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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이야기

예인짱 2013. 6. 11. 15:01

대구읍성 이야기

 

지금 우리들은 대구 도심에 들어가는 것을 시내 간다.’고 한다. 50년 전에는 성내 간다.’고 했었다. 이 말은 결국 대구에도 성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대구성의 이모저모를 한 번 살펴보자.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면서 나라의 중심이 경상도에서 중부지방으로 옮겨갔다. 여기다 대구는 후삼국 쟁패기 때 고려의 편이 아니라 후백제 견훤을 지원한 징후가 보인다. 이런 연유로 대구는 고려가 통일한 이후 조선 초까지 교통상이든 군사상이든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 하고 한산한 촌락에 머물고 있었다.

이러던 대구가 교류의 범위가 넓어지고 사회가 다양화 되는 변화를 맞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상도 중심에 있으면서 낙동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변화의 원천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조선 선조 23(1590)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일본의 조짐이 심상찮아 전국적으로 요충지에 읍성을 쌓기로 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때 성주, 청도, 영천, 경산, 안동, 상주, 부산, 동래, 진주, 삼가 등의 읍성과 같이 축성되는데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선산, 군위, 인동의 장정과 대구 부민들이 동원되어서 쌓았다.

2년 뒤인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421일 왜장 고니시 유까나가(소서행장)는 대구 읍성을 함락시키고 성을 파괴해 버렸다. 7년 간 긴 전쟁을 겪으면서 군사적으로 대구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은 선조 34(1601) 대구에다 경상감영을 설치했다. 이때부터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으로 부상하지만 성이 없는 허술한 상태였다.

 

영조 때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한 민응수가 왕의 재가를 얻어서 영조 12(1736) 4월에 석성공사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돌을 침산(오봉산)에서 끌어다 14달 만에 완성하고 그해 11월에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읍성은 둘레가 2700m, 높이 5m로 남쪽에는 영남제일관(남문, 약전골목 구 대남약국자리), 동쪽에는 진동문(동성로 구 제일은행자리), 서쪽은 달서문(서성로 구 조흥은행 자리), 북쪽은 공북문(북성로 구 경북인쇄소 북쪽) 4대문을 두고 동남쪽인 동성로 구 제일극장 골목길과 서성로 서문로 교회 옆에 소문을 두었다.

 

몇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별 탈 없이 잘 지내던 대구읍성이 수난을 당한다. 190611월 대구군수 겸 경상도관찰사 서리로 부임한 야마모토가 대구에 살고 있던 일본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황제의 윤허도 없이 성을 허물어 버렸다. 야마모토의 원래 이름은 박중양이지만 러일전쟁 후 스스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꿨으므로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을 이름 야마모토로 불러주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하기에 야마모토라 썼다.

 

몇 수 앞을 내다봤던 대료적 친일파, 야마모토는 성을 헐어낸 자리를 도로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이다.

 

 

      < 대구 음성의 남문-영남제일관> 이 사진을 보면 지금 망우공원에 지어놓은 영남제일관이 원래의 모습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대구 읍성의 서문>

 

 

                                         <대구 감영의 정문- 포정문> 지금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화원 유원지>-청동기 시대의 성읍 터

 

                             <수성못>

                                      <수성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