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Bible

사울과 다윗

예인짱 2008. 6. 3. 13:42

 사울과 다윗 (16-31장)


엘리와 사무엘

사무엘과 사울

사울과 다윗

엘리

사무엘

사무엘

사울

다윗의 초기 생활

한나 기도

어린
사무엘

엘리
죽음

법궤

왕의
요청

초대왕
사울

마지막
연설

사울
승리

사울
거역

기름
부음

골리앗
죽음

다윗
도피

유랑
생활

사울
죽음

2:11 

4

5

8   

9  

12

13  

15

16  

17

18

21

   31



                            

 * 사울과 다윗: (16-31장) *




1. 다윗의 등장(16장)  
<참고 지도>(사울의 생애)

 

  (삼상 15장)에서 사울이 공적으로 여호와의 버림을 받은 후에 사무엘서 기자는 사울의 몰락 과정과 다윗의 등극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이야기(16-31장)는 사울이 왕으로서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점차 몰락해가고, 다윗이 지도자로 떠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왕으로 소개되는 과정은 사울의 경우와 동일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으며(9:16), 선지자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고(10;1), 여호와의 신의 능력을 공급받았다(10;6-13), 그리고 암몬인들을 무찌르고 공적으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다윗도 이와 동일한 순서를 밟는다. 그는 여호와에 의해 선택을 받은 후에(16:1),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다(16:13). 그리고 그는 골리앗을 죽임으로 백성들에게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었다(17장).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더 이상 사울을 위해 근심하지 말고 기름을 가지고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에 가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른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지시하셨다(16:1).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이 이일을 공개적으로 하면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2). 그러자 하나님은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제사에 이새를 청하라고 지시하셨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제사를 행하고 그 곳에 이새를 초청했다. 그리고 은밀히 이새의 아들을 자기에게 오게 하도록 시켰다. 사무엘은 이새의 강건한 아들들을 보고 과연 왕이 될 사람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다(3-6).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린 소년 다윗을 선택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지시하셨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것은 왕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준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신은 다윗에게 임하여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이후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일 마친 후에 자기 고향인 라마로 돌아갔다(8-13).


2. 왕궁에서의 다윗(17장-20장)

 2-1. 궁중의 악사 다윗(16:14-23)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역사의 중앙에 서게 만든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한 에피소드에선 다윗이 사울의 고통을 치료하는 젊은 음악사로 등장하고(16:14-23), 다른 에피소드에선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무찌르는 용사로 등장한다(17:1-18:5). 다윗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신 후에 사울은 반대로 악신을 경험하게 되었다.(16:14). 사울의 신하들은 다윗을 추천하여 그로 하여금 사울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자로 삼도록 추천하였다. 사울은 이 추천을 받아들여 이새의 집에 기별하여 다윗을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사울은 다윗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자기를 위해 일하게 하고, 자기의 병기를 드는 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라고 부탁했다. 그 후에 때때로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윗은 악기를 연주하여 사울을 상쾌하게 했으며, 악신을 사울로부터 떠나가게 만들었다(16:14-23). 이러한 모습은 사울이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다윗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2. 골리앗을 죽은 용사 다윗(17장)  <참고 지도: 다윗과 골리앗>
  두 번째 에피소드(17:1-18:5)에서도 사울은 왕으로서의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정신이 쇠약해졌다는 말을 듣고 믹마스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하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에 있던 에베스담밈에 진을 쳤다(1). '소고'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뜻을 가진 이름으로,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세펠라) 지역에 있던 요새로서(수 15:35), 베들레헴에서 서쪽으로 약 22.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블레셋 군대가 유다에 속한 이곳에 진을 쳤다는 것은 이미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세가는 '파헤친 땅'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아얄론 골짜기(수 10:12) 남쪽에 있던 도시로, 해발 약 120m 정도 되는 곳이었다. 에베스담밈은 '피의 경계선'이란 뜻을 가진 이름인데, 이러한 이름은 이곳에 잦은 전투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이곳은 소고에서 북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때에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2). '엘라 골짜기'는 '상수리 나무의 골짜기'란 뜻을 가진 이름으로,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약 22.5k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이 지역에는 나무가 무성했으며, 골짜기 밑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 이곳은 여름철만 빼고는 항상 골짜기에 물이 흘렀으므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이 전투는 물이 마른 여름철에 벌어졌음이 분명하다(Hertzberg). '항오를 벌였다'(아라크)는 말은 '상대를 엄습하다', '일렬로 정렬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서 방어진을 친 것을 의미한다. 블레셋 군사들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산에 진을 치고있었다(3).

 

  이때에 블레셋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었다. "싸움을 돋우는 자(아쉬 하베나임)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이란 말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기 위해서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한 선봉장을 의미한다. 그는 블레셋의 '가드'사람이었다. 가드는 아세가에서 서쪽으로 약 8.9km 떨어진 곳에 있는 블레셋 5대 도시 중에 하나였다(4). 이 지역에는 거인 족인 아낙 족속 함께 살고있었다(수 11:22). 아마 골리앗도 이러한 거인족의 후예였을 것이다. 그의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었는데(한 규빗-45cm, 한 뼘-13cm), 이는 약 283cm나 되는 큰 키였다.   골리앗은 최소한 270cm 이상 된 장대한 신장을 가진 거구였다. 그는 머리에 놋으로 된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 즉 천 위에 비늘 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붙여서 만든 갑옷을 입었다. 그런데 그 갑옷의 무게는 놋으로 오천 세겔(한 세겔-11.5g), 즉 57.5kg이나 되었다. 그는 다리에는 다리를 보호하는 "놋 경갑"을 쳤으며,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다. '놋 단창'은 어깨의 뒷  부분에 차는 창을 가리킨다. 그의 창 자루는 베틀채와 같았는데, 이는 멀리 던지기 위해서 창 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가진 창날은 철 육백 세겔, 즉 7kg나 되었다. 이와 같이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이었던 골리앗)은 신장이나 무기 등에서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으며,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같이 보여졌다(4-7).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서로 대표를 선택하여 결투를 하고, 지는 편이 이긴 편의 종이 되기로 약속하자고 외쳤다(8-10).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11).

 

  이때에 이 전쟁터에는 이새의 3아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새는 다윗에게 전쟁터로 가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고 형들이 안전하게 있는 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다윗이 형들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에 왔을 때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다윗은 그때에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이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사울이 골리앗을 제압하는 자에게는 많은 재물과 왕의 사위가 되게 할 것을 약속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이때에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꼈다. 이때에 이새의 맏형 엘리압이 다윗의 말을 듣고 그에게 노하며 그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그러나 다윗이 한 말은 곧 사울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울은 골리앗을 치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불렀다(12-31).  다윗은 사울 앞에 가서 자신이 골리앗과 싸울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울은 소년의 몸으로 골리앗과 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시닝 양을 칠 때에 사자와 곰도 쳐죽였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한 블레셋인을 치지 못하겠느냐? 고 대답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해 주신 것처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구해주실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자신이 입던 투구와 갑옷을 입혀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무거운 갑옷과 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버리고 맨 몸으로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창이나 칼 대신 손에 막대기 하나를 들고,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에 있던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목자의 주머니에 담고, 물배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아갔다(32-40). 물매(켈라)는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돌을 넣을  수 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이 물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있어서 엄지에 연결하여 물매를 돌려 던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러한 물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다. 목자들은 이러한 물매로 1) 옆길로 새는 양떼를 통제했으며, 2)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냈다. 또한 물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베냐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물매 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고 있으며(25:29; 삿 20:16; 대상 12:2; 대하 26:4),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 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물매 군이 그려져 있는 사실도 이러한 점을 증거 해주고 있다.

 

  골리앗을 중무장을 하고 다윗과 싸우기 위해서 가까이 나아왔다. 그러나 그는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다윗을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네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들고 나왔느냐?"고 비난하면서 자기의 신의 이름으로 그를 저주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내가 너를 새와 짐승의 밥이 되게 해주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골리앗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칼과 단 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을 죽여 그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사들의 시체를 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1)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단 창에 있는 것이 아니며, 2)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골리앗은 다윗을 치기 위해서 다윗이 있는 곳으로 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에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물매 돌을 돌리면서 나아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물매 돌을 꺼내서 물매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그를 단숨에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의 목을 베었으며, 이를 본 블레셋 군사들을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이스라엘과 유다 군사들은 즉각적으로 블레셋 군사들을 추격하며 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블레셋 군사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으며, 부상당한 블레셋 군사들은 사아라임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쓰러져 있었다(41-52).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가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로 보고, '에그론'에 속한 한 지점이었다는 해석(Targum, Vulgate)이 있으며, 둘째는 이를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라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 해석이 있다(Keil, Klein, LXX) .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말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을 보면, 두 번째 해석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사아라임 가는 길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 '사아라임'은 (수 15:36)을 볼 때에, 소고 및 아세가와 인접한 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가드와 에그론은 블레셋의 주요 5 도시들에 속한 성읍이었다. 이날에 승리한 이스라엘은 패전한 블레셋의 진에서 탈취물을 취했다(53). 그리고 다윗은 블레셋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그의 갑옷은 자기의 장막에 두었다(54).

 

  그때에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것을 보고 군대 장관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도 사울은 다윗이 군사들에게 잘 알려진 용사인 줄로 알고 군대장관에게 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브넬은 다윗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브넬이 다윗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사울은 아브넬에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에 돌아올 때에 아브넬은 다윗의 손에 골리앗의 머리가 있는 채로 다윗을 사울 앞에로 인도했다. 사울은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보고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고 물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57-58).


 
2-3. 사울 가족이 다윗을 사랑함-다윗과 요나단(18-20장)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은 이스라엘 가운데에 다윗의 인기를 치솟게 만들었다. 이때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해 이렇게 노래했다. "사울의 죽은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18:7)." 이 사건은 사울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다윗을 박해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8:8-9). 이 사건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궁에 머무르게 하면서 자기 곁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18:1).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으며, 그와 의형제의 언약을 맺었다. 이러한 언약은 자신들의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원하는 언약이었을 것이다. 또한 요나단은 자신이 입었던 겉옷과 군복과 활과 띠를 벗어서 다윗에게 주었다(3-4). 이처럼 자신의 의복을  벗어주거나, 자신의 무기를 상대방에게 선물로 주는 것은 고대에 용사들 간에 우정이나 혈맹 관계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행해졌던 풍습이었다(Keil, Philippson).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다. 사울은 이를 보고 다윗을 군대의 장으로 삼았으며,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5).

 

  그러나 다윗의 명성이 사울을 능가하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다시 임하게 되자, 사울은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두 번이나 피하여 안전할 수 있었다(6-11).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본 사울은 다윗을 자기로부터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와 함께 계셨다. 이로 인해 사울은 더욱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했다(12-16). 사울은 자신의 첫째 딸 메랍을 아내로 준다는 조건으로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과 싸우라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에 사울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울은 다윗에게 블렛세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양피 200개를 가져오면 그를 사위로 삼겠다고 제안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통해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무사히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200개를 구하여 사울에게 주었다. 그러자 사울은 할 수 없이 약속대로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사울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요나단 뿐 아니라, 자기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다윗을 더욱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 후로 사울은 일평생 동안 다윗을 대적 자가 되게 되었다(17-30).


 2-4. 요나단과 미갈이 다윗을 살림(19:1-17)
  그 후에 사울은 자기아들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하였다(19:1). 그러나 요나단이 다윗을 크게 사랑했기 때문에 아침에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고 부탁했다(2). 그리고 나서 요나단은 부친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는 일이 옳지 않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라는 영령을 취소해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말 성경에 요나단이 다윗에 대해 포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포장했다는 말은 "선하게 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4).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자신이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요나단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다윗을 불렀으며, 그 후에도 사울과 함께 있을수 있게 되었다(1-7). 다윗은 그 후에도 블레셋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8).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게 되자 사울은 단 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윗은 그 창을 피해 그 날 밤에 집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이 집에 있는 것을 알고 군사들을 보내서 다윗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키다가 아침이 되면 죽이라고 명령했다. 사울의 딸 미갈은 자기 남편 다윗이 죽게된 것을 보고 창문에 줄을 매달아서 그를 은밀하게 도피시켰다. 그리고 나서 미갈은 인형으로 다윗이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 후에 사울이 보낸 군사들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미갈은 다윗이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사울은 이러한 보고를 듣고 침상 채로 다윗을 잡아오라고 지시했다. 사자들이 다윗을 잡기 위해 집으로 들어간 후에 그들은 다윗이 이미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울은 미갈에게 네가 어찌 이런 일을 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미갈은 다윗이 보내지 않으면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8-17). 이와 같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계획은 모두 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딸 미갈에 의해서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5. 사무엘에게 피신한 다윗(19:18-24)
  그 후에 다윗은 다시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피난했으며, 사무엘에게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 후에 다윗은 사무엘과 함께 나욧에 거하게 되었다. 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란 뜻을 가진 아카디아어인 '나움'에서 온  단어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Smith, Keil, Fay).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을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나욧'은 단순한 기숙 시설 외에 '교육을 위한 집'이나, '선지자 학교'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나욧'이 '초원 지대'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말인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시설은 목자들이 거주하는 초원 지대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삼하 7:9, 렘 33:12). 또한 본문에 '나욧'이 복수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여러 동으로 이루어진 교육용 숙소 시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Keil). 그 후에 혹자들은 다윗이 사무엘과 함께 라마의 나욧에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을 잡기 위해서 군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사무엘과 선지자들이 있는 것을 보는 순간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또 다시 다른 사자들을 라마로 보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파송을 받은 사울의 군사들도 역시 하나님의 신을 인해 예언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악신이 들린 사울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다윗을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셨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자신이 친히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라마로 갔다. 사울은 세구에 있는 우물에 이르러서 다윗과 사무엘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세구는 '전망대'란 뜻을 가진 말로서, 이곳은 기브아와 라마 사이에 있는 지역이었다. 이 곳은 라마에서 북쪽으로  4.8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슈웨이케'로 추정된다(Conder). "큰 우물'이란 말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잇는 것을 보면 이 우물은 근처에서는 잘 알려진 우물이었던 것 같다. 마침내 사울도 사무엘이 있는 라마의 나욧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그도 역시 선지자들의 무리와 함께 종일토록 예언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유대인의 속담 중에는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말은 본래 어떤 사람이 본래의 자기 모습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할 때에 사용되게 되었다(18-24). 악신을 인해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의 시도는 하나님의 신의 강력한 개입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2-6.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20장)
  그 이후에 다윗은 라마에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네 부친 사울이 나를 죽이려하느냐?" 고 물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부친 사울이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다. 요나단은 만일 부친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했다면, 벌써 자기에게 그 사실을 밝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요나단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슬퍼 할 것을 두려워해서 그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진실로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에게 "네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다윗은 월삭 식사시간에 3일간 참석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월삭은 매월 첫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상번제 외에 속죄제를 드려 지난 한달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을 시작하는 종교행사와 민간 축제가 거행되었다(민 10:10, 28:11-1, 스 3:5, 느 10:33, 느 10:33, 사 1:13). 월삭 때의 식사는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공동 식사를 했던 것 같다(Smith, Fay). 다윗도 사울의 사위였기 때문에 마땅히 사울의 식탁에 참석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다윗은 만일 사울이 요나단에게 다윗이 식사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고향 베들레헴에 매년제를 드리러 갔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매년제는 1년에 한 번씩 가족이 함께 드리던 제사를 말한다. 다윗은 만일 사울이 그 말을 듣고 "잘했다!"고 대답하면 사울이 다윗을 죽일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면 그가 다윗을 죽일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다윗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겠다고 말했다. 요나단은 만일 부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내가 너를 평안히 보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때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의 생애 동안 자기의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약속하고, 그 후손 때까지도 자기 집을 선대할 것을 약속하도록 요구했다. 이 때에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사울을 포함한)을 치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되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3일이 되면 에셀 바위 곁에 숨어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자신이 병기를 든 소년과 함께 가서 그 곳에서 화살을 세 번 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병기 든 소년에게 "화살이 이 편에 있으니 가져 오라!"고 하면 사울이 다윗을 해칠 의사가 없는 것이므로 무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병기 든 소년에게 "화살이 네 앞 편에 있다"고 하면 사울이 다윗을 해칠 의사가 있는 것이므로 "네 길을 편히 가라!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이 말을 하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여호와 앞에서 맹세를 했다(1-23).

 

  사울은 월삭의 식사 시간에 다윗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첫째 날은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이 둘 째 날 식사시간에도 참석하지 않게 되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요나단은 자신이 매년 드리는 제사를 위해 다윗을 베들레헴으로 보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크게 노하며 요나단에게 욕을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으면 요나단의 왕위가 위험하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사울은 창을 던져 요나단을 죽이려고 했다. 요나단은 이 사건을 통해서 부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크게 노하여 식사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갔으며, 다윗을 슬퍼하며 다음 날 식사시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후에 요나단은 미리 정한 방법을 따라 다윗에게 사울이 그를 해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윗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자기의 병기 든 소년을 먼저 성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나서 요나단은 울면서 다윗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전에 맺은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요나단은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윗의 파란만장한 피난 생활이 시작되게 된다(24-42).

 


 

3. 다윗의 도피 생활(21:-) <참고지도: 다윗의 도피생활>

 3-1.놉으로 간 다윗(21:1-9)
  다윗은 요나단과 헤어진 후에 놉으로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났다. '놉'은 '작은 산', '언덕', '산당'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당시의 수도인 기브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블레셋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실로의 성막이 파괴된 후에, 여호와의 성막은 제사장의 성읍인(22:19) '놉'으로 옮겨졌던 것 같다. 다윗이 '놉'으로 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으로 자신의 피신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22:10), 2) 도피 생활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며, 3)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F.R. Fay). '아히멜렉'(Ahimelech)은 '아히야'(Ahijah)와 동일 인물로 보이는 데, 그는 사울 때의 대제사장으로(14:3), 아히둡의 아들이며, 비느하스의 손자요, 엘리 대제사장의 증손이었다(22:9). '아히멜렉'(아히야)은 블레셋과의 믹마스 전투에서 사울을 도와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했었다(14:3, 36-42).

 

 아히멜렉은 다윗을 보고 떨면서 그를 영접했다. 그는 다윗이 갑자기 찾아온 것을 보고 혹시 자기에게 해를 가하러 오지 않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던 것 같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군사들도 없이 혼자 나타난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 했다(1). 이때에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특명을 받고 은밀하게 내려왔으며, 다른 사람들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2). 다윗이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히멜렉이 자신이 사울을 피해 도망친 것을 알면, 사울을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제사장에게 자신과 일행이 먹을 음식을 요구했다(3). 그러나 성막에는 보통 떡은 없었고, 떡 상에 새 떡을 올려놓으면서 물려낸 거룩한 떡밖에 없었다. 이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일행이 매우 허기 진 것을 보고 그들이 여인을 가까이 하지만 않았으면, 그 떡을 주겠다고 말했다(4). 다윗은 자기 일행이 3일 동안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으며, 아히멜렉은 그 말을 듣고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주었다(5-6).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사울의 목자장으로 있던 도엑이라는 사람이 그 곳에 있었다(7). 그는 에돔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인으로 귀화하여 사울 왕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후에 그는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음식과 칼을 준 일을 고자질하여 제사장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칼이나 창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아헤멜렉은 다윗이 죽은 골리앗의 칼이 그 곳에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다윗은 그와 같은 무기가 없으니 그 칼을 달라고 요청했다(8-9). 

   

 3-2. 가드에서의 다윗(21:10-15)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서 블레셋 땅 가드로 도피했다. '가드'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서 놉에서 남서쪽으로 약 3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본문에서 아기스를 가드의 '왕'이라고 부른 이유는 블레셋에게는 중앙 집권적인 왕이 없었고, 각 도시를 다스리는 방백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아기스'는 가드를 다스리는 방백이었을 것이다. 시 34편의 제목을 보면 이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애굽 왕의 공식 명칭이 '바로'인 것처럼, 가드 왕의 공식 명칭이 '아비멜렉'이었기 때문이다. '아기스'는 다윗 당시의 가드를 주관했던 왕, 곧 아비멜렉의 이름이었다(Keil, Smith). 다윗이 '가드'로 도망간 이유는 1) 사울의 영토인 이스라엘에서는 자신이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2) '가드'는 엘라 골짜기 입구에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3) 혹시 가드 왕이 사울을 피해 망명해 온 자신을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스가 신하들을 불러놓고 다윗의 망명에 대해 논의 할 때에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받아들이는 일을 크게 반대했다. 그들은 다윗이 가드의 장수인 골리앗을 친일과,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사울보다 더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10-11).

 

 다윗은 이러한 아기스의 신하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기스가 자기를 죽일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아기스가 자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의 앞에서 미친 척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문에 글씨를 쓰며, 입에는 침을 흘렸다. 아마도 이러한 모습은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악신이 든 사울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했던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가드 왕 아기스는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보고 다윗이 미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윗을 당장 자기 앞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후에 다윗은 이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여호와의 도우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10-15). 그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큰 위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3-3. 아둘람 굴에서의 다윗(22:1-2).
  가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윗은 즉시 그 곳을 벗어나 아둘람 굴로 피신했다. '아둘람'은 '피난처', '보호처'란 뜻으로, 이곳은 성경에서 가나안 족속의 왕도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창 38:1,2, 수 15:35).  이 곳의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인데, 가드에서 남동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곳은 원래 유다의 영토였으나 당시에는 블레셋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성서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탐사하던 중에 아둘람 성의 한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적합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Conder, Robinson). 그리고 다윗의 피신  소식을 들은 다윗의 부친과 형제와 모든 집안 사람들도 그 곳으로 내려갔다(22:1). 이는 한 사람이 반역에 걸리면 모든 식구들이 처형을 받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환난 당한 사람들과 빚진 자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머여들었으며,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되었다. 이때에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약 400명 정도 되었다(2). '환난 당한 자'는 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며, "빚진 자"는  사울 왕국의 부당한 세정이나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대금업 등으로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며, "마음이 원통한 자"는 사울 왕국의 비도덕적이고, 불경한 행동을 인해 심적. 영적으로 상처를 입고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들이  있었다(5, 대상 12:1-18).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타락하고 쇠퇴해가던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고 안주하기  보다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 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 당하기를 기뻐하여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3-4. 모압에서의 다윗(22:3-4)
  그 후에 다윗은 자기 부모를 사울의 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모압 땅 미스베로 가서 자기 가족을 모압 땅에 거주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3). 이때에 다윗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들의 피신처로  모압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증조모 룻이 모압 여인이었으므로(룻 1:22), 다윗은 모압 민족과 어느 정도 혈연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룻 4:13-22; 마  1:5,  6). 2) 당시 사울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모압 민족이 사울 왕의 경쟁자인 다윗을 후원할 것으로 기대했다(14:47). 3) 모압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오기에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미스베'는 '망대'란 뜻으로, 현재까지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지명의 의미로 보아 아마도 사해 동쪽에 있는 비스가 산 근방이나, 그 인근의 고지대로 추정된다(Fay, Smith, Keil). 모압 왕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다윗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당분간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가서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3-5. 유다(세렛 수풀)로 돌아온 다윗(5)
  다윗은 이 지시를 따라서 모압을 떠나 헤렛 수풀에 머물게 되었다(4-5). 성경 주석가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 선지자의 출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들을 제시한다. 1) 갓은 그때 다윗에게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하나님의 뜻만 전했다는 해석(Lange). 2) 갓은 사무엘이 지도하는 선지학교 출신으로서, 사무엘의 명을 받아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는 해석(Smith, Keil), 3)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에 모여든 400명 중의 한 사람으로, 모압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다윗에게 전했다는 해석(Wood) 등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2)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 "갓"은 의 갓 지파 소속의 사람으로 보이며, 다윗의 도피 생활 중에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궁전 선지자로 있으면서(대상 21:9)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고(삼하 24:11-19), 다윗의 행적을 기록하기도 했다(대상 29:29). 다윗이 유다를 떠나 모압으로 간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 땅으로 내려간 것과 비슷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다윗도 모압에서 불러내어 유다 땅에 머물도록 지시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의 땅 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고난 속에서도 약속의 땅을 지키는 일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헤렛 수풀은 '십'의 남쪽으로 약 3.2km,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약 8-9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그일라'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Hertzberg).

 

 3-6. 제사장을 죽인 사울(도엑)(6-23)
  다윗이 유다 땅으로 돌아간 후에 사울은 다윗이 다시 유다 땅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울은 기브아에서 베냐민 사람들을 모으고 다윗이 어디에 있는 지 고발하지 않은 일에 대해 추궁을 했다. 바로 그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다윗이 놉에 가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받아 도망친 사실에 대해 고발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놉에 있는 모든 제사장들을 소집했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모은 후에 그들이 다윗와 공모하여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몰아세웠다. 제사장들은 다윗의 반역 사실을 알지 못하고 떡과 칼을 주었다고 말했으나, 사울은 이를 믿지 않고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무도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고발한 도엑에게 칼을 들어 그들을 치라고 명령했으며, 도엑은 그명을 따라 세마포를 입은 제사장 85명을 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사울은 그 날에 놉에 있는 모든 남녀와 가축과 젖 먹는 아이와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다(6-19). 그러나 이때에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구사일생으로 그 칼을 피해 다윗이 있는 곳으로 피신하였다. 다윗은 제사장이 죽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아비아달이 자신이 있는 곳에 함께 머물게 하였다(20-23).

 

 3-7. 그일라에서의 다윗-블레셋을 친 다윗(23:1-12)
  그 후에 다윗은 블레셋이 그일라를 쳐서 타작마당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듣게되었다(23:1). '그일라'는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 그리고 아둘람 굴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이 곳은 가나안 정복 후에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수 15:44). 이곳은 당시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헤렛 수풀'에서 북쪽으로 약 9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둘람' 지역이 당시에 블레셋의 영토였기 때문에(22:1), 그곳과 인접한 '그일라'는 블레셋의 국경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Keil, Smith, Tobler). 블레셋 사람들은 추수한 곡식을 탈취하기 위해서 그일라의 타작 마당을 탈취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여호와께 자신이 블레셋을 칠 것인지를 물었으며, 여호와께서는 블렛세을 치고 그일라 사람을 구하라고 지시하셨다(2).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사울을 피해 다니는 상황에서 블레셋을 치는 일을 반대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시 한 번 이 일에 대해 여호와께 물었으며, 여호와께서는 다시 한 번 다윗에게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치라고 대답하셨다(3-4). 다윗은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였다(5).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도망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왔었다(6). 그러므로 다윗은 그 에봇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선지자와 하나님의 뜻을 전해줄 제사장이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나 다윗이 그일라에 왔다는 소식은 곧 사울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울은 다윗이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군대를 이끌고 그일라를 에워싸고 다윗을 잡으려고 했다.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을 불러 에봇을 가져오게 하고, 사울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서 그일라에 올 것인지 물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이 올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윗은 다시 여호와께 그일라 사람이 자신을 사울에게 넘겨줄 것인지 물었다. 여호와께서는 그일라 사람이 그를 사울에게 넘길 것이라고 대답해주셨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한 600명을 데리고 즉시 그일라 성을 떠났다. 그리고 사울 역시 다윗이 그일라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을 좆는 일을 중단했다(7-13).

 

 3-8. 십 황무지에서의 다윗(23:14-28)
  그 후에 다윗은 황무지 요새와 십 황무지 산골에 가서 있었다. 여기에서 '황무지'는 유다 광야, 즉 유다 지역의 산지와 사해 사이에 있던 광야를 가리킨다(수 15:61, 62). 그리고 '요새'는 산과 수풀 등 자연적 지형 지물로 형성된 안전한 은신처를  가리킨다. '십'은 오늘날의 유다 지파에 속하는 성읍으로(수 15:55), 그일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1km, 헤브론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산악 지대에 있는 산중의 하나가 19절에 언급된 '하길라 산'이었다.   어느 날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온 것을 보고 십 황무지 수풀에 숨어 있었다. '십 황무지 수풀'(호레쉬)은 '십'에서 남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13-15). 그때에 사울의 요나단이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을 만나서 그에게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이러한 요나단의 행동은, 1) 사울에게 쫓겨 심한 곤경에 빠져있을 다윗을 위로하고, 2) 다윗과 자신간에 맺은 언약(20:12-16)을 재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의 손이 다윗에게 이치지 못할 것이며, 다윗이 다음 왕이 되고 자신은 그 다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16-18). 그 후에 십 사람들이 다윗이 광야 남편에 있는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 있다고 보고했다. '하길라'는 '건조한 언덕'이란 뜻으로, 이곳은 '십 황무지 산골'의 한 부분이었다.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 수풀'의 다른 명칭으로 보인다. 이 산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평지에 살던 십 사람들에 의해 쉽게 발견될 수 있었다. 사울은 그 보고를 듣고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으며, 누가 그를 발견했는지 알아보고, 다윗이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이에 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사울의 지시를 듣고 다윗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갔다. 이때에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광야 남편에 있는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었다(19-24).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는 '광야 남편으로 아라바 근처에 있던  마온 황무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온'은 '거주', '거처'란 뜻으로서, 헤브론에서 동남쪽으로 약 13km, 십에서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아라바'(Arabah)는 '황무지' 또는 '사막의 들'이란 뜻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기까지 요단 계곡을 따라 좌우로 펼쳐져 있는 낮은 광야 지대를 의미한. 보통 이 말은 넓게는 유다 광야 전체를, 좁게는 유다 광야 중 사해 인근의 지역이나 요단 계곡 중 사해와 가까운 곳을 의미한다. 여기서에서는 이 말을 유다 광야 중 사해 인근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울은 마온 황무지에 가서 다윗을 잡으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교묘하게 피해다녔다. 그때에 하나님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셨다. 블레셋 침공 사실이 사울에게 보고되자. 사울은 다윗을 좆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가서 블레셋을 치러 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이 곳 이름이 "셀라하마느곳"이라고 불리게 되었다(25-28).

 

 3-9. 엔게디 요새에서의 다윗(23:29-24:22)
  그 후에 다윗은 그 곳을 떠나 엔게디 요새에 가서 거하게 되었다(23:29).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란 뜻인데, 이곳은 다윗이 앞서 은신해 있었던 '마온 황무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7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본문에 언급된 '엔게디 요새'는 한 지점이 아니라 약 20여km의 거리에 걸쳐  있는 산맥 전체를 가리킨다(Aharoni). '요새'(메차도트)가 단수가 아닌 복수로 기록된 것을 보면,  당시에 다윗은 어느 한 곳에서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면서 은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요새 지대는 동쪽으로 사해로 내려가는 석회석 협곡 및 벼랑과 연결이 되었다. 이러한 협곡과 벼랑은 흙은 석회질이지만 바위는 백악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많은 자연적인 굴들이 있어, 현재에도 도망자들의 도피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Robinson). 또 이 협곡의 벼랑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 지역의 명칭을 낳게 한 약 섭씨 30도 정도되는 물이 있는 '샘'이 있다(Conder).  이 엔게디는 유다의 여러 지역 중에서 국방상 가장 취약한 곳이었기 때문에, 암몬. 모압. 에돔 족속들이 유다를 침범하는 통로로 이용했다(대하 20:1 이하). 한편 엔게디 요새지는 사해 수면에서 약 670m 정도 높은 곳에 있었으며, 엔게디의 샘의 높이는 약 200m 높이에 있었다. 이곳에는 그 지명의 의미와 같이 지금도 들 염소들이 살고있다

 

 사울은 블레셋을 치러 출전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1). 사울은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들 염소 바위로 가고 있었다(2). 들 염소 바위는 가파른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염소나 산양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Robinson).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해 들 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다(Danin). 오늘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 염소를  발견하곤 한다(Thompson).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이 있었다(Fay). 사울은 길을 가다가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르러 굴이 있는 것을 보았다. 길가 양의 우리는 양을  사육하는 곳을 말한다. 이 '양의 우리'는 대부분 동굴 앞에 돌로 낮고 둥글게 쌓아서 만들었으며, 그 지붕은 야생 짐승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가시나무로 되어 있었다(Thompson). 당시 이러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 또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사울은 "발을 가리우기 위해서" 그 굴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가리운다'(사카크)는 말은 '덮다', '둘러싼다'는 말이다.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Keil, Thenius). 히브리인들이 대변을 보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대변을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을 때에 옷자락에 의해 자신의 발이 덮여지기 때문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잠을 잔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울이 이러한 생리 현상을 급히 해결하기 위해서 그 굴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굴 안에는 사울이 그토록 찾아 다니던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었다(3).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사울을 죽일 때라고 생각하고 그를 죽이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고 단지 그의 겉 옷 자락만 베었다(4). 그러나 다윗은 그의 겉 옷 자락을 벤 것조차 마음에 가책이 되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을 해치는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사울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일어나서 무사히 다윗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그 후에 다윗이 사울을 쫓아 나가서 급히 사울을 불렀다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게 되자, 다윗은 그 앞에 절을 했다(5-8). 다윗은 자기가 사울을 해치려고 한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울의 겉 옷 자락을 보이면서, 오늘 자신이 사울을 해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윗은 악은 악인에게서 나온다는 속담을 인용했다. 다윗이 악한 마음, 즉 사울을 번역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를 죽이려는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울 사이를 심판하시되, 자기가 사울을 죽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어찌 죽은 개나 벼룩과 다름 없는 자신을 두려워하여 쫓고 있느냐? 고 물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울 왕과 자신의 사이를 공정히 판결하고 그 행위대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8-15). 사울은 이러한 다윗의 말을 듣고 다윗을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사울은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대답했다. 사울은 오늘 다윗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일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선으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그를통해서 이스라엘이 견고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자기의 이름을 아비의 집에서 멸하지 않을 것에 대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다윗은 사울이 말한 그대로 다 이행하겠다고 맹세했다. 이것은 사울과 다윗이 서로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 조약을 맺은 후에 사울은 자기 집으로, 그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돌아갔다(16-22).

   

 3-10. 사무엘의 죽음(25:1)
  그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해 오던 사무엘이 죽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죽음을  슬퍼하며 라마에 있는 집에서 그를 장사하였다. 사무엘의 사망한 때는 그의 나이 83세인 B. C. 1017년 경으로 추정된다(Leon Wood).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때는 `미스바 전투'(7:5-11, B. C. 1055년)가 있은 지 5년 후, 즉 사무엘이 50세 때인 B. C. 1050년경이었다. 따라서 사무엘의 출생 연도는 대략 B. C. 11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이며,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은 신정 왕국의 건설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에 따라 세상을 하직하고 열조에게 돌아갔다. 사무엘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바란 광야로 피신했다. `바란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북쪽에 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광야이다. 최근의 학자들은 1) `바란 광야'는 팔레스타인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윗의 행동 반경으로 보기 힘들며, 2) 또 2절 이하에서 `마온 광야'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란 광야'를 `마온 광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Keil, Smith, Lange 등은 이러한 견해를 반대한다.  그 이유는 `바란 광야'는 팔레스타인의 최남단에 있는 도시인 `브엘세바'와 인접한 광야로서, 유다 광야와 경계선 없이 이어지는 광야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여건상 다윗이 이곳까지 도피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사실, 당시에 사무엘은 사울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멀리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1. 마온 광야에서의 다윗(25:2-44)
  그러나 다윗은 얼마 후에 다시 식량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신이 전에 머물렀던 `마온 광야'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마온은 `십'과 `갈멜' 부근에 있는 유다의 구릉지 성읍이었다(수 15:55). 갈멜은 마온에서 북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울이 아말렉 전투 후에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었다(15:12). 그는 크게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 삼천 마리와 염소를 일천 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이 때에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나발'은 많은 가축들을 마온 광야의 고지대에서 방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발'은 `시들다', `바보처럼 행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나벧'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리석은', `우매한', `괴악한'등으로 번역되었다(삼하 13:12; 시 14;1; 39:8).  그런데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특성으로부터 붙여진 별명일 가능성이 높다(Keil). `아비가일'은 `기쁘게 하는 자', 또는 `기쁨을 주는 자'란 뜻이다. 이 여인은 후에 자신의 남편 `나발'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다(삼하 3:3; 대상 3:1). 아비가일은 지혜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내면과 외면적으로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이었다(16:18; 아 4:10; 7:1,6). 그러나 나발은 완고하며 행사가 악해졌다. `완고하다'(카쉐)는 말은 `거칠은', `굳은',  `난폭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에게 적용되었다(출 33:3,  5;  34:9; 신 9:6; 삿 2:19). 그리고 `악하다'(라 마알랄림)는 말은 능동적으로 악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갈멜 족속이었다. 여기의 `갈멜 족속'은 마땅히 `갈렙 족속'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나발'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찰을 신실하게 수행했던(민 13;30) `갈렙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갈렙은 그 신실함으로 인해 모세로부터 헤브론을 중심한 유다 땅의 일부를 약속 받았었고,  그는 그 자신이 약속 받은 그 땅을 정복했었다(민 13, 14장 ; 신 1:22-36;  수  14:6-15; 15:13, 14). 한편 `마온'이라는 지명은 갈렙의 자손인 삼매의 아들 `마온'에게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볼 때에(대상 2:45), 바로 이 `마온'에 살던 `나발'은 `마온'이라는 인물의 후예인 듯하다.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부하 중에서 열 명을 그에게 보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양털을 깎을 때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를 벌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창 38:13, Keil). 즉 유목민에게 있어서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의 날과 같은 기쁜 날이었다. 다윗은 이러한  관례를 따라 자신과 부하들의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해 나발의 집으로 수하 소년들을 보냈다. 다윗은 전에 자신이 갈멜에서 나발과 그의 재산을 지켜 준 일이 있었다. 다윗은 그 일을 상기시키면서 자신과 부하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나발에게 요청하였다(4-9). 그러나 나발은 이러한 다윗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다윗을 주인으로부터 도망 나온 패역한 무리로 간주했다. 다윗은 빈손으로 돌아온 자기 부하들을 통해 나발의 말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분노하여 군사 200명만 남겨두고, 400명을 무장시켜 나발을 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에 나발이 거느린 사람들 중에 하나가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가서 나발이 한 행위에 대해 전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했다(10-17). 아비가일은 그 말을 듣고 급히 떡 200덩이를 준비하고,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붉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200개를 취하여 나귀에 실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시켜서 먼저 그것을 싣고 가게하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도중에서 다윗을 만나서 다윗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도록 요청하였다. 그녀는 나발의 우매한 행동을 인정하면서 그가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다고 해도 다윗이 직접 그 손을 들어 원수를 갚는 것은 다윗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손으로 나발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 후에 다윗은 아비가일이 가져온 음식을 받고, 나발을 치러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다시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게 되었다(18-35). 아비가일이 돌아오니 나발은 잔치로 인해 크게 취하여 기쁨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날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나발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발은 다음 날 아침에 그 말을 듣고 심히 놀라 몸이 돌같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0일 후에 여호와께께서 치심으로 죽고 말았다(36-38). 다윗은 마온에 사는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신 일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총명한 아비가일을 자기의 아내로 맞기 위해서 자기의 부하들을 그녀에게 보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부하들의 말을 듣고 즉시 자기를 따르는 처녀 다섯을 데리고 다윗에게 가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25:2-44). 그 후에 다윗은 이스르엘의 아히노암을 아내로 취하였다. 그리고 사울은 자기의 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다(39-44). 전에도 사울은 골리앗을 죽인 대가로 다윗에게 주기로 했던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변덕스러운 짓을 했었다(18:19). 사울은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막내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발디에게 주었다. `발디'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삼하 3:15)에서는 `발디엘'로 표기되었다. 성경을 보면 가나안 정탐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발디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민 13:9).  그는 베냐민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정탐에 참여했던 `라부'의 아들 `발디'였다. 아마도 여기에 나오는 `발디'는 이러한 그의 조상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22:5). "갈림에 산다"는 말은 `갈림 출신'이란 뜻이다. `갈림'은 `무더기'란 뜻으로, (사 10:30)을 따르면 이 곳은 예루살렘과 사울의 기브아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

 

 3-12. 십 황무지에서 또 다시 사울을 살려줌(26장)
  그 후에 다시 십 사람들은 사울이 있는 기브아로 가서 다윗이 광야 앞에 있는 하길라 산에 숨었다고 밀고하였다(26:1). `십'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었다(23:14).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였다(10;26). `십 사람'들은 다윗을 첫 번째로 밀고할 때에 다윗이 `광야 남편'에 은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23:19).  그 후에 그들은 또 다시 다윗이 광야 앞에 있는 하길라 산에 숨었다고 밀고 했다.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 `광야의 얼굴'이란 뜻으로,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갈멜을 떠나서 십 사람들이 첫 번째 밀고했던 때에 살던 곳에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하길라 산', 즉 `하길라 산 수풀 요새'는 `십 황무지'에 있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그 보고를 듣고 즉시 정예병 3,000명을 이끌고 십 황무지로 내려갔다(26:2). 그때에 사울은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길' 은 예루살렘 방향에서 네게브 지방의 `아랏'(민 21:1)으로 통하는 대로를 가리킨다(Smith, Fay). 이때에 다윗은 황무지에 있다가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3). 당시 다윗은 사울의 진 서쪽 지점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동태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정탐꾼을 보내서 소문대로 사울이 그 곳에 이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4). 다윗은 은밀하게 사울이 진을 친 곳으로 갔다. 그리고 사울과 군대 장관 아브넬이 머물고 있는 곳을 살폈다. 다윗이 살펴보니 그때에 사울은 진 가운데에 누워 있었고, 백성은 그를 둘러서 진을 치고 있었다(5). 다윗은 헷 사람 아헤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누가 나를 따라 사울이 있는 진으로 내려가겠느냐?" 고 물었다. 이때에 아비새가 "내가 함께 가겠다!'고 대답했다(6).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은밀하게 사울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때에 사울은 진 가운데에 누워자고 있었고, 그의 창은 머리 곁에 있는 땅에 꽃혀 있었다. 그리고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은 다윗을 둘러서 잠을 자고 있었다(7). 이때에 아비새는 다윗에게 사울을 창으로 찔러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을 해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직접 치실 것이므로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가도록 지시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이 모든 일을 할 동안에 사울은 깊은 잠이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8-12).  

  

  다윗은 사울의 진을 떠나서 건너편에 있는 산꼭대기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울과 군대 장관 아브넬을 불렀다. 다윗은 군대 장관 아브넬에게 사울을 보호하지 못한 일을 책망했다. 다윗은 아브넬에게 왕의 창과 사울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13-16). 사울은 그 소리가 다윗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네가 내 아들 다윗이냐?"고 물었다. 다윗은 자신이 다윗임을 밝히고 자신은 왕에게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는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난 일이면, 자신이 죽을 수 있지만, 만일 다른 사람들이 모함한 것이면 그들이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여호와 앞에서 무고한 자신의 피를 흘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다윗은 어찌 왕이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사람처럼 한 마리의 벼룩을 잡으려고 나왔느냐? 고 대답했다(17-20). 사울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하였도다." 그러자 다윗은 사울에게 한 소년을 보내어 그의 창을 가져가라고 대답했다. 다윗은 오늘 자신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귀중히 여겨주시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다윗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이 일이 있은 후에 다윗과 사울은 각기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21-25).  

     

 3-13. 가드로 간 다윗(27장)
  그 후에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에 있다가는 언젠가 사울의 손에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은 사울이 언제든지 약속을 어기고 또 다시 자기를 추격할 수 있으며, 또한 사울의 주변에는 자기를 모함하는 수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서 블레셋 사람의 영토로 피난하기로 결심했다(1). 그는 자기와 함께 한 600명을 데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갔다(2). 블레셋은 사울의 강력한 경쟁자인 다윗과 손을 잡음으로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드'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 다윗과 그 일행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가드 왕'은 블레셋의 5대 방백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다윗은 전에 `아기스'에게 갔다가 위기를 맞고 미친 척 하여 겨우 살아나온 적이 있었다(21:10-22:1). 다윗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그에게 도피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다윗이 아기스의 대적인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게 알려졌으며, 2) 아기스는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해서 사울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옥'은 (왕상 2:39)에 나타나는 `마아가'와 동일한 인물으로 보인다(Keil, Smith, Fay). 이로 인해 다윗은 그의 가족과 두 아내, 즉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함께 가드에서 아기스와 함께 거하게 되었다(3). 다윗이 이스라엘을 떠나 가드로 망명한 사람은 곧 사울에게도 보고되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포기하였다(4).

 

  다윗은 가드 왕에게 가서 왕도에 거하지 않고 지방 성읍을 주어 그 곳에 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아기스는 이 청을 받아들여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어 그 곳에 거하도록 허락하였다(5-6). `시글락'은 가나안 정복 후에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으나(수 15:31), 그 후에 이 성은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갔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빼앗겼으며, 그 후에는 이 성읍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Keil, Fay). 이 곳은 가사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에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약 1년 4개월 동안 머머물러 있었다(5-7). 그 후에 다윗은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거민과, 아말렉을 공격하였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들이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거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8). `그술 사람'은 유랑 생황을 하던 족속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요단 동쪽 지방에(신 3:14, 수 12;5, 13:11,13, 삼하 13:37) 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가사'와 인접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신 2:23). `기르스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는데, 1) 첫째 해석은 그들이 팔레스타인 중앙의 그리심 산 근처에 살던 한 종족으로 보는 견해(Smith)이며, 2) 둘째 견해는 그들을 블레셋 땅과 이스라엘 땅의 남부에 살던 민족으로 보는 견해(I.D.B.)이다. 다윗이 공격한 민족들이 팔레스타인의 남부였던 점을 생각하면 두 번째 견해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아말렉 족속"은 사울의 군대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15:7,8). 그러나 세월의 지난 후에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했으며 또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다윗이 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민족들을 공격했던 것이다(Keil). 이것은 다윗의 침공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이 이들을 치고 노략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자,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가 공격한 곳이 어디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다윗은 아기스에게 자신이 공격한 지역이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었다고 대답했다(9-10). 다윗은 자신이 친 지역에 대해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지역을 가리키며(8:2; 삼하 24:7),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에서 `여라므엘'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으로,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의 이름이기도 했다(대상 2:3, 5, 9). 따라서 `여라므엘 사람'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던 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칠 때에  겐 사람을 미리 대피시킨 일이 있었다(15:6). 다윗이 자신이 침노한 곳을 이렇게 돌려서 대답한 것은 자신이 유다를 친 것처럼 믿게 하여 그가 자신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을 공격한 것은 옳은 일이라 해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을 떠난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듯이 약속의 땅을 떠난 다윗 역시 여러 가지 거짓말로 자신을 은폐시켜야만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종족들을 칠 때에 그들을 모두 죽이고 가드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 중 일부가 다윗의 일을 고발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윗이 친 종족들은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공격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러한 사람들을 친 것이 아기스에게 고발되면, 다윗은 아기스에게 불신을 받게 되어 위험에 빠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자신이 공격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아기스는 다윗이 유다 남방을 쳤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는 다윗이 자신의 동족들을 쳤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자신의 사역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1-12).

 


 

4. 사울의 최후(28-31장)

 4-1.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28장)
  다윗이 블레셋 땅 시글락에 있을 때에 블레셋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소집했다. 이때에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를 요청했으며 다윗은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블레셋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에 있는 수넴에 진을 쳤다. 그리고 사울은 이를 막기 위해 온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 길보아 산에 진을 쳤다(1-4). `수넴'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로서,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에서 북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 편의 작은 헬몬 산의 서쪽 경사 지대에 있었다(Conder,  Robinson).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여인의 고향이었다(왕하 4:8-10). '길보아'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 평지의 동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길이 12.8km, 폭 8km 정도 되는 지대이다.  길보아 산악지대는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이르게되고,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르렀다. 이때 사울은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있는 `이스르엘'에 진을 쳤다(29:1). 사울은 불과 수마일 거리를 두고 진을 치고 있는 엄청난 수의 블레셋 군대를 보고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여호와께 그 전쟁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울에게 꿈이나 우림이나, 또는 선지자로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5-6). 하나님은 다니엘과 요셉과 같이 꿈으로 계시를 주시기도 하고, 제사장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계시를 주시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직접 선지자를 보내서 그 뜻을 전하기도 하셨다. 이러한 세 가지 방법(꿈과 우림과 선지자)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15:10-11; 23:9-12). 그러나 사울은 전쟁을 앞두고 이러한 방법 중에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미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15:1-23).

 

  황급해진 사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되자, 신하들을 시켜서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사울은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신접한 여인과 박수들을 쫓아냈었다(3). 그러나 사울이 다시 신접한 여인을 찾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급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울의 신하들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신접했다'(바알라트 오브)는 말은 '혼령을 다스린다'는 말로써, '신접한 여인'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엔돌'은 '거주의 샘'이란 뜻으로서, 이 곳은 다볼 산에서 남쪽으로 약 6.4km, 그리고 '수넴'에서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가면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이곳은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전해진다(Robinson). 사울은 신접한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하고 두 사람과 함께 엔돌로 갔으며, 밤이 되어 엔돌에 도착하게 되었다. 사울은 신접한 자에게 가서 사람을 불러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울 왕이 이 일을 금한 지금, 그러한 일을 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울은 이 일로 그가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신접한 여인은 누구를 불러내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고, 사울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때에 여인은 사무엘을 보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사울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울에게 큰 소리로 어찌해서 자신이 사울이라는 것을 속였느냐? 고 외쳤다. 사울은 그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후에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울은 그 모습이 어떤지 물었으며, 그 여인은 그가 겉옷을 입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였다(7-14).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 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3)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것이다(Smith).

 

  많은 학자들은 첫째 견해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견해를 따라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사무엘로 가장한 악령의 형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급해서 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 왕을 위해 사무엘의 영을 보내심으로 그에게 마지막 심판을 선고하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사울이 신접한 여인의 주술에 의지하지 않도록 조치해 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안식을 방해하느냐?" 고 책망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블렛셋 군대로 인해 심히 위급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꿈이나 우림이나 둠밈, 그리고 선지자로 말씀하시지 않기에 할 일을 지시 받기 위해서 그리했다고 대답했다(15).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떠나 그의 대적이 되셨으며, 그의 나라를 다윗에게 주셨다고 대답했다. 사무엘은 이 일이 그가 아멜렉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내일 사무엘과 함께 잇게 될 것이며,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16-19). 사울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는 그가 사무엘의 말을 듣고 심한 두려움을 느꼈으며,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울이 기진한 것을 보고 신접한 여인은 사울에게 자신이 음식을 준비할 터이니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요청했다. 사울은 처음에는 이 요청을 거절했으나, 여인과 신하들의 간곡한 권유로 인해 여인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 밤중에 길을 떠나게 되었다(20-25).  

 

 4-2. 다윗을 불신임하는 블레셋(29장)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서 모든 군대를 아벡으로 소집시켰다. 블레셋 족속은 다섯 방백에 의해 다스려지는 부족 연합 성격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5:8). 그러므로 그들은 이처럼 집결지를 정해 그곳으로 각 부족의 군사들을 총집결 시켰던 것이다. '아벡'은 '요새'란 뜻으로, 팔레스타인에는 이와 동일한 지명이 여러 곳이 있다. 이때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을 치고 있었다(1). '이스르엘'(Jezreel)은 헬라식 이름은 '에스드라엘론'이다. 이곳은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28:4), 기손 강의 영향으로 토지가  비옥했으며, 긴 평원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샘'은 '이스르엘'에서 동남쪽으로  약 2.8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그 수원지는 길보아 산지 북쪽에 있었다. 이 우물은 화강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온 물에 의해 형성된 큰 웅덩이의 모양으로 되어있다(Conder). 이때에 블레셋 군사들은 장관의 인도를 따라 수백, 수 천명씩 행진해 나갔고, 다윗은 아기스의 군대와 함께 그 뒤에서 행진해 나갔다(2).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다른 곳에서는 '방백'으로 번역하고 있다(5:8, 11;6:4,12, 18;7:7). 이들은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을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수 13:3)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들을 가리킨다(5:1-12). 그들 밑에는 여러 명의 천부장과 백부장들이 있어서, 그들에 의해 병력이 관리되고 있었다. 블레셋의 군대는 병력이 많을 뿐 아니라, 군사적인 제도도 규모가 잡혀 있었다. 블레셋 방관들은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스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아기스는 다윗이 자신에게 망명해 온 후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블레셋 장관들은 다윗이 사울과 화해하기 위해서 사울과 협공하여 자기들의 머리를 사울에게 바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기스에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은 자로서 이스라엘에서 사울보다 더 인기 있는 지도자라는 점을 상기시켰다(3-5). 이로 인해 결국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사실 이러한 아기스의 명령은, 다윗에게는 매우 기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 연합하여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전투에 참여하지 않기를 원했다(28:2). 아마도 다윗은 하나님께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드 왕 아기스를 통해서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셨다. 다윗은 속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아기스에게 항의했다. 다윗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1) 블레셋 방백들의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고, 2) 또 아기스가 한 말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Keil). 만일 그때에 다윗이 가만히 있었다면, 아기스는 다윗을 고소한 다른 방백들의 말(4, 5절)을 참말로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아기스는 다윗을 진정시키면서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아기스는 다음 날에도 다윗이 보이면 블레셋 장관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아기스의 지시를 따라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시글락을 향해 떠났다(6-11). 다윗이 이처럼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심으로써, 1)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장애가 없도록 하셨으며, 2) 또한 아말렉의 침공에 의해 아멜렉에게 납치된 가족을 구출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었다. 다윗은 진퇴 양난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지 않고, 또한 아기스 왕에게도 의심받지  않은 채로 시글락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다윗은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는 궁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1) 인간의 실수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마 26:14-29)을 발견할 수 있으며, 2)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전 10:13).

 

 4-3. 아말렉으로부터 탈취 당한 가족을 구원한 다윗(30장)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블레셋 군사들을 떠난 지 3일째에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약 75km를 행군하는 데 3일이 걸렸다. 그러나 다윗이 시글락에 돌아왔을 때에는 아멜렉 족속들이 시글락과 남방을 침략하여 불을 사르고 여자들을 모두 사로잡아 간 뒤였다(1-2). 이러한 아말렉 족속들의 침략은 1) 전에 다윗이 자신들을 침략한 일(27:8, 9)에 대한 보복과(Fay, Keil), 2) 생존을 위한 약탈물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말렉 족속이 마음놓고 시글락을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아벡'으로 이동함으로 그곳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나노는 '남방'은 유다의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네게브'지역을 가리킨다(27:10). 원래부터 이곳은 항상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던 지역이었다(14:48). '침노했다'는 말의 기본 동사 '파솨트'는 '흩다', '벗기다'란 뜻으로, 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침략 행위보다는 갑자가 습격하여 필요한 노획물을 약탈해 가는 노략 행위를 가리킨다(27:8). 다윗은 성에 돌아와서 아멜렉에 의해서 성이 불에 타고,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 간 것을 보게 되었다. 이때에 다윗의 두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역시 사로잡혀갔다(3,5).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를 보고 기력이 떨어질 만큼 심히 통곡하였다(4). 백성들은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으며, 이로 인해 다윗은 크게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왕으로 기름 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힘입고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6). "용기를 얻었다"는 말(이트하제크)은 '힘을 내다', '견고히 한다'는 뜻을 가진 '하자크'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 안에서) 자신을 위해 스스로 힘을 냈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하여 적극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먹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즉 이때 다윗은 휘하 군사들을 회유하는 설득이나 구구한 변명 대신 하나님께 그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그분의 도우심을 전적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실로 신앙인이 불신자보다 월등한 점은 고난에 처했을 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그리고 당신만을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위로를 제공하신다(시 50:15;사 40:31).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을 불러 에봇을 가져오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아말렉을 쫓아가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물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쫓아가면 반드시 승리하고 모든 잃은 것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7-8). 다윗과 그 부하들은 즉시 아멜렉 족속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솔 시내에 이르러서는 200명의 군사들이 지쳐서 다윗을 쫓기를 포기해야 했다. 다윗은 그들을 그 곳에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아말렉을 추격했다(9-10). 브솔 시내는  '시글락'에서 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유다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가사' 남서쪽 지역을 통고해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였다(Raumer). 이 곳에서 200명이 추격을 포기하게 된 것은 1)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3일 길을 행군하여 피곤했으며, 2) 쉬지도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하여서 아말렉 족속을 추격했기 때문에 몹시 지쳤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힘들어하는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게 하였다. 다윗은 지친 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신앙에 기초를 둔 다윗의 인도적 조처였다. 다윗은 길을 가다가 한 애굽 소년이 지쳐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음식과 물을 주어 구해주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아말렉 사람을 섬기던 종이었는데, 그가 병이 든 것을 보고 아말렉 사람이 그를 버리고 간 것이었다. 다윗은 그를 인도자로 삼아 마침내 아말렉 족속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11-15). 다윗이 가서 보니 아멜렉 족속들은 탈취물로 인해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있었다. 다윗은 새벽부터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으며, 이때에 나귀를 타고 도망친 400명을 제외하고 모든 아말렉 족속들이 죽임을 당했다(16-17).

 

  다윗은 탈취물을 가지고 브솔 시내에서 피곤해서 추격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부 비류들은 다윗에게 그들에게는 탈취물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윗은 오늘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모든 탈취물을 똑같이 분배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후에 탈취물을 나눌 때에 전례가 되게 되었다(18-25). 다윗은 돌아와서 자신이 얻은 탈취물을 남방에 사는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었다. 이들은 다윗과 평상시에 친분이 있는 장로들이었을 것이다(26).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1) 자신이 비록 블레셋 땅에 망명해 있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2)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물심 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성읍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30절), 3)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앞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닦아 놓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다윗은 벧엘에 있는 자들과 남방 라못에 잇는자와 얏딜에 있는 자에게 선물을 주었다(27). '벧엘'은 '호라마'와 '시글락' 근처에 있는 '브둘'(수 19:4, 5)과 동일 지역으로 보인다(Smith). 그리고 남방 라못 은 브엘세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성읍으로, 그리고 얏딜은  에스드모(수 15:50)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곳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수 15:48) 제사장의 성읍이었다(수 21:14). 다윗은 아로엘과 십못, 에스드모아, 라갈, 여라므엘, 겐, 홀라, 고라산, 아닥, 헤브론에 살던 사람과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선물을 보냈다(28-30). 아로엘은 브엘세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그리고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십못은 유다 남방(네게브)에 있던 성읍으로 알려지고 있다. 에스드모아는 유다의 산악에 있던 성읍으로,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었다(수 15:50; 21:14; 대상 6:57). 라갈은 헤브론에서 남동쪽 약 11km, 그리고 에스드모아에서 북동쪽 약 6.5km 떨어진 곳에 있는 '갈멜'(25:2)로 추정된다(Thenius). '여라므엘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대상 2:4,5,9). 그들은 브엘세바의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살고 있었다(27:10). '겐 사람'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들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안내자들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곳에  정착했다(15:6; 민 10:29-32; 삿 1:16). 이들은 유다 남방, 아말렉 사람들의 거주지 북쪽에서 거주했었다(15:6;27:10). 홀마는 브엘세바에서 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었다(수 15:30). 이곳의 원래 지명은 '스밧'이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이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시킨 후에 그 이름을 '홀마(전멸을 위해 헌신되었다는 뜻)라고 바꾸었다(삿 1:17). 고라 산은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있던 세펠라 지역의 한 부분인 '아산'으로 알려져 있다(수 15:42). 이곳은 처음에 시므온 지파에게 소속된 성읍이었으나(수 19:7), 후에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되었다(대상 6:59). 아닥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에델'(수 15:42;19:7)로 추정된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읍으로(수 10:3), 일찍이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으로(창 13:18;23:1), 그 뜻은 '벗' 또는 '친구'라는 말이다. 후에 다윗은 이곳을 자신의 잠정적인 왕도로 삼았다(삼하 2:1-4, 5:3). 다윗과 그 부하들이 왕래하던 곳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지역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억울한 도피자 다윗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은밀히 제공하여 다윗을 도왔을 것이다(Fay).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무엘서 기자는 그들을 다윗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4-4.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31장)
  마침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을 치다가 길보아 산에서 엎드려 죽게 되었다(1). 이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고 말았다(2). 다윗은 후에 요나단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다. 요나단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1)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질투와 시기의 화신이 된 사울과는(18:29) 달리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자였으며(18:1-4:20:17), 2) 매우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었고(14:6-14), 3)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으며(19:1;20:30-42), 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인물이었다(18:4;23:17). 그러한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역한 사울과 운명을 같이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1) 부친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다(겔 18:2). 2) 의인의 소망과 생명은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오는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삶에 있다(잠 14:32). 3) 의로운 자였지만 요나단은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했다. 사울은 블레셋 군사를 피해 달아나다가 블레셋 군사의 화살에 맞고 중상을 당하게 되었다(3). 사울은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병기를 든 사람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울은 할 수 없이 칼을 빼어 그 위에 엎어져서 자결하고 말았다(4). 그리고 사울이 자결하는 것을 보고 그의 병기를 든 자도 자결하고 말았다(5). 이렇게 해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의 병기를 든 자가 모두 같은 날에 죽고 말았다(6).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곧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요단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성읍을 보리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성읍에 블레셋 사람들이 살게되었다(7). 여기서 '골짜기'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산의 북동쪽 기슭에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29:1)를 가리킨다. 그리고 '저편'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비 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블레셋 군대가 그들과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Aharoni).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요단 건너편'은 '요단 동부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Smith). 그러나 여기서는 전투 장소인 길보아 산의 맞은편 지역인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을 가리킨다.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따라서 그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을 찾아 급히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 주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블레셋 군사들은 죽은 자들의 물건을 수거하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8). 그들은 즉시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겼다. 그리고 승리의 소식을 신당과 자기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블레셋 온 영토에 보냈다(9).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큰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큰 소식이었다. '신당에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기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신당'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며, 이 말은, 블레셋 땅에 많은 신당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의 집에 두었다(10). 그들은 자기 신들이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일을 한  것이다. '아스다롯'은  '아세라'(신 7:5), '아낫'과 더불어 가나안 3대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이었다(삿 2:13).   그들은 산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매달았다.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에 달았다'는 (대상 10:10)을 참고하면 아마도 벧산 성벽에 매단 사울의 몸은 머리가 없는 몸뚱이  였을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다가 죽어서도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 부분으로,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지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읍이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그 성읍 주위의 기둥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Pritchard). 이러한 기록을 보면 패장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는 것은 1) 상대국 백성들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안겨주고, 2) 자신들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확증하려는 전쟁 관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참한 일은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행한 그의 끈질긴 반역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을 원했던 반역 행위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8:4-8,19,20).

   

  길르앗 야베스 족속들은 사울이 죽어서 벧산 성벽에 매달려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장사들을 선발하여 밤새 달려와서 사울의 시체를 찾아다가 야베스로 가져가서 화장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사울을 위해 7일간을 금식하며 슬퍼했다(11-13). '길르앗 야베스'는 갈릴리 바다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었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에 사울은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러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 당하는 사울의 시체를 가져오기로 결단을 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 21km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이러한 일을 결행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한 것이었다(28:8).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했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목이 잘린 사울의 시체는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화장을 했다(Lange, Keil).
 2) 매장을 하는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침공하여 그 시체를 파내고 다시 모욕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Thenius, Smith, Philippson).
 3) 죽은 지가 오래되어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었기 때문에(Hertzberg).
 4)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훌륭한 용사들을 화장하는 이교적 장사법에 따랐다(Rainey).
 5) '불사르고'(사라프)라는 단어를 '송진을 바른다'는 의미로 이해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여부스 사람들의 장사 방식에 따라 사울의 시체를 방부 처리했다(Driver)

  그런데 이러한 견해 중에서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요단 동쪽이라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또 4)의 견해도 모압 암몬 등의 민족들은 화장하는 방식의 장례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오히려 그 민족들은 적의 시체를 불살라서 뼈를  가루로 만드는 등의 형벌적 성격으로 시체를 불살랐다(암 2:1). 그리고 5)의 견해는 시체를 불사름으로써 뼈가 남았다는 것을 보아 그 타당성이 적다. 여기서 '에셀  나무'는 (대상 10:12)에는 '상수리나무'로 표기되어 있다. 이 나무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Smith).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ㅎ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 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 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울은 교만으로 인한 불순종과 거역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고, 길보아 산에서 적의 화살에 중상을 입고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사울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좆지 않고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4-5. 삼상 18장-31장의 요약: 사울의 쇠퇴와 다윗의 흥기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승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다윗의 인기를 치솟게 만들었다. "여인들이 뛰놀며 서로 노래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 18:7) 이 사건은 사울로 하여금 격정과 질투심의 희생양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윗을 박해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박해할 때마다 다윗의 위치는 더 강해졌으며, 반대로 사울의 위치는 약해졌다. 결국 (삼상 18-31장)의 이야기는 사울이 주변의 지지 세력으로부터 소외되고, 다윗이 지도자로 부상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래 표는 어떻게 사울이 몰락하고 다윗이 세력을 얻었는 지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성경본문

사울의 몰락

다윗의 흥기

18:6-20:42

* 다윗을 죽이려 함으로써 음악 치료사인 다윗으로부터 소외됨
* 딸인 미갈과 아들인 요나단에게도 소외되기 시작

* 백성들에게 인기
* 사울의 신하들의 인정을 받음
*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
* 왕의 사위가 됨
* 미갈과 요나단의 사랑을 받음

21:1-22:23

*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놉의 제사장들을 살해함으로써 제사장들에게서도 소원해짐

* 골리앗의 칼로 무장함
* 식구들과 연합함
* 400명의 부하들이 따름
* 선지자 갓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협조

23장

* 그일라에 있는 다윗을 해치려고한 계획이 불발됨
* 블레셋의 침공으로 결국 다윗 쫓는 일을 중단함

* 그일라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함
* 600명의 부하가 따름
* 사울의 손에서 탈출함
* 요나단이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인정

24-26장

* 다윗이 자신보다 의로움을 인정함
*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인정함
*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함

* 사울의 생명을 두 번 살려줌
*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을 얻음

27-31장

* 사울은 여호와와 선지자로부터 소외 되어, 신접한 여인을 찾았으며, 결국 길보아 산 전투에서 전사함

* 블레셋에 피신, 사울의 죽음과 무관함
* 시글락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을 치고 전리품을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 줌

 

 

  이와 같이 (삼상 18-31장)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사울이 점차적으로 몰락해 가는 과정과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인정을 받게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왕권이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사울의 왕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가진 자임을 강조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무엘하에서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자연스럽게 왕권을 계승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윗이 인근 국가들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내용을 다루기 위한 준비가 끝난 셈이다.

 


 

C. 적용 및 교훈

 

1. 인간의 통치를 받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2.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지도자와 인간들이 선택하는 지도자는 어떻게 다른가?

3.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하시고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신다.
 (예) 부정적 지도자 엘리와 이상적 지도자 사무엘.

4. 인간을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만일 왕이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신다.

5. 좋은 가문과, 훌륭한 체격과 준수한 외모,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울이 겸손히 행할 때에    는 하나님께 높임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승리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6. 하나님은 인간적으로는 어리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게 하시려고 수많은 순종의 훈련을 시키셨다.

출처:김진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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