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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외국인 '할매 수녀' 10년 만에 고흥 온다

예인짱 2017. 12. 26. 10:49

2005년 귀국 후 첫 방문…한센인 위한 40년 희생정신 재조명 


 

(고흥=연합뉴스) 여운창 기자 = 소록도에서 40여 년간 한센인을 위해 봉사하다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두 '할매 수녀' 중 한 분이 10여년 만에 소록도를 찾는다.

전남 고흥군은 31일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오는 5월에 '할매 수녀' 두 분을 모두 초청하려고 했지만 마가렛 수녀의 건강이 좋지 않아 마리안느 수녀만 소록도를 찾을 예정이라고 전했다.

마리안느 수녀도 최근까지 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현재 상태는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흥군은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할매 수녀'로 불리던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잊히지 않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자원봉사 프로그램 등 다양한 선양사업을 검토 중이다.

할매 수녀의 노벨상 후보 추천을 추진중인 고흥군 관계자는 "연고도 없는 작은 나라에 와서 40년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오직 소록도를 위해 일만 하시다 가셨다"며 "더 늦기 전에 보답할 기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도 다가서려 하지 않았을 때 비닐 장갑하나 끼지 않고 한센인들을 간호했던 이들 외국인 할매 수녀의 고귀한 봉사정신과 소록도에서의 삶이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소록도성당의 프란치스코 주임신부가 할매 수녀의 삶을 정리해 놓은 메모를 토대로 이들의 삶을 살펴본다.


◇ 한센인 자녀 돌보기 위해


이제 갓 20살을 넘긴 아가씨들이었던 마리안느(Marianne Stor), 마가렛(Margareth Pissarek) 두 수녀는 한국전쟁이 멈추고 전 국토가 폐허 더미였을 때 한국에 온다.

두 수녀는 1952~195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룩의 간호학교에서 같은 학년 같은 방을 쓰며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 사이다.

졸업 후 마리안느는 오스트리아 현지 병원에서 근무중이었고. 마가렛은 1959년 천주교 단체의 소개로 이미 대구에 와 있었다.

두 수녀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전남 나주성당의 초대 신부이자 한국 천주교에 큰 족적 남긴 해롤드 헨리 대주교의 주선 때문이다.

당시 조창원 소록도병원장은 낙태를 중지시킨 소록도에서 태어난 한센인 자녀를 돌볼 사람이 없음을 헨리 대주교에게 호소했다.

5천500명에 달하는 환자를 치료할 인력도 부족한데 아이들을 돌보기는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한센인 자녀 돌보는 마리안느 수녀(소록도 성당 제공)
한센인 자녀 돌보는 마리안느 수녀(소록도 성당 제공)


헨리 대주교는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면서 오스트리아 대주교에게 소록도 봉사인력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리안느·마가렛 두 수녀가 뽑혔다.

두 수녀는 헨리 대주교와 5년 계약으로 1962년 2월 소록도에 왔지만 그 계약은 43년이란 긴 세월로 이어졌다.


◇ 한센인과 함께 밥 먹기


두 수녀의 원래 임무는 한센인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지만 점차 한국어와 현지 생활에 적응할 때 쯤 헨리 주교가 두 수녀에게 오스트리아로 6개월간 휴가를 보냈다.

휴가가 끝나자 헨리 주교는 세계적인 한센인 구호단체인 벨기에 다미안 제단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인도로 보내 6개월간 한센병에 관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교육 후 두 수녀는 다미안 재단 소속 의사 2명 다른 간호사 3명과 함께 소록도병원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한센인 치료와 구호에 나선다.

1970년 소록도 병원 외국인 의료진
1970년 소록도 병원 외국인 의료진소록도병원에 한센인 치료를 위해 온 다미안 재단의 의료진. 사진의 뒷줄 오른쪽이 마리안느 수녀, 뒷줄 왼쪽이 마가렛 수녀. 이들은 1971년 귀국했지만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는 소록도에 남았다.


이들이 소록도 병원에 와서 한 첫 일은 한센인과 함께 식사하기였다.

이 사건은 '나병환자'라며 이들을 격리하고 멀리하며 국내 의료진조차 직접 치료를 꺼렸던 당시 분위기로서는 소록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외국인 의료진들이 환자의 상처 부위를 맨손으로 직접 만지며 약을 발라주는 치료과정은 나병환자와 함께 밥 먹는 모습과 함께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전염관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이 이들을 외부인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온 가족처럼 받아들이면서 치료는 한결 쉬워졌다.

'미친 짓'이라며 만류하고 손가락질했던 병원의 다른 직원들도 6개월이 지나도 이들 외국인에게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자 그때부터 한센인들을 '그냥 환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한센인에 대한 사랑


소록도에 정착하기 위한 큰 고비를 넘겼지만 두 수녀의 고된 봉사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새벽 5시부터 병실을 돌며 따뜻한 우유를 환자들에게 먹이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새벽 기도와 미사를 마치면 병원 옆 한센인 마을에서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을 위해 음식을 내주고 한센병 치료제인 람프렌과 약을 줬다.

한센인 살펴보는 마라안느 마가렛 수녀(소록도성당 제공)
한센인 살펴보는 마라안느 마가렛 수녀(소록도성당 제공)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 환자 살피는 두 수녀. 사진 왼쪽이 마가렛, 오른쪽이 마리안느 수녀.


표정 한번 찡그리지 않고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환자 형편을 살펴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줬다.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가 있으면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냄비에 음식을 만들어와 직접 먹이기도 했다.

5년간의 봉사와 헌신으로 소록도의 환자 수가 3천 명대로 떨어지자 그동안 함께 치료활동에 투신했던 다미안 재단의 다른 의료진들은 1971년 4월 그들이 사용했던 수술도구 등을 남기고 귀국했다.

하지만 그들 중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는 소록도에 남아 한센인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했다.

이들이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봉사하는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자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 도움으로 소록도 병원 초창기 영아원, 결핵병동, 정신과병동, 목욕탕 건물이 세워졌다.

의료인 집안이었던 마가렛 수녀의 가족들도 소록도 병원에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의약품을 지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 수녀 관사는 종교화합·한센인 사랑방


두 수녀는 인도에서 돌아와 2005년 귀국할 때 까지 지금은 '마리안느 마가렛'으로 이름 지어진 작은 관사에서 검소하게 생활했다.

이곳은 소록도에 있는 개신교와 원불교 관계자나 소록도 밖의 목사, 스님들이 드나들던 사랑방 역할도 했다.

이 관사에서 종교인들은 한센인을 돕겠다는 신념으로 하나가 돼 함께 친교를 나눴다.

고 김수환 추기경 등 천주교 인사들이 찾아 이들을 위로했고 두 수녀는 시도 때도 없이 방문하는 다른 종교인들도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맞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소록도성당 제공)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소록도성당 제공)1993년 소록도병원을 찾은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뒷줄 맨 왼쪽이 마리안느 수녀, 뒤줄 오른쪽 두번째가 마가렛 수녀.


환자들을 직접 집으로 초대해 자주 식사했으며 성당 환우 200여 명의 생일에는 200명분의 빵을 오븐에 직접 구워 내놓아 거의 매일 빵을 굽기도 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두를 환영했지만 딱 하나 두 수녀의 얘기를 알리고 싶어하는 언론과는 절대 접촉하지 않고 철저히 숨어지냈다.

2005년 11월 소록도를 조용히 떠날 때도 두 수녀는 이 철칙을 지켰다.


◇ "이제는 천막을 접을 때"


두 수녀는 '할매 수녀'로서 은퇴의 나이를 넘어 70대의 고령에 접어든 2005년 11월 소록도를 갑자기 떠났다.

누구에게도 미리 알리지 않고 편지만을 남겼다.

그것도 편지를 관사에 두지 않고 고흥을 떠나 광주에 와서 우편으로 소록도에 보냈다.

떠나는 도중 소록도 사람들에게 알려져 혹시 눈에 띄기라도 하면 이별하기 더욱 어려워질 것을 걱정해서다.

편지는 "떠남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헤어지는 아픔은 그대로 남기에 편지로 대신한다"고 시작했다.

이제는 노인이 된 자신들이 소록도에 부담될까 봐 그것을 불편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록도에서 과거처럼 일하기는 건강이 허락될지 모르겠다"며 "자신들이 다른 친구들에게 항상했던 말, 제대로 일할 수 없고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실천할 때"라고 떠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이 어려웠을 때에는 약과 치료품을 고향의 도움을 받아 제공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을 만큼 소록도와 한국이 발전했다"고 기쁜 마음도 드러냈다.

두 수녀는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와서 천막을 치며 간호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천막을 접어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드린다"고 편지를 마쳤다.

b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