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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와 나 - 존 리치]

예인짱 2018. 1. 23. 20:14

[6ㆍ25와 나 - 존 리치]
최초 공개 컬러 사진들로 되돌아본 한국전쟁

존 리치
⊙ 1917년 미국 출생.
⊙ UPI의 전신인 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도쿄 특파원
으로 파견되어, 맥아더 장군 및 히로히토 일왕 등 인터뷰.
⊙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으로 파견되었으며,
1950년 12월 NBC News로 옮겨 3년 동안 한국전쟁 취재.
⊙ 한국전쟁 이후 베를린 특파원으로 4년 근무했고, 베트남
전쟁을 10년간 보도하는 등 주요 분쟁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로 30년간 활동.
⊙ 미국 방송협회와 조지아대가 주최하는 미국의 방송상
(Peabody Award) 수상.

사진제공 : (주)서울셀렉션

글 | 존 리치(John Rich) 한국전쟁 종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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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7월 27일 워싱턴의 한국전(韓國戰) 기념물 앞에서 열린 휴전 60주년 행사에서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冷戰)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과 압제 속의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5000만 명의 한국인들은 활력(活力) 있는 민주제도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한국전은 이긴 것”이라 평가했다.
 
2000년 6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5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도 비슷한 역사관을 피력했다. 그는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해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티어낸 덕분에 냉전(冷戰)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며 “50년 전 한국의 능선(稜線)을 지켜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독일의)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최근 《월간조선》 6월호 기고문 〈완전히 달라진 한국전에 대한 세계사적 인식〉에서 “6ㆍ25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冷戰)의 승리를 가져온 위대한 항전”이라며 이렇게 썼다.
 
“남침과 동족상잔의 강조에서 벗어나 (6월 25일을) 이제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승리의 날로 기념하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반도 냉전을 자유통일로 종식시킬 것을 다짐해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 해석해야 피의 대가(代價)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다.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한국, 미군 등 유엔군들은 45년간(1946~1991년) 지속된 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승리, 수많은 인류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도록 하는 데 고귀한 피를 흘린 셈이다.”
 
 한국전이 냉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인과 기자들뿐 아니라 한국 학자들을 제외한 세계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정설(定說)이 되었다. 헨리 키신저(닉슨 정부 때 안보 보좌관을 지낸 美中 화해의 주역)는 《외교》라는 저서(著書)에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도전하였을 때 미국 정부는 기존의 전략을 폐기하고 맞서기로 결정하는 용기를 보였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되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장, 특히 일본과의 중대한 관계가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지도국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했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은 한국인들은 휴전 하의 경제ㆍ정치ㆍ문화 경쟁에서 북한에 이겼고, 이것은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공산진영을 동(東)과 서(西)에서 감제하는 초소 및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쇼윈도 역할을 한 곳이 베를린과 서울이었다. 냉전시대 서독과 한국을 지켜낸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세계사적 차원의 반공지도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오판(誤判)과 문민(文民) 대통령에 대한 항명(抗命)과 해임으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적(敵)의 전략을 흩트려버린 김종오(金鐘五) 6사단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여기에 6ㆍ25 당시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에 참가했던 무명의 용사들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뼈를 깎는 듯한 고통ㆍ고난을 당당히 이겨낸 그 시대의 한국민 또한 영웅이 아닐까 싶다.
 
 올해로 6ㆍ25전쟁 발발 66년이 되었다. 북한 김정은이 핵무기로 세계를 협박하고 있지만 통일은 한반도의 대세(大勢)다. 제대로 된 통일을 위해 우리 세대는 66년 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ㆍ25’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월간조선》은 6년 전(前) 6ㆍ25를 체험한 31인의 소중한 증언을 모았다(2010년 6월호 별책부록). 증언자 중에는 이제 고인(故人)이 된 분도 있다.《조선pub》 독자에게 다시 소개한다. 6ㆍ25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은 통일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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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이 소련제 야크기는 전쟁 초기 잠깐 맹위를 떨치나, 유엔군은 곧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한반도 상공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북한이 6·25전쟁에 동원한 소련제 야크 전투기의 잔해에 올라가 신나게 손을 흔드는 소년, 어린 삼 남매와 함께 쌀가마를 얹은 수레를 끌고 가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진달래꽃을 꺾어 철모에 꽂은 앳된 병사의 모습….
 
  치열한 전투에 가려졌던 6·25 당시의 일상이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되살아났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NBC 종군기자였던 존 리치(John Rich·92) 씨가 전쟁 초기부터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3년여 동안 촬영한 컬러 사진 70여 점을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전쟁 당시 사진을 찍으면서 세계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국인들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이 사진들을 통해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존 리치의 사진전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2010년 6월 서울 효자동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렸다. 전시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주최하고 서울셀렉션이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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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여름, 부산항을 향해 가고 있는 미 해군 상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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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수원 화성 장안문. 탈환과 재탈환의 과정 속에 수원은 크나큰 피해를 입는다. 연합군의 주요 수송로가 수원을 통과했기 때문에 많은 군인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기념촬영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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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폭격으로 파괴된 기차들. 철로 끝으로 서울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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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부대원들.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국내치안유지와 38선 경계를 주목적으로 훈련받았던 국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침공을 막아낼 전투 경험이나 화력이 부족해 전쟁 초반 뼈아픈 패배를 경험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교전 경험을 통해 국군의 전투력은 현격히 향상되어 갔고, 곧 유엔군의 주력군으로 자리매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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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 병사가 철모에 진달래를 꽂은 채 봄을 기다리고 있다. 많은 병사들이 곳곳에 핀 진달래를 보며 혹독했던 겨울의 끝을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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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수와 배우로 활동했던 베티 허튼(Betty Hutton)이 미군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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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사고문단의 감독하에 국군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훈련을 받고 있다. 그들은 여덟 내지 아홉 발 정도를 쏴본 뒤 부대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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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휴전 회담이 열렸던 개성의 모습. 북한군과 미국 측 사람들이 평화롭게 섞여 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던 탓에 개성은 북한 전역에 퍼부어졌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개성은 현재 가장 많은 한옥이 보전돼 있는 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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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왕실기갑연대 대원들이 전투에 임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51년 1월 중공군의 2차 공세를 앞둔 시기로 추정) 오른쪽 뒤편 병사가 목에 두르고 있는 실크 스카프는 영국군 기갑부대 장교들의 애용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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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방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란민 인파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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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유엔 측이 1951년 초반에 세운 이 수용소는 총 28개 시설에 최대 17만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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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봄, 재탈환된 서울 시청 앞에 어린이들이 서 있다. 사진으로는 피해 상태가 경미한 듯 보이지만, 연희고지 등 북한군의 저항이 극렬했던 일부 지역은 유엔군의 집중포격으로 폐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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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만난 아이들. 한국전쟁 동안 약 10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는데, 그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물자나 시설은 거의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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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를 보기 위해 모여든 아이들과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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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모여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 전쟁 중에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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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필품만 챙겨 어디론가 떠나는 피란민 가족. 어머니의 왼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인 남자는 징집 당했고, 이는 피란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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