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다윗 (16-31장) | ||||||||||||||||||||||||||||||||||||||||||||||||||||||||||||||||||||||||||
* 사울과 다윗: (16-31장) * 1. 다윗의 등장(16장) <참고 지도>(사울의 생애)
(삼상 15장)에서 사울이 공적으로 여호와의 버림을 받은 후에 사무엘서 기자는 사울의 몰락 과정과 다윗의 등극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이야기(16-31장)는 사울이 왕으로서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점차 몰락해가고, 다윗이 지도자로 떠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왕으로 소개되는 과정은 사울의 경우와 동일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으며(9:16), 선지자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고(10;1), 여호와의 신의 능력을 공급받았다(10;6-13), 그리고 암몬인들을 무찌르고 공적으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다윗도 이와 동일한 순서를 밟는다. 그는 여호와에 의해 선택을 받은 후에(16:1),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다(16:13). 그리고 그는 골리앗을 죽임으로 백성들에게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었다(17장).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더 이상 사울을 위해 근심하지 말고 기름을 가지고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에 가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른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지시하셨다(16:1).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이 이일을 공개적으로 하면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2). 그러자 하나님은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제사에 이새를 청하라고 지시하셨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제사를 행하고 그 곳에 이새를 초청했다. 그리고 은밀히 이새의 아들을 자기에게 오게 하도록 시켰다. 사무엘은 이새의 강건한 아들들을 보고 과연 왕이 될 사람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다(3-6).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린 소년 다윗을 선택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지시하셨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것은 왕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준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신은 다윗에게 임하여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이후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일 마친 후에 자기 고향인 라마로 돌아갔다(8-13).
2-1. 궁중의 악사 다윗(16:14-23)
2-2. 골리앗을 죽은 용사 다윗(17장) <참고 지도: 다윗과 골리앗>
이때에 블레셋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었다. "싸움을 돋우는 자(아쉬 하베나임)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이란 말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기 위해서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한 선봉장을 의미한다. 그는 블레셋의 '가드'사람이었다. 가드는 아세가에서 서쪽으로 약 8.9km 떨어진 곳에 있는 블레셋 5대 도시 중에 하나였다(4). 이 지역에는 거인 족인 아낙 족속 함께 살고있었다(수 11:22). 아마 골리앗도 이러한 거인족의 후예였을 것이다. 그의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었는데(한 규빗-45cm, 한 뼘-13cm), 이는 약 283cm나 되는 큰 키였다. 골리앗은 최소한 270cm 이상 된 장대한 신장을 가진 거구였다. 그는 머리에 놋으로 된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 즉 천 위에 비늘 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붙여서 만든 갑옷을 입었다. 그런데 그 갑옷의 무게는 놋으로 오천 세겔(한 세겔-11.5g), 즉 57.5kg이나 되었다. 그는 다리에는 다리를 보호하는 "놋 경갑"을 쳤으며,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다. '놋 단창'은 어깨의 뒷 부분에 차는 창을 가리킨다. 그의 창 자루는 베틀채와 같았는데, 이는 멀리 던지기 위해서 창 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가진 창날은 철 육백 세겔, 즉 7kg나 되었다. 이와 같이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이었던 골리앗)은 신장이나 무기 등에서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으며,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같이 보여졌다(4-7).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서로 대표를 선택하여 결투를 하고, 지는 편이 이긴 편의 종이 되기로 약속하자고 외쳤다(8-10).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11).
이때에 이 전쟁터에는 이새의 3아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새는 다윗에게 전쟁터로 가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고 형들이 안전하게 있는 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다윗이 형들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에 왔을 때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다윗은 그때에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이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사울이 골리앗을 제압하는 자에게는 많은 재물과 왕의 사위가 되게 할 것을 약속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이때에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꼈다. 이때에 이새의 맏형 엘리압이 다윗의 말을 듣고 그에게 노하며 그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그러나 다윗이 한 말은 곧 사울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울은 골리앗을 치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불렀다(12-31). 다윗은 사울 앞에 가서 자신이 골리앗과 싸울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울은 소년의 몸으로 골리앗과 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시닝 양을 칠 때에 사자와 곰도 쳐죽였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한 블레셋인을 치지 못하겠느냐? 고 대답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해 주신 것처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구해주실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자신이 입던 투구와 갑옷을 입혀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무거운 갑옷과 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버리고 맨 몸으로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창이나 칼 대신 손에 막대기 하나를 들고,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에 있던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목자의 주머니에 담고, 물배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아갔다(32-40). 물매(켈라)는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돌을 넣을 수 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이 물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있어서 엄지에 연결하여 물매를 돌려 던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러한 물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다. 목자들은 이러한 물매로 1) 옆길로 새는 양떼를 통제했으며, 2)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냈다. 또한 물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베냐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물매 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고 있으며(25:29; 삿 20:16; 대상 12:2; 대하 26:4),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 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물매 군이 그려져 있는 사실도 이러한 점을 증거 해주고 있다.
골리앗을 중무장을 하고 다윗과 싸우기 위해서 가까이 나아왔다. 그러나 그는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다윗을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네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들고 나왔느냐?"고 비난하면서 자기의 신의 이름으로 그를 저주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내가 너를 새와 짐승의 밥이 되게 해주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골리앗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칼과 단 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을 죽여 그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사들의 시체를 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1)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단 창에 있는 것이 아니며, 2)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골리앗은 다윗을 치기 위해서 다윗이 있는 곳으로 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에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물매 돌을 돌리면서 나아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물매 돌을 꺼내서 물매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그를 단숨에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의 목을 베었으며, 이를 본 블레셋 군사들을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이스라엘과 유다 군사들은 즉각적으로 블레셋 군사들을 추격하며 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블레셋 군사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으며, 부상당한 블레셋 군사들은 사아라임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쓰러져 있었다(41-52).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가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로 보고, '에그론'에 속한 한 지점이었다는 해석(Targum, Vulgate)이 있으며, 둘째는 이를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라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 해석이 있다(Keil, Klein, LXX) .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말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을 보면, 두 번째 해석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사아라임 가는 길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 '사아라임'은 (수 15:36)을 볼 때에, 소고 및 아세가와 인접한 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가드와 에그론은 블레셋의 주요 5 도시들에 속한 성읍이었다. 이날에 승리한 이스라엘은 패전한 블레셋의 진에서 탈취물을 취했다(53). 그리고 다윗은 블레셋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그의 갑옷은 자기의 장막에 두었다(54).
그때에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것을 보고 군대 장관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도 사울은 다윗이 군사들에게 잘 알려진 용사인 줄로 알고 군대장관에게 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브넬은 다윗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브넬이 다윗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사울은 아브넬에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에 돌아올 때에 아브넬은 다윗의 손에 골리앗의 머리가 있는 채로 다윗을 사울 앞에로 인도했다. 사울은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보고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고 물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57-58).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은 이스라엘 가운데에 다윗의 인기를 치솟게 만들었다. 이때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해 이렇게 노래했다. "사울의 죽은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18:7)." 이 사건은 사울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다윗을 박해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8:8-9). 이 사건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궁에 머무르게 하면서 자기 곁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18:1).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으며, 그와 의형제의 언약을 맺었다. 이러한 언약은 자신들의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원하는 언약이었을 것이다. 또한 요나단은 자신이 입었던 겉옷과 군복과 활과 띠를 벗어서 다윗에게 주었다(3-4). 이처럼 자신의 의복을 벗어주거나, 자신의 무기를 상대방에게 선물로 주는 것은 고대에 용사들 간에 우정이나 혈맹 관계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행해졌던 풍습이었다(Keil, Philippson).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다. 사울은 이를 보고 다윗을 군대의 장으로 삼았으며,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5).
그러나 다윗의 명성이 사울을 능가하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다시 임하게 되자, 사울은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두 번이나 피하여 안전할 수 있었다(6-11).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본 사울은 다윗을 자기로부터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와 함께 계셨다. 이로 인해 사울은 더욱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했다(12-16). 사울은 자신의 첫째 딸 메랍을 아내로 준다는 조건으로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과 싸우라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에 사울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울은 다윗에게 블렛세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양피 200개를 가져오면 그를 사위로 삼겠다고 제안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통해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무사히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200개를 구하여 사울에게 주었다. 그러자 사울은 할 수 없이 약속대로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사울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요나단 뿐 아니라, 자기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다윗을 더욱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 후로 사울은 일평생 동안 다윗을 대적 자가 되게 되었다(17-30).
요나단은 다윗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겠다고 말했다. 요나단은 만일 부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내가 너를 평안히 보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때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의 생애 동안 자기의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약속하고, 그 후손 때까지도 자기 집을 선대할 것을 약속하도록 요구했다. 이 때에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사울을 포함한)을 치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되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3일이 되면 에셀 바위 곁에 숨어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자신이 병기를 든 소년과 함께 가서 그 곳에서 화살을 세 번 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병기 든 소년에게 "화살이 이 편에 있으니 가져 오라!"고 하면 사울이 다윗을 해칠 의사가 없는 것이므로 무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병기 든 소년에게 "화살이 네 앞 편에 있다"고 하면 사울이 다윗을 해칠 의사가 있는 것이므로 "네 길을 편히 가라!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이 말을 하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여호와 앞에서 맹세를 했다(1-23).
사울은 월삭의 식사 시간에 다윗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첫째 날은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이 둘 째 날 식사시간에도 참석하지 않게 되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요나단은 자신이 매년 드리는 제사를 위해 다윗을 베들레헴으로 보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크게 노하며 요나단에게 욕을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으면 요나단의 왕위가 위험하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사울은 창을 던져 요나단을 죽이려고 했다. 요나단은 이 사건을 통해서 부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크게 노하여 식사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갔으며, 다윗을 슬퍼하며 다음 날 식사시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후에 요나단은 미리 정한 방법을 따라 다윗에게 사울이 그를 해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윗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자기의 병기 든 소년을 먼저 성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나서 요나단은 울면서 다윗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전에 맺은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요나단은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윗의 파란만장한 피난 생활이 시작되게 된다(24-42).
3. 다윗의 도피 생활(21:-) <참고지도: 다윗의 도피생활> 3-1.놉으로 간 다윗(21:1-9)
아히멜렉은 다윗을 보고 떨면서 그를 영접했다. 그는 다윗이 갑자기 찾아온 것을 보고 혹시 자기에게 해를 가하러 오지 않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던 것 같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군사들도 없이 혼자 나타난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 했다(1). 이때에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특명을 받고 은밀하게 내려왔으며, 다른 사람들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2). 다윗이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히멜렉이 자신이 사울을 피해 도망친 것을 알면, 사울을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제사장에게 자신과 일행이 먹을 음식을 요구했다(3). 그러나 성막에는 보통 떡은 없었고, 떡 상에 새 떡을 올려놓으면서 물려낸 거룩한 떡밖에 없었다. 이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일행이 매우 허기 진 것을 보고 그들이 여인을 가까이 하지만 않았으면, 그 떡을 주겠다고 말했다(4). 다윗은 자기 일행이 3일 동안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으며, 아히멜렉은 그 말을 듣고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주었다(5-6).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사울의 목자장으로 있던 도엑이라는 사람이 그 곳에 있었다(7). 그는 에돔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인으로 귀화하여 사울 왕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후에 그는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음식과 칼을 준 일을 고자질하여 제사장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칼이나 창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아헤멜렉은 다윗이 죽은 골리앗의 칼이 그 곳에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다윗은 그와 같은 무기가 없으니 그 칼을 달라고 요청했다(8-9).
3-2. 가드에서의 다윗(21:10-15)
다윗은 이러한 아기스의 신하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기스가 자기를 죽일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아기스가 자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의 앞에서 미친 척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문에 글씨를 쓰며, 입에는 침을 흘렸다. 아마도 이러한 모습은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악신이 든 사울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했던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가드 왕 아기스는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보고 다윗이 미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윗을 당장 자기 앞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후에 다윗은 이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여호와의 도우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10-15). 그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큰 위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3-3. 아둘람 굴에서의 다윗(22:1-2).
3-4. 모압에서의 다윗(22:3-4)
3-5. 유다(세렛 수풀)로 돌아온 다윗(5)
3-6. 제사장을 죽인 사울(도엑)(6-23)
3-7. 그일라에서의 다윗-블레셋을 친 다윗(23:1-12)
3-8. 십 황무지에서의 다윗(23:14-28)
요나단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16-18). 그 후에 십 사람들이 다윗이 광야 남편에 있는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 있다고 보고했다. '하길라'는 '건조한 언덕'이란 뜻으로, 이곳은 '십 황무지 산골'의 한 부분이었다.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 수풀'의 다른 명칭으로 보인다. 이 산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평지에 살던 십 사람들에 의해 쉽게 발견될 수 있었다. 사울은 그 보고를 듣고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으며, 누가 그를 발견했는지 알아보고, 다윗이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이에 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사울의 지시를 듣고 다윗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갔다. 이때에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광야 남편에 있는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었다(19-24).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는 '광야 남편으로 아라바 근처에 있던 마온 황무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온'은 '거주', '거처'란 뜻으로서, 헤브론에서 동남쪽으로 약 13km, 십에서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아라바'(Arabah)는 '황무지' 또는 '사막의 들'이란 뜻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기까지 요단 계곡을 따라 좌우로 펼쳐져 있는 낮은 광야 지대를 의미한. 보통 이 말은 넓게는 유다 광야 전체를, 좁게는 유다 광야 중 사해 인근의 지역이나 요단 계곡 중 사해와 가까운 곳을 의미한다. 여기서에서는 이 말을 유다 광야 중 사해 인근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울은 마온 황무지에 가서 다윗을 잡으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교묘하게 피해다녔다. 그때에 하나님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셨다. 블레셋 침공 사실이 사울에게 보고되자. 사울은 다윗을 좆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가서 블레셋을 치러 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이 곳 이름이 "셀라하마느곳"이라고 불리게 되었다(25-28).
3-9. 엔게디 요새에서의 다윗(23:29-24:22)
사울은 블레셋을 치러 출전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1). 사울은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들 염소 바위로 가고 있었다(2). 들 염소 바위는 가파른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염소나 산양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Robinson).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해 들 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다(Danin). 오늘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 염소를 발견하곤 한다(Thompson).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이 있었다(Fay). 사울은 길을 가다가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르러 굴이 있는 것을 보았다. 길가 양의 우리는 양을 사육하는 곳을 말한다. 이 '양의 우리'는 대부분 동굴 앞에 돌로 낮고 둥글게 쌓아서 만들었으며, 그 지붕은 야생 짐승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가시나무로 되어 있었다(Thompson). 당시 이러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 또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사울은 "발을 가리우기 위해서" 그 굴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가리운다'(사카크)는 말은 '덮다', '둘러싼다'는 말이다.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Keil, Thenius). 히브리인들이 대변을 보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대변을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을 때에 옷자락에 의해 자신의 발이 덮여지기 때문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잠을 잔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울이 이러한 생리 현상을 급히 해결하기 위해서 그 굴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굴 안에는 사울이 그토록 찾아 다니던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었다(3).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사울을 죽일 때라고 생각하고 그를 죽이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고 단지 그의 겉 옷 자락만 베었다(4). 그러나 다윗은 그의 겉 옷 자락을 벤 것조차 마음에 가책이 되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을 해치는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사울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일어나서 무사히 다윗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그 후에 다윗이 사울을 쫓아 나가서 급히 사울을 불렀다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게 되자, 다윗은 그 앞에 절을 했다(5-8). 다윗은 자기가 사울을 해치려고 한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울의 겉 옷 자락을 보이면서, 오늘 자신이 사울을 해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윗은 악은 악인에게서 나온다는 속담을 인용했다. 다윗이 악한 마음, 즉 사울을 번역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를 죽이려는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울 사이를 심판하시되, 자기가 사울을 죽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어찌 죽은 개나 벼룩과 다름 없는 자신을 두려워하여 쫓고 있느냐? 고 물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울 왕과 자신의 사이를 공정히 판결하고 그 행위대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8-15). 사울은 이러한 다윗의 말을 듣고 다윗을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사울은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대답했다. 사울은 오늘 다윗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일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선으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그를통해서 이스라엘이 견고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자기의 이름을 아비의 집에서 멸하지 않을 것에 대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다윗은 사울이 말한 그대로 다 이행하겠다고 맹세했다. 이것은 사울과 다윗이 서로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 조약을 맺은 후에 사울은 자기 집으로, 그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돌아갔다(16-22).
3-10. 사무엘의 죽음(25:1)
3-11. 마온 광야에서의 다윗(25:2-44)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부하 중에서 열 명을 그에게 보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양털을 깎을 때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를 벌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창 38:13, Keil). 즉 유목민에게 있어서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의 날과 같은 기쁜 날이었다. 다윗은 이러한 관례를 따라 자신과 부하들의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해 나발의 집으로 수하 소년들을 보냈다. 다윗은 전에 자신이 갈멜에서 나발과 그의 재산을 지켜 준 일이 있었다. 다윗은 그 일을 상기시키면서 자신과 부하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나발에게 요청하였다(4-9). 그러나 나발은 이러한 다윗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다윗을 주인으로부터 도망 나온 패역한 무리로 간주했다. 다윗은 빈손으로 돌아온 자기 부하들을 통해 나발의 말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분노하여 군사 200명만 남겨두고, 400명을 무장시켜 나발을 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에 나발이 거느린 사람들 중에 하나가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가서 나발이 한 행위에 대해 전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했다(10-17). 아비가일은 그 말을 듣고 급히 떡 200덩이를 준비하고,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붉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200개를 취하여 나귀에 실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시켜서 먼저 그것을 싣고 가게하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도중에서 다윗을 만나서 다윗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도록 요청하였다. 그녀는 나발의 우매한 행동을 인정하면서 그가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다고 해도 다윗이 직접 그 손을 들어 원수를 갚는 것은 다윗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손으로 나발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 후에 다윗은 아비가일이 가져온 음식을 받고, 나발을 치러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다시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게 되었다(18-35). 아비가일이 돌아오니 나발은 잔치로 인해 크게 취하여 기쁨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날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나발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발은 다음 날 아침에 그 말을 듣고 심히 놀라 몸이 돌같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0일 후에 여호와께께서 치심으로 죽고 말았다(36-38). 다윗은 마온에 사는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신 일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총명한 아비가일을 자기의 아내로 맞기 위해서 자기의 부하들을 그녀에게 보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부하들의 말을 듣고 즉시 자기를 따르는 처녀 다섯을 데리고 다윗에게 가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25:2-44). 그 후에 다윗은 이스르엘의 아히노암을 아내로 취하였다. 그리고 사울은 자기의 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다(39-44). 전에도 사울은 골리앗을 죽인 대가로 다윗에게 주기로 했던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변덕스러운 짓을 했었다(18:19). 사울은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막내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발디에게 주었다. `발디'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삼하 3:15)에서는 `발디엘'로 표기되었다. 성경을 보면 가나안 정탐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발디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민 13:9). 그는 베냐민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정탐에 참여했던 `라부'의 아들 `발디'였다. 아마도 여기에 나오는 `발디'는 이러한 그의 조상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22:5). "갈림에 산다"는 말은 `갈림 출신'이란 뜻이다. `갈림'은 `무더기'란 뜻으로, (사 10:30)을 따르면 이 곳은 예루살렘과 사울의 기브아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
3-12. 십 황무지에서 또 다시 사울을 살려줌(26장)
다윗은 사울의 진을 떠나서 건너편에 있는 산꼭대기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울과 군대 장관 아브넬을 불렀다. 다윗은 군대 장관 아브넬에게 사울을 보호하지 못한 일을 책망했다. 다윗은 아브넬에게 왕의 창과 사울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13-16). 사울은 그 소리가 다윗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네가 내 아들 다윗이냐?"고 물었다. 다윗은 자신이 다윗임을 밝히고 자신은 왕에게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는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난 일이면, 자신이 죽을 수 있지만, 만일 다른 사람들이 모함한 것이면 그들이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여호와 앞에서 무고한 자신의 피를 흘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다윗은 어찌 왕이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사람처럼 한 마리의 벼룩을 잡으려고 나왔느냐? 고 대답했다(17-20). 사울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하였도다." 그러자 다윗은 사울에게 한 소년을 보내어 그의 창을 가져가라고 대답했다. 다윗은 오늘 자신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귀중히 여겨주시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다윗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이 일이 있은 후에 다윗과 사울은 각기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21-25).
3-13. 가드로 간 다윗(27장)
다윗은 가드 왕에게 가서 왕도에 거하지 않고 지방 성읍을 주어 그 곳에 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아기스는 이 청을 받아들여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어 그 곳에 거하도록 허락하였다(5-6). `시글락'은 가나안 정복 후에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으나(수 15:31), 그 후에 이 성은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갔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빼앗겼으며, 그 후에는 이 성읍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Keil, Fay). 이 곳은 가사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에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약 1년 4개월 동안 머머물러 있었다(5-7). 그 후에 다윗은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거민과, 아말렉을 공격하였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들이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거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8). `그술 사람'은 유랑 생황을 하던 족속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요단 동쪽 지방에(신 3:14, 수 12;5, 13:11,13, 삼하 13:37) 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가사'와 인접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신 2:23). `기르스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는데, 1) 첫째 해석은 그들이 팔레스타인 중앙의 그리심 산 근처에 살던 한 종족으로 보는 견해(Smith)이며, 2) 둘째 견해는 그들을 블레셋 땅과 이스라엘 땅의 남부에 살던 민족으로 보는 견해(I.D.B.)이다. 다윗이 공격한 민족들이 팔레스타인의 남부였던 점을 생각하면 두 번째 견해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아말렉 족속"은 사울의 군대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15:7,8). 그러나 세월의 지난 후에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했으며 또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다윗이 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민족들을 공격했던 것이다(Keil). 이것은 다윗의 침공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이 이들을 치고 노략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자,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가 공격한 곳이 어디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다윗은 아기스에게 자신이 공격한 지역이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었다고 대답했다(9-10). 다윗은 자신이 친 지역에 대해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지역을 가리키며(8:2; 삼하 24:7),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에서 `여라므엘'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으로,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의 이름이기도 했다(대상 2:3, 5, 9). 따라서 `여라므엘 사람'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던 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칠 때에 겐 사람을 미리 대피시킨 일이 있었다(15:6). 다윗이 자신이 침노한 곳을 이렇게 돌려서 대답한 것은 자신이 유다를 친 것처럼 믿게 하여 그가 자신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을 공격한 것은 옳은 일이라 해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을 떠난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듯이 약속의 땅을 떠난 다윗 역시 여러 가지 거짓말로 자신을 은폐시켜야만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종족들을 칠 때에 그들을 모두 죽이고 가드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 중 일부가 다윗의 일을 고발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윗이 친 종족들은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공격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러한 사람들을 친 것이 아기스에게 고발되면, 다윗은 아기스에게 불신을 받게 되어 위험에 빠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자신이 공격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아기스는 다윗이 유다 남방을 쳤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는 다윗이 자신의 동족들을 쳤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자신의 사역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1-12).
4. 사울의 최후(28-31장) 4-1.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28장)
황급해진 사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되자, 신하들을 시켜서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사울은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신접한 여인과 박수들을 쫓아냈었다(3). 그러나 사울이 다시 신접한 여인을 찾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급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울의 신하들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신접했다'(바알라트 오브)는 말은 '혼령을 다스린다'는 말로써, '신접한 여인'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엔돌'은 '거주의 샘'이란 뜻으로서, 이 곳은 다볼 산에서 남쪽으로 약 6.4km, 그리고 '수넴'에서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가면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이곳은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전해진다(Robinson). 사울은 신접한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하고 두 사람과 함께 엔돌로 갔으며, 밤이 되어 엔돌에 도착하게 되었다. 사울은 신접한 자에게 가서 사람을 불러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울 왕이 이 일을 금한 지금, 그러한 일을 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울은 이 일로 그가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신접한 여인은 누구를 불러내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고, 사울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때에 여인은 사무엘을 보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사울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울에게 큰 소리로 어찌해서 자신이 사울이라는 것을 속였느냐? 고 외쳤다. 사울은 그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후에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울은 그 모습이 어떤지 물었으며, 그 여인은 그가 겉옷을 입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였다(7-14).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 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3)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것이다(Smith).
많은 학자들은 첫째 견해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견해를 따라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사무엘로 가장한 악령의 형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급해서 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 왕을 위해 사무엘의 영을 보내심으로 그에게 마지막 심판을 선고하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사울이 신접한 여인의 주술에 의지하지 않도록 조치해 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안식을 방해하느냐?" 고 책망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블렛셋 군대로 인해 심히 위급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꿈이나 우림이나 둠밈, 그리고 선지자로 말씀하시지 않기에 할 일을 지시 받기 위해서 그리했다고 대답했다(15).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떠나 그의 대적이 되셨으며, 그의 나라를 다윗에게 주셨다고 대답했다. 사무엘은 이 일이 그가 아멜렉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내일 사무엘과 함께 잇게 될 것이며,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16-19). 사울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는 그가 사무엘의 말을 듣고 심한 두려움을 느꼈으며,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울이 기진한 것을 보고 신접한 여인은 사울에게 자신이 음식을 준비할 터이니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요청했다. 사울은 처음에는 이 요청을 거절했으나, 여인과 신하들의 간곡한 권유로 인해 여인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 밤중에 길을 떠나게 되었다(20-25).
4-2. 다윗을 불신임하는 블레셋(29장)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아기스에게 항의했다. 다윗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1) 블레셋 방백들의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고, 2) 또 아기스가 한 말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Keil). 만일 그때에 다윗이 가만히 있었다면, 아기스는 다윗을 고소한 다른 방백들의 말(4, 5절)을 참말로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아기스는 다윗을 진정시키면서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아기스는 다음 날에도 다윗이 보이면 블레셋 장관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아기스의 지시를 따라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시글락을 향해 떠났다(6-11). 다윗이 이처럼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심으로써, 1)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장애가 없도록 하셨으며, 2) 또한 아말렉의 침공에 의해 아멜렉에게 납치된 가족을 구출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었다. 다윗은 진퇴 양난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지 않고, 또한 아기스 왕에게도 의심받지 않은 채로 시글락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다윗은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는 궁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1) 인간의 실수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마 26:14-29)을 발견할 수 있으며, 2)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전 10:13).
4-3. 아말렉으로부터 탈취 당한 가족을 구원한 다윗(30장)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을 불러 에봇을 가져오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아말렉을 쫓아가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물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쫓아가면 반드시 승리하고 모든 잃은 것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7-8). 다윗과 그 부하들은 즉시 아멜렉 족속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솔 시내에 이르러서는 200명의 군사들이 지쳐서 다윗을 쫓기를 포기해야 했다. 다윗은 그들을 그 곳에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아말렉을 추격했다(9-10). 브솔 시내는 '시글락'에서 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유다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가사' 남서쪽 지역을 통고해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였다(Raumer). 이 곳에서 200명이 추격을 포기하게 된 것은 1)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3일 길을 행군하여 피곤했으며, 2) 쉬지도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하여서 아말렉 족속을 추격했기 때문에 몹시 지쳤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힘들어하는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게 하였다. 다윗은 지친 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신앙에 기초를 둔 다윗의 인도적 조처였다. 다윗은 길을 가다가 한 애굽 소년이 지쳐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음식과 물을 주어 구해주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아말렉 사람을 섬기던 종이었는데, 그가 병이 든 것을 보고 아말렉 사람이 그를 버리고 간 것이었다. 다윗은 그를 인도자로 삼아 마침내 아말렉 족속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11-15). 다윗이 가서 보니 아멜렉 족속들은 탈취물로 인해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있었다. 다윗은 새벽부터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으며, 이때에 나귀를 타고 도망친 400명을 제외하고 모든 아말렉 족속들이 죽임을 당했다(16-17).
다윗은 탈취물을 가지고 브솔 시내에서 피곤해서 추격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부 비류들은 다윗에게 그들에게는 탈취물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윗은 오늘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모든 탈취물을 똑같이 분배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후에 탈취물을 나눌 때에 전례가 되게 되었다(18-25). 다윗은 돌아와서 자신이 얻은 탈취물을 남방에 사는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었다. 이들은 다윗과 평상시에 친분이 있는 장로들이었을 것이다(26).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1) 자신이 비록 블레셋 땅에 망명해 있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2)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물심 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성읍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30절), 3)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앞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닦아 놓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다윗은 벧엘에 있는 자들과 남방 라못에 잇는자와 얏딜에 있는 자에게 선물을 주었다(27). '벧엘'은 '호라마'와 '시글락' 근처에 있는 '브둘'(수 19:4, 5)과 동일 지역으로 보인다(Smith). 그리고 남방 라못 은 브엘세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성읍으로, 그리고 얏딜은 에스드모(수 15:50)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곳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수 15:48) 제사장의 성읍이었다(수 21:14). 다윗은 아로엘과 십못, 에스드모아, 라갈, 여라므엘, 겐, 홀라, 고라산, 아닥, 헤브론에 살던 사람과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선물을 보냈다(28-30). 아로엘은 브엘세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그리고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십못은 유다 남방(네게브)에 있던 성읍으로 알려지고 있다. 에스드모아는 유다의 산악에 있던 성읍으로,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었다(수 15:50; 21:14; 대상 6:57). 라갈은 헤브론에서 남동쪽 약 11km, 그리고 에스드모아에서 북동쪽 약 6.5km 떨어진 곳에 있는 '갈멜'(25:2)로 추정된다(Thenius). '여라므엘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대상 2:4,5,9). 그들은 브엘세바의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살고 있었다(27:10). '겐 사람'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들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안내자들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곳에 정착했다(15:6; 민 10:29-32; 삿 1:16). 이들은 유다 남방, 아말렉 사람들의 거주지 북쪽에서 거주했었다(15:6;27:10). 홀마는 브엘세바에서 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었다(수 15:30). 이곳의 원래 지명은 '스밧'이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이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시킨 후에 그 이름을 '홀마(전멸을 위해 헌신되었다는 뜻)라고 바꾸었다(삿 1:17). 고라 산은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있던 세펠라 지역의 한 부분인 '아산'으로 알려져 있다(수 15:42). 이곳은 처음에 시므온 지파에게 소속된 성읍이었으나(수 19:7), 후에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되었다(대상 6:59). 아닥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에델'(수 15:42;19:7)로 추정된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읍으로(수 10:3), 일찍이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으로(창 13:18;23:1), 그 뜻은 '벗' 또는 '친구'라는 말이다. 후에 다윗은 이곳을 자신의 잠정적인 왕도로 삼았다(삼하 2:1-4, 5:3). 다윗과 그 부하들이 왕래하던 곳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지역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억울한 도피자 다윗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은밀히 제공하여 다윗을 도왔을 것이다(Fay).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무엘서 기자는 그들을 다윗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4-4.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31장)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곧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요단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성읍을 보리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성읍에 블레셋 사람들이 살게되었다(7). 여기서 '골짜기'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산의 북동쪽 기슭에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29:1)를 가리킨다. 그리고 '저편'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비 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블레셋 군대가 그들과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Aharoni).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요단 건너편'은 '요단 동부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Smith). 그러나 여기서는 전투 장소인 길보아 산의 맞은편 지역인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을 가리킨다.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따라서 그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을 찾아 급히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 주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블레셋 군사들은 죽은 자들의 물건을 수거하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8). 그들은 즉시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겼다. 그리고 승리의 소식을 신당과 자기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블레셋 온 영토에 보냈다(9).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큰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큰 소식이었다. '신당에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기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신당'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며, 이 말은, 블레셋 땅에 많은 신당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의 집에 두었다(10). 그들은 자기 신들이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일을 한 것이다. '아스다롯'은 '아세라'(신 7:5), '아낫'과 더불어 가나안 3대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이었다(삿 2:13). 그들은 산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매달았다.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에 달았다'는 (대상 10:10)을 참고하면 아마도 벧산 성벽에 매단 사울의 몸은 머리가 없는 몸뚱이 였을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다가 죽어서도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 부분으로,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지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읍이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그 성읍 주위의 기둥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Pritchard). 이러한 기록을 보면 패장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는 것은 1) 상대국 백성들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안겨주고, 2) 자신들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확증하려는 전쟁 관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참한 일은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행한 그의 끈질긴 반역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을 원했던 반역 행위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8:4-8,19,20).
길르앗 야베스 족속들은 사울이 죽어서 벧산 성벽에 매달려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장사들을 선발하여 밤새 달려와서 사울의 시체를 찾아다가 야베스로 가져가서 화장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사울을 위해 7일간을 금식하며 슬퍼했다(11-13). '길르앗 야베스'는 갈릴리 바다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었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에 사울은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러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 당하는 사울의 시체를 가져오기로 결단을 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 21km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이러한 일을 결행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한 것이었다(28:8).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했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목이 잘린 사울의 시체는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화장을 했다(Lange, Keil). 그런데 이러한 견해 중에서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요단 동쪽이라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또 4)의 견해도 모압 암몬 등의 민족들은 화장하는 방식의 장례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오히려 그 민족들은 적의 시체를 불살라서 뼈를 가루로 만드는 등의 형벌적 성격으로 시체를 불살랐다(암 2:1). 그리고 5)의 견해는 시체를 불사름으로써 뼈가 남았다는 것을 보아 그 타당성이 적다. 여기서 '에셀 나무'는 (대상 10:12)에는 '상수리나무'로 표기되어 있다. 이 나무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Smith).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ㅎ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 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 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울은 교만으로 인한 불순종과 거역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고, 길보아 산에서 적의 화살에 중상을 입고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사울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좆지 않고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4-5. 삼상 18장-31장의 요약: 사울의 쇠퇴와 다윗의 흥기
이와 같이 (삼상 18-31장)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사울이 점차적으로 몰락해 가는 과정과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인정을 받게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왕권이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사울의 왕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가진 자임을 강조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무엘하에서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자연스럽게 왕권을 계승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윗이 인근 국가들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내용을 다루기 위한 준비가 끝난 셈이다.
C. 적용 및 교훈
1. 인간의 통치를 받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2.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지도자와 인간들이 선택하는 지도자는 어떻게 다른가? 3.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하시고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신다. 4. 인간을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만일 왕이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신다. 5. 좋은 가문과, 훌륭한 체격과 준수한 외모,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울이 겸손히 행할 때에 는 하나님께 높임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승리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6. 하나님은 인간적으로는 어리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게 하시려고 수많은 순종의 훈련을 시키셨다. |
출처:김진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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