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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유래와 역사

예인짱 2013. 6. 11. 15:54

 

 

대구의 유래와 역사

 

 

 

大邱의 옛이름은 多伐(다벌), 達伐(달벌), 達弗城(달불성), 達句伐(달구벌), 達句火(달구화). 大丘(대구)등으로 바
뀌었다. `불`과 `벌`은 우리말의 모음접변에 의한 것으로서 같은 말인데 평지, 평야, 촌락, 성읍을 뜻하는 말
이라 한다. `達(달)`의 뜻은 圓(원), 周(주)등 넓은 공간을 뜻하므로, 결국 達句火(달구화)와 大邱는 서로 같은
뜻이 된다.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757年(경덕왕 16年) 주, 군, 현 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
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달구벌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唐(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신라가 모든 제도 문물을 중국식으로 정비해 가는 변화의 한 산물
이다. 종래 여러 가지로 불리우던 벼슬 이름이나 지방 이름을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하였다.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아름답게 고치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이 있는데 달구벌이 大丘(대구)
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丘』자가 『邱』로 바뀐 것은 조선왕조 英正(영정)시대부터이다. 1750年(英祖 26) 『丘』자를 다른 자로 고
치자는 상소가 있었다. 『丘』자가 孔子(공자)의 이름자인 까닭에서였다. 영조는 이것을 신기를 좋아하는 경망
한 풍조의 소산이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대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로 생각된다. 이후 대구지역의 청
동기 사회는 철기가 유입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기원전1세기 무렵에는 소국(小國이라 불리는 초기 국가(初基國
家)가 형성되었다. 이 소국은 변한(弁韓) 12국 중의 하나였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대구지

역에 비 정할 만한 지명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종래에 대구지역이 변한 12국을 계승한 가야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탁순(卓淳)·탁기탄(啄己
呑)을 탁순 = 대구(大邱)·탁기탄 = 경산(慶山)에 비정하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묘제(墓制)의 형식이나 발굴된
관모류(冠帽類) 의 지역적인 범위와 특성을 밝힌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대구지역은 3세기 이후부터 신
라 문화권에 속했 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탁순국을 대구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은 불확실한 추측이라고 하
겠다.

 

대구 지역을 지칭하는 확실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신라 첨해이사금 15년
(261)의 달벌성 축조기사(築造記事)이다. 종래에 이 기사는 <<삼국사기>> 상고기사(上古記事)의 신빙성여부
와 관련하여 전설적이거나 허구적인 사실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3세기 경에 벌써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이 대
구· 경산을 거쳐 의성·상주 일대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있는 사실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때의 달벌성은 대구지역을 지칭하는 최초의 확실한 지명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하 다. 이후 그 시기를 정확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대구지역은 달구벌로 불려졌다. 신라가
통일한 이후 인 신문왕대에 수도를 경주에서 대구지역인 달구벌로 옮기려고 했던 사실에 대한 기록은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대구지역이 달구벌로 지칭된 것은 이기록에서 처음으로 찾을 수 있으나, 실제적
으로 앞의 기사에 나오는 달벌성이라는 지명에서 그 이전부터 지칭되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
다. 달구벌이란 당시 이 지역을 가리키는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의 음을 이용하여 표기한 것이다.


 

대구의 역사

 

대구 사회의 발전 상황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무덤유적을 통해 볼 때, 지석묘축조시대·석관묘축조시대·석곽묘
축조시대·석실분축조시대를 거치면서 통합운동이 일어나 하나의 소국(小國 : 城邑國家)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소국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변진 24국 가운데 하나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며, 사로국이 성장
해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거기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261년(점해이사금 15)에 달벌성을 쌓
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보면,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되어 있으
며, 늦어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무렵까지는 신라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군현 체제 하의 대구는 위화군(?火郡)과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나누어져 통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위화군이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大丘縣)으로 개명되었다. 신라시대에 대구가 정치적 요지
로 기능했던 사실은, 신라 5악 가운데 부악(父嶽 : 八公山)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나, 689년(신문왕 9)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했던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대구 지역은 후삼국의 쟁패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
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 정치의 중심무
대가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신라시대와는 달리 그 비중이 점차 낮아져갔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壽城郡)·대구현·해안현(解顔縣)으로 나누어져, 수성군이 대구현을 영속하고 있
었고,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의 영현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1018년(현종 9)의 전국적인 군현 개편과정에서
수성군과 해안현은 동경(東京)의 속군·속현이 되었고,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의 14속현의 하나로 편입되었
다. 그 뒤 약 1세기가 지난 1143년(인종 21)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되어 점차 그 지위를 다시 인정받게 되
었다. 12세기에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밀양·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몽고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符仁寺)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
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몽고의 제5차 침입 때는 대구지역 주민들이 공산성(公山城)에 입보(入保)해 끝까지
저항하는 항몽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낙동강·금호강으로 바다와 연결된
대구도 두세 차례의 약탈 피해를 입었다.

 

조선 건국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가구수가 증가하고 점차 거읍(巨邑)으
로 성장하게 되었다. 1394년(태조 3)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게 되었고, 1419년(세종 1)대구군으
로 승격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마침내 도호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는 이 곳 출신 사림이
주축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
남지방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구부는 해안현·하양현(河陽縣)·경산현(慶山縣)·수성현·화원현(花園縣)·하빈현(河濱
縣)을 포괄하는 거읍이 되었다.

 

수세기 동안 경상도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의 중심지 위치를 누려왔던 대구는 1895년에 시행된 지방관제의 개
혁에 따라 변화를 맞게 되었다. 경상도가 4부(대구부·안동부·진주부·동래부)로 분할되자, 대구지역도 대구군으
로 개편되어 부청 소재지가 되었고, 대구부의 관할구역도 23군으로 축소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으로 시가지 일대를 포괄해 대구부로 독립하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다. 1981년 달성군의 월배
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해 직할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에는 달서구가 설치되는 등 많은 행정구역이 변동되거나 조정되었다. 1995년 1월 1일 광역시로 개칭
되고, 3월 1일에는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하면서 시역이 크게 늘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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