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가고 싶은 곳

주흘산

예인짱 2009. 9. 23. 08:17
        [명산 명품 산행로] 주흘산
 
따스한 여인 ‘문경 미녀’의 속살 속으로
1관문~여궁폭포~주봉~영봉~부봉~5봉~2관문~1관문 16.5km

 ‘여자’는 부끄럼을 탔다. 몹시 비가 내렸고 여자는 구름 속에 숨었다. 산꾼에게 비가 온다는 건 방전된 자동차처럼 모든 게 멈추는 것. 멍하니 창밖의 빗소리에 시선을 두고 어느 산쟁이의 엉뚱한 얘기를 되새겼다.

“문경에 기막힌 여자가 있어. 몸매가 끝내 주는데 그 여자는 산꾼들하고만 살을 섞는대. 궁금하지 않나? 들어 봐. 옛날 문경 땅에 멋진 산이 솟았어. 자기가 난 땅이 한양이 될 줄 알았는데 더 예쁜 북한산이 한양을 차지한 거야. 그래서 문경 미녀는 토라져서 한양을 등진 채 돌아앉았다는 얘기야. 어때 산꾼이라면 타 봐야 되지 않겠어?”

코웃음으로 넘길 법한 얘기를 따라 문경까지 온 건 마성에서 본 산세 때문이었다. 하늘의 성채처럼 화려하게 솟구친 산마루는 눈을 떼기 힘들었다. 첫인상은 뭐랄까. 여느 육산들은 아주 우습게 보는 도도한 바위산 같았다. 마성에서 본 산세는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풀고 다리를 길게 뻗어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내의 노골적인 의중을 읽었는지 문경 미녀는 빗속에 몸을 감추었다.


▲ 1. 산행 기점인 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도립공원에는 박물관과 드라마세트장 등 볼거리가 많다. 2. 대궐터 약수. 사계절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3. 곡충골의 시원한 계류. 작은 계곡이지만 더위를 식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토라져서 남쪽으로 돌아앉은 산

미안하지만 비 맞는 산을 창 밖에 세워두었다. 쉴 새 없이 비는 곤두박질쳤다. 콘크리트 바닥은 비를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산은 달라 묵묵히 서서 흠뻑 받아들였다. ‘하늘에서 쫓겨난 것들, 또 어디서 받아주겠느냐’며 제 몸을 다 내어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산의 결에서 황홀한 구름이 피어올랐다. 괴로움을 안으로 오래도록 삼키면 이르는 경지인 것을. 스스로 피어난 산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간 산이 되돌아온 건 폭우가 그친 아침이었다. 쨍 하진 않지만 여린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췄다. 한 무리의 등산인과 함께 갔다. 방배 우정산악회 최진무(70) 회장과 김기영(60) 산행대장, 정재순(57) 회원, 문경 산들모임 이상만(52) 회장이다. 최 회장이 만들어 11년째 운영하고 있는 서울 방배 우정산악회는 안내산악회다. 안내산악회라 하면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이도 있지만 우정산악회는 나름 고집스런 산악회로 400회가 넘는 정기산행 동안 같은 산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개척산악회다.

반듯하게 정리된 1관문 잔디밭을 버리고 조금 어둑한 기운이 감도는 곡충골로 들었다. 어제 내린 비로 물살이 싱싱하다. 산을 박차고 흐르는 힘찬 소리와 투명한 물보라가 골을 가득 메워 깊숙이 들수록 더위가 멀어졌다. 오를수록 물소리는 커졌다. 오르막에 올라서니 작은 소가 있고 바위 협곡에서 하얀 비룡이 거칠게 꿈틀거린다. 바위틈을 타고 물줄기가 콸콸 쏟아진다. 그 울림이 골을 다 채우고 미세한 물보라들이 파도를 일으키며 얼굴에 와 닿는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진부한 전설이 있는 여궁(女宮)폭포다. 이름의 유래는……. 직접 보면 안다.

▲ (위) 주봉에서 영봉으로 이어진 능선길. 육산의 부드러운 흙길이라 걸음이 편하다. (아래) 주봉에서 본 문경 시가지. 주흘산은 너른 품과 위용을 갖춘 문경의 진산이다.

계곡에서 멀어지자 밀린 숙제처럼 가파른 길이 쌓여 있다. 지난 비로 진흙탕이라 디딤이 조심스럽지만 걸음걸음이 쌓여 1,000m가 넘는 산도 금방 오를 수 있음을 안다.

숨이 넘어갈 듯 차오르는 과정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산 밖에서도 이 헐떡이는 숨결이, 헐떡이게 만드는 깔딱고개가 한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심장이 펄떡거리고 다리는 무거워지고 몸은 자꾸 ‘멈추자, 여기 서자’고 하는데 마음이 허락하지 않을 때, 마음이 몸을 이끌어 비탈을 확 쳐 오를 때의 고통스런 감각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온 힘을 쥐어짜는 그 순간의 고통스러운 짜릿함이 좋다면, 도시스러운 것들에 환멸이 났거나 산에 중독되었거나를 의심해 봐야 한다.

등산로에 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했더니, 대궐터 약수가 철철 넘친다. 대궐터는 이름이 무색하게 좁으나 고려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사찰 이름도 혜국사(惠國寺)다. 약수터에는 ‘주흘산 100번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랴’라는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는데 문경의 초등학교 교장인 서종섭씨가 10년 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주봉 꼭대기는 나무가 많지만 남쪽으로 뚫려 있어 문경시내가 훤하다. 시내가 산의 품에 안긴 게 한눈에 드는 전형적인 지역의 진산이다. 산세 또한 시내가 있는 남쪽으로는 경사가 순하지만 북쪽으로는 무척 가팔라 ‘토라져서 남쪽으로 돌아앉은 산’이란 얘기가 맞아떨어진다. 오후로 접어들수록 구름이 짙어졌다. 걸음을 서둘러 북으로 향했다. 주봉과 영봉을 잇는 능선은 오르내림이 적은 흙길에 조망도 없어 자연스레 걸음이 빨라졌다.

▲ 곡충골 오름길의 다리. 곡충골은 작지만 등산로가 계곡 바로 곁으로 나 있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영봉 꼭대기는 나무가 빽빽하고 좁아 터져 생판 모르는 사람도 몇 명만 모이면 서로 대화를 나누게 하는 친화력이 있다. 영봉은 주흘산의 최고봉이며 신령 영(靈)자를 쓰는 범상찮은 봉우리다. 최고봉다운 조망은 없고 표지석이 전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는 설이 있다.

주흘산은 이름이 예쁘고 특이하다. ‘산 우뚝 솟을 흘(屹)’자와 주인 주(主)자를 곁들여 우뚝 솟은 주인이란 뜻이지만 주변을 보면 월악산·조령산·대미산·황장산 등 1,000m가 넘는 큰 산들이 줄을 섰다. 그럼에도 ‘주흘’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문경의 진산이며 멀리서 본 산의 자태가 워낙 빼어났기 때문이다.

주흘산은 주봉(主峰)과 영봉(靈峰·1,106m), 부봉(釜峰·921m)으로 이뤄져 있는데 동행한 이상만 회장의 문경산들모임산악회에서 모두 표지석을 세웠다. 문경산들모임은 1995년부터 회원들의 회비를 털어 매년 문경의 산에 표지석을 세웠다. 이곳 영봉은 누군가 고의로 표지석을 뽑아 버리는 바람에 2003년 이틀에 걸쳐 회원들의 땀으로 다시 올렸다고 한다.

‘부봉 1.3km’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부터 대간 길이다. 대간이라 해서 특별히 더 웅장한 풍경 같은 것은 없고 더 가파른 오름이라 힘들다. 부봉으로 향하는 길, 암릉이 잦다. 줄지어 기다리는 암봉을 맞기 위해 스틱을 접어 배낭에 꽂았다. 손발로 바위와 흙의 틈을 야금야금 뜯어가며 올랐다. 야윈 무덤과 표지석이 있는 부봉 정상에 서자 비가 온다. 마침 무더웠는데 잘됐다.
주흘산행의 백미는 역시 부봉 암릉 구간

▲ 여궁폭포. 수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m 정도 거리에서 폭포를 느낄 수 있다.
주봉에서 대간으로 이어진 능선은 육산이라 산만하게 걸었지만 부봉부터는 산에 집중했다. 밑에서 보면 험해 보이는 바윗길도 고정 로프가 있어 막상 붙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부처를 닮았다는 미륵바위는 불심이 없어서인지 봐도 부처를 닮았는지 모르겠고, 멀리 사자바위는 잠깐 들여다보고 있으니 사자가 웅크리고 앉은 옆모습의 윤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수석들이 일렬로 줄지어 서서 등산인을 맞는다.

인수봉 참기름바위 비슷한 곳을 로프를 잡고 영차 하고 오르자 탁 트인 3봉 정상이다. 정상의 모양새도 인수봉을 축소해둔 것처럼 닮아 있다. 부봉의 6개 연봉 중 가장 탁월한 조망대로 월악산과 마패봉, 조령산, 백화산 등 얼굴을 터 둔 산들이 아는 척을 한다. 비가 오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좋은 쉼터다. 배낭을 풀고 퍼질러 누워본다. 여인의 속살처럼 따뜻하다. 낮 동안 데워진 바위의 온기가 긴장한 근육을 위로한다. 빗방울이 산에 와 닿자 바위에서 묘한 냄새가 난다. 여인의 부드러운 살냄새인 양 바위 속으로 몸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 바위의 온기가 인간적이다.
 
발에 착착 감겨오는 바위를 따라 5봉에 서니 사자바위가 있다. 가까이에서 봐도 영락없는 사자 옆모습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문경새재를 지나는 나그네들을 보고 있었을까. 평온한 사자의 거대한 무게감과 깊이 있는 시선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6봉 직전의 갈림길에서 2관문 쪽으로 내려섰다. 조곡관에 닿자 7시가 넘었다. 문경새재 숲길에 비가 내린다. 돌 속에 두고 온 여인을 떠올리자 어디선가 야릇한 밤꽃 향기가 난다.

1관문~여궁폭포~영봉~부봉~1관문, 왜 명품 등산로인가?
즐거운 장거리 산행… 부봉 암릉 구간이 산행의 백미


“주흘산을 제대로 보려면 여궁폭포로 올라 주봉, 영봉 찍고 부봉에서 6봉까지 바위를 타야 다 봤다고 할 수 있지요.”

문경 산들모임산악회 이상만 회장은 주흘산이 집이고 고향이다. 이곳 토박이로 51년을 여기에서 살았다. 이곳의 정상 표지석도 모두 그의 산악회에서 회비를 모아 세운 것들이다. 더불어 산 입구에서 식당까지 하고 있으니 그에게 주흘산은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그는 베스트 코스로 단번에 주봉~영봉~부봉 코스를 꼽는다. 코스가 길어 시간이 걸려 그렇지 가장 대표적인 길이라고 한다.

“여궁폭포는 수량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입니다. 지금처럼 비 온 뒤에는 정말 시원해요. 주봉은 문경시내가 보여서 좋고요. 영봉은 영험하다 해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어요. 부봉에서 6봉까지는 바위가 널찍한 게 전망이 좋지요.”

그 중에서도 부봉 암릉길이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으며 여섯 봉우리 중에서도 3봉이 가장 탁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산행 코스가 길어진 것도 부봉을 빼놓고 주흘산에 다녀왔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흘산을 제대로 맛보려면 저녁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산행을 각오해야 한다.

산행 길잡이

영봉 정상과 부봉 가는 길, ‘알바’ 주의
삼복더위에는 조곡골로 내려가는 게 나아


명산의 고장 문경에서도 주흘산은 산세가 수려하기로 손꼽힌다. 주봉과 영봉은 육산에 가까우며 부봉과 다섯 봉우리는 암봉이다. 그래서 주봉~영봉~부봉을 잇는 코스는 육산과 바위산의 매력을 모두 맛볼 수 있다.

차량은 주차장에서 통제되므로 산행의 엄밀한 출발지는 주차장이다. 1관문~주봉~영봉~부봉~5봉~2관문~1관문을 도는 코스는 16.5km로 당일산행 치고 길다. 걸음걸이나 휴식시간에 따라 최소 7시간에서 10시간 정도 걸리므로 노약자나 등산 초보자는 주봉에서 조곡골로 바로 하산하는 게 좋다. 들머리인 조령천의 해발고도가 200m대이며 주능선이 1,000m대이기에 800m 이상 걸어서 고도를 높여야 한다. 한여름 산행하기에 쉽지 않은 산이다. 다만 대궐약수가 8부 능선에 있어 산행 중 물을 채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저녁까지 산행이 이어질 것을 대비해 헤드랜턴과 비상식량은 필수로 챙겨야 한다.

주흘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깊어 이따금 사고가 발생하며 지난 6월 29일에도 조난사고로 등산객이 사망한 바 있다. 지도와 나침반 정도는 기본으로 챙겨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고 다니는 습관이 필요하다. 2관문에 닿았다 해서 산행이 끝난 것이 아니다. 편한 임도지만 1관문까지 1시간 정도 걸리므로 체력과 시간을 안배해 산행을 조절해야 한다.

부봉에서 5봉까지 이어진 암릉길은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위험하진 않지만 자칫 실수했다간 추락할 수 있는 구간이 있으므로 초보자는 베테랑과 동행해야 한다.

전반적인 길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주의를 요하는 곳이 있다. 영봉 정상에서 북쪽 부봉으로 가는 길이 나무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아 길이 잘 난 서쪽 조곡골길로 잘못 내려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봉에서 부봉 가는 능선길에서는 암릉을 우회하는 듯한 사면길이 있는데, 길이 뚜렷해 이리로 드는 이들이 많다. 이 길은 우회로가 아니고 하늘재로 이어진 길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 산길이 끝나는 제2관 조곡관.

>>교통

승용차로 갈 경우 중부내륙고속국도 문경나들목에서 10분이면 산 입구에 닿는다. 문경행 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1시간에 1번 정도(06:30~20:00) 운행하며 매시 10분 혹은 20분에 출발한다. 2시간 소요에 1만900원. 문경 시외버스터미널(054-571-0343)에서 도립공원행 버스는 1일 16회(07:20~18:50) 운행한다. 주차료는 1일 2,000원이며 버스 4,000원, 경차 1,000원.

>>숙식(지역번호 054)

▲ 새재산장의 한방 보양 백숙
새재산장설악가든(572-1919)의 한방보양백숙이 좋다. 십전대보탕과 오미자로 우려내 국물이 담백하고 시원하며 산행 후 원기를 채워준다. 사장인 이상만씨는 문경산들모임산악회 회장으로 10년 전부터 문경의 산꼭대기마다 표지석을 세우고 있다. 민박을 겸하고 있다.

새재 입구에는 문경관광호텔(571-8001), 문경새재유스호스텔(571-5533), 깊은산속화로구이(571-7978), 새재할매집식당(571-5600), 탄광촌연탄불석쇠구이(572-0154) 등 식당과 숙소가 즐비하다.

>>명소

문경새재

옛날 나그네들이 걸었던 영남에서 한양으로 이어진 중요한 고개다. 1, 2, 3관문과 주변 성벽이 복원돼 옛적 영남대로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영남 1관문인 주흘관은 조선 숙종 34년(1708년)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 2관문인 조곡관은 선조 27년(1594년)에 건립되었고 주흘관을 세울 때 중건했다. 그 후 불이 나서 홍예문만 남았으나 1975년에 복원됐다.

3관문은 새재 정상에 있는 조령관문으로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다. 이곳 1관문 뒤에 KBS 드라마 촬영 이후  관광지로 거듭난 태조 왕건 촬영세트장이 색다른 볼거리다.

문경옛길박물관

리모델링해 올해 4월 재개장했다. 박물관은 조선시대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를 비롯해 서기 156년에 개척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꼽히는 하늘재, 백미인 토끼비리 등 문경지역에 있는 옛길과 조선의 10대 도로, 고지도, 여행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상선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