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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 한국사람들의 생활상

예인짱 2018. 8. 23. 13:53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 한국사람들의 생활상  

온 산하가 나무가 없던 민둥산이였던 50년대

 

세계에서 젤 가난한나라 1950년대

 

50년대 중반 이후는 숫채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도 많았다. 날이 새면 산 나물을 뜯으려 바구니를 인 동네 아주머니들의 행렬이 그치질 않았다. 신문마다 대문짝만한 활자로 농촌에 절량농가 속출이라는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했다. 전쟁이 남기고 간 폐허에 가난과 굶주림의 시련만 안긴 50년대였다. 공장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고 국가의 경제력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지금은 물론 그때에 비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국민소득 2만 달러라니 어떻게 그 고비 고비를 넘겨 오늘에 이르렀는지 감회가 새롭다

 

사진을 통해본 그시절 사회상

초라한 민가 풍

 

물물교환을 하던 시장골목

기차길 옆 오막살이 집들

반공 정신이 투철하던 시절

 아이들은 똥싼다고 바지를 벗고 온동네를 쏘다니던 시절

 

 

 

 

 

 1950년대 꿀꿀이죽

 

 

 

 

1950년대도 보수적인 봉건 사상이 남아 갓을 쓰고 다닌 어른들이 많았다

 

 

  주요 운반수단인 지게

 

 

허리에는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짐을 이고 먼길을 떠나는 그시절 아낙네들

 

고무신에 지게를지고 수 킬로를 걸어 다니던 시절이였다

 

 

 

 

짝대기로 공산당을 때려잡자는결의찬 아이들

 

 

1950년대 까까 머리 소년들과 단발머리소녀들

 

 

 

 

 

 

 

 

 

 

날품팔이로 살았던 지겟꾼

 

 

 

 

애기가 애기를 업고 다니던 시절

 

 

 

 

북한의 장마당수준인 한국의 50년대 시장 모습

 

 

 

 

 

 

 

 

 

 

 

부산지역의 1950년대 모습

 

  1950년대 결혼식 모습

 

 

 

똥장군들이 이용하던 수레와 똥통

 

 

 

 

그시절 한국의 아낙네 생활모습

 

 

 

 

 

 

대부분 초가집이였던 시골마을모습

 

 

 

 

 

 

 

동네아낙들과 아기업은 여자이들 모습

 

 

 

 

 

북한처럼 소가 운반도구

 

 

 

 

 

 

 

 

그시절 피서법

 

그시절 상여

1959년대 대구지역  배급받는 아이들

한국전쟁의 전화가 채 가시지 않은 50년대 중반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로 식량이 부족한 시절 서방의 원조구호물품 중의 하나인 탈지분유를 배급받기 위해 아이들이 줄을 선 모습이다.우유가루를 끓는물에 타서 우유대용으로 먹기도 했는데 이것을 먹고 설사를 하기도 했다. 또는 걸쭉하게 물에개어서 그릇에 담아 밥할때 쪄서 먹기도 했는데, 얇게 찐 우유는 어머니가 적당한 크기로 칼로 자르고 나서 바로 먹으면 부드러워 먹을만 했지만 그대로 놔두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려 먹기 어려웠다.
돌덩어리가 된 찐우유를 힘들게 조금씩 깨물어 가며 과자 대용으로 먹었고 애어른 할것없이 최고 먹거리 중의 하나였다.
모두가 먹을것이 궁핍한 이무렵 아이들에겐 귀하고 흔치 않은 것이였는데 이것 만큼 감지덕지 한 것이 없었다. 57~58년 국민학교 취학 전 학교에서 운영한 병설유치원생때 우유가루 배급을 받기도... 입학(59년) 후엔 학교에서 끓여 준 우유(소금과 사카린 첨가)를 먹기도 했다.

 

1950년대 서울모습

 

 

 

 

 

50년대 서울 한강모습들

 

 

 

 

1950-60년대 한국의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