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삶/상담심리학

기독교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예인짱 2008. 4. 18. 17:43

기독교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박 노권(목원대학교 목회상담학교수)


1. 서론


“영성”이란 말은 오늘날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이 말은 전통적으로는 중세의 수도원적 경건, 금욕생활이나 개인의 내면적인 신비체험 등을 포괄하는 인간의 영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사용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영성은 전통적인 이분법적 사고구조 속에서 육체적인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의 영성 개념보다는 기독교인의 삶 전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인적 인간에 관계된 개념으로 점차 이해되고 있다. 인간을 이렇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부분이 통합된 인격체로 이해하는 오늘날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을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은 영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또한 자칫 영성이 잘못 이해되기 쉬운 상황에서, 바람직한 영성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상담․심리치료 분야에서는 내담자의 영성이 상담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1)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 교회에서 영성에 대해 많은 훈련을 실시하고 이에 대한 강조를 하는 현실을 고려하면서, 올바른 영성을 위해 심리학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글은 최근 사람들이 영성에 관심을 갖는 그 배경과 기독교 영성의 특징을 간략히 알아보고, 기독교 영성을 심리학적으로도 접근해야 할 필요성과 더 나아가 그 근거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심리학적 접근이 구체적으로 기독교 영성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그 한계와 함께 제시해보고자 한다.

2. 영성에 관심을 갖는 배경

한 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지성일변도인 시대 흐름에 싫증을 낸 서구 사람들이 동양의 영성(힌두교의 요가, 이슬람교의 수피즘, 불교의 선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어, 그 동안 잠자고 있던 기독교 영성에 대한 관심을 기독교인들도 갖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풍부한 영성적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고독, 금욕적인 극기, 영적인 정화, 자아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기 통제를 강조한 사막 교부들의 영성과, 내적 고요와 침묵을 강조하는 동방정교회 영성, 수도원 운동이나 중세기에 꽃을 피운 신비신학을 계속적으로 수정 내지 보완하면서 영성신학을 발전시켜온 로마 카톨릭의 영성이 있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 내에도 개혁주의, 경건주의, 청교도, 복음주의 등의 영성운동이 있었다.2) 그러나 개신교 신학에서는 아카데믹한 지적 훈련의 신학을 강조하다 보니 그동안 영성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한 개신교회와 카톨릭 교회와의 신학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개신교의 신학 제 분야에서 영성에 대한 연구가 신학적으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실천방안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연구되어지고 있다.3)

특히 현대인은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달의 결과로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해가고 있지만, 이에 반비례하여 정신세계의 황폐화와 가치관의 혼돈으로 인해 오는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최근 신앙적 축복이나 성공의 척도를 물질에 두는 물량주의와 도덕의 타락 현상은 영적 생동감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불건전한 신비운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을 억압함으로써 성서와 교회전통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영성의 전통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정신적 깊이를 추구하는 기독교 영성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위에 언급한 오늘날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영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영성의 특징

일반적으로 영성이란 자기를 포기하며 또한 자기를 초월하고자 하는 갈망으로서,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4) 그러나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영성이 다 종교적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또 종교적인 영성이라고 해서 모두 다 기독교적인 것도 물론 아니다. 기독교 영성을 잘 표현한 메이(Gerald May)의 말을 빌리면, 각 개인의 자아가 좀더 고차원적인 어떤 힘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기도 혹은 예배를 통하여 이러한 관계를 표현할 때 비로소 이 영적인 반응은 종교적이라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교적인 영성의 부분집합인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내주 하시는 성령에 의해 가능해진,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인 것으로 볼 수 있다5).

그러므로 일반 영성과 달리 기독교 영성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 좀 더 깊고 밀접한 관계로 나가는 영적 성장 안에서 우리의 의지와 품성이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따르게 되면서 우리는 온전해져 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것은 변화된 행동보다도 변화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윌리암 제임스가 말한 것처럼 변화된 마음은 변화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6) 진정한 기독교 영성체험에는 인간성품의 변화와 윤리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인간다움이 덜 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고 우리는 더욱 더 인간다워지고 더욱 더 진실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영적인 성장과 정신적인 성장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그 수준으로까지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할 뿐만 아니라 인격의 통합을 위한 기준점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논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의 필요성

영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상처를 입히거나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상처를 주거나 그 관계가 회복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먼저 심리적인 성숙이 있어야 하거나 모든 심리적인 갈등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적 실재의 부르심을 듣자마자 영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가 있다. 그렇지만 심리적 갈등과 문제들은 우리가 이러한 영적 부르심에 응답함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제한을 가할 뿐 아니라 부르심 자체를 듣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손상을 입힌다는 사실이다.7)


이런 의미에서 클라인벨은 영 중심의 전인성의 개발은 한편으로는 심리-사회과학과 심리치료 분야의 모든 자원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신학적 유산으로부터의 모든 자원을 계속적으로 통합시켜 가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8) 예를 들어, 많은 요소들이 인간의 전인건강을 지향한 성장을 막을 수 있다. 유년기에 있어서 성숙한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던가, 충격적인 위기(가족의 사별, 이혼, 사고, 실직, 중병, 전쟁 등)도 이런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들--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욕구,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 안전과 음식, 내적인 자율성을 위한 욕구,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욕구 등--을 충족하지 못할 때 고통을 받게 되고, 이러한 고통은 영적인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40대의 한 여인이 자신이 겪고있던 심리적 갈등과 괴로움의 문제가 상담과정에서 해결되면서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 글의 일부분을 소개해본다.

신앙생활한지도 벌써 14년째, 처음부터 체험신앙으로 남다른 열심은 있었지만 그에 비해 사탄의 역사도 유달랐다. 열심히 기도와 말씀 읽기, 교회봉사, 금식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하나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늘 어두웠고 가슴 속은 늘 답답하고 괴롭기만 했다... 그 때문에 나의 눈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급기야는 죽음까지도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기도와 말씀으로만 치유할 수 없던 부분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마음을 방황의 늪 속으로 끌고 들어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 무분별한 성행위, 가정과 자녀들에 대한 무책임, 특히 나는 중간에서 무수히 많은 매를 맞았다. 그리고 엄마의 가출, 계모의 등장으로 집을 쫓겨나게 되었다. 불과 7살 짜리 꼬마애가 13살 때까지 겪어야 했던 일들이었다....나의 가슴 속에 응어리 진 분노와 증오는 여기에서부터 나왔음을 결국 심리학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고 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서서히 얻을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이 서서히 무너짐을 느꼈으며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갖기 쉬운 오해 중 하나는 기독교 영성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인 반면에 정신치료는 자기를 강화하고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먼저 자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오로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의 글에서 보듯 억압을 가져오게 되고 영적 성장을 가로막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흔히들 자신에 대한 몰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를 못한다. 이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참 자기(true selves)가 아니라 자신들이 받은 상처나 불안 그리고 거짓 자기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과 참 삶을 가로막은 여러 모양의 거짓 자기들을 뛰어 넘을 때, 비로소 이들은 자신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나면 이들은 참 자기를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근거를 둔 자기초월을 통해 인격의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9)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고, 진실된 자기를 또 진실된 인생을 더 깊이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짓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정신치료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우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우리는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을 아는 일에 비로소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힘이 있어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이지만 인간의 영적인 의미추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외관상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신적 성숙이 요구된다. 정신병자나 자기-보호막에 갇혀있는 자기 애적인 사람들은 영적성숙(예,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누림이나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깊어짐 등)에 이르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비록 거듭남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경우에는 자기초월 능력이 손상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갖는데 제한을 받게 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을 이루려면 나의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인간의 사랑은 보통 조건적이며 결핍동기에서 나온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사랑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치료를 해야한다. 여기에 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5.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의 근거: 전인적 존재

인간의 심리적인 면들과 영적인 면들을 서로 분리시키게 된다면, 즉 영(spirit)이란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인간의 한 부분이라고 인식한다면 전인으로서의 인간은 단지 일부분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과 감정이 함께 하는 것이지, 심리적인 감정이 없이 오직 영으로만 찬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와 영적인 차원에 대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될 때 이것은 영성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1) 이분법적 사고의 문제점

극단적으로 영적환원주의와 심리적 환원주의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영적환원주의는 모든 것을 영적인 측면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밥간(Bobgan)은 정신치료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적절한 통로가 될 수 없으며, “성경은 기질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정신-정서 장애들에 대한 치료적 위안의 저장고”라고 주장하면서, 감정, 행동 혹은 사고에서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치료는 성경의 영적 원리들을 믿고 그대로 따름으로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10)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또 다른 사람은 널리 알려진 아담스(J. Adams)이다. 그는 “성경은 기질적 근거가 있는 문제들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행동으로 지은 죄로 인해 생긴 문제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하며,11) 기질적이 아닌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개인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영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문제들을 적절하게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마음이나 행동으로 지은 죄를 들추어내어 그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물론 이들은 당시 심리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성경을 강조함으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했지만, 지나친 문자위주 해석이나 심리적 문제에 대해 연구된 오늘날의 지혜를 거부하는 약점과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것이 문제점으로 등장한다.12) 그리고 영성의 가치를 도덕성의 상태로 떨어뜨려 생리적 문제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문제들 뒤에 개인적인 죄를 씌어 놓는다. 이런 입장은 영성의 보다 깊은 의미를 윤리적인 것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 모든 문제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보는 것도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환원주의 경향과는 다르게 정 반대로 심리적 환원주의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으로 모든 문제들을 심리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프로이드는 종교를 인류의 우주적인 강박증적 신경증, 그리고 유아신경증에 비유하면서 심한 심리-환원주의적 견지에서 보았다. 그는 또 신령과 악령들을 “인간 자신의 감정적 충동의 투사”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외디프스적 양면감정의 전치와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의 우주적 투사로서 설명하였다.13)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드보다 덜 환원주의적이라 할 수 있으나, 「정신분석과 종교」라는 책에서 종교와 정신분석을 비교하면서, 심리학이 문제해결에 있어서 중요함을 강조한다.

정신분석가는 비종교적인 상징체계들 이면에 있는 인간의 실재뿐만 아니라 종교적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실재를 연구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이 종교에로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잘 믿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대해 사색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에 그가 진리를 사랑하고 사색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체계들은 이차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상징체계들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14)

종교와 정신분석은 둘 다 사람들이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과 관계가 있는데, 이때 종교는 이러한 역할을 계속하는 한 유용한 것이며,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프롬에게 있어서, 정신치료는 종교와 똑같은 목적을 추구하는데, 서로 다른 점은 정신치료가 교리나 종교적 상징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드가 종교를 정신병리화 하는 것은 자신의 사적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생각과 편견으로서 사변적인 추론이니만큼, 종교를 갖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정신분석적 작업의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15) 종교에 대한 프로이드식의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그 경험의 심리적 토대들을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경험 자체를 설명해준다고 볼 수 없으며, 우리에게 그 경험의 본질이나 의미 혹은 가치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해주지는 않는다.16) 이것이 심리환원주의가 또한 갖고 있는 문제이다.

2) 심리-영성의 전인적 접근

심리와 영성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그럼 이 둘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성화나 회심 후에 따르는 영적 성장이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되어지는 과정으로 제시되며, 또한 구원은 우리의 전인격을 회복시키기 위해 계획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부분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에 몸, 혼, 영과 같은 개념들이 있지만 이것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인적인 개념에서 보야 한다는 것이 최근 성서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점은 구약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영육의 분리가 아니라 영육합일체로서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17) 즉, 우리는 영을 소유하거나 혹은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화된 영인 것이다. 리치(K. Leech)는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가 사람을 몸과 영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숨을 쉬고, 경험을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바로 전인이 하는 것이다.”18)

심리학적으로 볼 때에도, 몸과 마음 사이에는 긴밀한 상호 관련성이 있다. 정서상태라든지 인지작용과 같은 심리학적 변인들이 뇌의 화학작용을 변화시키고 계속해서 몸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반대로, 외상(trauma)이나 세포조직의 손상과 같은 몸 속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변화들 또한 뇌의 화학작용을 바꿀 수 있으며, 따라서 정서상태나 사고작용 그리고 다른 심리학적 변인들을 수정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음과 몸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나 신체기관의 어느 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전인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대부분 인간의 초월적 요소인 영성에 대하여 소홀히 취급해왔지만, 칼 융의 개성화를 통한 자아실현, 아브라함 마슬로의 절정경험을 통한 자아실현, 아사지올리(Robert Assagioli)의 보다 높은 자아실현, 제랄드 메이의 명상심리학,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클라인벨의 영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초인격 심리학적인 접근19) 등은 영성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으며, 이런 이론들은 심리학과 영성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기독교 영성의 폭넓은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가운데서 융과 클라인벨에 대해 잠시 소개해 본다.

아마 심리학에서 융보다 더 인격이 갖고 있는 영적인 면들과 심리적인 면들의 통일성에 대해 강조한 이론가도 없을 것이다. 물론 융이 보는 하나님은 심리적인 경험에 관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유대-기독교의 신앙에서 말하는 그런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즉, 집단무의식 속에나 존재하는 숨어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융의 심리학적 통찰력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의 성장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도 있고,20) 다른 한편에서는 영혼 치유를 위한 융의 지침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변화를 받기 위한 지침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기독교적 견지에서 볼 때 이단적이라는 주장21)도 있다.

그럼에도 융의 이론은 심리-영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며, 특히 영적 성장과 관련된 그의 견해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격의 의식적인 면과 무의식적인 면이 통합되어 가는 과정으로서 일생동안 계속되는 것인데, 정신적 성숙이란 이렇듯 인격의 중심이 자아로부터 자기에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융은 이 개성화를 자아-의지(ego-will)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묘사하면서, 그것을 종교적 과정으로 보았다.22)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이 없이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고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심리와 영성을 통합해서 보게 하는 융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융에게 있어서, 우리가 영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온전함(wholeness)은 자기(self)가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상보적일 뿐만 아니라 충돌하는 인격의 요인들까지도 자기에로 통합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의식세계에서 거부되었던 “그림자” (shadow)의 통합이다. 우리가 만일 진실되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의 인격에서 억눌린 무의식의 부분들이 통합되어 자아가 점차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에 있어서 상징이 하는 중요한 역할을 발견한 것은 종교생활에서 상징과 예전이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듯 융에게 있어 영성과 심리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융이 가진 제한점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우리 자신의 자기 초월성을 적절히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23) 융의 내면화된 하나님은 전적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신 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내재적이지만 동시에 초월적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월성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란(Robert Doran)의 융에 대한 비판, 즉 융은 하나님과 자기를 같은 수준으로 놓음으로써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전락되었으며, 결국 진실된 기독교 영성에서 드러나는 자기의 초월적인 경험은 파괴되었다는 주장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24) 이런 문제는 심리학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빠져들기 쉬운 현상이다. 따라서, 심리학과 영성의 조화에 대해서는 융이 중요한 공헌을 하였지만, 이처럼 기독교의 특수한 영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견해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클라인벨은 전인적 건강을 위해 정신, 신체, 너와 나의 관계성, 생태계와의 조화, 사회조직,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으로, 이원론적 접근을 탈피하여 통합적인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건전한 종교적 영성을 가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데 몇 가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25)

1. 불가피한 삶의 비극들에 부딪칠 때도 신뢰와 희망을 제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의 철학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가?

2. 그들의 내면생활에서 사랑과 자기용납을 강화시켜 주는가?

3. 자기 존중을 촉진시켜주며 그들의 힘을 건설적인 삶에 사용해야 할 의무를 갖게 하며, 그런 삶에 사용하도록 도와주는가?

4. 넘치는 성적인 에너지를 억압적이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긍정적이요 책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도록 격려하는가?

5.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수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 현실적인 희망을 강화시키는가?

6. 살아있는 상징들과 의미 있는 의식들과 중대한 신화들을 통하여 창조적인 무의식의 자원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하는가?

이러한 영성 기준은 전통적인 기독교 영성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것들이나 건전한 기독교적 영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리학적 접근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와 증상에 대하여 심리적 이해와 자각에 이르기 전까지 상담자는 종교적 언어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종교 자원중 기도나 성경을 사용할 때는 내담자가 원할 때만 사용하라는 클라인벨의 언급 즉 심리적인 단계에서 영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26) 물론 클라인벨도 전인건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영성을 강조하면서도 심리학적인 통찰력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둘의 관계를 나름대로 잘 설명한 학자라 볼 수 있다.

6. 심리학적 접근의 공헌

기독교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처음부터 그 한계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데, 심리학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이미지는 다룰 수 있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된 하나님을 말 할수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은 위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심리학적 접근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몇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27)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로, 그가 사랑 받고 있다는 관계의 경험 안에서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솟아오르는 존경, 수용, 그리고 자신을 좋아함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 자신을 사랑스럽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부드러움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실현화하기 시작할 수 있고, 그가 되고 싶어 하는 더욱 사회화된 자아가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그 자신과 행동을 재조직하기 시작할 수 있다.28)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한데,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기가 사랑 받고 또 사랑 받을 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은 도덕성의 핵심으로서 상호성에 대해, 그리고 아가페와 에로스의 관계에 대해 더욱 적절하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하였다. 근본적인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신학은 말을 하지만,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통찰력은 바람직한 기독교 영성을 추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대상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통합된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계선 인격구조를 가진 사람은 신앙생활에서도 때로는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으로 때로는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하나님으로 양극화된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따라 아주 만족스럽고 이상적인 하나님으로 경배하다가, 하나님이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에는 큰 좌절과 절망감을 느끼고 신앙을 과소평가 한다. 결국 하나님을 언제 어느 때나 그를 항상 사랑하시고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안정되게 믿는 것에 어려움을 갖는다.29) 이러한 심리구조를 설명해주는 심리학의 도움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회심의 체험이 있고 신앙생활에 열정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잦은 죄책감과 우울증, 열등감의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더 깊은 영적 훈련을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집회에 열심히 참석을 해도 여전히 그들 내면에서 들리는 “좀 더 잘해봐, 아직 충분히 않아”라는 음성 때문에 영적인 좌절을 맛보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낮은 자존감은 인간관계를 굴절시키고, 삶의 순수한 동기를 파괴하며,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할 수가 있다.30)

심리학은 바로 이런 낮은 자존감의 원인들을 규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오늘날 영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좀더 자세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예를 들면, 부모와 만족스런 정서적 관계를 형성한 유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지각하며31),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감이라든가 자존감이 높을 뿐 아니라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깨우쳐준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의 완전주의적 양육방식과 방치, 거절, 학대 등의 경험은 유아의 무의식 속에 깊이 기억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해준다. 특히 역기능 가정은 자녀들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최근 연구 결과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32) 낮은 자존감의 뿌리 가운데 특히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완전주의 신앙’의 결과이다. 완전주의는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해서 소아기에 주로 형성되며,33) 완전주의적 신앙은 또한 성인아이 목회자의 영향으로 올 수도 있다.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목회자가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율법적이고 경직된 신앙관을 교인들에게 요구를 함으로, 이런 영향을 받는 교인들의 신앙이 완전주의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그 원인이 부모의 양육태도이건 목회자이건, 항상 더 높은 목표만을 제시하는 완전주의적인 신앙은 절망감을 심어주고,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유발시킴으로써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게 끔 한다는 것을 심리학은 밝혀주고 있다.

결국 이렇게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하기가 쉽다. 씨맨즈의 지적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대우에 따라 성인아이의 하나님 상은 사랑이 많고 자비롭고 선하신 분, 믿을 수 있는 분, 거룩하고 공평하신 분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가 하면, 무관심하거나 잔인하고 용서할 줄 모르는 분, 비판하고 불공평하신 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34)

이렇게 볼 때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상 어린 시절 받은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라고도 볼 수 있다. 정당한 정서적 요구가 계속적으로 좌절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사고 속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의 왜곡을 익히게 된다. 에론 벡(Aaron Beck)은 이렇게 사회적 적응을 어렵게 만들며 마음에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왜곡된 사고"로, 엘리스(Albert Ellis)는 "비합리적 사고"라고 부른다. 애론 벡에 의하면 사람들이 우울해진다거나 불안해지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고의 왜곡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우울하니까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애론 벡은 비관적인 생각을 하니까 우울해지는 것이라고 한다.35) 결국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비난의 느낌과 사고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경직되어지고 완전주의자가 되어 계속적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결과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사고의 왜곡을 불러와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신앙생활도 강박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러한 강박적인 관념에 의한 신앙생활은 남들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유함이 없으며 "아직도 부족해"라는 완전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적 통찰력에서 많은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영적인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일반 심리학의 한계는 분명히 지적해야하나, 영성에 있어 장애가 되는 자존감의 문제를 분석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심리학의 도움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영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을 신체, 심리, 영성의 전인적 존재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36) 예를 들어, 성추행이 영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보면 그 외상이 일어난 연령에서 다른 심리적 발달과 같이 영성적 발달도 멈추는 것으로 나타난다.37) 그리고 아동기에 외상적 경험이 있는 개인들이 미발달적이고 정신건강 척도에서 증상이 더 심하다고 하였으며, 부적절한 인지발달이 때로 영성적 고민과 신앙적 갈등을 자극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또한 충분히 인지적 발달을 한 개인은 삶의 의미라는 궁극적인 질문과 직면하지만 그렇지 못한 개인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보고 불안하고 영성적 갈등을 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38) 이러한 사례들에서 보듯 마음의 병을 몰라보고 신체적 증상만 다루려는 것도 문제지만, 마음의 병을 오로지 영성의 문제로만 보려고 한다면 그것도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이다.

7. 나오면서

대학에 있으면서 많은 기독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며 영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나, 또 다른 한편으론 심리적으로 열등감이나 갈등을 건전하게 다루지 못하며, 자신에 대한 정체성부족(신앙과 세속가치 속에서 어떻게 자기를 규정해야 할지 몰라, 자신 안에 있는 여러 감정들에 대한 해석을 못하고 혼돈을 경험)으로 고민하는 것을 보아 오면서, 바른 영성을 위해서는 심리학적 통찰력의 도움이 필요함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목적 없는 삶, 의미 없는 삶은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인격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사람들은 좌절이나 상처의 경험 때문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때문에도 정신적인 질병에 걸릴 수가 있는데, 융도 심리적인 문제들은 영성적인 질병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때가 많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만 일방적인 관심을 갖고 영성적인 문제들과 얽혀있는 심리-사회적인 요소들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온전한 건강을 얻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도 분명한 현실임을 밝혀보았다.

영성이란 궁극적으로 자기 초월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깊은 갈망으로 인격의 중심부에서 생기는데, 이것은 일반 영성과 종교적 영성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심리학적 접근은 기독교 영성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성의 본질에 대한 이해라든지 인격 내에서 영성이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하여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심리적 성숙은 때로 영적 성숙에 선행하며, 영적 성숙을 촉진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볼 때에도 영성에 대한 이러한 심리적 접근은 나름대로 올바른 영성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며. 앞으로 교회의 영성훈련에 있어서 이러한 접근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