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감동받은 글

`삶이 기적이었던` 장영희 교수님.Rest in peace...

예인짱 2009. 5. 12. 14:51

故 장영희 교수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heroine이 아니었나싶다.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리고, 아픈지 . . . .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는 그 소중한 가르침..... 내내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이제 아픔이 없는 그 곳에서 편히 쉬세요.... sarah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난 이 책이 오롯이 기적의 책이 됐으면 한다"('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프롤로그 중에서)

소아마비 장애와 3차례의 암 투병을 견뎌내면서도 강단 복귀와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서강대학교 영미어문·영어문화학부
장영희 교수가 9일 낮 12시 50분 타계했다. 향년 57세.

고인이 꽃 피운 삶은 고통과 시련의 바닥을 뚫고 피어났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됐지만 거뜬히 장애를 딛고 서강대 영문과, 미국 뉴욕주립대의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영미문학자이자 수필가로 활약했다.

장애를 이겨낸 고인에게 다시 찾아온 시련은 암. 2001년에 유방암 선고를 받은 뒤 갖은 치료 끝에 병을 이겨냈지만 2004년 척추에서 암이 재발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살을 에는 고통도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희망으로 뿌리를 박고 서있는 이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대는 대신 그는 '뼈'를 추슬렀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본문 중에서)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는다"는 다짐대로 그는 오뚝이처럼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봄 강단에 다시 섰다. 그리고 투병기간 내내 고통과 함께 더욱 농익은 희망의 메시지를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의 책을 통해 풀어냈다.

고인의 말대로 그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이었는지 모른다. 그 기적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고인의 다섯 번째 수필집이자 유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이 출간됐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남긴 책의 말미에도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또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않은 짧지도 않은 평균수명은 채우고 가리라"고 적으며 삶에 대한 집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키워냈던 장영희 교수. 하루하루가 얼마나 '기적' 같은 것인지를, 우리네 삶을 얼마나 귀하게 보듬어야 하는 지를 많은 이들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어머니 이길자 씨와 오빠 장병우 전 LG 오티스 대표, 언니 영자 씨 등 4자매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오는 13일 서강대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뒤 선친이 묻혀 있는 천안의 공원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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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영남, 고(故) 장영희 교수 회고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장영희 교수는 내가 본 사람 중 자기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내는, 꽉 찬 삶을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암 투병 중 사망한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미어문ㆍ영어문화학부)의 빈소를 다녀간 가수 조영남씨는 11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생전의 장영희 교수를 떠올리며 한없는 애도의 뜻을 표했다.

조씨와 장 교수의 인연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신문에 실린 장 교수의 글을 즐겨읽던 조씨가 모 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장 교수를 초청한 것.

조씨는 처음 본 장교수에 대해 "평소 글을 보면서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상큼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실제 만나보니 정말 그랬다. 목소리도 아주 청아했다"고 기억했다.

2004년 장교수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영문학자였던 고(故)장왕록 교수의 10주기 출판 기념회때는 조씨가 직접 축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조씨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친하게 지내기 시작해 2005년 내 환갑잔치 땐 장영희가 큰 케익에 내 사진을 박아서 선물해 주기도 했다"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조씨가 장 교수와 함께 보낸 시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 그 답례로 파주
헤이리에서 장 교수의 생일 파티를 열어줬을 때.

당시 조씨는 장 교수와 지난 3월 작고한 서양화가 고(故) 김점선 씨, 주철환 전(前) MBC PD 등이 함께있는 자리에서 장 교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독 콘서트를 열어줬다.

조씨는 그렇게 함께 행복했던 시절에도 장 교수가 사람들에게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늘 조문을 갔다가 뜻밖의 얘길 들었다. 우리가 한창 만나던 2005년 즈음에 이미 막 아플때였다고 한다"며 "그 아픈 몸을 가지고서도 한 번도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아 죄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조씨는 작품 속이나 현실에서의 모습이 딱 맞아 떨어졌던 장 교수의 삶을 떠올렸다.
조씨는 "그는 자기 글과 삶이 딱 떨어지는, 더 근사하지도 않고 덜 근사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며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밖에 못하겠다"고 말을 흐렸다.

"장영희 교수는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희망이었다. 늘 웃고, 남의 말을 들어줄 줄 알고...우리 모두가 장영희가 돼야 한다."

출처: >Sarah's Little 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