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레스 치마 저고리
문명사회에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이었던
조선시대 아낙네들의 대담한 모습
톱레스 치마 저고리
러일전쟁 무럽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여성의 "젖가슴 드러낸 치마 저고리" 풍자화
18세기 이후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장남을 낳은 여성은 젖가슴을 노출한다."라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깊은 이 시대에 "장남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이 의상은
여성에게 있어서 "남아를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일본 순사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도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다.
아래의 사진은 프랑스 판화 화가 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
그녀는 3살 때에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중국, 폴리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애를 일본에서 보내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 시골의 결혼 피로연과 톱레스 치마 저고리 - 1921년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서민의 기묘한 습속
인물화를 섬세한 선과 파스칼 컬러로 여성답게 표현했다
- 아침의 잡담 - 1921년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조선 서민의 기묘한 습속
당시 조선시대의 "톱레스 치마 저고리"는 1911년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풍속문란이라고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 뺨 맞아 가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바티칸 교황청 한국 대사관에 기증된 "한국판 마리아 상"
2005년 바티칸의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관에 안치된 한국형 성모마리아상.
성염 주 교황청 한국대사의 의뢰로
돌조각가 오채현씨가 약 10개월간 걸쳐 만든 약 2m 높이의 이 작품은
한복을 입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가 등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동이는 천주교회에서 쓰이는 성수(聖水)를 나타낸다.
역시 압권이라면
성모 마리아가 가슴을 전부 대담히 드러낸 모습이 한국적이다.
당시 양반계급의 여성이 외출 때의 모습
유방(乳房)은 말그대로 아기를 위한 젖통입니다.
유방을 성기로 보는 것은 서구풍입니다.
아들 선호시대에 아낙네들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가부장시대에 이나마 자랑하고 떳떳하게 기를 폈던 조선의 아낙네였습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살렸습니다.
지금은 유방은 아니지만 배꼽을 살짝 보이게 하고 길거리 다니는
아가씨들 몇 년전에 많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앞의 옷섶을 살짝 묶어서 배꼽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을
본일이 있습니다.
길거리 다니면서 다시 유심히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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