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진주대첩

예인짱 2013. 6. 20. 08:04

임난 때 1차 싸움에서 2만의 왜군을 무찔러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잘 지켜낸 위대한 싸움, 임난 3대 대첩의 하나(행주산성싸움, 한산도대첨과 더불어)러서 김시민이라는 위대한 장수를 잃기도 합니다.

2차 싸움에서 1차의 대패를 설욕하기 위하여 왜군은 10배도 넘는 10만 군사로 성을 애워싸서 몇날 며칠 간의 공방전 끝에 김천일, 최경희, 황진 등의 의병장과 관군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다가 결국은 성이 함락되어 장수들은 강물로 뛰어 들거나 전사하게 되고, 군관민 모두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 싸움. 이 전투로 왜군도 힘을 잃고 더 이상 크게 발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남강의 푸른 물 위에 흐르는

뜨거운 역사의 붉은 꽃잎

 

                                               천수교 쪽에서 본 진주성 전경

 

논개의 의기 느낄 수 있는 임진왜란의 격전지

 

덕유산 육십령 쪽에서 흘러온 물과 지리산 천왕봉 쪽의 물줄기가 합쳐진 남강(南江)의 푸른 물결이 허리를 감싸 안고 흐르는 진주성. 이곳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으로 유명한 사적지일 뿐만 아니라 풍광 또한 빼어나게 아늑하고 온화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성의 남쪽 층암절벽에 우뚝 선 촉석루의 물그림자 속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한 논개(論介)의 의기를 느낄 수 있고, 강안(江岸)을 따라 길게 뻗친 대숲과 백사장에서는 이곳 사람들의 청정한 기상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남해의 다도해로부터 봄이 올라와 성벽에 꽃이 피는 날 푸른 남강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노래한 시  <논개>가 떠오른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주성은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터였다고 하지만 처음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3년(1377) 가을에 성을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진주성은 고려말에 왜구방어의 보루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조선 선조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진주성의 남포정사 문루

 

 

옛 이름이 「촉석성」인 진주성은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남쪽으로 남강이 흐르는데, 성의 총 둘레가 1,321m 높이가 약 5m에 이른다. 현재의 정문 격인 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웅장한 자태의 촉석루가 왼쪽 옆으로 비껴서 남강을 굽어보고 있고, 성 안에는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義妓祠),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김시민장군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나란히 서있는 정충단(旌忠壇),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창렬사(彰烈祠), 호국사(護國寺),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건너편 남강 가에서 바라본 촉석루 전경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 ‘촉석루’

남강 가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아있는 촉석루는 남원 광한루(廣寒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데,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남강의 경치도 운치가 있지만 진주성의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촉석루의 모습은 강과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고려 고종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이 처럼 장원루라는 이름이 쓰였던 것은 전시에는 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지만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시험장으로 쓰였던 까닭이다.

현재의 촉석루는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된 것을 1959년에 원형대로 복원한 것으로 누대의 오른쪽에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義妓祠)가 있고, 촉석루 아래 작은 문을 통해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강가에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몸을 던졌다는 의암(義岩)이 있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출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최경희를 따라 진주성으로 왔다고 한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몸을 던졌다는 의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이 함락된 뒤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 끌려나온 논개는 왜장 에야무라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촉석루 아래의 바위로 유인한 뒤 그를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훗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논개를 칭송하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는 자기의 한 목숨을 던져 온 성민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의로운 기개를 어찌 장하다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촉석루의 뒤쪽 높지막한 언덕엔 비문과 부조로 둘러싸인 커다란 제단이 하나 있다.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晉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이라는 긴 이름의 이 제단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제1차 진주성 싸움의 승전과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7만 여명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순의단 삼면에 새겨진 진주성 싸움의 부조(부분)

 

1592년(임진년) 음력 10월5일 진주성을 쳐들어온 왜군은 2만 여명이나 되었고 조총으로 무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판관 성수경, 곤야군수 이광악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불과 3,800여 명의 적은 군사로 6일간의 전투 끝에 왜적을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진주성 대첩이다.

그러나 이때 패한 왜군은 이듬해인 1593년(계사년) 음력 6월19일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특명에 의해 최정예의 10만 여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희,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 등 3장사를 비롯한 의병, 관군 6,500여 명과 피난민 6만여 명은 압도적인 적세와 맞서 두려움 없이 싸웠으나 11일간의 전투 끝에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김시민 장군의 공적비와 정춘단비

 

이 순의단 아래쪽 광장에는 <김시민 장군 순의비>와 3장사를 비롯한 1․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영령들을 제사하기 위해서 세운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있고, 북문 쪽에는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서장대 옆에 있는 사당 창렬사(彰烈祠)에는 김시민 장군과 3장사 등 3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사방으로 트인 진주성의 전망과 역사적 유물들

진주성은 성안에서 성벽을 따라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데,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서 진주시내를 두루두루 살펴볼 수 있다. 이 성안에는 군사시설로 북장대(北將臺)와 북문, 서장대(西將臺)와 포루 등이 복원되어 있고, 조선 광해군10년(1618)에 세운 망미루(望美樓)가 전신인 관찰사 청사의 관문이었던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승병사찰 호국사(護國寺),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성의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북장대

 

이 가운데 북장대는 조선조 중엽의 건물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건물의 모범이 된 건물이며, 진주성의 가장 높은 벼랑에 푸른 남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서장대는 전망이 수려하고 주변의 산책로가 특히 아름답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탑의 고전미와 현대감각을 잘 조화시킨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각종 유물들과 고령가야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에서 출토된 보물 제637호 차륜식 토기를 비롯해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가야시대의 유물 유적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고령가야시대의 차륜식 토기(보물 제537호)

 

그러나 진주성은 성 밖의 남쪽이 남강과 이어진 절벽이어서 밖에서 성 전체를 돌아볼 수는 없다. 그 대신 진주교를 건너 반대편의 남강 가에서 바라보면 서장대에서 동문까지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일정이 맞아떨어지면 천수교 아래 백사장에서 열리는 진주의 유명한 소싸움을 구경할 수도 있다.

이밖에 진주시에서 가볼 만한 유적지로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성과 마주고 있는 망진산(望晉山)의 금선암, 이반성면의 용암사터, 금산면 갈천리의 청곡사 등이 있고, 가족나들이 장소로는 시의 들머리인 가좌동산의 석류공원, 각종 위락시설이 갖춰져 있는 남강다목적댐의 진양호 유원지 등이 있다. 

 

  

 진주성 서남 높은 언덕에 세워 적병들을 감시하거나 싸움을 독려하던 '서장대'의 날아갈 듯한 모습. 아래 강변에서 올려다본 전경. 봄을 알리는 버드나무의 싹들이 정겨웁다.

 

 

 서장대의 모습

 임난 때 사용되었던 무기들 중 하나

 진주성은 역사의 고비마다 이쪽 서무 경남의 중심에 서 있었다. 3.1 독립만세 운동 때도 예외는 아니다.

 성위에서 내려다 본 남강

 

 강변에서 올려다 보는 남강과 촉석루의 전경

 촉석루 : 평화시에는 이곳 관헌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비상시에는 전투의 심장부가 되는 곳이다. 돌이 많은 곳에 세워진 누각이라는 뜻으로 '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矗 : 우거질 촉, 우뚝설 촉)

 

 진주성 내에 있는 청계서원

 창렬사 안내판(김시민 장군,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의 장수들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

  진주성 내에 있는 국립 진주박물관

 

 

진주대첩 영웅(김시민 장군)

 

 

   김시민장군 충민사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과거급제 및 관직근무 동향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하면서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군기(軍器)시 판관(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그 활약상

장군이 진주판관에 부임한지 1년후인 1592년(선조25년) 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행에 임명된 장군은 병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장군은 모집된 수성군에게 맹훈련을 시켰음은 물론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치하였는데 염초 510근 제조 및 총통 170여자루를 제작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왜적은 바로 호남지역을 휩쓸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군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가 사랑암 부근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됨).

9월에는 진해에서 왜군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생포하여 의주 행재소에 보내 조정의 사기를 높여 주었으며(이로인해 경상우병사에 임명), 연이어 고성, 창원까지 진격하여 왜군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김시민 장군이 최고로 활약한 진주대첩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 제1차 진주성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되었다.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움에 있어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성밖에 있는 아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야간을 이용해 화살 등 무기를 몰래 반입하였다.
- 성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공격 및 교란작전, 횃불시위 등을 전
  개하여 아군의 사기진작 및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
-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비격진천뢰, 화약등 당시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 왜군에게 잡혀있다 탈출한 민간인들을 통해 적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 성민들로 하여금 돌·기와·집단 등을 가져와 투척하게 하는 등 민·관·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김시민 장군의 사망

김시민장군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인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중 죽은체 하고 숨어 있던 왜병의 저격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가 며칠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장군의 사망일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음력 10월 18일(임진잡록)과 12월 26일(족보)이 있다. (규명 필요)
그후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사 선조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상락군에 추록하였으며, 숙종때에는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였다.

 

 

 

 

 

 

 

진주성. 촉석루. 의암

'행주대첩'과 '한산대첩',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한다.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전라감사 권율의 지휘에 의해 승리를 거둔 '행주대첩'과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거북선과 수군에 의해 승리를 거둔 '한산도대첩', 그리고 이곳 진주성에서 치러진 싸움을 가리켜 '진주대첩'이라 한다. 진주성싸움은 1592년(선조25년)과 1593년에 있었던 싸움으로 김시민 장군의 지휘 하에 승리를 거둔 1차 전투가 '진주대첩'이며 진주성에는 1, 2차 전투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후 왜는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영.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공략한다. 1592년 10월 왜장 나가오카는 3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왔고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이 3,800여명의 관, 군, 민을 지휘하여 7일간 전투를 벌여 우리가 이겨냈다.

다음해 1593년 6월.. 전쟁이 소강상태로 빠진 상태에서 1차 진주성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0만 여명을 이끌고 왜가 다시 쳐들어왔고 우리는 3,500여명의 군사와 6만 여명의 주민이 사투를 벌였으나 11일간의 전투 끝에 패하고 말았다. 2차 진주성전투는 조총과 귀갑차를 앞세워 총력을 벌였던 왜에 밀려 패하고 말았는데, 진주성을 초토화시키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2차 전투를 승리하게 된 왜군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열었고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물에 뛰어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주며 <진주성>에 갔더니 이것저것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길이 달랐다. 진주성에는 촉석루 외에도 논개 의암, 김시민 장군 동상, 북장대와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논개 사당 등이 있으며 공원처럼 꾸며놓아 시민들의 쉼터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곳도 촉석문과 공북문, 서문 등이 있어 가까운 곳으로 입장하면 된다.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토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왜구의 침범에 대비해 석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남쪽엔 남강이 서쪽은 청천이 북쪽은 못이 있고 사방으로는 절벽을 이루어 성곽으로서 좋은 조건을 가졌다. 성의 둘레는 1,320미터고 높이는 5~8미터이다.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와 촉석문, 북장대,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영남포정사문루 등이 있으며 1975년경에 성곽을 보수하였다.

촉석문과 촉석루 사이에는 진주성전투에 쓰였던 대포인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간략한 설명문도 함께 있다. 대포가 천자나 날아간다 하여 붙여진 천자총통보다 크기가 작은 순서대로 천. 지. 현. 황을 써서 이름이 정해진다고 한다.

강 가운데 돌이 오뚝 오뚝 솟아있다 하여 붙인 "촉석루"는 진주성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전쟁 발발 시에는 주장이 병졸을 지휘하던 장소로 쓰였으며 평소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로 이용됐다. 촉석루를 다른 이름으로 '남장대' 또는 '장월루'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 고종28년(1241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했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탔던 것을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담장이 촉석루에 바짝 붙어있어 답답함을 주지만 루에 올라 넓은 마루 위에서 남강을 내려다보면 시야가 탁 트인다. 나중에 진주성 답사를 마치고 나와 아이들과 함께 오리 배를 타고 남강에서 진주성을 올려다보면 다시 한번 멋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 사진을 열심히 찍어보기도 했다. 덤으로 "의암" 바위를 아주 가까이 볼 수 있어 절벽에 새겨진 많은 글들을 함께 구경할 수 있는데 대부분 논개의 충절을 기린 글들이라 한다.

"촉석루" 바로 앞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의암" 바위와 함께 "의암사적비"가 있다. 손가락이 미끄러질까 봐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과 함께 죽은 논개의 충절은 "의암" 옆에 서있는 "의암사적비"에도 잘 나타나있다. 충렬실록(경종2년 1722년)에 쓰여진 글을 해석한 것이 왼편에 세워져있는데 마지막 구절인 '유독 가파른 그 바위에 그녀 홀로 우뚝 서 있도다. 그녀가 그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었겠으며 바위인들 이 여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의롭단 소리를 듣겠는가? 이 남강가의 높다란 바위에는 만고의 꽃다운 마음이 서려 있도다'라는 글이 마음을 적신다.

"의암"은 높이와 너비가 약 3미터 정도가 되며 조금씩 움직여 촉석루 쪽 절벽에 들러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데 절벽에 와 닿으면 큰 재앙이 난다는 전설을 가져 위암(危岩)이라고 했다가 논개로 인해 의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촉석루로 올라가 왼편으로 가면 논개 영정이 그려진 "의기사"란 이름의 논개 사당이 있어 숙연함을 더한다.

"촉석루"를 나오면 <진주성> 이곳 저곳엔 볼거리가 가득하다. 임란시 의병을 모아 싸운 제말과 제홍록 장군의 충의를 새긴 "쌍충사적비"와 진주성에서 순절한 제장, 군졸들의 충의를 새긴 "촉석정충단비";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김시민전성각적비"; "김시민동상"; 1593년 계사년에 순국한 7만 민. 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한 "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승병의 양성소였던 "호국사"; 김시민 장군과 임란때 함께 순절한 분의 신위를 모신 "창열사"; 경상남도 감영의 정문이었던 "영남포정사문루"; 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인 "서장대"; 진주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진남루라는 편액을 걸고 있는 "북장대"; 김시민 목사가 적탄을 맞자 곤양 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신해 나무에 의지해 돌과 화살, 진천뢰를 쏘며 '북장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아주 커다란 느티나무인 "이광악나무" 등을 볼 수 있다.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지인 촉석루는 남강(南江)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아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진주성 안내도

 

촉석문 앞에 세워진 의기(義妓) 논개 시비(論介 詩碑)

 

촉석문(矗石門) 진주성 입구

 

성안에서 성밖쪽으로 본 촉석문(矗石門)

 

촉석루(矗石樓) 현판

 

촉석루(矗石樓) 누각에서 본 진주 남강(晋州 南江)

 

촉석루비(矗石樓碑)

 

입구에서 본 촉석루(矗石樓)

 

의랑 논개의 비(碑)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義妓(의기) 論介(논개)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며 논개의 영정을 모셔두었다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3호

 

논개가 임진왜란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하여 함께 투신 순절한 의암(義巖)

 

의암(義巖)에서 본 진주성벽과 촉석문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 戰功碑)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

 

임진대첩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1593년)에 순국하신 7만 민, 관, 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에 건립하였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호
임진왜란 때 전사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새긴 것으로

1792년(정조 16) 촉석루 옆에 쌍충각을 지어 비석을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관헌들에 의하여 비각이 헐리고

문산가도(文山街道)에 방치되었으나 1961년 지금의 위치에 비각을 새로 지어 비를 옮겼다.

  

호국종각(護國鐘閣) 종신 2.7m, 지름 1.7m

 

동쪽성벽에서 본 촉석문(矗石門)

 

조선시대 대형총통

 

진주성 안에서 본 공북문(拱北門)

 

공북문(拱北門) : 진주성의 정문(正門)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晋州城圖)에 나오는 진주성의 정문으로 2002년 복원하였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 將軍)동상 

 

 

 

안내판과 공북문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하였고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리며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굳게 닫혀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

청계서원(淸溪書院)은 정신열 공과 정천익 공을 배향한 서원으로 사적 제118호

 

담너머에서 찍은 청계서원(淸溪書院)

정신열 선생은 고려 때 병부상서로 거란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진양부원군 은열공 시호를 받았으며
정천익 선생은 문익점 선생의 장인으로 1364년 고려 공민왕 13년 이 땅에 목면종을 처음 심어 그 중 한알을 살려 번식 배양하고

씨아와 물레와 베틀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듯한 목면 베옷을 입게 한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청계서원(淸溪書院)의 옆모습 

 

북장대(北將臺)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조선중기에 건축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다락집형 건물로서 내성과 외성에 포진한 성의 병력을 지휘하던곳이다

 

진주성 비석군(碑石群)
진주시내에 흩어져 있던 비석(공덕비등)을 모아놓은 곳

 

용다리 흔적

 

슬픈 사랑이야기 용다리 전설은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그 중 둘째 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 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기 위해

용다리를 건너던중 도랑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 처럼 보이고

아씨를 그리워 하다 미쳐서 개울옆 고목 나무에 목을매 죽는다

 

그후로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용다리를 왔다 갔다하면 상사병이 씻은듯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안에 남아있다

 

국립진주박물관 안내석

 

국립진주박물관 전경

 

박물관내 진열대의 거북선 모형

 

진주시(晋州市) 남강(南江) 둔치에서 바라본 촉석루(矗石樓) 전경

 

남강에 반사되어 더 아름다운 진주대교(晋州大橋)와 진주시가지

 

남강(南江) 둔치의 아름다운 조형물

 
2008年 12月 16日 경남 진주 촉석루(晉州 矗石樓)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지인 촉석루는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여
남강(南江)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아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향시(鄕試:初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 되었다 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 (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것을 시민들의 힘을 모아 진주고적 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하였는데 건물은 팔작지붕에 다락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 에서 
채석하였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으며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 묵객 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義巖)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39년(영조 16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추모하는 사당인 의기사를 촉석루 옆에 세웠다
사진/글 : 나비 (글 : 안내판과 인터넷 참조)

 

진주라 천릿길
(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


 

진주라 천릿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 천릿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노래를 불러본다.




 

 

1.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을 말한다.

특히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 논개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① 제1차 진주싸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수천 죽제(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에서는 의병대장 곽재우의 응원이 적과 아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② 제2차 진주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반성·의령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의병장 고종후·이계련·민여운·강희열,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이끈 3,400명의 병력과 6∼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우리 군과 적군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2.진주의 유래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진주성

 

1)위치 : 경남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2)규모 : 내성의 둘레1.7km, 외성의 둘레 약 4km로 면적 17만 3,036㎡이다.

 

3)설명 :

 

경남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에 있는 성.
지정번호 사적 제118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경남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시대 조선시대
크기 면적 17만 3,036㎡
종류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촉석성()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였다고 하며,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내성의 둘레1.7km, 외성의 둘레 약 4km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때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使) 이수일()이 진()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뒤 병사 김태허()가 1607년 포루()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