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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천사’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

예인짱 2017. 12. 26. 10:32

소록도 천사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

 

40여년간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최저 수준 연금생활

고흥군, 선양사업 및 생활지원금 혜택추진

 


소록도 할매’, ‘소록도의 마더 테레사’, ‘소록도 천사등등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를 일컫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40여년을 낯선 땅인 대한민국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보낸 이 두 수녀의 삶은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참으로 크다.

 

이 두 수녀가 살았던 소록도성당 근처 사택에는 그들이 평생 마음에 새겼던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우리는 이들을 수녀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들은 가톨릭 수녀 종신서원을 받지 않았다. 다시 말해 통상적으로 우리가 수녀라고 부를 뿐, 가톨릭 소속의 파견간호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단순히 간호사라고만 부를 수 없을 만큼 이들은 가톨릭 수녀이상의 무소유와 헌신적인 봉사로 이어진 삶을 살았다. 그래서 수녀라는 종교적 존칭을 넘어 존경과 찬사가 담겨 있다.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초청된 마리안느 수녀는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지 11년만인 지난 413일 입국하여 오는 69일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영아들을 보고 있는 마리안느 수녀            마가렛 수녀              


조창원 원장의 요청으로 소록도 도착

마리안느 스퇴거(82) 수녀와 마가렛 피사렉(81) 수녀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주()의 주도인 인스브루크 출신이다. 알프스산맥의 도시로 잘 알려진 이 도시는 1964년과 1976년 등 두 번씩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 인스브루크 간호대학을 나온 두 수녀는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였다. 마리안느 수녀는 8살 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간호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육군 군의관(대령)인 조창원 원장이 소록도병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족한 의료진 확보를 위해 오스트리아 교구청 주교에게 간호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오스트리아 가톨릭 그리스도왕국시녀회 소속인 28살 파란 눈의 마리안느 수녀가 자원하면서 1962224일 낯선 땅 천형의 섬인 소록도에 도착했다. 결국 마리안느 수녀를 불러들인 것은 가톨릭 신자였던 조창원 전 원장이었던 셈이다.

 

  이청준의 소설 <우리들의 천국> 실제 주인공인 조창원 원장(좌측)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실제 주인공인 조창원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직원과 환자로 구분되어 있던 선착장과 선박을 하나로 통폐합시키는  등 각종 폐단을 없앴다.

 

직원과 환자 거주지를 갈라놓았던 철조망을 없애고 강제노역의 상징인 벽돌공장은 아예 폭파시켜 버렸다. 반인륜적인 단종수술을 전면 금지시키고 환자끼리 결혼을 자유화한 것도 조원장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최근 이 강제 단종?낙태수술에 의한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한국정부수립이후 본인 동의하에 수술이 진행됐다는 주장이고 피해자들은 70년까지 강제수술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소록도병원에는 90년대 초반까지 단종수술이 한 기록이 남아 있다.

 

20141심인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는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고 현재 5건의 소송이 상급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조원장은 한센인들의 자립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시작했던 오마도간척지 공사도 결국 오마도 주변 주민들과 지역 국회의원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부임 3년만인 1964년에 원장직에서 쫓겨났다.

 

소록도 수용 한센병 환자들의 구세주

 

60년대초 6000여명에 이르던 한센병 환자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료진 등 정부의 무관심과 지원 부족으로 각종 차별 속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당시 의료진이나 간호사, 직원들은 마스크와 장갑, 방역복 등으로 무장한 채 환자를 대했고, 의사들도 멀찍이 떨어져 환자들에게 직접 상처를 만져보라고 할 정도로 한센병에 무지했다.

 

한센병 치료제인 DDS도 값이 비싸 국내에서는 구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때 등장한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 환자들의 구세주였다.

 

마리안느 수녀는 하얀 가운만 입은 채 짓물러진 환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맨손으로 직접 소독해주고 상처의 피고름도 아무렇지 않게 만졌다. 어쩌다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전혀 놀라지 않고 담담했다.

 

조창원 전 원장은 나는 명색이 의사인데 너무 부끄러웠다. 그 전까지 우리 병원 사람들은 마스크에 고무장갑을 끼고, 고무장화를 신고 완전무장하고 나서야 환자들을 치료하곤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60년대 소록도 한센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어준 벨기에 다미안의료재단 의료진과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

 

이어 196610월 룸메이트였던 마가렛 수녀가 다미안의료재단을 통해 소록도에 들어왔다. 당초에는 5년만 근무하고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의 어려운 사정을 눈으로 보고는 떠날 수가 없었다. 두 수녀는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이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당신 자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환자들의 자녀인 어린 미감아를 돌보는 것이었다. 5살이 되면 부모들과 떨어져 허름한 창고건물인 미감아 보육소로 보내졌다.

 

마리안느 수녀의 부모는 농부였지만, 친척이 신부여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마가렛 수녀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의사였고, 언니는 약사여서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비싼 한센병 치료약 DDS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구할 수 있었다.

 

이들 수녀는 고국에 수천통의 편지를 써서 약품과 후원금 등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 수녀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곳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였다. 이 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영아원을 비롯해 결핵병원과 정신과병동, 목욕탕 등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이 단체에서는 35년 동안 두 수녀의 기초연금도 넣어 주었다. 이 두 수녀가 소록도에서 거의 평생 젊음을 바쳐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의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든든한 후원단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센병 치료를 위해 65년 인도에 한센병 관리교육연수까지 다녀온 마리안느 수녀는 66년 한국 정부와 벨기에 다미안의료재단과의 협약에 따라 파견된 의사와 함께 5년간 수술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소록도 환자들만 돌본 것은 아니었다. 이들 수녀는 치료가 끝나 육지로 나가는 원생들에게 정착금까지 보태줄 정도였다.

 

또 경북 왜관, 경남 거창 등 한센인 정착촌까지 찾아가 진료 및 계몽활동을 펼쳤고, 전남 나주시 금천(현 나주 호혜원) 정착촌은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준 후원금 250여만원으로 1만여평의 땅을 구입해 세워졌다.

                                    나주 혁신도시 근처에 있는 한센인 정착촌인 호혜원 전경

  

오스트리아의 한 초등학교와 소록도 녹산국민학교는 자매결연을 맺도록 해서 TV, 학용품 등을 지원받기도 했다. 이렇게 한센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지만, 이들의 삶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는 “40년간 보수 한푼도 받지 않았고 돌아가신 분의 옷 중에서 멀쩡한 것만 골라 고쳐 입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면서 오스트리아에서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주택에서 빈곤층이 받는 최저 수준의 기본연금으로 살고 있다고 전했다.

 

마가렛 수녀는 현재 가벼운 치매증세로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마리안느 수녀는 매주 세차례씩 20km 정도 떨어진 양로원에 들려 소록도에서 지낸 추억을 나누며 살고 있다.

 

소록도 중앙공원에는 1972년 이들을 위해 한센인들이 세운 공적비가 있다.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수여한 훈장은 거절해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직접 소록도를 찾아와 전달했다. 한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모란장도 청와대 관계자가 소록도에 직접 와서 전달했다.

 

99년 호암상 사회복지상 수상도 당초에는 거절했다가 1억원의 상금으로 한센인들을 위해 사용하면 좋겠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받을 정도였다.

 

작은 상처는 큰 상처로 치유된다

작은 들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소록도에서 죽을 때까지 살겠다던 두 수녀는 2005년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조용히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2003년 대장암 수술을 받으면서 짐이 될까 싶어 홀연히 떠났던 것이다. 지난 4월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초청되어 11년 만에 소록도를 방문한 마리안느 수녀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소록도를 거쳐간 한센인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만남은 매일 감동이고 눈물바다라고 한다.

 

                                         고흥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받은 마리안느 수녀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가 살았던 사택 건물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근 고흥군은 이 두 수녀의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소록도성당은 사단법인 마리안느마가렛’(이사장 김연준 주임신부)를 만들어 함께 동참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추천부터 봉사학교 설립, 기념관 설립, 다큐 제작과 수녀 사택 및 이들이 지은 결핵병동 건물의 등록문화재 지정 등이다.

 

또 고흥군은 35000여만원의 기금을 만들어 두 수녀와 김정희 교무 등 세분에게 남은 여생동안 월 104만원씩 지원할 계획이다.

 

김정희 교무는 소록도병원 약사로 근무하며 월급을 털어 진학이 어려운 한센인 자녀의 학비를 지원한 것을 계기로 장학회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516일 고흥군은 이들에게 명예군민증을 수여했다. 그동안 소록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한 이들에게 지자체에서 최소한의 보답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두 수녀와 인연이 깊은 박병종 고흥군수는 마리안느 수녀를 소록도에 와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계속 설득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소록도와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이분들을 잘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김연준 신부도 작은 상처는 큰 상처를 통해 치유가 된다면서 이 두 수녀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치유되고 회복되길 소망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