지한다(cf. 동시성 현상의 두번째 유형).

 

(3) 동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에 의해 정의되는 지속은 동시성 현상의 다차원적 실재성을 보증해 준다. 고전적인 시공이론을 넘어서서 상대성이론을 그의 체계 속에 통합시키는 방식은 바로 M을 관통하는 지속이 하나 이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성 현상'은 우리의 4차원 시공연속체 안에서 무한히 다양한 양태로 출현할 수 있다.

 

(4) 현재라고 하는, 시간폭을 가지고 있는 지속의 영역은 인과관계가 파괴하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최소 지속의 단위가 현재에 적용된다면 아래의 보기와 같이 최소 지속 내부에서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 현재라고 하는 시간폭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서는 광속보다 빠르지 않는 물체의 세계에서도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29] 융의 동시성 현상은 바로 현재라고 하는 영역에서 인과율이 파기되면서, 동시에 세계 전체의 '순간'에 대한 의식적 파악이 진행된 찰나인 것이다(cf. 동시성 현상의 세번째 유형의 접근가능성).

 

(5)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를 확보해 주는 현재화된 지속은 개별적인 인격들의 정체성을 구유(具有)해 줄 뿐만 아니라 Unus Mundus 개념을 구체적으로 조명해 준다.

 

모든 인격은 동시적 세계의 존재이다. 동시적 사건의 정의는 그것들이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동시적 계기(M와 N)는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의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적 계기는 자기 독립의 절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동시성은 모든 존재의 동등한 위상을 지시한다. 거기에는 비교도 없고 가치도 없다. 바로 그것은 동시적 존재들의 독자적 주체성이 확보됨을 의미한다. 동시에 연대성이 상실됨을 의미한다.

 

동시적 존재들은 상호 독립하기에 서로 연대할 수 없다(M≠N). 이는 하나님의 부재(Deus absconditus)이다. 하지만 동시적 세계의 타자성은 이제 세계의 연대성으로 전진한다.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를 확보해 주는 현재화된 지속이 바로 Unus Mundus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현존(Deus revelatus)이다. Unus Mundus에 의하여 동시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은 세계와의 조화를 구현할 수 있다(M=N). 이는 Unus Mundus에 근거한 절대지의 활동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30] 

 

넷째,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동시성 현상을 통하여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차이를 강조하는 클레아투라와 통합이 이루어지는 플레로마 사이의 불가분리적 연결인 하나의 세계(Unus Mundus)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또한 이 안에서 운행하는 절대지(das absolute Wissen)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동시성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사이의 의미있는 일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적 주관적 의식의 카테고리가 박살나고 이 하나의 세계에 내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의 그물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직관적 파악은 동시성 현상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매우 강렬한 체험인 것이다. 또한 원형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을 동시성 현상은 열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대한 주체의 파악(파악의 주체)과 그 파악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 세계[존재론적 시공간], 혹은 그 파악을 매개로 투사되는 객관적 세계[인식론적 시공간] 사이의 흩어진 조각들은 주체가 세계에 가하는 논리적인 분별지(分別智)에 불과할 뿐, 실제적으로는 Unus Mundus가 존재할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 Unus Mundus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오히려 이들을 품는 근원적인 깊이이다. 융은 Unus Mundus를 물질과 마음이 분화되지 않고 따로 따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융에 의하면 "절대지"는 감각이나 경험적인 자아의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31]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의 일상적인 범주의 제한을 넘어서는 동시성의 사건을 매개로 절대지와 접촉하게 된다.
 

5. 나가며 : 동시성 이론의 현재적 의미와 성찰 

 

첫째,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었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융의 동시성 이론은 맹목적인 합리성과 과학성에 찌든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거점을 확보해 준다.[32] 

 

둘째, 심리적으로 동시성 현상은 <자기>Self의 표현과 관련이 있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Ego를 향해 전체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아의 결여를 직시하고 미래의 혹은 현재의 치명적인 손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 프란츠는 동시성이라는 현상 안에서 Unus Mundus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인간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33] 동시성 현상 역시 무의식의 작용인 한,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전체성과 관련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음에 틀림없기[34]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레 다가오는 기이한 조짐들을 잘 포착해 내는 것, 그리고 무의식의 미세한 음성을 귀담아 듣는 것이 매우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 융의 동시성 현상은 인간 인격의 온전한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과도 연계[35]되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동시성 현상은 종교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던져준다. 인간은 동시성 체험을 통하여 온전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체험은 누미노제[36]적인 것일 수 있고 더욱 커다란 존재에 의하여 자신이 운행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영적인 성숙을 인도한다. 특히 비인과적 연계성인 동시성은 우리에게 주체와 대상, 정신과 물질, 인과성과 목적론 사이의 온전한 조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동시성 현상은 주체의 인식론적 영역과 세계의 존재론적 영역 사이에 의미있는 일치를 심오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37] 어쩌면 우리는 다시 적막감이 끝도 없이 감도는 무한한 동일성의 우주를 머리속으로 그려낼 수 밖에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실로 동시성 현상은, 우리를 향한 융의 투명한 해명과 제시가 아니라 더욱 우리를 미궁으로 인도하는 암호가 된다. 융은 물질과 정신의 문제, 몸과 마음의 문제[38]를 해명하는 데 매우 고려할만한 유용한 단서로서 '동시성'의 문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비밀이자 역사의 비밀인, 누적적인 시간의 문제, 우주의 대극에서의 영혼의 위치와 영혼의 불멸, 물질과 정신을 동시에 아우르고 분유하는 Unus Mundus의 그 깊이에 관한 물음이 스산하게 다가온다. 실로, 우주는 아직도 인류가 해명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비밀로 간직한 채 저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각주
 

1)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Jung, Carl"

2) 융이 동시성(Synchronicity)에 관련하여 겪은 연구의 어려움과 이 해명을 둘러싼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Synchronicity : An acausal Connecting Principle, Collected Works VIII, pp.419-420. 서문에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3) Arthur Koestler(최효선 역), {야누스-혁명적 홀론이론} (서울: 범양사, 1993).

4)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Kammerer, Paul" 

5) Synchronicity, pp.424-427.

6) Marie-Louise von Franz, Psyche and Matter (Boston : Shambhala Publications, 1992), p.137.

7) 이부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인과적 동시성 현상은 폰 프란츠도 말한 것처럼 '바로 그렇다는 이야기'Just-so-story이다. 우리의 논리로 남김없이 증명하는 일은 없으나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로써 합리성 너머의 비합리적 질서의 가능성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측면임을 알게 된다." 이부영, {분석심리학}(서울 : 일조각, 1998), p.323.

8) Synchronicity, p.441.

9) Ibid., p.520.

10) Marie-Louise von Franz, Psyche and Matter, p.258.

11)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p.470.

12) Synchronicity, p.526.

13) Ibid., pp.525-526.

14) Ibid., p.526.

15) Ibid., pp.443-444.

16) C.G. Jung, Answer to Job, The Collected Works, vol. 11. p.386.

17) Victor Mansfield, Distinguishing Synchronicity from Parapsychological Phenomena : An Essay in Honor of Marie-Louise von Franz, pp.4/23. in http://lightlink.com/vic/distinguishing.html

18)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 (서울 : 통나무, 1997), p.322.

19) cf. Victor Mansfield, Synchronicity, Science, and Soul-Making (Chicago : Open Court Publications, 1995).

20) Einstein/Podolsky/Rosen, 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n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cial Revier 47(1935). 

21) on Jungian Transpersonal Psychology, Psychokinesis, Precognition and Remote-Viewing in Post-Modern Physics. in http://www.hia.com/pcr/mansfeld.html.

23) 실제로 융은 점성술, 강신술, 텔레파시, 염동(念動)작용, 투시력, 초감각적 지각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이를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비적 현상은 동시성 현상과 집단무의식의 영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동시성과 집단 무의식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동시성은 집단무의식에 기초해 있고,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경향들에 의하여 형성된 원형으로의 진입을 제공해 준다.

24) Distinguishing Synchronicity from Parapsychological Phenomena, pp.13/23.

25) {분석심리학], pp.316-317.

26)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p.347.

27) Synchronicity, p.512.

28)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우주의 횡단면(橫斷面)인 동시적 세계 안에 포함된 정보는 결코 (주체에게)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과거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현재의 태양을 결코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우주의 횡단면을 화이트헤드는 지속(Duration)이라고 부른다. 지속은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현재의 우주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지속은 우선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의 현재의 횡단면인 지속의 두 성원은 동시적이다. 둘째, 지속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과거에 있던가 미래에 있을 뿐이다. 셋째, 지속이란 지속 안에 모든 성원이 상호간에 동시적인 계기들의 완전한 집합이다. 정보소통이나 세계 인식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는 '정보'와 '인식'을 더욱 합리적인 언어로 새롭게 해명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 The Free Press, 1978), pp.125, 168, 320.

29) 전병기, "화이트헤드의 지속과 이중 스릿 실험", {창조성의 형이상학} (한국화이트헤드학회, 1998), p.102.

30) cf. 전 철, "화이트헤드의 인간이해", {신학의 미래} (한신대학교 신학부, 1997).

31) Distinguishing Synchronicity from Parapsychological Phenomena, pp.5/23.

32) cf. Synchronicity, p.421.

33) Psyche and Matter, p.263.

34) 김성민, {융의 심리학과 종교} (서울 : 동명사, 1999), p.364.

35) cf. Victor Mansfield, The Challenge of Synchronicity (Quest Magazine, May 1996). in http://lightlink.com/vic/chall.html.

36) Mel Faber, Jungian Synchronicity : Questions, Issues, Alternatives (Praeger Publishers, 1998), p.5/23. http://www.jungindex.net/faber/jungdian_synchronicity.shtml

37) Stephen J. Davis, Synchronicity and Information Theory in http://members.tripod.com/~One_3/page-1.html

38) cf. Synchronicity, p.516.


 
 
한신 29 (한신대학교, 1999), pp.152-163

융의 동시성 현상과 물리적 자연의 본성





흔히들 우리는 근대서구의 기초가 된 주객도식을 비판하곤 한다. 사실 주객도식은 주체와 대상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옹호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러한 주객도식은, 자연은 대상이고 대상과 동떨어진 주체로 정신을 이해하는 기초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주객도식이라는 사고가 정신의 모태인 자연을 망가트리고, 타인을 여전히 인격적 너Du가 아닌 그것, 사물성Es의 차원으로 추락하게 한 요인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사실 주객도식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정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기에 있다. 정신의 자연의 대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 오류투성이로 보이는 듯한 '주객도식' 이외에는 다른 방식이 특별히 없어 보인다는 점에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주객도식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정신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주객도식 이외에 특별한 다른 방식이 경험적으로 가능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융의 동시성 현상이 이러한 정신의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접촉방식인 '주객도식'과 어떠한 상관을 맺고 있는가를 헤아릴 것이다. 그리고 감추어진 정신과, 드러난 정신인 자연 사이의 상관의 문제를 헤아릴 것이다.

융에게 있어서 정신, 영혼Seele은 해체될 수 없는 일종의 아르키미데스 적인 점으로 상정되어 보인다. 물론 융의 정신은 심리학적 의미의 정신이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실재를 인간의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조명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신의 실재론적 기원과 의미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정의에 필연적으로 포함될 필요가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융의 사상의 기초에서 정신의 문제를 볼 때에는, 정신은 탄생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는 입장에 서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에 상응하는 아르키미데스 점인가. 그것은 자연에 상응하는 점이다. 저 밖에는 자연이 있고 내 안에는 정신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 점에서 융은 "자연이라는 물리적 사태에서 창발한 정신" 이라는 도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정신은 자연으로 외면화된다는 관점에 서 있는 듯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저 밖'의 순수한 자연[1]을 나의 정신은 지금 보이는 자연으로 구현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융이 말한 동시성 현상은 이러한 정신과 자연이라는 '주객성'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상응성에 대한 경험적 고찰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저 자연이 결국은 정신이 구현해낸 하나의 영상이라면 그것은 애시당초 정신과 결부된 하나의 영상일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시각의 세계 일부에는 화면이 접힌 곳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접힌 곳은 대상의 초점이 바뀌어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망막의 일부가 접혀졌기 때문에 망막에 잡히는 세계영상이 접혀 보이는 것이다. 눈에 접혀진 곳은 눈 밖의 저 세상으로 투사되며, 아무리 시각적 대상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 접혀진 곳은 대상을 왜곡시킨다.

융은 이렇게 우리의 자연을 정신이 구현해 낸 일종의 실재적 영상 혹은 더 고양된 의미체계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정신은 자연을 주객도식 속에서 대상화 하지만, 사실은 자연은 정신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과 자연의 이러한 궁극적 상응성과 비매개적 관련성에 대한 '예증'을 바로 융은 동시성이라는 관념 속에서 제시한 것이다.

정신을 자연에서 출현한 부가적인 산물로 이해한다면, 정신은 자연의 인과성을 파괴할 수 없으며 인과성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융과 같은 관점, 즉 자연이 투사된 정신이라는 관점에서는, 자연의 인과성에 정신이 필연적으로 환원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파울리나 융은 인과성을 실재의 전제가 아닌 실재의 한 요소로 상대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자연에 대한 관찰의 문제와 투사의 문제는, 사실 파울리를 위시로 한 당대의 양자론의 모델을 고민했던 자연과학자, 자연철학자의 핵심적 사안이기도 했다. 양자론의 문제는 미시세계에 대한 기술적 모델구성의 맥락도 있지만, 정신과 자연의 주객도식성을 실재의 본질 속에서 궁극적으로 해명해 나아간다는 맥락이 있다. 융의 동시성에 대한 연구와 심리학적 모델 또한 이러한 해명의 태도와 시대정신을 유사하게 공유한다.

정신은 자연을 관찰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정신에 맞물린 자연에 대한 관찰이며,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투영된 정신에 대한 관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동시성 현상과 같은) 내 안의 정신과 내 밖의 정신 사이의 상응성, 그리고 우리의 체험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신과 자연 사이의 비매개적 소통과 직시의 문제는 결코 실재의 본질에 어긋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감추어진 정신은 드러난 정신인 자연에 대한 성찰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대면하게 된다. 융의 동시성에 대한 성찰은 심리적 모델이지만, 드러난 정신인 자연의 표면을 진술하는 자연과학적 모델이 융과 결코 대립적이라고 이해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적 모델 또한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인간 정신성의 원형과 전혀 관련이 없는 외계인의 기호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융과 파울리가 30년 가까이 진지하게 대화할 수 밖에 없었던 그 근거를 우리 실재는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여전히 실재는 그러한 고민에 대하여 열려 있다.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전이轉移와 역전이逆轉移: Transference and countertransference>
 
  전이(Übertragung)는 환자가 어린 시절에 부모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체험한 감정을 치료자에게 옮기는 현상으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는 치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역전이(Gegenübertragung)는 환자에 대한 치료자의 무의식적 감정반응으로, 환자가 마치 치료자가 겪은 과거의 어떤 중요한 인물로 느끼게 되는 현상으로 이것 역시 프로이드파의 정신분석에서는 치료에서 극도로 피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다.

  융학파에서도 정신치료에서 전이현상이 중요하다는 점은 받아들이고 있고, 치료자의 역전이도 치료 도중에 늘 검토되어야 한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또한 전이현상은 항상 치료자와의 결합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 그것이 흔히 성적인 결합과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에 있어서의 전이란 반드시 성적인 욕구의 표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무의식적 내용물이 무엇이든 간에 치료자에게 옮겨지는 일종의 투사현상으로 본다. 투사되는 무의식의 내용에 따라, 즉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이 투사되는 경우는 개인적 전이(personal transference),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인 원형이 투사되는 경우는 원형적 전이(archetypal transference)가 된다. 실제에 있어선 개인적 내용과 원형적 내용이 섞여서 나타나는 경향이 많다. 개인적 전이의 형태는 부모나 형제 자매, 학교 선생, 그 전에 치료받았던 의사에게서 느낀 감정이 현재 치료자에게 옮겨지는 경우 등이고, 원형적 전이는 구제자의 상이나 전지전능한 신상, 또는 괴물이나 악마의 상을 치료자에게서 보고 있는 상태이다. 신경증 환자의 정신치료에서도 때때로 치료 초기에 치료자를 초인적인 구세주와 같은 인물로 보는 데서 경험할 수 있다. 역전이는 전이와 반대되는 경우이다.

  전이의 해소는 어려운 작업이다. 때로는 해소되지 않은 채 머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이는 유익할 뿐 아니라 치료상 없어서는 안 되는 과정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분석심리학의 정신치료에서는 정신분석에서처럼 전이가 반드시 일어나야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전이는 치료과정에서 다소간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전이에도 불구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환자의 문제를 치료자가 편견 없이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나갈 때 불필요한 심한 전이의 발생 없이 환자는 자신의 동기나 문제를 자연스럽게 이해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역전이 문제는 분석심리학적 정신치료의 핵심이 치료자의 인격인 만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진다. 치료자의 개인분석이 강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투사현상이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인간관계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중요한 것은 투사 그 자체보다 투사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자세이다.
 
 
<<<심리학적 유형: psychological types>>>

 

심혼의 구조: 칼융의 심리학적 유형

 

 

  1. 학설의 배경과 주요 특징

 

 심리학적 유형론은 융의 학설 가운데 비교적 초기의 학설이다. 융의 후대 관심은 점점 깊이 무의식의 내용과 기능에 집중되었으므로 무의식에 관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소하고 어렵게 받아 들여질지 모르지만, 심리학적 구조와 기능의 유형에 관한 이론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그만큼 보편화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융의 공로로 내향적, 외향적이란 말은 그 말을 누가 제창했는지 모를 사람도 일상적인 대화에 들먹일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그로 인해서 그 본래의 뜻이 많이 왜곡된 것도 사실이다.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오해, 논쟁, 편견의 근원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거나 보는 입장과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임을 흔히 알 수는 사실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 격론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반목하여 피비린내는 권력투쟁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는 착각이다. 남도 나와 같이 생각하겠거니 하는 믿음은, 특히 친목과 화합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끼리'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임을 강조하고, 그러한 믿음을 굳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는 이러한 동일시가 특히 심하다. 그만큼 다른 사람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느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깊이 실망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정도를 넘어 상대를 저주하며 배신자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의 밑바탕에 깔린 무의식은 이렇게 나와 남이 같지 않다는 인식이 주는 뼈저린 상처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차이를 넘어 나와 남의 합일을 기원하는 회한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타인은 내가 아니다. 한 가족 내에서도 마찬갖다. 이러한 구별을 의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고통은 인간관계의 진실을 인식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융의 심리학적 유형론도 융 자신의 고통스러운 갈등을 밑거름으로 생긴 것이다. 융은 그 고통을 심리학적 통찰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데 그의 인간 유형론의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고통을 무시하고 남의 고통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자신의 고통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무어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또한 융의 유형론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2. 일반적 태도의유형

 

 융은 심리학적 유형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일반적인 태도형태에서 보는 유형으로 흔히 말하는 내향적 태도, 외향적 태도를 말한다. 둘째는 각 성격의 특수 기능을 중심으로 그중 적응 과정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분화된 기능에 따라 구분하는 유형으로 이를 여덟가지 기능 유형으로 나누었다.

 

 흔히 우리는 내향적인 태도는 수줍고 비사교적인 태도, 외향적인 태도는 사교적이고 활달한 사라의 태도를 두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통속적인 해석일 따름이다. 틀리지는 않지만 그 이론의 한 면만을 보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내향적, 외향적 태도의 구분은 그 개인이 주체(자신)와 객체(타인과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에 따라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태도가 주체보다 객체를 중요시하면 그는 외향적 태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객체보다 주체를 중요시한다면 그는 내향적 태도의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는 것이 주로 외부의 상황에 따르는 것일 때, 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외부보단 자기 자신이면 그는 내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미술 전람회에 가서 어느 그림이 좋다고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이 말한 동기가 전날 본 매스컴의 비평이 좋았기 때문이고, 그 화가가 유명한 사람이어서 객관적으로 좋다는 평을 내렸다면 그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그는 객관적인 규준에 따라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문의 평이 좋고 그 화가가 세상에 잘 알려진 사람이라도 내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한다면 그의 태도는 내향적이다. 그의 모든 판단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자기의 주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항상 의견의 차이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외향형과 내향형은 간혹 완벽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서로를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견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좀더 대화흘 진행하면 할수록 매울 수 없는 큰 간격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령 음악을 좋아하는 두 유형의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했다고 가정을 하자.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것에 반가워한다. 누구의 곡이 좋고 하는 등의 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별 마찰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외향형의 사람은 음악가의 생활사, 객관적 명성, 유명한 비평가의 연주평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내향형의 사람은 음악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이야기 할 것이다. 외향형의 사람은 곧 상대방이 음악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다고 실망할 것이고, 내향형의 사람은 외향적인 상대방이 지식을 가지고 잘난 척만 하고 실상은 전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외향형, 내향형이란 말은 두 가지 태도가 각각 그 사람의 전생애를 통해서 거의 하나의 생활 습성이 되었을 때를 두고 말한다. 이 두 사람은 실상 모두 적극적인 사람이다. 다만 내향형은 주체를 지키는 데 적극적이고 객체를 소흘히 하는데 반하여, 외향형은 객체를 따르는 데 적극적이고 주체를 소흘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외향형은 관심이 밖을 향하여 객관 세계로 뛰어들고, 내향형은 객체를 무엇인가 주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밖에서 오는 자극을 신중하게 파악하는데 주의한다.

 

 외향형은 리비도(심리학적 에너지로써의)가 바깥 세상, 다른 사람등간의 객관세계로 나가는 데 반하여, 내향형에서는 좀처럼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외향형은 사회활동과 실리를, 내향형은 자기 충실과 원리 원칙을 중시한다.

 

 이 두 가지 유형은 너무나도 틀리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도 쉽게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경향이 과연 교육이나 그 밖의 환경 영향 때문에 불과하겠느냐고 융은 의문을 표한다. 물론 사회나 교육에 의해서, 혼은 본인의 의지 여하에 따라 이러한 성격들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어릴 때부터 이 두 가지 성향은 너무나 뚜렷이 구별된다. 물론 어린이에게서 부모의 무의식적인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형제 자매간에서 조차 각기 내향적인 성경이 두드러진 아이와 외향적인 아이가 있다. 또한 이런 두 가지 유형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나 볼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된 사회 계층간의 갈등또한 끊이지 않는다. 외향, 내향간의 상반된 유형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모든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거의 타고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인간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다산형이고 다른 하나는 탐구형이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내향형과 외향형과 비슷한, 서로 다른 적응 양식을 생물학적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적응 양식을 가진 생물과 종족들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방어력은 적으나 왕성한 생식력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적응 양식이고(농경민족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생식력은 적으나 자기 보존을 위한 방어력으로 무장함으로 적응해 나가는 양식이라 볼수 있는 것이다(유목민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두 가지 방향의 특징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특징의 원인이 무엇이겠는가는 아직 확언할 단계는 아니라고 융은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생리적은 이유가 문제겠지만, 현재로서는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본래 타고난 유형에 반하여 살아갈 때는 그 사람은 타고난 생리적 쾌적감이 극도로 손상되어 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적 유형 Psychological Types (1)


종종 어떤 사람과 대화나 토론을 하다가 아무리해도 서로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여 말싸움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나중에 차분히 되돌아보면 그러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오해, 논쟁, 편견의 근원은 서로가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이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사물을 볼 때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가치에 대한 전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요. 융도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프로이트나 아들러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우리의 견해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유형의 문제와 부딪치게 되었고, 그러한 의문이 심리학적 유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융은 심리학적 유형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태도상의 유형으로 외향적 태도 extraverted attitude내향적 태도 introverted attitude로 구분합니다

 

둘째로는 정신의 특수기능상의 유형으로 네 가지 정신기능 : , 사고 thinking, 감정 feeling, 감각 sensation, 직관 intuition에 따라 구분합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객체를 주체보다 중요시하고 주로 객체의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 그 사람은 외향적 태도를 취한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객체보다는 주체를 중시하는 태도를 지닌 경우에는 내향적 태도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저 명랑하고 사교적이든가 수줍고 비사교적이라는 것만 가지고 외향적, 내향적 태도를 나누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마지막에 결정하는 것이 사회의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인지, 그 보다는 자기의 주체에 입각한 기준인지에 따라 외향적, 내향적 태도가 구분 됩니다이러한 태도 유형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친형제들 간에도 서로 다르고, 교육 정도나 계층간에 그 분포의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정신의 네 가지 기능 중, 사고와 감정기능은 이치에 맞게 진행되는 판단기능이므로 합리적인 기능이라 하고, 감각과 직관은 이성적인 고려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인식이므로 비합리적인 기능이라고 합니다.   합리적 기능의 양극인 사고와 감정 ; 비합리적 기능을 이루는 양극인 감각과 직관은 서로 대립된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한 기능이 활동을 하면 다른 기능은 저절로 눌리게 됩니다. 융은 이 기능유형도 어느 정도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을 시사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에 따라 네 가지 기능 중에서 가장 분화된 기능(주기능 또는 우월기능)이 있고 가장 덜 분화된 기능(열등기능)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무의식의 열등한 기능은 늘 열등한 채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의 의식화로써 분화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화 발달시켜 의식에 통합시키는 작업은 자기실현, , 개성화과정의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이상과 같은 일반적인 태도나 특수한 정신기능 중 어느 것을 주로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이 구분됩니다. 즉 일반적 태도의 유형으로 외향형과 내향형 : 여기에 각각 사고형, 감정형, 감각형, 직관형이 결부되어 외향적 사고형이라든가, 내향적 감정형등 여러 유형으로 구분됩니다.(각 유형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보다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심리학적 유형론은 융의 심리학설의 초기에 속하는 설로서 주로 의식의 태도와 기능을 다룬 것이면서 그것과 무의식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레치머, 슈나이더, 에리히 프롬 등의 의학심리학적 성격유형과는 다른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학설은 인간 정신에 내포되고 있는 두 가지의 상반된 대극의 존재와 그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외향형의 사람의 무의식에는 미분화된 내향적인 태도가 있을 수 있고, 사고기능이 발달한 사람의 무의식에는 미분화된 열등한 감정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융의 심리학적 유형을 적용시킬 때는 그 사람의 의식의 태도와 기능뿐 아니라 무의식의 상태도 함께 보아야만 합니다.

  네 가지 기능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회적이고 교육적인 그리고 가정의 영향으로 어느 특정한 기능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다른 것을 배제하게 되면 배제된 기능은 분화 발달되지 않아 유아적이고 고태적인 상태로 무의식에 남아있어 문제를 일으키곤 합니다. 이런 기능을 열등기능이라고 하고, 반대로 잘 발달된 기능을 우월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열등기능이라고 늘 열등한 채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분화될 수 있고, 그것을 의식적인 노력으로 분화 발달시켜 의식에 통합시키는 작업은 자기실현, 개성화과정의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감각형: sensation type>: 연구중

 

<외향형>

 

외향형 사람의  일반적인 의식 태도

 

 중요한 결정이나 행동의 대부분이 주체의 의견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인 상황에 좌우될 때 이를 외향적 태도라 하고, 이런 태도가 습성화 되어 특징을 이루면 그 사람을 외향적인 사람이라 부른다. 누구나 살아가자면 외부 세계가 주는 자료들에 따라서 자기 태도를 결정하지만 외향형은 주로 객체에 자신을 맞추며, 객체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판단해 가는 경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즉 사는 법이 좋든 나쁘든 객관적인 사정이나 상황에서 오는 여러가지 요구에 직접 부합되는 것이면 그 사람은 외향적이다. 물론 외향형이라고 해서 주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관보다는 객체에서 오는 힘이 의식의 태도를 결정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외계로 향하고, 내적인 것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 억눌린다.

 

 도덕적인 행동 기준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요구, 즉 일반적인 도덕관과 완벽히 일치한다. 일반적인 도덕관이 바뀌면 자기의 행동 기준도 바뀐다. 그 때문에 큰 갈등을 겪지 않는다. 그러므로는 그 사람은 내향형인 사람의 입장에선 곧잘 기회주의자, 지조 없는 사람, 뼈대가 없다. 비겁하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삼국지의 경우를 들면 조조와 같은 인물이 해당될 것이다). 물론 외향형의 입장에서도 내향형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외향형에게 내향형은 이해할 수 없는 고집불통, 시류를 외면하는 독선가, 이기주의자 라는 비난을 듣기 쉽다(조조의 입장에서 유비를 본다고 생각해보자).

 

  보다 높은 견지에서 볼 때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반드시 어떤 경우에나 정상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 비정상적이면 외향형의 태도는 곧바로 환경의 비정상성에 부합되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는 사회에 함께 보편적인 생명윤리에 어긋나는 행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은 사회와 꼭같이 멸망하게 된다. 여기에 외향형의 제약이 있다고 융은 말한다.

 

 외향형의 태도가 일방적으로 극단화될 때 자기의 주체를 소흘히 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주관적인 사실로서 외향형의 사람이 가장 소흘하게 되는 것이 신체이다. 이것은 그 자신에게 너무 외적이고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외향적인 태도가 너무 지나치면 신체가 고통을 받는데, 대게 외향형은 신체 감각의 이상화가 눈에 띄게 진전될 때에야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외향형은 성격상 모든 것을 구체적, 객관적으로 보는 버릇이 있으므로 신체 증상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 외향형은 지나치게 객체에 순응하는 나머지 객체에 완전히 흡수되어 주관적인 것을 잃어버릴 위험도 있다. 이런 주관적인 것은 의식에서 배제되어 분방한 환상작용으로 무의식에 억압되어 의식을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주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남자다운 남자가 갑자기 건강에 대하여 염려하기 시작하고 신체기관의 조그만 이상에도 놀라는 경우가 있다면, 그 사람은 외향적 태도가 너무 극단으로 치달아 이제 다른 것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게 이른게 아닌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융은 외향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인 신경증은 히스테리성 노이로제라고 했다. 히스테리의 특징은 항상 남의 관심을 끌고 주변에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상적인 외향성이 극도로 과장된 것이다. 또한 히스테리성 성격으 다른 특징은 극도의 환상작용인데, 이 때문에 히스테리 환자는 곧잘 거짓말쟁이라는 오해를 받거니와. 이는 의식의 외향적 태도를 보상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삼국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외향형 성격인 조조와 손책은 말년에는 극도의 히스테리와 환상작용에 시달렸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의 태도

 

 외향저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주관적인 것을 무시하고, 객관적인 상황에 따라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건전한 외향형은 항상 적절한 보상을 내향적인 작업을 통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장점인 객관적 현실 참여가 건설적이고 유익한 방향으로 실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외향적인 태도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과장되면 외향적이 아닌 것은 모두 무의식에 억압되고, 이것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종국에는 무의식의 엄청난 압박이 의식에 일어나게 된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의 무의식은 극단적인 내향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에 억압된 내향적 경향은 분화 발달될 기회를 잃었으므로 억압이 오래 계속될수록 미분화되고 원시적이고 고착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내향적 경향은 무의식의 가장 본능적인 충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전한 주체적 판단이나 이에 입각한 행동력이 점차 마비되고, 유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성향이 차츰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의 외향적 태도가 완전하면 완전할 수록 무의식적인 태도는 유아적이고 고착적이다." 극대화된 객체지향성은 미구에는 극도의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거나 욕망에 지배당할 바탕을 마련해두고 있다. 이때 그 사람의 무의식적 경향은 단순한 어린애 같은 유치함을 넘어서는 무자비한 이기주의와, 프로이트가 말하는 근친혼적 욕망에 까지 이를 수도 있다.

 

 외향형은 현재와 바깥 현실에 집착하는 나머지 과거와 역사를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옜날에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뭐라 했는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은 대표적인 외향형이다. 미국의 프로그머티즘은 상당히 이와 같은 외향성을 띤 사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식적으로 끊어버린 과거와 역사는 의식에서는 없어질 지 몰라도, 무의식에서 계속 연명하며 그 개인을 포함한 전인류의 과거가 하나의 요청으로서 의식의 현실주의와 대립하게 된다. 이 점에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전연사와 인류의 역사를 마음속에 지닌다. 역사는 한상 그 현명한 운영을

   절실히 요청한다. '지금까지의 것'은 어떻게든 '새로운 것'에서 발언된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체

   험되어야 한다. 객체에의 전적인 동화는 그러므로 억압된 소수자인 '지금까지의 것'의 원초적인

   항의에 부딪치게 된다.

 

 이렇게 외향형의 의식적 태도에 상반되는 무의식적 경향이 적절한 대상의 정도를 넘어서서 의식에 대항하여 적대적인 반장용을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도 깨닫지 못하는 모순된 경향이 의식 표면에 나타나 그 사람의 행동을 복잡하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 규준에 따라 공정무사하게 사무를 처리하며 항상 남과 사회를 위하여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때때로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해치우려는 아집과 횡포를 부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경우 겉으로만 보아서는 그 사람의 어느 것이 의식적이고 어느 것이 무의식적 태도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누가 무슨 유형에 속하는지 행동으로만 보아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2> 내향형

 

 일반적인 의식 태도

 

 세계는 결코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보이는 것으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칼 융)

 

 외향형의 사람들은 곧잘 모든 지각과 인식이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상 주관적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하다.

 

 똑같은 사물을 보아도 외향형은 객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주로 보지만 내향형은 객체의 인상이 주체 안에서 형성된 것에 의해서 사물을 본다. 내향적인 의식의 태도에도 외적인 조건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지만 언제나 그 판단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주관이다.

 이것을 두고 자기애적, 자기중심적, 주관적, 이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순전히 외향적인 태도에서 오는 편견이라고 융은 비판한다.

 

 현대와 같은 외향적 시대에서는 내향적 태도는 외향적 태도와 동등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1920년대에도 그랬는지 융은 주관적이라는 말은 외향적 시대 풍조때문에 거의 비난처럼 들린다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외향적인 태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무기로 '단지 주관적'이라는 말은 주로 사용되나 그 말의 의미또한 충분히 검토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주관적 요소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 와고 어느 민족에도 있어 온 것이므로 그만큼 보편적인 요소이다. 주관적 요소 또한 하나의 세계율이다. 이 위에 발을 딛고 선 사람은 객체에 근거를 둔 사람과 똑같은 지속성과 효용성과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 태도가 객관적 태도나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태도임에는 틀림없으나, 객관적 태도가 우연성에 의하여 변할 수 있는 것처럼 주관적 태도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것이기보다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내향형의 특징인 주관 중심경향을 절대시하면 글자 그대로 주관주의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게 되어, 외향형으로부터 단지 주관적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편협한 관점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상적인 경우의 내향적 태도는 원칙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정신구조에 순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 이전에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원형의 세계이며, 자아를 훨씬 능가하는 자기이다. 건전한 내향형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이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며 자아에 매달리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향형은 자아를 자기와 혼동해서 뒤바꿀 위험을 늘상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아를 자기의 위치로 무제한 높인다. 그 사람은 자아의 판단을 극대화하고 그것의 절대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의 장점인 무의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외향형에게도 내향적 기능이 있듯이, 내향형에게도 외향적 기능이 있다. 이 둘이 적절하게 보상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자기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내향적 태도가 극도에 다다르면 무의식에는 의식과 반대되는 외향적 경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아는 이와 같은 무의식의 제물이 되거나 전술한 것과 같이 자아의 팽창으로 인한 엄청난 권력욕에 사로잡히게 된다(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던 동오의 군주 손권이 말년에 암군이 된 이유를 상기해보자).

 

 내향형에게 객체가 왜 항상 결정적이어야 하는지 이해될 수 없는 것처럼, 외향형에게는 어째서 주관적인 입장이 객관적 입장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지 의문이 될 수 밖에 없다. 외향형은 내향형이 저만 잘난 줄 아는 이기주의자나 아니면 독선적인 공상가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외향형은 냐행형이 무의식적인 권력 콤플렉스에 영향하에 있다고 가정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런 외향형의 편견에 내향형은 어쩔 수 없이 걸려들 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그의 단정적이고 강한 표현을 통하여 마치 그가 모든 다른 의견을 처음부터 배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게다가 모든 객관적인 원인과 결과 위에 선험적으로 지배하는 주관적 판단에 대한 경직적인 믿음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인상을 주기에도 충분하다(칼 융).

 

 무의식의 태도

 

 내향형이 자기 자신에 입각해서 사물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때 그는 이 세계와 인간 마음의 심층적인 세계를 깊이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라는 엄청난 세계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향형이 자기의 전인격인 자기 자신에게 입각하지 않고 단지 의식의 중심인 자아에만 사로잡히면, 의식의 경향은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히게 되고 객체에 대한 관심과 고려를 무시하게 된다. 그결과 모든 객체와의 관련성은 무의식에 억압된다. 의식의 태도가 자기 중심적인데 비해서 무의식의 태도는 객체 중심이 되며 객관적 규준, 외부 세계, 타인 등 모든 객체에 대한 관심이 자기도 모르게 커져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모든걸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등의, 평소의 의식적 태도와는 모순된 특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 개인이 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그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남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내향형은 자아의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객체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성속에 숨어들려는 경향이 강하다. 진정한 의미의 은둔과는 다른 것은 그 사람은 무의식에 놓여 있는 객관 세계와의 관계를 아주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객체로부터의 자극을 통제하기도 어렵고, 이것은 권력욕, 지배욕의 환상을 자극한다.

 

 극단적인 내향형 태도에 생기기 쉬운 신경즉은 신경쇠약증이다. 이런 사람들의 무의식을 살펴보면 수없는 권력환상을 볼 수 있다. 자아를 둘러싼 강대한 적들에게 공격을 당하며 도망치는 꿈들이 나타난다. 꿈속에서 때로는 이들과 대결하여 영웅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바깥세상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 외계와의 접촉을 피하려 하는 소심한 사람이다. 이 경우 이들은 객관세계에 있는 것, 구체적으로 타인, 현실, 정치, 법률, 경제, 행정, 단체와 같은 것들을 실지로 있는 것보다 지나치케 크게 평가하고 두려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 있는 강대한 외향적 경향을 외부 세계에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향형은 그런 면에서 내향형처럼 외부 세계를 과대평가하거나 두려워 하지는 않는다.

 

 내향형은 때때로 무의식적 충동에서 자아를 방어하기 보다는 스스로 그 충동에 내맡김으로써 무의식의 외향적 경향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내향적 학자가 상아탑을 나와 사업을 시작하거나 정계에 투신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대게의 내향형은 이런 외향적 태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을 일찍 지치고 허무해진다. 그 사람은 미구에 스스로의 외향적인 사회 역활을 포기하거나 신체적 정신적 쇠약으로 그 역활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장점인 주체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으면 마치 강으로 돌아간 물고기처럼 별안간 활기를 띠고 삶의 보람을 찾는 것이다.

 

<외향형/내향형: introverted type/extroverted type->               

중요한 결정이나 행동이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보다도 객관적인 조건과 관계에 의해 결정될 경우, 그는 외향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하고, 이런 외향적 태도가 습성화되어 생활의 일정한 특징을 이루면 그를 외향형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많은 사람이 경탄하기 때문에 어느 테너가수를 좋아한다든지, 어떤 미술작품을 유명한 평론가가 좋은 평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 그는 외향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향형은 곧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에게는 도덕적인 행동기준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요구, 즉 일반적인 도덕관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융은 외향형의 이런 객체위주의 태도에 대해, “그는 순응Adaptation은 하지만 적응Adjustment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응은 직접적인 주변의 그때 그때의 조건에 아무 마찰 없이 살아가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사회가 보편적인 생명법칙에 어긋나는 경우에 그것을 따르다가 사회와 더불어 파멸하는 경우가 외향형이 가질 수 있는 제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외향형에서는 주관적인 요인이 무의식에 억눌려 하나의 보상적인 태도를 형성합니다. 의식의 외향적인 태도가 강할수록 무의식의 내향적인 태도는 미분화된 원시적 특징을 띄우며 유아적 성향을 넘어서 무자비한 이기주의와 프로이드가 말한 근친혼에의 욕망에까지 번지게 됩니다.

객관적인 규준에 의하여 매사에 공정무사하게 행동하고 항상 사회를 위하여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때로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해치우려는 끝없는 아집과 횡포를 부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외향형의 자기중심적인 무의식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외향형이 극단적으로 객체를 중시할 경우 주체를 소홀히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홀히 한 신체의 여러 가지 불쾌한 감각이나 신체증상으로 나타납니다. 히스테리성 신경증이나 건강염려증에 걸릴 위험이 높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체에 이상이 생겨야만 비로소 그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내향형은 객체의 인상이 주체 안에서 형성한 것에 의거해서 사물을 보는 특성을 갖습니다. 융은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아니라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 존재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객체적 태도와 똑같이 주관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내향형은 모든 사람들이 경탄한다고 그 테너가수가 훌륭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평론가가 아무리 극찬한 작품이라도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맞지 않으면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경우 내향적인 태도는 원칙적으로 전승으로 주어진 전승구조 구조 즉, 자아ego 이전에 존재하던 것, 원형archetype의 세계이며, 자아를 훨씬 능가하는 자기Self의 세계, 에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내향형은 남들의 생각보다도 자기자신의 마음에 따라 판단, 또는 행동하려는 사람이며 자아에 매달리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내향형의 주관중심 경향이 절대시되면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편협한 관점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습니다.

 

내향형의 무의식에는 외향적인 태도가 억압되기 쉬우므로 객관적인 규준과 외부세계, 타인 등 모든 객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거기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도 의식의 내향적인 태도가 지나치면, 무의식의 억압된 객체적인 요소는 보다 더 고태적인 특징을 띠며, 그것이 외계에 투사되면, 객체가 마치 마력을 지닌 존재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객관세계, 즉 타인, 구체적인 현실, 정치세계, 법률, 경제, 행정 같은 것들을 실지로 있는 것보다 지나치게 크게 평가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향형이 독립적이고 우월하고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의 자아는 객관적 판단규준의 노예가 됩니다. 극단적인 내향형은 이러한 두렵고 위협적인 객체에 대항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면서 전형적인 신경쇠약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이상에서 일반적인 태도유형상의 분류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유형은, 이미 말했듯이, 발달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각 유형은 그에 상응하는 무의식의 태도를 지니기 때문에 유형을 판단할 때 의식의 태도뿐 아니라 무의식의 태도도 함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때로 무의식의 열등한 태도가 과보상되어 나타나 그것이 주된 태도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융이 강조하였듯이 내향형과 외향형은 모두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향형과 외향형은 대체로 무의식의 적절한 보상을 받아들여 원만하게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해나갈 수 있고 서로 협동하여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우월한 태도에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집착하고 각자의 무의식에 있는 열등한 성향을 보지 못할 때는 내향형은 외향형에게, 무의식의 열등한 외향성을 투사하여 그들을 오해하여 ‘잘난척하고, 피상적이며 무모하고, 지조가 없고, 자기자신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외향형은 내향형에게 ‘소심하고, 고집불통의 샌님이다.’라고 비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각자가 자기의 타고난 관점을 인식하고 무의식에 있는 미분화된 열등기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킬 때, 인격성숙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사고형(思考型): Thinking type>

 

 융에 의하면 의식은 내향, 외향의 두 가지 태도 뿐 아니라 네 가지 정신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감각sensation, 사고thinking, 감정feeling, 그리고 직관intuition기능을 말합니다. 이중 사고와 감정 기능은 모두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으로 이치에 맞게 진행되는 기능이기 때문에 합리적 기능이라고 하고, 감각과 직관 기능은 이와 같은 합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인식이므로 비합리적 기능이라고 합니다.

 

합리적 기능과 비합리적 기능은 서로 극을 이루어 대립하고, 각각을 구성하는 두 기능, 즉 사고와 감정, 그리고 감각과 직관도 서로 대극 관계에 있습니다. 대개 이들 네 기능 중 가장 잘 발달한 기능을 주기능이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어떤 주기능을 주로 사용하며 살아가는 가에 따라 각각 사고형, 감정형, 감각형, 직관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사고형을 다루고 다음 호부터 감정형, 감각형, 직관형을 차례로 다루겠습니다.

 

  사고는 이성의 법칙에 따른 판단작용입니다. 그것의 평가기준이 외부의 객관적 사실에 있고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나 이미 보편화된 개념으로 향할 경우, 외향적 사고라고 하고, 평가기준이 주관의 원천에서 나오고 사고가 내적인 방향을 취해 주관적인 이념, 주관적인 성질의 사실로 결론짓는 경우 내향적 사고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삶이 주로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 즉 객관적인 사실들이나 보편타당한 판단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외향적 사고형에 속합니다. 그는 보편타당한 가치기준에 부합된 사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곧잘 “우리는 마땅히 ... 해야 한다.” “사람은 본래 ....”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외향적 사고형은 공정무사한 사회지도자, 정치가, 과학자, 혹은 개혁자인데학자나 교수가 외향적 사고형이면 항상 객관적 사실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거나 보편적인 객관적 법칙을 추출하는데 관심이 크고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비판적 견해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형에서는 내향적 사고와 감정기능이 무의식에 억압되고 감각, 직관같은 비합리적 기능도 상대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가장 억압되는 것은 사고의 대극인 감정이며 그것도 내향적 감정기능입니다. 무의식에 있는 열등한 내향적 감정은 충동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유아적인 성향을 띄우며 억압이 심할수록 힘을 얻어 의식을 자극하게 됩니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유치하고 독선적인 언행, 감정폭발을 일으켜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 우리는 그 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의식에서 억압된 미숙한 비합리적인 기능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식의 태도와는 반대로 고태적이고 미신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평생을 과학연구에 몰두해온 냉철한 과학자가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된 사이비과학적인 신비술에 몰두한다든가 비타민 씨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기 시작하는 경우에 그러한 무의식의 보상작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외향적 사고형의 사고는 긍정적이고 합성적이지만 외향적인 사고가 일방적으로 극대화되면 억압된 내향적인 열등한 감정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사고(Nothing but thinking")가 됩니다. 즉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식으로 판단의 대상을 무엇인가 진부한 것으로 환원해서 그 객체에서 그것이 가진 독립적인 가치를 박탈합니다. 누가 오랜 노력 끝에 책을 펴 냈습니다.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힌 극단적인 외향형이 말합니다. “그 사람 그 책으로 얼마나 벌지?  

 

  같은 사고형이면서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적 요인에 근거를 둔 이성적 법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내향적 사고형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주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은 내면에 있습니다. , 내적인 가치는 깊은 무의식의 원형층에서, 혹은 ‘자기Selbst’로부터 나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객관적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사실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외향적 사고형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때 그때의 다수의 의견에 맞추어 생각을 바꾸는데 비해서 내향적 사고형은 “내일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능금나무를 심는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실천합니다. 깊은 내적 성찰을 하는 학자, 사상가, 종교가로서 항상 이성과 합리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서 이 유형이 발견됩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도 그들의 생각을 펴는데 용감하고 그래서 독단적이라는 평을 특히 외향형으로부터 받게 되지만 자신이 구축한 이념세계를 막상 실현시켜야 할 때에는 극도로 소심해집니다. 그러한 일이 자신의 성질에 안 맞기도 하고 실제적인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형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하는데 서투르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없어서 좋은 교사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감정표현이 부족하여 “남의 마음을 몰라 준다”는 원망을 받게 됩니다‘창백한 수재형,’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 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내향적 사고가 일방적으로 지나치면 사고를 통한 판단은 경화되고 완고해집니다. 비사교적이면서 어린애 같은 정서를 지닌 노총각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글자 그대로 주관적인 것이 되고 남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하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나’(자아)를 자기Selbst와 혼동하는 데서 나옵니다이 형에서 가장 많이 억압되기 쉬운 것은 외향적 감정입니다. 외향적 사고도 열등한 상태로 있게 되며 비합리적 기능도 상대적으로 미분화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열등한 감정은 분화가 덜 된 까닭에 흑백판단의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싫은 사람은 덮어놓고 싫고 좋아하는 사람은 덮어놓고 좋아하는 맹목적인 경향이 생깁니다. 이 형의 사람이 일단 어떤 대상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 거의 광적으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질 수 있고 그 감정은 무척 원시적입니다. 내향적 사고형에서 열등한 기능의 하나인 외향적 사고와 함께 외향적 감각기능이 의식의 내향성을 과도하게 보상하는 경우, 이들은 외향형보다 더 그들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통계수치나 객관적인 증빙자료를 동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외향형으로 오인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주기능과는 달리 과보상된 열등기능은 늘 강박적이고 완전무결성을 지향하여 다소 경화된 느낌을 주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보상된 열등기능을 발휘할 때는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예민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목할 것은 사고형이라 할지라도 주기능( 1기능) 다음의 제 2기능(보조기능)이 직관이냐 감각이냐에 따라 나타나는 심리적 양상이 모습을 달리 한다는 것입니다. 직관적 사고가 있고 감각적 사고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무의식에 있는 열등기능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이상에서 외향적 사고형과 내향적 사고형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관찰하여 하나의 법칙을 도출해낸 다윈이 외향적 사고형의 대표적인 예라면, 인식자체를 비판한 칸트는 전형적인 내향적 사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향적 사고가 백과사전적인 풍성한 사실의 축적과 그 객관적인 관련성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지식의 확장에 능하다면, 내향적 사고는 하나하나의 관념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하여 지식의 심화에 능합니다.

 

외향형의 입장에서 보면 내향적 사고형의 판단은 냉철하면서도 완고해 보이고 때론 객관적인 사실을 도외시한 자기만의 생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반면에 내향형은 외향적인 사고형의 방대한 지식의 양에는 놀라지만 그들의 사고는 객관적인 조건에 지나치게 얽매여 근시적이고 피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두 형의 사람이 만나 어떤 주제에 관해 토론을 한다면, 외향적 사고형은 다양한 통계자료나 객관적인 사실을 제시하여 자신의 생각을 입증하려 노력할 것이고, 내향적 사고형은 그러한 객관적인 자료는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추론을 통한 결론을 도출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공동의 이성적, 합리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서로 의기투합하지만 뒤에 가서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결국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헤어집니다.

 

그러나 이 예는 극단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이들 둘은 각자의 무의식에 있는 열등한 기능을 의식화하도록 서로 영향을 주며 의식에 부족한 것을 보충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융도 외향적 사고와 내향적 사고는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을 뿐, 둘 모두 창조적인 사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형에서 무의식에 열등하게 남아있는 기능들은 늘 열등한 채로 있는 기능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화될 수 있고, 또 전 인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분화되어야만 할 기능입니다. 이러한 열등기능을 분화 발달시키는 것이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Individuation의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감정형: feeling type>

 

  감정feeling은 자아와 주어진 내용 사이에 일어나는 과정으로서, 그 내용에 받아들이든가 돌려보내든가 하는 일정한 가치(좋다/나쁘다)를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그때그때의 일시적인 의식의 내용이나 일시적인 지각과 관계없이 따로 ‘기분’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은 사고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판단의 한 양식이므로 합리적인 기능에 속합니다. 감정판단의 근거가 객체적 기준, 즉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가치일 경우 외향적 감정이라고 하고, 그 근거가 주체의 기준일 경우 내향적 감정이라 합니다.

 

<외향적 감정형:>      

 

  일상생활에서 외향적 감정기능을 주 기능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을 외향적 감정형 extraverted feeling type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감정은 객관적 여건이나 보편적인 가치에 순응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배우자 선택에 잘 나타납니다. 이 형의 여자의 경우 언제나 “적당한” 남자를 사랑합니다. 그 남자가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에 맞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나이, 사회적인 지위, 재력, 외모 등등이 모두 사회적 요구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선택이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형의 사람들은 외향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의 감정에 잘 맞추어줄 줄 알기 때문에 쉽게 친구들을 사귀고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줌으로써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해줍니다. 때문에 그들은 파티의 여주인공으로 적격입니다

 

  또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가장 잘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이들입니다.

 

  외향적 감정형에 가장 열등한 기능은 내향적 사고입니다. 외향적 감정형의 사람들은 내향적 사고, 즉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철학적 토론, 개념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면 하품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형의 사람들이 외향적인 감정을 너무 일방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이들의 감정활동은 개인적인 성격을 잃고 활기와 호소력을 잃게 됩니다. 때론 우습지도 않은 웃음을 억지로 웃어야 하는 오락프로의 사회자와 같아집니다. 이렇게 해서 감정의 주체가 객체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리면, 감정에 있어 가장 매력적인 개성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이때 무의식에 억눌려있던 고태적이고 부정적이고 거친 사고가 의식에 들이닥칩니다. 무의식에 의한 의식의 해리현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의식의 객체와의 감정관계가 강할수록, 그래서 감정이 “탈자아화”될수록, 가장 높게 평가되는 객체들의 가치를 무자비하게 깎아 내리는 무의식적 사고가 밀려듭니다. “그것은 무엇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nothing but"는 사고가 일어나 객체들에 얽매인 감정의 지나친 권력을 파괴합니다. 이리하여 그는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가장 깎아 내리는 온갖 편견과 좋지 못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의 본래의 명랑한 태도는 편견에 찬 냉혹한 태도로 바뀌어 성격상의 일관성을 잃게 됩니다. 융은 유아적, 성적 관념을 무의식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유형의 히스테리환자의 경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폰 프란츠는 외향적 감정형의 열등한 사고는 내향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가 흔히 자기 자신의 주체의 문제로 향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위험성은 외향적 감정형이 일단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완전히 빠져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 속에 파묻혀 독서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고 기능은 열등하기 때문에 그런 작업은 범용한 암기작업과도 같습니다.

 

<내향적 감정형 :>

 

  감정기능을 주 기능으로 사용하면서도 내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사람을 내향적 감정형introverted feeling type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무척 분화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밖으로 표현되지도 않고 객체에 작용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분화된 내향적 감정은 내적으로 진실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볼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어느 집단의 윤리적 지주가 됩니다. 이들은 결코 남에게 훈계하지도 않고 자기를 주장하지도 않지만 올바른 윤리적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은연중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융은 “잔잔한 물은 깊다.”란 속담이 이 형의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이 형의 사람들의 감정은 밖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밖에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서늘한”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객체의 감정에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라앉히거나 막거나 또는 부정적 감정판단으로 냉각시킵니다. 언제나 조용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려는 태세가 되어있지만, 낯선 타인에 대해 다정하거나 따뜻하지 않고 무심하고 냉정하고 거부적인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내향적 감정형은 밖으로 나타내는 냉담성과는 달리 자기 안에 깊은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의 대상은 객체가 아니고 마음속에 숨어있는 깊은 종교적 심성입니다. 혹은 시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종교적 심성, 이렇게 함으로써 객체에 대한 우월성을 지키려는 은밀한 야심을 표현합니다. 자녀를 둔 부인들의 경우 이러한 우월성 중 많은 부분을 아이를 통해 은밀히 실현하려 합니다.

 

  이 형의 사고는 외향적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수많은 외적인 사실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들이 외향적 사고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면, 너무 많은 자료와 참고 문헌, 사실들에 압도당해 자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외향적 사고의 열등성은 흔히 편집광monomania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한두 가지의 관념으로 수많은 자료 속을 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폰 프란츠는 프로이트를 한 인간으로 보면 내향적 감정형이었으리라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융도 지적했다시피 프로이트의 체계가 외향적 사고를 나타내고, 그것도 소수의 근본적인 관념을 수없이 많은 자료로 표현하여, 열등한 외향적 사고의 특성을 띄었기 때문입니다.

 

  열등한 외향적인 사고는 물론 다른 모든 열등기능이 가지고 있는 고태적이고 환원적인 경향을 띱니다. 이러한 무의식의 사고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무의식에 의식과는 상용할 수 없는 극단적인 대극이 생기고 그런 무의식적 사고는 외계로 투사됩니다. 자아 중심적이 된 주체는 평가절하 된 객체들의 권력과 의미를 느끼게 되고 의식은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남들이 온갖 야비한 것들을 생각하고, 악한 계획을 세우고, 몰래 선동하고, 계략을 꾸미고들 있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냉전과 암투, 경쟁관계가 되고, 그러한 긴장으로 말미암아 탈진에 이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형의 사람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신경증은 신경쇠약성 신경증이거나 여성들에게는 신체상태가 같이 나빠져서 빈혈 같은 증상이 온다고 융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외향적 감정형과 내향적 감정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융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대극 관계에 있는 유형(외향적 감정형과 내향적 사고형)이 아니라 같은 기능을 주 기능으로 하고 다른 태도를 가진 유형이라고 말했습니다. 외향적 감정형과 내향적 감정형의 사람들이 함께 미술관에 갔습니다. 외향적 감정형의 사람은 어느 화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그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만일 그곳이 별로 유명하지 않은 화랑이고, 무명의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비평가의 평도 신통치 않았다면, 그는 일반적으로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할 입니다. 그렇지만 내향적 감정형의 사람은 외향형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에 부합되는 작품 앞에서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넋을 잃고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둘은 모두 미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감상하는 각도가 전혀 다릅니다. 물론 이런 예는 외향형과 내향형의 일반적인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심리학적 유형을 아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유익합니다

 

  그리고 감정형에서도 사고형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에 열등하게 남아있는 기능들을 분화 발달시키는 것은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직관형(直觀型) Intuition type
 
   직관이란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인식을 유도하는 심리기능’이라고 융은 말한다. 직관은 감각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적 기능이다. 직관 내용은 감각 내용이나 마찬가지로 사고나 감정 내용처럼 ‘유도되거나 표현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합리적 법칙에 따른 판단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발견하고 직접 지각한다. 그러므로 직관적 인식은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살아가면서 주로 직관의 원리에 의지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직관형이라고 부른다. 감각과 직관은 곧잘 혼동되기 쉽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외향적 감각형의 경우, 감각은 객체의 물리적 표면으로 향하게 하지만 직관은 바로 그 뒷면을 관조한다. 감각과 직관은 하나의 대극이므로 감각은 흔히 직관적 관조를 방해한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예로 들면 감각형은 그 사람의 생김새, 그 사람이 드러내는 좋은 인상에 좌우되기 쉽지만 직관형은 그가 잘 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지저분한지 말쑥하게 차려 입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그의 속을 꿰뚫어 본다. 결과적으로 감각형이 겉은 멀쩡한데 불성실하거나 속이 텅 빈 사람을 고르기 쉬운데 비해서 직관형의 사람은 겉모양이나 태도에 상관없이 진실한 사람을 선택한다.
   직관형에는 직관이 주체보다 객체를 향하는 외향적 직관형과 객체보다 주체의 직관적 관조에 더 관심을 기우리는 내향적 직관형이 있다.

 

 외향적 직관형Extroverted intuition type의   우월한 능력은 다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가능성, 그것도 외부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데 있다. 이들은 외향적 감각형처럼 현실적인 감각에 충실한 행정가와는 달리 항상 무슨 사업이 장래성이 있는가, 독자가 무슨 기사를 흥미 있게 읽게 될 것이며 미래의 세계에 무엇이 일어날 것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향적 직관형이 빠지기 쉬운 위험성은 그가 너무 외향적 직관기능에만 사로잡혀서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서는 나머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그가 발견한 가능성을 차분히 키워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씨를 뿌려 놓고 수확도 하기 전에 다른 밭으로 가는 사람’이다.

 

 외향적 직관형에서 가장 소홀히 하여 열등한 상태에 있는 기능은 내향적 감각기능인데, 이것은 주체에 대한 병적인 집착의 형태로 나타난다.  외향적 직관형에서 잘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은 강박증상, 특히 건강염려성 강박관념이나 공포증, 또는 병적인 신체감각이다. 때로 고태적 감각이 투사되면 이 형의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 또는 여자에 반해 버리는데, 이들이 그 사람의 무의식의 원시적, 고태적 감각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내향적 직관형Introverted intuition type의 주기능의 특징은 구체적인 현실의 가능성보다 정신세계에서의 가능성을 촉지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 유형은 종교적 예언가, 이른바 선지자이며 예술가나 시인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원시사회 같으면 혼령의 세계와 교통하며 이를 통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샤만과 같은 형이 될 것이며,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현대 사회의 정신치료자, 정신과의사, 심리학자들 가운데도 이런 형의 치료자가 많다. 자기 마음 속 깊은 원형층의 움직임과 이와 이어져 있는 인류의 숙명과 미래의 방향을 감득하는 것이다. 앓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치유의 작용, 혹은 그를 병들게 하는 파괴적 본능의 징조와 그 의미를 성찰한다.


 외향적 직관형과 마찬가지로 내향적 직관형에서도 감각 기능이 가장 억압되어 열등한 상태에 있게 되는데 특히 외향적 감각, 즉 이른바 ‘현실감각’이 극도로 미분화된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 뒤죽박죽이 되어 독자나 학생들의 불평을 사기 쉽다. 그러나 그 독자나 학생이 내향형이라면 그 뒤죽박죽의 말 속에 그래도 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더 즐기게 된다.
  무의식의 열등한 외향적 감각기능은 강박적으로 의식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불쾌한 증상을 나타내게 된다. 무의식의 열등기능의 과도한 보상작용이 일어나면 이 유형의 사람은 쉽게 감각적 충동에 사로잡히며 강박적으로 객체적 감각에 구속된다. 즉,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강박적으로 속박된다. 이 형에서 흔히 보는 신경증은 강박신경증으로 건강염려증상, 감관기관의 과민상태를 볼 수 있다.

출처 :마음이 머무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 꿈속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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