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감동받은 글

[소록도] 소록도에서 43년 “행복했습니다. 하늘만큼…”

예인짱 2017. 12. 26. 10:35


소록도(小鹿島).

‘아기 사슴’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섬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한센인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서다. 천형(天刑)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 한센병. 소록도는 육신의 아픔과 세속의 편견에 눈물짓는 한센인들의 피난처였다.

소록도 한센인 정착 100년을 맞아 주교회의 홍보국(국장 이정주 신부)이 4월 25∼26일 ‘아픔의 땅, 치유의 섬, 100년의 소록도’라는 주제로 마련한 종교 기자단 현장 동행 취재를 다녀왔다. 한센인들의 눈물과 한이 밴 소록도를 구석구석 둘러봤고, 한센인의 어머니 마리안느 수녀를 만났다.

아픔이 큰 곳에 은총도 크다고 했던가. 소록도는 고통을 은총으로 승화시키는 치유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



▲ 마리안느 수녀(왼쪽)가 11년 만에 다시 소록도를 찾아 환자를 만나고 있다. 소록도본당 제공




“어떤 사람이든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했다. 내 엄마 같다고 느꼈다. 어떤 여자아이는 온몸에 물집이 생겨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터지고 또 터지고 했다. 그런 아이도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친절하게 치료했고, 심한 상처도 다 치료해줬다.”

“신앙을 배웠다. 봉사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 행동이 나를 변하게 했다. 생활 자체가 기도였고,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공을 조금이라도 보이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한다.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이 마르안느 스퇴거(82) 수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록도에서 1962년부터 43년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다 2005년 11월 짐이 되기 싫다며 훌쩍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 수녀가 11년 만에 다시 소록도를 찾았다. 광주대교구와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이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17일) 행사에 수녀를 초청한 것.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던 마리안느 수녀가 4월 26일 소록도병원 회의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기자들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마리안느 수녀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지만 따스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은 한센인을 돌보던 예전 그대로인 듯했다. 우리 말이 유창하지는 않았으나 짧은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전해지는 진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그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피한 것에 대해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알릴 필요가 없었다”면서 “사소한 일이 기사화되고 높게 평가받는 것이 힘들었다”고 밝혔다. 마리안느 수녀가 “기자들이 거짓말도 하고…”라고 웃으면서 말해 기자들도 함께 웃었다.

“소록도에 다시 오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섬에 온 것이 정말 기쁩니다. 와서 보니 많이 변했고 또 좋아졌습니다. 한센인들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가 고맙습니다.”



한센인들이 가족에게 냉대 받을 때 마음 아팠다

마리안느 수녀는 “28살 젊은 나이에 소록도로 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현하자는 생각 하나로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4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회고했다.

“환자가 치료를 받고 가족에게 돌아갈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한센인은 가족과 단절된 경우가 많은데, 가족이 기다려 주고 받아줄 때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완치된 후에도 여전히 외면당하는 한센인을 볼 때는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한센인을 아주 친한 친구로 여기며 지냈다”면서 자신도 한센인들에게 좋은 친구로 기억되기를 희망했다.

2005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달랑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것은 마리안느 수녀에게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떠나는 것이었기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웠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전화와 편지로 소록도 소식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서 예수 발견하도록 노력

마리안느 수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안다면 그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고통받고 있는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백 년 가까운 소록도에서의 인생이 행복했느냐는 질문에 마리안느 수녀는 더없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행복했습니다. (양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하늘만큼….”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가 걸어온 길


▲ 한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리안느 수녀(오른쪽).



▲ 마리안느 수녀(뒷줄 왼쪽)와 마가렛 수녀(뒷줄 오른쪽).

▲ 한센인을 돌보는 마리안느 수녀(오른쪽).




어려서부터 봉사하는 삶을 꿈꿨던 마리안느 수녀는 오스트리아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60년대 초 당시 광주대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1962년 2월 마가렛 피사렛 수녀와 함께 소록도로 온 마리안느 수녀는 미감아(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한센인의 자녀)를 돌보는 영아원 일부터 시작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병사(病舍) 지대 아이들을 영아원으로 데려오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부모들은 수녀들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봐주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운영 주체가 천주교라 꺼리던 개신교 신자들도 아이들을 맡기며 감사를 표시했다.

마스크와 장갑, 방역복을 착용한 병원 직원들과 달리 흰 가운만 걸친 수녀들은 짓물러 달라붙은 환자의 손과 발가락을 맨손으로 소독해 줬다. 상처의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개의치 않았다.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 교정 수술을 해주고 물리 치료기를 들여와 재활 의지를 북돋웠다. 한센인 자녀 영아원 운영 및 보육사업, 재활 치료와 계몽, 자활 정착 사업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포장(1972년)과 국민훈장 모란장(1996년)을 받았다.

43년의 소록도 생활 중 마리안느 수녀가 소록도를 떠나 있던 기간은 단 10개월. 대장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으러 오스트리아로 떠났던 그는 수술이 끝나자 요양도 마다하고 소록도에 돌아왔다.

두 수녀는 1960년대 초부터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서 보내준 의약품과 지원금으로 활동했다. 지원금은 주로 쓰러져 가는 초가를 현대식 주택으로 개량하는 데 썼다. 그 사이 두 수녀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하는 할머니가 됐다. 주민들은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2005년 11월 21일 소록도 주민들은 슬픔에 휩싸였다. 43년간 동고동락한 마리안느ㆍ마가렛 수녀가 이른 아침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두 수녀가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 위해 아침 일찍 섬을 떠났다는 소식을 해가 중천에 떠서야 들었다. 신자들은 성당에 모여 두 수녀를 위한 밤샘기도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43년 생활을 정리한 짐이라곤 낡은 여행 가방이 전부였다. 이들은 섬을 떠나며 편지 한 장만 남겼다. 그 편지도 광주로 나와서 부쳤다. 수녀들은 편지에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가끔 저희가 충고해 주는 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마가렛 수녀는 지병으로 이번에 한국을 찾지 못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오스트리아의 고향 마을 마트레이에 살면서 일주일에 세 번 20㎞ 떨어진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아픈 마가렛 수녀도 만난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수녀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지만 엄밀히 말해 두 사람은 수녀가 아니다. 그리스도 왕 시녀회라는 재속회 회원으로, 평신도 선교사에 가깝다.

국립소록도병원은 2006년 5월 개원 90주년 행사 중에 두 수녀가 생활했던 공간을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집’으로 명명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1938년에 처음 지어지고 2015년 복원 공사를 거쳐 새로 단장한 이 집은 소록도 병사 성당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병원 100주년 행사가 끝나면 귀국할 예정이다.

남정률 기자, 사진=소록도본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