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양육의세계

양육의 과제(4)-피 양육자에게 자리해야 할 두가지 자리

예인짱 2007. 1. 10. 11:16

양육의 결과는 피 양육자에게 나타날 두가지 변화에 달려 있다.

이것을 만들어 주면 양육은 성공이다. 그러나 이것을 만들지 못하면 양육은 실패이다.

 

그 첫번째 자리는 예수의 자리이다.

예수를 어디에 어떻게 모셨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를 병고치는 도구로 쓰는 사람은 그 상태에 머문다.

예수를 죄씻음 받는 도구로 쓰는 사람은 그 상태에 머문다.

예수를 천국가는 도구로 쓰는 사람은 그 상태에 머문다.

예수를 축복받는 도구로 쓰는 사람은 그 상태에 머문다.

 

예수를 어떤 주제로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예수모심의 자리가 바뀌는 것이다.

 

예수를 모시게 하는 원형에 얼마나 가깝게 예수를 모시게 하는가가 예수의 자리를 세우는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그것을 잘 감당하는 것이 양육의 필수요소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물이다.

예수는 영원히 나의 주로,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모든 것을 담당하시는 분으로 영원히 나와 함께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 예수를 내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이 예수안에 거함의 자리가 빈약하다.

존재적으로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할 뿐더러 예수가 나와 함께 나를 책임져 주시는 분으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정서가 빈약하고 그 필요가 부족하고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조차 부족하다.

 

그런 이유로 예수모심의 주제가 지극히 부분적인 영역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이 주는 깊고 깊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피 양육자의 삶의 자리이다.

삶의 자리를 물동이의 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은 예수안에 거해도 잘못된 삶의 현장에 서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예수충만을 만들기 보다는 삶의 충만을 만들수 밖에 없는 한계의 시스템을 갖게 된다.

 

물동이를 찾는 인간은 보장의 주제가 물동이일수 밖에 없다.

물동이의 찾는 사람은 물동이가 나요, 물동이가 주님이다.

물동이에 의해 자신의 존재도 보장도 평안도 기쁨도 얻게 되는 물동이의 한계안에 갇히게 된다.

 

물동이가 내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어떻게 아는가가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자리를 찾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내게 평안을 주고, 내게 행복을 주고, 내게 안정을 주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깊게 깊게 판단하는 지혜가 요청되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은 소유적이지 않다. 무엇을 얻음으로 평안을 얻으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신앙관인 것이다.

 

평안의 원인,

행복의 원인,

감사의 원인을 외부적 조건에서 찾는 사람은 이미 신앙적 가치관이 바르게 성립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이 나를 평안하게 하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조건인지를 분명히 찾아 그것을 담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나의 영원한 평안의 터요,

영원한 안정의 터요, 영원한 보장의 터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깨달음인지..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모든 삶의 현장의 주제들은 나의 달란트요, 나의 은사임을 알아야 한다.

나를 보장하시는 주님안에서, 나를 책임지시는 주님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입은 내가, 주님의 보장안에 있는 내가 주님이 주시는 은사를 개발하고 누리고 나누는 은사의 자리를 깊게 키워가는 것이다.

 

이런 인간을 만드는 것이 양육의 절대 과제인 것이다.

양육은 이런 인간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양육은 이런 사람을 만드는 스타트가 되어야 한다.

이런 주제로 신앙을 대하는 사람의 결과와 그냥 신앙을 대하는 사람의 결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