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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사관, 식민사관, 주체사관 -조갑제

예인짱 2015. 11. 2. 17:58

 

 

 

 넓은 의미의 역사는 우주의 생성 이래 지속된 모든 변화를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의 역사는 자연을 제외한 우주의 변화 곧 인간의 발자취다. 일반적으로는 그 범위가 더 좁아서 역사시대는 문자가 발명된 이후를 가리킨다. 역사는 대충 지난 약 5천 년 동안 기록으로 남겨진 인간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는 선사시대라 하여 역사학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주로 인류학의 대상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역사라는 개념은 인간의 기록을 통해 인간의 과거를 재현하고 재구성하고 보완한 후 현실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일컫는다. 

 

 사관(史觀)은 역사학의 기본 틀이다. 사관은 과학으로 말하면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역사학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누는 기준이다. 이것은 시대와 더불어 변한다. 가장 획기적인 사관은 과학기술의 폭발적인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역사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뉴턴이 신의 숨결과 손길을 배제하고 자연 자체를 과학의 눈으로 관찰하고 과학의 손으로 실험하고 검증하여 수학의 언어로 기술하여 만유인력을 발견함으로써 우주현상을 깔끔하게 정리했듯이, 역사학자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역사에서 도덕과 종교를 배제하고 우선 엄밀하게 인간의 기록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여 객관적인 기록을 재구성한 후 역시 선입견을 배제하고 역사 자체의 법칙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증사관이다. 그 이전의 사관은 동서 막론하고 도덕과 종교의 틀 위에 선 관념사관이었다.

 

 실증주의는 역사학에 자연과학의 객관성을 도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도 자연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이 솔솔 피어나면서, 인간의 인지능력 자체가 주관성을 배제하고는 성립될 수 없다는 전제에다 자연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반론과 반증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과거 자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증주의 내지 역사주의에 대해, 현재의 시간과 인간의 인식을 떠나서는 역사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에 선 입장을 현재주의 내지 상대주의라 한다. 그 후 사관은 실증사관의 과학성과 현재주의 사관의 가치관을 모두 수용하되 그 중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E.H. 카(Carr)가 객관과 주관으로 대립되는 두 사관을 절충한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실증사관 못지않게 현대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물사관이다. 공교롭게 실증사관이나 유물사관이나 둘 다 독일에서 나왔다. 실증사관이라면 랑케(Ranke)의 냉혹한 얼굴이 떠오르고, 유물사관이라면 마르크스의 텁석부리 수염이 떠오른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정신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유심론에 대해 물질이 인간의 중심이라는 유물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관념사관과는 정반대인 것 같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방대한 자료와 엄격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유물사관은 관념사관의 변종이다. 머리 속에서 절대불변의 공식(관념)을 미리 정하여 놓고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꿰어 맞췄기 때문이다. 관념사관이 도덕과 종교를 기초로 한 것인데 비해 유물사관은 물질과 자본에 의해 인간의 역사가 결정된다는 전제만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인간의 역사는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물사관의 핵심이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점진적으로 변한 국가는 점점 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고도화된 반면, 후진적 봉건 국가는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악마의 심장에 천사의 음성을  가진 공산주의의 악몽을 거쳐 초기 자본주의로 변하고 있다.

 

 유물사관의 변종은 한국에선 민중사관, 북한에선 주체사관으로 나타났다. 역사의 주인공을 노동자농민 또는 인민 대신 민중을 내세운 것이 민중사관이고, 역사의 원동력을 물질 대신 인간을 내세운 것이 주체사관이다. 한국에선 유물사관을 바로 내세우면 빨갱이로 몰려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민중사관을 내세운 것이고, 북한에선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 집단의 괴뢰성을 철저히 감추고 중소(中蘇)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되 전 재산의 국유화라는 두 강대국의 공산주의 노선은 충실히 따름으로써 그 두 국가의 환심을 사서 공산정권을 영구화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한국에 대해 가당찮게 정통성을 강변하고 호도하기 위해 김일성의 신격화를 주체사관(김일성사관)이라고 내세운 것이다.

 

 한국의 민중사관(강만길)은 광주사태를 계기로 1980년대부터 역사학의 비주류에서 주류로 급격히 떠올랐다. 동시에 예술에선 민중예술(음악의 김민기, 문학의 조정래, 비평의 백낙청)이, 정치에선 민중민주주의(386 운동권)가, 경제에선 민주(민중)노조가 휴전선 이남의 밤을 거의 평정했다.

 

 민중사관은 신채호를 계승한 재야의 민족사관과 손잡고 실증사관과 식민사관을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사학계의 주류(이병도)가 여전히 실증사관을 악용한 식민사관의 계승자라는 주장이었다. 민족사관 입장에서 해방과 더불어 절로 씨가 말라 버린 친일파를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고,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무질서 대신 법치를 가져오고 가난 대신 풍요를 가져온 장군 출신의 정치를 일언지하 군사독재로 몰아붙여 농민이 애써 기른 양을 습격하는 들개의 난동으로  취급하고, 세계 100위권 밖에서 세계 5위 수준의 제조업 신화를 일구는 데 가장 앞장서서 무수한 중소기업과 기러기 행진을 계속하면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고용을 수천만 개 창출한(농민이 인구의 60%에서 7%로 줄어들고 인구는 두  배로 늘었지만 그들이 대부분 취직함) 대기업을  농민이 애써 지어놓은 곡식을 아작내는 멧돼지 취급했다.

 

 민중사관은 또한 친일파와 지주를 숙청하고 노동자농민이 행복하게 사는 지상낙원을 건설했다는 김일성 공산독재에는 침묵하거나 비판하는 척 은근 두둔하고, 자유민주의 창이요 방패인 반공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대신 햇볕정책을 적극 주장하고 찬성하고 지지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역사의 범위를 해방까지 다루는 사이에 민중사관은 현대사를 독점 공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도 서점에 깔린 한국의 현대사 책 중에 민중사관의 입김을  벗어난 책은 거의 없다. 민중사관과 손잡은 민족사관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貶下)하고 자학(自虐)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78년 펴낸 <<한국사 25권>>에 대항하여 <한길사>가 역사의 범위를 1980년대까지 넓힌 1994년판 <<한국사 27권>>은 민중사관의 일대 개가였다.

 

 민중사관은 2002년에 한국사의 고지를 점령했다. 국사에서 근현대사를 따로 떼어내어 검인정 교과서를 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대학에서 운동권 중심으로 가르치던 현대사를 고등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대학의 강의실보다 휴게실이나 잔디밭에서 더 많이 배운 대로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가르치던 역사 교사들은 대환영했다. 전교조와는 상관없이 다수의 교사들이 양심껏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를 압도적 다수로 다투어 채택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나 한나라당조차 민중사관의 세례를 받은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래서 그들의 수정지시라고 해 봐야 오십보 백보다. 마땅히 검인정을 취소하고 전면적으로 새로 써야 한다. 최소한 통일되기 전까지는 국정으로 되돌려야 한다.

 

 해방 후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실증사관과 식민사관에서 굳이 말하자면 민족사관도 아니고 민중사관도 아닌 국민사관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자부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집중했다. 역사의 과학화라는 입장에서 그들이 실증사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동생산 공동분배가 아니라 공동생산에 90% 공출, 10% 분배로 조선의 봉건사회나 일제시대보다 더한 착취에 시달리는 김일성의 공산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법 앞에 국민 모두가 평등한 자유민주를 지키기 위해 자유민주시민으로서의 국민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다. 그러나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들에게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일제에 빌붙던 식민사관의 노예였다가 시대가 바뀌자 군사독재에 꼬리치는 기회주의자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은 해방되자마자 증발한 식민사관 유령들과 싸우고 있다. 

 

 국민을 민중과 지배계층으로 대립시킨 것부터 가치관이 뚜렷이 드러나지만, 역사 기록이 대부분 지배층 중심으로 써졌다는 것을 감안하여 고조선에서 조선까지 민중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면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한국을 비교하여 과연 어느 쪽의 민중이 자유와 평등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한국의 근로자는  연봉이 평균 2만 불이나 되지만, 북한의 근로자는 그 1000분의 1인 20불밖에 안 된다. 북한은 말뿐 복지도 없다. 뇌물과 도둑질 아니면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 한국의 1500만 일반 근로자가 북한의 김정일과 그 측근을 빼고는 북한의 300만 공산당원보다 훨씬 잘 산다. 더군다나 한국의 근로자는 해외여행도 자유롭고 심심찮게 해외에 자식을 유학도 보낸다. 외교관도 반드시 국내에 자식을 최소한 한 명 인질로 남겨야 하는 북한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런 자유와 평등과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준 위정자들이 누군가. 김대중인가 노무현인가, 김영삼인가. 그들도 물론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민중사관의 눈이 제대로 뜨여 있다면, 일부 과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대 정통우파 위정자들을 친일파나 군사독재라고 손톱의 가시나 발톱의 때 취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민중의 해방자로 우러러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식민사관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지만, 일본제국주의에 아첨하던 식민사관과 민중의 호루라기와 민족의 깃발로 김일성공산왕조에 대해 침묵하고 그것을 은근 동경하는 민중사관이 무엇이 다른가. 
        (2008.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