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좋은 상식

애국가 작사자 논란 재점화..원작자 규명 '글쎄'

예인짱 2018. 1. 16. 12:45

애국가 작사자 논란 재점화..원작자 규명 '글쎄'

  

 

한 시민단체가 '작자 미상' 상태였던 애국가 가사의 원작자를 규명하는 이른바 '애국가 제자리 찾기' 운동에 돌입하면서 애국가 작사자를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혜문 스님이 이끄는 시민단체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윤치호(1865~1945)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가사 친필본 '원본'이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돼 있다"며 이달 말 민주당 안민석 의원 등과 함께 에모리대를 방문해 환수 의사를 전하겠다고 밝혔다.

 

 

 

 

애국가 가사에 대한 원작자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는 가운데

현재로선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해방 이후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신문 '국민보' 1953년 5월 20일자를 발췌한 모습.

신문은 '애국가는 청일전쟁 이후 광무(光武·고종) 시대에 미국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짓고

곡조는 영국 노래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으로 하였는데

추후로 애국가를 안창호가 개선하고 곡조도 안익태가 변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민보 1958년 4월 9일자 지면. 신문은 애국가와 관련해

'국민회 당시 최정익과 안창호의 제안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정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단체는 친필본에 적힌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서명 등을 근거로 윤치호가 애국가 가사 원작자라는 데 무게를 두고 20일부터 한 포털 사이트에서 '친필본 환수 모금 운동'도 시작했다.

그러나 22일 연합뉴스가 확인한 광복 후 발행된 신문 내용 등을 종합하면 애국가 가사 원작자를 규명하는 것은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신문 '국민보'는 1953년 5월 20일자 '누가 우리나라 애국가를 지었느냐'로 시작하는 기사에서 '애국가는 청일전쟁 이후 광무(光武·고종) 시대에 미국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짓고 곡조는 영국 노래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으로 하였는데 추후로 애국가를 안창호가 개선하고 곡조도 안익태가 변경하였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빈도는 우리나라일세'이었던 애국가 1절이 안창호에 의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4절의 '사농공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가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로 변경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문은 애국가의 2, 3절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국민보는 이후 1958년 4월 9일자 기사에서도 애국가와 관련해 '국민회 당시 최정익과 안창호의 제안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정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 같은 국민보의 기사는 해방 이후 발행된 간행물 중 애국가의 탄생 과정에 대해 비교적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애국가 가사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윤치호, 안창호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학계의 기존 의견에도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다.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때아닌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불거지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특정 인물을 애국가 작사자라고 입증할 만한 자료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며 "애국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탄생한 '합동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빛나 기자.  2014.1.22>

 




 


윤치호 '애국가 가사 친필본' 환수 운동 벌인다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애국가 제자리 찾기 100인 위원회 출범식에서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이
애국가 작사가가 윤치호임을 뒷바침하는 자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친일파' 윤치호가 작사한 애국가 가사 원본을 국내로 환수하기 위한 운동을 벌인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17일 서울 조계사 불교문화대학에서 '애국가 제자리찾기 100인 위원회 출범식'을 열고 에모리대에 보관된 윤치호의 자필 애국가 원본 환수 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윤치호가 1945년 자필로 애국가 가사를 적고 '1907년 윤치호 작'이라 명기한 이 친필본은 지난 1997년 유족의 기증으로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중이다.

 

 

윤치호 친필 애국가 원본

에모리대학교에 보관중인 윤치호가 붓글씨로 쓴 애국가 가사

 

 

단체 대표인 혜문 스님은 "문헌자료를 보면 애국가 작사가가 윤치호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시된다"며 "애국가 원본은 국가 중요 기록물이므로 대한민국 자존심을 위해 반드시 한국으로 반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는 국론분열을 우려해 친일파인 윤치호를 작사가로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가 상징인 만큼 정부는 작사가 확정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애국가 제자리찾기 100인 위원회에는 혜문 스님을 비롯해 민주당 안민석 의원, 김형남 법무법인 신아 대표 등 사회 각계 인사와 학생들이 이름을 올렸다.

 

혜문스님은 오는 30일께 안 의원과 미국 에모리대를 방문, 애국가 원본을 열람하고 진위 여부와 당시 유족의 기증 조건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

이들은 애국가 원본 환수와 작사가 확정을 위한 1만명 서명운동을 다음달 15일까지 벌인 뒤 에모리대 총장과 도서관에 환수 요청서를 제출할 방침이다.

또 국회 등에 애국가 원본 기증 요청 결의안 발의를, 국사편찬위원회 또는 안전행정부에 애국가 작사가 확정을 위한 공청회와 심의 개최를 요청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설승은 기자 2014.1.18>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광복후 작성"…환수가치 논란

에모리대 "1907년도 원본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혜문스님 "친필본이 원본 되는 거 아닌가"

17일(현지시간) 미국 에모리대 도서관의 로즈매리 매기 귀중본 자료실장(오른쪽)이

1997년 대학 측이 윤치호의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애국가 가사 친필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매기 자료실장은 "우리가 소장하는 것은 1945년 윤치호가 딸의 부탁을 받고 자필로 써준 것"이라며

"사람들이 말하는 1907년도 애국가 가사 원본이라는 것은 우리 대학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대에 보관된 윤치호(1865~1945)의 애국가 가사 친필본이 애초 알려진 구한말이 아닌 애국가가 대중화된 광복 후에 가족들 요청으로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윤치호가 1907년 만들었다는 애국가 가사 원본 또는 초본이 아니기 때문에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에모리대 관계자들은 17일(현지시간) 도서관에서 연합뉴스 특파원과 만나

"우리가 소장하는 윤치호의 애국가 친필본은 사람들이 말하는 1907년도 원본(very original one)이 아니다"라며 "친필본 앞면에는 '1907년 윤치호 작사'로 적혀 있지만 뒷면에는 '딸의 요청(request)을 받고 1945년 작성했다'고 영어로 쓰여 있다"고 밝혔다.

 

귀중본 자료실의 로즈매리 매기 실장은 "윤치호의 유족들은 1997년 우리 학교에 친필본을 기증할 때 1945년에 윤치호가 딸의 부탁을 받고 쓴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고, 우리가 가진 정보는 이것이 전부"라며 "1907년에 작성됐다는 원본이란 것에 대해 우리는 전혀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진저 스미스 도서관 대외협력국장은 "다만 1945년도 친필본이 윤치호가 쓴 것인지는 복수의 검증을 거쳐 사실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일레인 저스티스 대변인은 "1945년도 친필본은 학칙에 따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에 사진촬영을 허용한 적이 없다"며 "따라서 (한국 언론에) 공개된 친필본 사진이 에모리대에 있는 1945년도 것이라면 우리가 기증을 받기 전에 누군가 찍은 것이 돌아다니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치호 유족이 2000년대 초까지 기증한 물품에는 애국가 가사가 수록돼 1908년에 출판된 '찬미가'라는 책, 유족이 애국가 가사를 새겨넣은 흰색 티셔츠, 윤치호에 관한 신문 기사 스크랩북이 포함돼 있다.

해당 기사에는 6·25 전쟁 후 윤치호의 유품이 대부분 연세대에 기증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에 앞서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혜문 스님은 17일 기자회견에서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가사 '원본'이 에모리대에 보관돼 있다며 이달 말 민주당 안민석 의원 등과 함께 에모리대를 방문해 환수 의사를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혜문 스님이 말하는 '원본'이 윤치호가 광복 후에 작성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이 문서가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 재미 사학자는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를 가르는 결정적 자료는 1907년 원본 또는 초본의 존재 여부"라며 "애국가가 이미 온 민족에게 알려진 시기에 지탄을 받던 친일파 인사가 자식에게 자필로 써준 것이 온 국민이 공들여 환수할 가치가 있는 중요 문화재인지 의문이 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혜문 스님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작사가가 쓴 친필본이 원본이 되는 것 아닌가"라며 "정확히 말하자면 친필본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7년도 원본의 존재 여부와 관련해선 "그런 건 없을 것"이라며 "일제강점기인데 애국가를 자기가 적었다 하고 하면 당장 잡혀가지 않았겠나"라고 반문했다.

 

환수 가치에 대해서는 "애국가를 자필로 적은 문서가 이것(에모리대 소장본)이 유일할 거라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라며 "애국가 작사가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수인데 이들도 친필본은 남기진 않았고, 1907년 윤치호가 편찬한 찬미가 출판본에도 애국가가 수록됐지만 이것도 그가 직접 쓴 게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도 애국가를 윤치호가 혼자 지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며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민족지사가 공동 창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