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양육의세계

양육의 과제(3)-양육자에게 필요한 두가지 중심이미지

예인짱 2007. 1. 9. 11:49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상품은 하나이다.

예수이시다.

 

문제는 그 예수가 어떤 예수이신가가 중요하다.

어떤 예수로 이미지하느냐가 그 예수를 주는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육자의 중심이미지가 무엇인가는 양육자의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값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모든 것의 담당이시다.

이사야53장6절에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다 담당시키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나의 죄, 나의 한계, 나의 모순, 나의 부족, 나의 꿈, 나의 소망, 나의 미래를 다 책임져 주시는 분으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키우고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한 인간이 태어날 때 그 부모를 통해 양육을 하신다.

부모가 없는 자녀는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아이로 자라지 못한다.

부모로부터 보호와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인간 만들기의 과정인 것이다.

 

하나님은 한 인간을 세워주는 절대 값을 갖고 계신다.

그 절대값이 바로 예수이신 것이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그 예수와 더불어 영원한 사랑의 품안에서 다 담당하신, 다 담당하시는, 예수와 함께 살아가길 소망하신다. 이것만이 인간의 내면과 외형과 가치와 능력을 만드는 유일한 비결임을 아신 것이다.

 

양육리더에게 필요한 중심이미지는 이것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가진 값, 예수가 가진 절대 권세를 절대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두번째 이미지의 대 전환은,

예수를 모신자가 존재의 터를 완전히 바꾸는 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양육자가 가져야할 중심이미지이어야 한다.

 

양육을 받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아온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한계에 갇힌 채 자기의 틀에 종속되어 스스로 고독한 존재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로 살아왔다. 이 사람에겐 이런 틀 속에 예수를 모시려는 강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를 모시면 예수는 잡혀죽고 만다.

 

자기 틀, 자기 시각, 자기 관점에 예수를 담는 자는 예수를 잡아 먹는다.

예수로 인해 전환 된 것은 자신의 한 상황의 전환이고, 실제의 삶은 자신이 가진 틀속에서 진행형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것은 양육의 실패이다.

 

양육은 양육자의 존재와 삶의 대 전환을 만들어야 한다.

다 이루신, 다 완성하는 예수안에 거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틀과 의식과 가치를 송두리채 전환하는 대 전환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마치 결혼을 한 여인이 두가지 의식의 사람이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는, 노처녀 히스테리가 있는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재벌 남편을 만난 후 자신이 가진 모든 한계와 꿈을 극복할 대안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자신의 이전의 삶을 그대로 진행하는 여인이요,

또 하나는, 노처녀 히스테리가 있는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재벌 남편을 만난 후, 남편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남편중심의 삶의 재편을 이루는 전환의 여인이 있는 것이다.  

 

첫번째 여인은 남편과 결혼한 것도 알고, 남편이 힘있고 빽있고 좋은 남편인지도 안다.

그러나 그 남편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전환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편으로 인해 자신이 추구하던 삶을 더 열심히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진행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인간은 전환의 인간이 아니다.

 

이 여인은 남편의 가치보다는 남편으로 인해 얻어진 일의 가치에 더 중점을 두는 사람이 되고, 남편의 보장 보다는 일을 통해 나타나는 보장에 더 관심을 집중한다. 이러한 사람에게 남편이란 존재는 점점 더 약화되고 결국은 자신의 틀에 갇힌 삶을 살아가고 만다. 삶의 가치도 남편 자체가 아닌, 남편과 함께 일구어온 삶의 주제들이 더 큰 주제가 된다.

 

이 사람은 물동이의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앙은 예수를 얻고 예수로 보장됨을 가슴에 담는 대 전환의 인간을 만든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이 없어져도 예수로 인한 보장과 보호를 믿고 예수가 가진 절대 값안에서의 자유를 얻은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이다.

 

마치 노처녀 히스테리가 있는 여인이 재벌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능력과 사랑과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영원히 책임져 줄 남편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남편처럼 여겼던 모든 물동이를 버리고 그 남편의 품에 거해 그 남편의 은헤와 사랑속에 살아가는 삶의 대 전환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예수모신 전환인 것이다.

 

예수를 모신 자는 예수를 붙잡는다.

그 외의 것들에 일생을 걸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

왜?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일생을 다해 목을 매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일들에 종속되어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큼 인간은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존재의 영원한 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내 존재의 모든 필요와 문제와 비전을 해결 해 주실 영원한 주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 예수님안에 거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무수한 말씀 속에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사시기를 원하신다.

나의 주로 대접만 받고 사시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요,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약함을 책임지시고, 나의 부족을 채워주시고, 나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고, 나를 진리가운데 인도하시고, 나의 미래를 열어주시는 나의 주님이신 것이다.

 

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내 인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주님과 내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그 듣든한 빽안에서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은혜를 누리고 그 기쁨을 누리며,

그것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인인 것이다.

 

양육자는 이 두가지 중심이미지를 정확하게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