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Bible

카이로스와 크로노스,호라

예인짱 2008. 4. 29. 16:33

                       카이로스와 크로노스,호라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시간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시간속에서 나와 다른 존재, 다른 대상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은 시간과 관계속에서 의미를 찾고 해석하며 살아간다

성경에서 말하는 희랍어의 시간개념은 세 가지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호라가 그것이다

흐르는 보편의 시간이 크로노스이다

호라와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에 첩입되거나 유월하는 시간이다 

요한 복음 2장너머에서 호라를 통해 그 카이로스의 시간이 적용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진다

그 공정하게 주어지는 일상성의 시간이 크로노스이다

호라와 카이로스는 그 흐르는 시간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시간이다

제8요일, 25시처럼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시간인 것이다

크로노스가 그 범위와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시간이라면 크로노스는 영원할 수도 있고 시간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하는 '길들임'처럼 사람은 논리와 도그마, 습관과 중독, 관념속에서 형성되는 존재이다

누구나 그 자신의 한계와 틀을 가지고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객관과 상황, 논리와 현실, 물질과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

고난의 때가 오면 절망하고 승리의 순간이 오면 기뻐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소풍을 하루 앞 둔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기다림마저 설레임이고 기쁨이다

주말은 기다려지고 월요일은 괴로움의 시간이다

전자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시간이라면 후자는 더디가거나 멈춰졌으면 하는 시간이다

그리운 사람, 보고픈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함께 하는 시간은 짧게만 느껴지는 잠시의 시간이다

짐 리브스라는 가수는 병속의 시간이라는 노래에서 시간을 병에 넣을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쓰고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력없는 사람,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함게 하는 시간은 한없이 지겹고 길게 만 느껴진다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거나 지워졌으면 하는 괴로움과 절망, 아픔, 고난의 시간이다

이처럼 크로노스의 시간과 삶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이로운 것을 소망하고 득이 되는 것을 가까이 하며 해가 되는 것을 감각적으로 피한다

손익의 대차대조표가 작동하고 얻는 것와 잃는 것에 대해 민감하며 상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상황과 환경의 지배에서 자유롭다

그 곳엔 거룩한 인위가 작동하고 신앙이 결부된다

거꾸로의 시간이다


감옥에서 바울이 찬송할 수 있었던 것과 요셉이 삶을 억울한 옥살이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이로스는 죽음과 고난을 뛰어넘는 구원의 시간이다

상실이나 단절은 인간에게 절망과 좌절을 요구한다

크로노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한 크로노스의 삶에 익숙해지면 사람은 고독을 견딜 수 없다

자기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


유대교에서는 인간과 세상을 악한 존재,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구원은 오늘 이 세계가 아닌 저 하늘 어딘가에서 시작되고 계획된 일이기에 오늘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바로 지금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미래적이고 동시대적이며 일원론적이다

저 먼 미래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관념의 무엇만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내 아픔과 절망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독처의 반의어는 관계이다

관계는 상대적 고독을 만들어낸다

그 상대적 고독의 크로노스속에서 인간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소중한 사랑의 관계, 애증의 관계, 있으나 마나한 관계, 스쳐 지나가는 관계...

할당된 시간과 공간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관계는 삶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실패는 결국 관계의 실패이며 울고 웃게 하는 환희와 좌절의 근원도 이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관계속의 인간에게 신은 도움과 섬김을 명령하셨다

누군가를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다

내 통찰과 판단력이 평가에서 그치고 만다면 그는 기독인이 아니다

서로를 세우고 일으키고 위로하기 위해 사랑키 위해 우리에게 관계가 주어진 것이다

수건과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볼이다

구원의 카이로스를 깨닫고 경험한 사람은 상대의 단점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아픔과 상처를 본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러했듯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이의 아픔속에서 자신의 할 일을 발견하고 실행한다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실천이 있었다

평면적 사유가 아니라 입체적 실제였다

그 실천을 가능케 하는 것이 카이로스적 영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찬송하고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지나치는 사람이다

나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

크로노스의 시간속에서 갇힌 채 도움과 사랑의 관계가 아닌 손익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만남, 어떤 인연, 어떤 삶은 크로노스에서 시작하여 진행되다 결국 기계적으로 크로노스속으로 사라진다

갇힌 삶이고 살아지는 삶이며 윈인에 대해 반응하는 결과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와 '그러나'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전환점을 맞았고 진전되었다

'합'을 도출하는 건 언제나 '정'을 부정하고 깨뜨리는 '반'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붓다의 히나야나,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기독교가 그것을 반증한다

묵시문학적 유대교 전망과 역사 해석에 의하면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며 본질적으로 악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세계는 철저히 이분법적이며 합치, 양립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하고 해석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은 보이지 않는 저 먼 우주 한 귀퉁이의 관념이 아닌 이 크로노스속에서 실현되고 시작되는 무엇이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들이여

이제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이득이 아닌 상처와 아픔을 향해 그대들의 삶과 시간과 가슴과 물질을 열라

당신들의 보물창고는 이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헌금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는 크리스챤이여

상장에 이름을 쓰는 수여자여

진정한 보화는 당신의 그 엶속에 있음을 자각하라

적금과 보험, 예금을 해약하고 인출하여 가난한 자들과 병든자, 주리고 목마르고 벗은 자에게 가라

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갈망하지 말고 지금의 주어진 현실과 관계에서 실행하라

나라는 크로노스의 성을 허물고 관계속으로 진입하라

두 벌 옷과 전대는 제자의 물품이 아니다

이방인과 여행자, 순례자로 살아가라

오늘 당신이 나누고 베풀어야 할 사랑과 희생, 헌신에 마지막 목숨을 쏟으라

피와 살까지는 줄 수 없겠는가!

우선은 쥐고 있는 것부터, 이루려는 것부터 내려 놓으라

날마다의 묵상과 고독, 기도속에서 자신을 깍고 다듬으라

나아가 관계속에서 자신을 실행하고 완성하라

버리지 않고 카이로스에 이를수는 없다

집착과 소유, 욕망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하여 '나'와 '타자'와 '관계'를 구속하고 묶어버린다

그 곳에는 진정한 관계도, 삶도, 행복도 있을 수 없다

얻고자 하고 가지고자 하는 관념과 행위가 있을 뿐이다

카이로스는 거듭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전환이며 변혁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로부터의 혁명인 것이다

블레리스 파스칼은 "다른 사람을 돕는 수단을 제공하기에 나는 물질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크로노스가 지배하는 세상에 와서 예수는 죽지 않아야 할 죽음을 죽었고 버려진 이들을 취했으며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던 자들을 사랑했으며 선생으로서 종들의 발을 �었으며 마침내 죽음을 넘어 부활했다

당신의 손은 지금 누구의 발을 �고 있는가

죽어가는 자들속에 당신의 생명과 소망의 가멸찬 카이로스가 실행되고 있는가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자명하다

자기를 부인하여 지우고 관계의 십자가를 지라

아픔과 절망이 있는 곳으로 가라

시인 안도현은 말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렇다 

예수는 연탄이였다 

시퍼런 생명을 아궁이에 집어넣어 다 태우고 재로 버려진 그 연탄이었다

타고 남은 재가 생명의 비밀이다

당신이 취해야 할 신앙이고 영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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