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가야

예인짱 2009. 4. 13. 10:20

가야

서기 전후 무렵부터 562년까지 우리 나라의 남단 경상남·북도 서부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총칭. 또는 좁은 의미에서 보아 김해의 가야국(加耶國)이나 고령의 대가야국(大加耶國).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경상남도 해안지대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이 지역에서는 사회 통합이 진전되어 변한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 추세가 지속됨에 따라 소국간의 통합이 한 단계 더 진행되었다.

그 결과 2∼3세기 변한 지역은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변한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 초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전기가야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거의 몰락하였다.

이로써 가야라는 이름은 더 이상 역사 주체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 옛 가야 지역의 내부에서 재통합의 기운이 일어났다. 지배 권력의 주체 및 중심 지역이 옮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령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백제·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면서, 6세기 초 소백산맥과 낙동강 사이의 영역에 자기 세력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라·백제가 팽창하면서 530년대에 김해의 금관국을 비롯한 남부 지역을 병합하자 가야는 다시 약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562년 신라가 고령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후기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즉 ‘갈래〔分派〕’라는 견해와 ‘강(江)’이라는 견해, 그리고 ‘겨레〔同族〕’라는 견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야’의 한자 표기는 위에서 하나를 골라 통일해서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伽倻’는 원전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조선시대 이후 쓰이기 시작한 표기 용례이므로 일단 제외한다.

駕洛의 용례는 수로왕과 관련해 김해의 가야국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가야의 일반 명칭으로 사용되기에는 한계성이 있다. 그리고 加羅는 〈광개토왕릉비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명칭으로 처음 나온 후, 각종 사서에 광범한 용례를 보인다.

그러나 용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서기≫에서 加羅는 거의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고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서는 예외적으로만 나오고 있으므로, 김해 세력까지 포괄하려면 加羅로 명칭을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김해나 고령의 가야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명칭은 加耶나 伽耶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加耶는 ≪삼국사기≫에서 일반적으로 용례로 쓰이며, 그 사용 빈도도 높은 편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원전을 이루는 사료들의 상당수가 신라의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삼국사기≫의 찬자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공식 표기법에 따라 加耶라는 명칭을 많이 쓰게 된 결과라 볼 수 있다.

가야를 ‘伽耶’로 표기한 예는 주로 ≪삼국유사≫에 보이고 있다. 이 표기는 불교경전의 부다가야 표기와 관련이 높으므로 고려시대 승려들의 표기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가야의 명칭으로는, 고령과 김해를 모두 포괄하면서 사용 빈도도 높고, 한국고대사의 기본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쓰이고 있는 ‘加耶’가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

가야에 속하는 국가들로서는 먼저 ≪삼국지≫의 이른바 변진 12국(弁辰十二國)을 들 수 있다. 즉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혹은 半跛國), 낙노국(樂奴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 등이다.

한편, 국내 사료인 ≪삼국유사≫의 5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古寧加耶), 금관국(金官國), 아시량국(阿尸良國), 대가야국(大加耶國) 등이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 전하는 우륵 12곡 중에서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 등도 가야연맹 소속 국명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중에서 지명 고증이 대개 일치하는 것은 김해(狗邪國·金官伽耶·金官國·南加羅), 함안(安邪國·阿羅伽耶·阿尸良國·安羅國), 고성(古資彌凍國·小伽耶·古嵯國), 합천(多羅國), 고령(大伽耶·大加耶國·加羅國) 정도이다.

가야의 건국설화로는 두 종류가 있다. 이는 각각 김해와 고령 지방에 전하고 있다.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신화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천강신화(天降神話)의 요소를 나타낸다.

즉, 김해 지방에는 원래 아도간(我刀干) 등의 가락9간(駕洛九干)이 있었는데, 그들이 서기 42년(후한 건무 8)에 ‘구지봉’에서 〈구지가 龜旨歌〉를 부르면서 천신을 맞이했다는 내용이다.

그 때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 중 가장 먼저 동자로 화한 것이 수로인데, 그가 나라를 세워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칭했다 한다. 그리고 나머지 알에서 나온 다섯 사람은 각기 5가야주(五伽耶主)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서기 전후부터 2세기 말 사이에 김해 지역에서 9간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들이 보다 문화 능력이 높은 수로집단에 의해 통합되어 가야국이 출현하는 것을 반영한 설화라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6란 설화와 5가야의 국명들은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일어난 반신라 성향 및 자치독립의 이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고려 초기까지도 스스로를 옛날에 존재했던 가야연맹체 소속국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의 말투로 보아 이 설화는 수로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존재는 대가야의 주체가 토착적 성격이 짙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또한 수로와의 형제관계가 나타나 있으므로, 이 설화는 고령 지방의 토착집단이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김해 방면의 집단을 대신해 가야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하는 것을 반영한 설화로 보인다.

이처럼 가야의 건국신화는 지역과 시기를 달리하는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는 면에서 주목된다. 이는 가야사의 전개과정이 단선적인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어떤 중대한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역사

1. 전기가야사

한반도 남부의 영남 지역에 국한해 볼 때, 기원전 6∼5세기경부터 민무늬 계통의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 정착 농경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차 부(富)가 축적되고 읍락 내의 신분 차이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거대한 지석묘를 축조할 수 있는 소군장(小君長)세력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기원전 3∼2세기경에는 그들 사이에도 우열의 차이가 나타나, 일부 지역에서는 충청·호남 지역의 청동기를 구입해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기원전 1세기경에 위만조선의 유이민과 그들의 문화가 영남 지역에 직접 파급되었다. 그러면서 발달한 청동기와 소박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사회통합 기반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남 지역의 기존 농경문화 기반도 상당한 것이어서, 새로운 금속기문화의 파급이 사회구조에 즉각적인 변동을 가져오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그 선진 제철기술 및 관련 문화양식은 기존 주민들과의 상호연관 아래 점진적으로 토착화되면서 주변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래서 기원 후 1∼2세기경에는 지역에 따라 상당한 문화축적을 이루어, 경주·김해 등지에 좀더 큰 단위의 고분 및 생활유적을 영위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야의 개국신화에서 수로왕을 추대하는 9간이나 신라의 개국신화에서 혁거세를 추대하는 6촌장은 위만조선으로부터 이주해 와서 토착화한 세력들이었다.

바로 그들에 의해 이러한 문화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기존의 축적기반을 토대로 삼아, 당시 한반도 주변에서 가장 선진문화를 보유한 중국의 상업기지인 낙랑과 교류를 가지면서 발전을 도모했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후한(後漢) 환제(桓帝)·영제(靈帝) 연간에 한·예(韓濊)가 강성해 한군현이 통제할 수가 없게 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 간 것으로 나타난다.

즉, 2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남한 지역의 전반적인 발전과 중국의 통제력 약화에 따라, 낙랑 지역으로부터 제2차 유이민 파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적 진통이 초래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혼란에 대항해 기존의 영남 지역 주민들이 새로운 이주민계를 중심으로, 또는 자신들만이라도 결속함으로써 여러 소국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개국한 사로국(신라)이나, 김수로왕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개국한 구야국(가야)은 그런 소국들 중에 선진적인 부류였다.

그 후에 수로왕은 뒤이어 내려온 석탈해 계통의 유이민을 물리치고, 신라의 남해왕은 탈해를 받아들였다. 이는 그들이 새로운 정치조직을 마련하면서 연속적인 유이민 파동을 일부는 물리치기도 하고, 일부는 왕권 내부로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발전해 나갔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영남 지역에서의 이러한 발전 추세가 진전되어 2∼3세기에 이르러서는 진한·변한 24소국과 여러 소별읍이 나타났다. 이 지역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유물 성격으로 보아, 당시의 경상남북도 지역은 대체로 공통적인 문화기반 아래 대등하게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세력권은 크게 보아 진한과 변한의 둘로 나뉘어 있었던 듯하다. 변한 지역에는 10여 개의 소국과 별읍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 중에 이름이 전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미리미동국(지금의 경상남도 밀양), 접도국(지근의 경상남도 칠원), 고자미동국(지금의 경상남도 고성), 고순시국(지금의 경상남도 단성), 반로국(반파국 : 지금의 경상남도 고령), 낙노국, 미오야마국(지금의 경상남도 창원), 감로국(감문국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 구야국(가야국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주조마국(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안야국(안라국 :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 독로국(지금의 부산) 등이다.

이러한 여러 소국 중에 가장 유력한 세력은 김해의 가야국이었다. 따라서 2∼3세기에 변한 지역은 가야국을 맹주로 한 변한소국연맹체, 즉 전기가야연맹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그 주변 지역인 마한·낙랑·왜 등과 교역에 임하기도 하고, 진한(신라)과 세력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전기가야연맹의 범위는 낙동강 유역에 널리 퍼져 있어서,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양산·창녕·부산·마산·창원·함안·고령·성주·김천 등지를 포괄하는 정도였다. 또한, 전기가야 지역 안에서도 문화중심은 김해·함안을 둘러싼 경상남도 해안지대였다. 그리고 고령·함안 등의 내륙 산간 지방은 주변 지역에 속한 채 서서히 문화 축적을 이루어나갔다.

그러나 4세기 초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가 한반도 서북 지방의 낙랑군·대방군을 소멸시키고, 죽령을 넘어 신라에까지 그 영향력을 뻗쳐 왔다. 그 때문에 가야연맹은 선진문물 교역 대상을 상실하면서 일시적인 혼란에 빠져 내분을 겪게 되었다.

골포(骨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 고사포(古史浦 : 고성),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 등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김해의 가야국을 공격했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가야국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해 8국 군대를 겨우 물리쳤다. 그러나 연맹의 분열상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4세기 중엽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대방 고지를 둘러싼 고구려와의 경쟁을 위해 후방인 마한 고지를 안정시키고, 가야 및 왜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백제는 중국 남조 문물의 교역을 앞세우며 가야와 왜에 접근하였다. 그러자 가야연맹 제국 중에 창원의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 후대의 탁순국)이 이에 부응해 중개 기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백제와 왜는 이를 ‘任那’라고 借字한 듯하다. 이를 중개 기지로 삼아 백제와 왜가 연결되자, 김해 가야국은 어쩔 수 없이 신라를 포기하고, 보다 유리한 교역체계 쪽으로 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가야연맹은 다시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통합되어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불렸다. 그러면서 백제와 왜 사이의 중개 기지로서 안정적인 교역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임나가라는 백제와 교역하는 대가로 일부 왜와 함께 동원되어, 고구려의 동조세력인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방의 안정에 힘입어 백제는 대방고지, 즉 황해도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평양에 와 있던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형세는 오래가지 못하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한번 더 큰 변혁을 겪게 되었다. 고구려·백제 사이의 패권 다툼에서 백제가 크게 패하고,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가 낙동강 하류 지역까지 내려와 가야를 토벌한 것이다.

특히,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월등한 고구려 5만 군대의 공격으로, 4세기 전반 이후 약화되어 있던 전기가야연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다. 이런 일련의 파동을 거치면서 소국연맹체가 와해된 가야 지역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전기가야연맹의 중심 지역이었던 김해를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는 큰 타격을 입고 쇠약해졌다. 그리고 그 잔여 세력의 일부는 전단계에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던 다른 지역들로 흩어졌다.

이에 반해 가야 지역 안에서 고령·함양 등의 내륙산간 후진 지역은 오히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기왕의 세력기반을 착실히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가야 지역 중에서 신라에 가까운 지방, 특히 성주·양산·부산 등지의 세력은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신라세력의 영향권 아래로 이탈해 들어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라는 고구려문화의 영향 아래 자체 문화의 성격 변화를 겪으면서 점차 그 세력권이 팽창되었다. 반면에 예전 진한·변한 문화의 공통기반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던 가야는 대폭 약화되어 그 세력권도 고령 이남의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2. 후기가야사

한번 발전의 기틀이 꺾이고 그 세력이 미치는 범위도 축소된 가야 지역은 5세기에 들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남북도 서부내륙의 고령·삼가·거창·산청·함양 및 전라북도 남원 등지의 세력은 경상남도 해안 선진문화의 파급에 힘입어 전 단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급속히 발전하였다.

특히 고령 지역의 발전상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한편,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김해·창원·함안·사천·고성 등은 전 단계의 선진 지역으로 전쟁의 참화를 입고 쇠락했으나, 점차 복구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국제환경은 또다시 변화해, 5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걸쳐 신라가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아가면서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이에 대해 고구려의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단행한 뒤 남하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백제를 쳐서 수도를 함락시켰다. 백제가 부득이 웅진으로 남천하는 사이, 신라는 추풍령을 넘어 보은의 삼년산성까지 진출하는 등 국제 관계가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주변정세가 급변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옛 가야 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재결속의 기운이 일게 되었다. 이 무렵, 고령 지방의 예전 주체세력의 하나였다고 추정되는 반파국이 가야의 재통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고고학적인 증거로 보아, 고령 지산리 고분군을 축조하던 집단이었다. 이 고령세력은 대가야 시조신화를 표방하면서 김해세력을 대신한 맹주로서 대두하였다. 그리고 같은 문화기반 안에서 성장하던 합천·삼가·거창·함양·산청·아영·하동·사천·함안·창원·김해 등지의 소국들을 포괄하는 후기가야연맹을 이룩하였다.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은 그 뒤 국제사회에도 당당히 등장하였다. 479년 대가야 하지왕(荷知王·嘉悉王)은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가라국(加羅國)’의 이름으로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았다. 또한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해, 고구려·말갈이 신라를 침입하자 원병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런 유리한 주변정세에 힘입어 대가야는 손쉽게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소백산맥을 넘어 기문 지역(己汶地域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임실·장수)을 공략해 차지함으로써 그 전성기를 과시하게 되었다.

6세기 초 들어, 백제는 고구려와 계속해서 변경을 다투었다. 그리고 신라는 북방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한 변경 정비에 주력하였다. 이 때문에 두 나라는 대가야와 다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는 무령왕대의 안정을 바탕으로 반격을 시도해 기문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런 다음, 가야와 왜의 관계에서 커다란 이권지대였을 대사 지역(帶沙地域 :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 방면)까지 빼앗으려고 도모하였다.

이처럼 주변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대가야 중심의 후기가야연맹은 점차 자기세력 자체 내의 결속을 강화해 나가는 수성기(守成期)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힘에 의한 방어전략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가야는 자탄(子呑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대사(帶沙)·마수비(麻須比 :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이열비(爾列比 :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등지의 변경에 축성해 세력권을 정비하였다.

그 뒤 백제와 왜가 하동을 그들의 교역장소로 이용하려 하자, 대가야는 이를 군사력으로 억제해 그 영유권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대가야는 백제와 소백산맥에서 섬진강 하류까지를 경계로 해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후기가야연맹에 소속된 소국들의 이름을 여러 사료들에서 찾아보면, 가라국(대가야 : 고령), 안라국(아라 : 함안), 사이기국(爾赦 : 부림), 다라국(합천), 졸마국(함양), 고차국(고성), 자타국(진주), 산반하국(沙八兮 : 초계), 걸손국(단성), 임례국(의령), 남가라국(금관국 : 김해), 탁순국(창원), 탁기탄국(밀양·영산), 사물국(思勿 : 사천), 거열국(居烈 : 거창) 등이다.

백제의 세력이 남하하기 전에 최대판도였을 때는 상·하기문(奇物 : 남원·임실·장수), 상·하다리(達已 : 여수·돌산), 사타(순천), 모루(勿慧 : 광양) 등지도 대가야에 가담하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백제가 섬진강 유역을 통해 왜와의 교역을 주도해 나가자 백제에게 기운 것으로 보인다.

522년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은 신라의 법흥왕과 혼인동맹을 맺어 이러한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시 신라 법흥왕은 제도 정비를 통한 왕권신장을 바탕으로 해 서쪽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중이었다.

때문에 신라의 입장에서 가야 지역 중 가장 강한 대표세력인 대가야와의 강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그 남쪽의 낙동강 하류 지역에 대한 병합을 탐색한 것이 바로 혼인동맹의 참뜻이었던 것이다.

그 뒤 혼인과 관련된 신라의 책략으로 가야연맹 내에 불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밀양·영산 지방에 있던 가야소국인 탁기탄국(0xF365己呑國)이 신라에게 항복하였다. 그 연대는 529년을 전후한 2∼3년간의 어느 시기였다.

이 때문에 가야연맹 남부제국은 대가야를 불신해 새로운 정치적 합의체 결성을 시도하였다. 이를 주도한 함안의 안라국(安羅國)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는 국제회의를 열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런 중에 금관국(金官國·南加羅國) 구해왕(仇亥王)이 신라에 항복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가야 남부 지역은 백제와 신라 양대 세력에 의해 동서로 분할 잠식당하는 형세가 전개되었다.

백제는 가야 서남부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신라의 진출을 일단 억제하였다. 그리고 530년대 후반에 안라에 친백제 왜인관료 인지미(印支彌)를 파견해, 이른바 ‘임나일본부’인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을 설치하였다.

초기의 안라왜신관은 백제가 안라에 설치한 왜국사절 주재관의 명분을 띠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친백제계 왜인들로 구성된 ‘백제의 대왜무역 중개소’와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백제는 왜국과의 교역을 빌미로 해서 가야 지역을 압박해 나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에 가까운 지역인 하동·함양·산청 등지에 군령(郡令)·성주를 파견해 행정구역화해 나갔다. 그러나 창원에 있던 가야소국인 탁순국(卓淳國)은 북부의 구례산수(久禮山戍 : 칠원)를 점령하고 있는 백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힘입어 신라는 구례산수에 주둔한 백제군사를 물리쳐 쫓아냈다. 그 기회를 타서 안라는 백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왜신관의 인원을 친안라 왜인관료들로 재편성함으로써 그 기구를 장악하였다.

540년대 이후 안라왕은 안라왜신관을 지휘 운영하면서, 이를 가야연맹제국이 신라와 백제로부터의 외부 압력을 막아내는 방패막이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가야연맹 내에서 안라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당시 안라왜신관은 대외적으로는 성립 당시와 같이 왜국사절 주재관이라는 명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안라왕의 지휘를 받아,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제국의 독립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외교 지원기관, 즉 ‘안라의 특수 외무관서’로 변질되었다고 하겠다.

그러한 성격의 기구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치 않다 하겠다. 그 대신 안라에 위치하고 안라가 운영하는 왜인관료 주재관이라는 뜻에서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안라는 그러한 과정에서 가야 남부 지역을 대표하면서, 북부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중심세력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가야연맹은 대가야·안라의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가야 지역 전체를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암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처럼 가야연맹제국은 둘로 분열되었으나, 대외적인 행동은 공동대처해 나가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541년에 대가야·안라 등 7∼8개 소국 대표들이 백제에 모여 성왕과 함께 제1차 사비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가야연맹제국은 백제에게 가야의 독립 보장과 신라의 공격에 대한 방비책을 요구하였다.

3년 후에 다시 열린 제2차 사비회의에서 백제 성왕은 왜군 주둔을 요청해 가야제국을 신라로부터 지켜내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가야연맹은 백제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백제는 그 후 몇 년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가야연맹제국 및 왜국에 두루 선진문물을 나누어주면서 기존의 계책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 세력이 그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해 548년 정월 고구려와 백제 간의 독산성(獨山城·馬津城 : 지금 충청남도 예산) 전투를 유발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하자, 가야연맹의 독자적인 세력 확립을 주장해 오던 안라 및 왜신관은 백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무력화되었다. 그 결과 가야연맹은 550년을 전후해 백제의 부용국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553년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자, 이듬 해 백제는 가야군이 다수 포함된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거느리고 신라에 쳐들어가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전투를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가야연맹제국은 큰 피해를 입은 채 멸망 직전에 몰리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경영을 마친 558년 이후, 강압과 회유를 병행하면서 가야연맹제국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라가 제일 먼저 560년에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북부 지역은 자체의 세력기반도 있는데다가, 친백제적 성향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신라에 대해 좀더 독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561년 창녕 지방에 신라 진흥왕 및 4방군주(四方軍主)가 모여 무력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반신라 세력의 중심인 대가야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를 전후해 나머지 가야 소국들도 멸망시켰다. 당시 대가야의 마지막 왕은 도설지왕(道設智王)이었다.

도설지왕은 이뇌왕과 신라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 사이의 아들인 월광태자(月光太子)와 동일인이다. 그는 일찍부터 금관국 계통의 김무력 등과 함께 신라의 장군으로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대가야 멸망 직전 또는 직후에 신라에 의해 잠시 대가야왕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라고 추정된다.

3. 가야의 유민

가야유민들의 동향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만한 기록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라와의 관련 아래 그 이름을 전하는 자로서 김유신(金庾信) 가계의 인물들과 강수(强首우륵(于勒) 등이 있다.

먼저 우륵은 성열현(省熱縣 :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사람으로서 악사(樂師)였다. 그는 가야금(加耶琴)을 만든 가야국 가실왕의 명령을 받아 이른바 ‘우륵 12곡’을 지었다. 그 12곡은 대가야 궁정에서 연주되던 가야연맹 소속국들의 대표적 음악으로, 이를 우륵이 가야금곡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해 가야연맹이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하자, 그는 12곡이 의미하는 가야연맹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예상해 신라에 투항하였다. 551년 신라의 진흥왕이 낭성(娘城 :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에 순행해 왔을 때였다.

왕은 대가야 악사인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불러다 음악을 들었다. 감탄한 왕이 우륵을 국원(國原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에 안치하고,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해 그의 음악을 배워 전하게 했다고 한다.

강수의 경우는 중원경(中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사람으로, 본래는 ‘임나가라인(任那加良人)’이었다고 한다. 그는 유학에 조예가 있었다. 그리고 7세기 중엽 신라 무열왕대에 중국과의 외교문서 해독 및 제작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편, 가야의 유민으로서 신라 왕실귀족으로까지 참여하게 된 것은 김유신 가계이다. 532년 수로왕의 9세손인 금관국 구해왕(仇亥王)이 왕비 및 노종(奴宗·世宗), 무덕(武德·茂得), 무력(武力·茂刀) 등의 세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이 일가를 맞이해 신라의 최고귀족 신분인 진골로 삼아 우대하였다.

그 중에서 큰아들인 김노종(金奴宗)은 노부(奴夫노리부(弩里夫세종(世宗)이라고도 나온다. 그는 한강유역 탈취 때에 8장군의 한 사람으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일선군 북쪽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이찬으로서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까지 역임하였다.

또한 셋째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대에 신주군주(新州軍主)로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임으로써 곤경에 빠진 신라군을 구원하였다. 그 뒤 신라의 최고위 관등인 각간(角干), 즉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김무력의 아들인 서현(舒玄)은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동거함으로써, 신라 왕실과의 첫 관계를 맺은 인물이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서현, 즉 서운(庶云) 잡간이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로 되어 있어서 다른 계보를 전하고 있다.

김유신은 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 난 아들로서 선덕·진덕 두 여왕대를 거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공헌하였다. 그리고 삼국통일 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우고 문무왕대에 태대각간(太大角干)까지 올랐다.

특히 김유신은 그의 누이 문명(文明)을 신라왕족 김춘추(후대의 태종무열왕)에게 혼인시키고, 그 자신은 춘추의 딸을 취하였다. 그 결과 가야계의 ‘신김씨(新金氏)’는 신라 중대(中代) 왕실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승려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은 고령 지방에 근거를 둔 대가야 도설지왕의 후손으로서, 9세기 초 합천 해인사(海印寺)의 창건을 주도하였다. 신라 말에는 신김씨 계통의 심희(審希), 즉 진경대사(眞鏡大師)가 김해부지군사(金海府知軍事) 소율희(蘇律熙)와 김인광(金仁匡)의 후원을 얻어 창원 봉림산파(鳳林山派)를 개창하기도 하였다.

대가야 후손인 순응과 금관국 후손인 심희가 가야가 멸망한 지 300여 년이 지난 신라 말에 각각 합천과 창원 지역에서 큰 사찰을 개창한 것으로 보아, 가야 소국들의 뿌리깊은 인맥과 문화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유적

1. 전기가야문화

가야의 문화는 기원전 1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그 지역에서 조성된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4세기 이전의 고분과 5세기 이후의 고분 사이에 분포상황이나 출토유물의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4세기 이전의 것을 전기가야문화로 구분해 볼 수 있다.

4세기 이전의 가야 지역 중에서 문화적인 선진 지역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였다. 이는 그 지역의 독특한 생활유적인 패총(貝塚)과 목관(木棺) 또는 목곽(木槨)을 내부구조로 가진 토광묘(土壙墓) 등의 분묘유적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의 패총에는 양산 패총, 부산 조도 패총, 김해 봉황동(구 회현리) 패총, 부원동 패총, 진해 웅천 패총, 창원 성산 패총 등이 있다. 이들은 철기문화요소가 나타나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시작해 5세기 정도까지 존속되었던 생활유적이다.

패총문화의 기본 요소로서는 굴 껍데기를 비롯한 수많은 패각과, 환원염으로 소성된 적갈색·회색 계통의 와질토기(瓦質土器) 및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 그리고 철도자(鐵刀子)·철겸(鐵鎌)·철촉(鐵鏃) 등의 철제이기(鐵製利器)를 들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에는 토광목관묘·목곽묘 등의 분묘유적도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서 창원 다호리 목관묘, 김해 양동리 목관묘, 김해 지내동 옹관묘, 고성 송천리 석관묘, 밀양 내이동 목관묘, 동래 구서동 목관묘 등이 있다.

그리고 3∼4세기의 것으로서 김해 예안리·양동리·칠산동·퇴래리·대성동 등의 목곽묘를 비롯해서, 동래 노포동·복천동 토광묘, 부산 화명동 석곽묘, 창원 삼동동 옹관묘 등이 있다.

가야 지역을 포괄하는 전체 영남 지역의 토광묘 유적들을 분석해, 전기가야문화의 발전과정을 단계적으로 추론해 보자. 영남 일대 토광묘문화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① 후기무문토기문화(세형동검문화) 계열의 토광목관묘 단계, ② 와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관묘 단계, ③ 와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곽묘 단계, ④ 도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곽묘 단계 등이다.

유물 상호간의 상대편년에 따르면, 대체로 1단계는 기원 전 1세기경, 2단계는 기원 후 1세기부터 2세기 전반까지, 3단계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 4단계는 4세기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1단계 경주 입실리 유적, 조양동 5호분과 창원 다호리 1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새로이 발굴된 토광묘는 길이 2.7m, 너비 1.3m, 깊이 2m 정도의 토광에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전 단계 이래의 흑색 및 갈색 무문토기와 칠기류(漆器類), 그리고 세형동검(細形銅劍)·동모(銅矛)·동탁(銅鐸동경(銅鏡) 및 철단검(鐵短劍)·철부(鐵斧) 등 청동기 위주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토기는 후기무문토기 이래의 갈색점토대발(褐色粘土帶鉢)과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등의 기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토기를 제외한 무기·장신구 등은 거의 모두 북한 서부 지역의 세형동검 문화유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철모는 형태상으로 보아 대동강 유역의 단조철기문화와의 연관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그 새로운 문화가 전래된 계기는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멸망과 그에 따른 유이민 파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목관의 규모나 유물의 성격에서 기술이나 부(富)의 축적이 충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는 영남 지방에 위만조선 계통의 선진문화가 일부 이주민과 함께 파급해 들어옴으로써, 앞으로 가야국과 같은 정치세력이 나타날 수 있는 ‘문화 기반’이 성립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2단계 경주 조양동 38호분과 김해 양동리 2호분·7호분 및 창원 다호리 11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길이 3m, 너비 1.3m, 깊이 1∼1.5m 정도의 토광에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에는 무문토기가 사라지고, 폐색요(閉塞窯)에서 제작되어 단단하면서도 흡수성이 강한 갈색 및 회색의 와질토기가 보인다. 또한 청동기가 거의 사라지고 철기가 늘어나 동경과 판상철부(板狀鐵斧)·단조철부·따비·철단검·철촉·철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토기문화는 1단계의 흑도장경호와 점토대발이 점진적으로 형태가 변화해, 조합우각형파수부장경호(組合牛角形把手附長頸壺)와 주머니형의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 토광묘문화가 후기무문토기시대의 문화기반을 근본적으로 제압했다기보다는, 그 기반을 토대로 해서 점진적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2단계에는 타날문단경구형호(打捺文短頸球形壺)와 같은 새로운 기형의 토기가 나타나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한반도 서북 지역 고조선 주민들이 사용하던 중국 전국계통(戰國系統)의 제도기술(製陶技術)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판상철부 등의 철기가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철기 제조기술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전반기에 속하는 양동리 2호분은 목관묘에다 농공구(農工具) 계통의 철기유물만 보인다.

이에 비해, 후반기인 양동리 7호분의 단계에는 작기는 해도 목곽이 나타난다. 그리고 철기 구성에서 철검·철모·철촉 등의 무기가 다량 추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국가권력의 무력독점적 측면에서 전반기보다 한 단계의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 보아, 전 단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토광묘문화가 영남 지역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2단계에 접어들면서 토착화해 발전해 나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국가 형성의 맹아를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3) 3단계 부산 노포동 고분군과 김해 양동리 162호분, 경주 조양동 3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비교적 큰 고분의 경우는 길이 4∼5m, 너비 2∼2.5m, 깊이 0.3∼0.9m 정도이다. 그 외 여러 규모의 토광에 목곽과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유물의 양이 많고 전 단계보다 약간 경질이면서 기종이 다양한 신식 와질토기가 나타나다. 철기 유물의 종류는 전 단계와 비슷하나 장검·환두대도(環頭大刀)와 보습·쇠스랑 등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토기유형인 화로형토기(火爐形土器), 유개대부장경호(有蓋臺附長頸壺) 및 직구호(直口壺)는 전 단계의 주머니호·조합우각형파수부장경호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토기 밑부분에 대족(臺足)이 붙고 뚜껑이 추가되어 낙랑계 토기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의 재래 토기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또한 대형 목곽이 설치되어 부장 유물의 양이 많아졌으며, 강한 무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환두대도가 나타났다. 김해 양동리 162호분에서는 철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한 중간소재로서, 화폐의 기능을 가진 판상철부형 철정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볼 때, 3단계의 문화는 일부 외래적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재래문화를 토대로 권력 통합을 이룸으로써 각지에 단위 소국들이 나타날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유역에서는 김해 양동리 지방의 문화가 양적·질적 측면에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4) 4단계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경주 정래동 고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길이 8m 정도의 세장형(細長形) 또는 주부곽식(主副槨式)의 대형 토광목곽묘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화로형토기·단경호·무개무투창고배(無蓋無透窓高杯) 등의 도질토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대형 철모 등 철제무기의 수량이 급증하고 철제단갑(鐵製短甲)과 같은 무구도 출토되었다.

목곽의 대형화 또는 부곽의 설치에 따라 부장 공간이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그 공간에 수납된 토기와 철기 등의 부장품도 그만큼 더 늘어났다. 철제단갑의 출현은 정치권력의 무력적 성격이 강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례적 관습에 따라 부장용(副葬用)으로 선호되었을 와질토기에 대신해 도질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권력의 성격이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므로 4단계는 기존의 소국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내부의 지배권력을 한층 더 실질적으로 강화시켜 나간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전반기에 낙동강 유역의 패권이 김해 양동리로부터 대성동으로 옮겨졌는데, 이는 지배 집단의 선택에 의한 이주인 듯하다.

이처럼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부(富)와 기술을 축적하면서 사회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경제기반으로서는 이 지역의 풍부한 노두철광상(露頭鐵鑛床) 및 양호한 해운 입지조건을 들 수 있다.

우선 철산지라는 면에서 볼 때, 당시 철기 제작의 부산물인 철재(鐵滓)가 나온 곳만 해도 김해 봉황동 패총, 창원 외동 성산 패총, 고성 패총, 김해 부원동 패총 등이 있다. 게다가 성산 패총에서는 야철지도 드러났다.

또한 창원 다호리나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단야도구인 철망치나 철집게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철정들이 수십 매씩 10의 배수로 출토되었다.

이는 낙동강 하류 지역이 철 공급의 중심지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철 자원 개발 및 철기 제작기술의 보급에 따른 야철 그 자체가 이 지역의 발전 및 그에 따른 패총문화의 형성에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반영한다 하겠다.

다음으로 해운의 면에서 볼 때, 3세기 당시 낙랑에서 출발해 서해 및 남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배가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들렀다가 해협을 건너 왜지로 향했음을 전하는 문헌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김해를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 가야제국의 입지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당시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세력들은 ≪위지≫ 한전 변진조에 보이듯이, 철을 매개로 ()·예(濊)·왜(倭)·2군(二郡)과 활발한 교역을 벌여 이익을 얻고 있었다.

김해 패총에서 출토된 화천(貨泉), 창원 성산 서남구 패총의 패각층에서 나온 오수전(五銖錢), 김해 양동리 토광묘의 후한대(後漢代) 상방경(尙方鏡), 함안 사내리 고분에서 출토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 방제경(倣製鏡),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붓 및 칠기류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김해 지내동 옹관묘에 부장된 대상구연토기(袋狀口緣土器)나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나온 이단구연호형토기(二段口緣壺形土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통형동기(筒形銅器)·파형동기(巴形銅器) 및 방추차형석제품(紡錘車形石製品) 등은 왜와의 교역 또는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또한 그 지역의 기층사회를 이루는 주민들은 이미 오곡과 벼를 재배하고 비단을 만들었다는 걸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김해 부원동 A지구 패총에서 출토된 종류만 보더라도 벼·보리·밀·콩·조 등의 곡물과 굴·털조개 등의 해산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세력기반은 도작(稻作)을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 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저변을 통괄하면서 철산업을 일으키고 있던 토광묘 계통 지배집단들의 해운을 이용한 중개무역이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이룩한 사회경제적 축적 및 그에 바탕을 둔 정치체제의 발전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 결과 낙랑의 소멸 이후에도 전기가야연맹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후기가야문화

영남 지방 토광묘문화의 4단계 이후, 영남 지방의 고분 유적·유물의 계통은 크게 2개의 문화권으로 양분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현상은 석곽묘 유적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문화권 양분은 곧 신라·가야 세력권의 분리와 관계가 있다.

이는 고구려의 배경 아래 경주세력의 주도로 일어나는 신라의 영역 팽창과 가야연맹권의 축소에 따른 결과로 파악된다. 그 시기는 문헌사료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판단되는 신라 나물·실성·눌지 마립간대, 즉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해당 시기의 영남 지방 석곽묘관계 유적·유물을 지역적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묘제의 측면에서 볼 때, 적석목곽분이 나타나는 경주를 제외한 나머지 영남 지방의 묘제는 거의 모두 내부구조가 수혈식장방형석곽묘(竪穴式長方形石槨墓)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혈식석곽묘의 발생 원인은 이원적이다. 먼저 원삼국시대의 토광목곽묘가 목곽 외부의 진흙 충전부를 돌로 채워 넣는 과도기를 거쳐 보다 편리한 축조방식인 수혈식석곽묘로 전환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 이래의 지석묘 하부 구조 또는 석관묘나 수혈식의 작은 석곽이 계승되어 규모의 확장을 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낙동강 동안 중심의 의성·안동·경산·대구·칠곡·성주·선산·창녕·울산·양산·부산 등지에서는 일찍부터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와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가 수혈식석곽묘와 공존하면서 축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수혈식석곽묘라고 해도, 신라문화권에서는 평면 형태가 너비에 비해 길이가 짧은 장방형(너비 : 길이=1 : 1.3 정도)을 보인다. 이 지역에 일어나고 있던 적석목곽분 및 횡혈식·횡구식석곽묘 등 다양한 묘제의 변화는 기존의 토광목곽묘의 변천 과정에 고구려문화를 흡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낙동강 서안 중심의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함안·고성·사천·진주·산청·하동·김해·창원 등지에서는, 원삼국시대 이래의 토광목곽묘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평면 형태가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긴 장방형 즉 세장형(너비 : 길이=1 : 4 이상)을 보이는 할석 축조의 수혈식석곽묘가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다른 묘제는 보이지 않는다.

낙동강 서안 지역의 묘제에 이와 같이 수혈식석곽묘의 내부 구조를 채택한 묘제만이 보편적으로 성행한 이유는, 그 사회의 문화가 비교적 오랫동안 외부문화의 동향에 휩쓸리지 않고 수혈식 장제(葬制)만을 고집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출토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토기의 측면에서 볼 때, 영남 지방의 5∼6세기 토기는 고배(高杯)와 장경호(長頸壺)를 기본적인 기종(器種)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기종이라고 하더라도 각 기종의 사이에는 지역에 따라 형태상·조합상에 약간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우선 낙동강 동안의 북부 지역인 경주 황남동, 의성 탑리·장림동, 안동 마동·중가구동·조탑동, 경산 북사동·임당동, 대구 내당동·비산동·불로동·구암동, 칠곡 인동·약목, 성주 성산동, 선산 낙산동 고분군과 남부 지역인 울산 양동·화산리, 부산 복천동·당감동·오륜대·덕천동, 양산 북정리, 창녕 교동·계성 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들은 공통적으로 이단교열투창(二段交列透窓)의 유개고배(有蓋高杯)와 V자형 경부(頸部)의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가 기본 조합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대구·경산·창녕·성주 등의 각 지역별 토기유물상은 경주 적석목곽분 출토 신라전기양식토기와 비슷하면서도 각각 약간의 이질적 요소가 보인다. 이것은 각 토기들이 해당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 기형의 세부적인 형태까지 경주의 것을 따르고 있는 이상, 경주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여기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서 금동관(金銅冠)의 경우에 대구·경산·양산·동래·성주 등지에서 출토된 것은 경주의 적석목곽분들에서 출토된 금관(金冠)과 거의 비숫한 양식을 띠면서도 그 재료면에서 격이 떨어진다.

이는 각 지역 군장간의 신분 차이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유물상의 격의 차이는 장신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방의 고분축조세력들은 아직 그 지역 지배층의 자체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경주세력에 의한 일정한 규제를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소국’ 또는 ‘신라계열 소국’으로 지칭해야 온당할 것이다. 특히 전기가야연맹에 속해 있다고 거론되던 지역 중에서 부산·창녕·성주·개령 등이 여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신라의 세력 확장 및 가야연맹권의 축소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낙동강 서안의 북부 지역인 고령 지산리, 합천 옥전·삼가·봉계리·저포리·중반계·반계제, 거창 말흘리, 함양 상백리·백천리, 남원 월산리·건지리 고분군과 남부 지역인 함안 말산리·도항리, 진북 신촌리, 고성 오방리, 사천 예수리·송지리, 진주 가좌동·수정봉, 산청 중촌리, 하동 고리리, 김해 예안리·칠산동, 창원 도계동, 진해 성내동 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들은 낙동강 동안 지역의 신라양식토기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단직렬투창(二段直列透窓)의 유개고배(有蓋高杯),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개배(蓋杯), 발형기대(鉢形器臺) 등으로서, 전체적인 토기 조합상만 놓고 보더라도 기대류(器臺類)가 그 말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토기유물들은 낙동강 서안의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고령 지산리 32·33·34·35호분 및 44·45호분 등의 고분 규모나 유물 출토량은 가야 지역의 다른 고분군과 비교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러므로 후기가야문화권을 전기가야시대와 비교해 볼 때, 문화중심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에서 고령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 지방으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중심의 이동과 영역의 축소 현상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후원을 받아 신라가 급성장하고 전기가야연맹이 그에 대항하다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가야 지역 중에서 산간 내륙 지방은 5세기에 들어와 점차 많은 고분이 각처에 번성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 지역에 성행하던 기대와 장경호 및 고배 등은 그 시원 형태를 창원·김해·부산 등의 4세기대 패총과 분묘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후기가야고분 출토 금속기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철촉·철겸·도자·철모·대도(大刀)를 비롯한 철제무기이다. 그리고 마구·갑주·장신구 등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이 중에서 철기의 제작기술이 당시 백제의 발전된 기법인 초강법(炒鋼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4세기 이전 경남 해안지대에서 출토된 철기유물들의 제조법인 괴련강(塊鍊鋼)과 같다는 점은 주목된다.

그러므로 5세기 이후에 고령·함양 등의 내륙 산간 지역이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한 계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경남 해안 지방의 몰락과 그로 인한 이주민 파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상 내륙 산간 지방에서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유지하던 토착 세력들은 이들의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해, 늦어도 5세기 후반까지는 가야 전체의 문화 중심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의 가야 남부 지역은 지역별로 서로 다른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물상으로 보아 진주·사천·고성·함안 등의 서남부 지역과 창원·진해·김해 등의 동남부 지역으로 구분된다.

고성·함안 등의 서남부 지역에서는 이 지방의 독특한 토기형식으로서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廣口長頸壺), 1단세장형투창유개고배(一段細長形透窓有蓋高杯), 삼각형투창무개고배(三角形透窓無蓋高杯) 등이 나타났다.

그와 비슷한 형식을 띤 화염형투창무개고배(火炎形透窓無蓋高杯)는 지금까지의 출토 예로 보아 함안의 독자형식인 듯하다. 이러한 토기들의 분포상황은 5∼6세기에 걸쳐 이 지역이 급격한 문화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백제·신라 등의 외부세력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역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고령을 비롯한 가야 북부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고령 지산리 계통의 토기 형식들인 2단직렬투창유개고배·유개장경호·기대·단추형꼭지뚜껑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유물 출토상황은 5세기 후반 이후로 고령 대가야의 세력 및 문화가 가야 북부 지역에만 보급되는데 그치지 않고, 가야 서남부 지역의 일부까지 미쳤던 흔적을 보이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가야 동남부 지역인 김해·창원 등지의 유물상은 서남부 지역의 그것과 상당히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창원·김해 지역은 4세기에는 부산 지역과 아울러 대형 목곽묘와 외반구연무투창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의 중심 지역으로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이후로는 규모가 소형 석곽분 정도로 위축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낙동강 동안 양식 토기가 보편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그나마 5세기 전반에 속하는 유적·유물은 많지 않다.

김해·창원 지역의 이러한 문화유물상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전기가야의 주체세력이 큰 타격을 입고 괴멸된 후, 그 지역에 잔존한 소규모 집단들이 정신적 기준을 잃고 신라문화로 편향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해 예안리 고분군과 창원 도계동 고분군 등에서 고령계의 토기들이 출현하면서 유물의 양이 증대되고 있음을 보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령 대가야의 문화적 영향 아래 다시 복구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유적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전부 대가야계통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아니다. 5세기 전반 이래의 신라토기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가야 동남부 지역의 세력들이 대가야에 완전히 경도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530년대에 신라·백제의 공세에 의해 가야연맹의 결속이 위기에 처하자, 김해와 창원의 세력들은 가장 먼저 신라에 자진해서 투항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 뒤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가야 고분유적으로는 고령 지방에서 발견된 5기의 횡혈식석실분과 합천 삼가 1호분 B·G유구 및 2호분 A·B유구, 합천 창리 A지구에서 내부구조가 장방형 수혈식석곽으로 이루어진 다곽분(多槨墳)들의 대다수, 진주 수정봉·옥봉 고분군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문화유물로 볼 때, 5세기 이래의 전술한 것과 같은 문화 분포경향은 대체로 큰 변동 없이 지속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가야 지역 6세기 중엽 유적·유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그리 큰 변화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부 지역의 경우에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즉,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은 석실의 터널식 천장구조가 공주 송산리 전축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곳에 그려진 연화문(蓮花文)의 양식이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해, 6세기 중엽 시기에 대가야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중엽 시기에 가야 지역은 전시대 이래의 문화 및 세력기반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하지만 고령·거창·합천·진주·하동 등 주로 대가야문화권 일부에서는, 기존 문화요소의 계승성이 크게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후기가야 지역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안 말산리 고분군으로서, 거기에는 40m 내지 50m급의 월등하게 큰 봉토분도 섞여 있다. 이러한 유적·유물 출토상황을 종합해 볼 때, 6세기 중엽 가야 지역은 6세기 전반과 같은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가야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의 영향을 약간 받고 있었다 하겠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고령 및 함안의 2대 문화중심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각기 가야연맹을 복속시키려고 노리는 가운데, 가야연맹이 남북으로 나뉘어 한쪽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쪽은 그렇지 않은 등 분열상을 보인 것이다.

연구사

종래 가야사는 문헌사료의 절대적인 빈곤과 식민사학에 의한 왜곡 등의 탓으로, 그 기본적인 전개의 줄거리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또한 일반적인 연구경향 면에서도 가야의 자체 발전과정을 논급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백제·신라·왜 등의 주변 세력에 의해 어떻게 종속되어왔는가 하는 주도권 변화 여부에만 관심을 집중되었을 뿐이다.

가야사는 원래 개항 이후로 일본학자들에 의한 임나일본부사(任那日本府史)로서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그에 대한 최초의 접근은 쯔다(津田左右吉)·이마니시(今西龍)·아유가이(鮎貝房之進) 등의 지명 고증 작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초기의 작업들을 집대성해 스에마츠(末松保和)는 체계를 갖춘 남한경영론을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任那興亡史≫이다. 즉 일본의 야마토왕조(大和王朝)가 한반도 경상남도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그를 기반으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남한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와 김석형(金錫亨)이 ≪고대조일관계사≫에서 고고학자료의 재해석을 통해 일본고대사 연구의 맹점을 지적하였다. 이로써 임나일본부설의 공허함을 일깨웠다.

1970년대 이후의 연구로 천관우(千寬宇)의 〈복원가야사〉에서는, 문헌 재해석을 통해 가야사의 전개과정을 복원하려고 하였다. 즉 4세기 이후에 가야 지방을 경영한 주체가 왜의 임나일본부가 아닌 백제의 군사령부였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다. 그리고 김현구(金鉉球)는 ≪임나일본부연구≫에서 천관우의 연구를 좀더 면밀하게 증보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 일본학계에서는 남한경영론의 실체인 임나의 존속기간이나 통치범위를 축소시켜 나가면서도 그 입장 자체는 고수하는 연구들이 나왔다. 이를 테면, 이노우에(井上秀雄)의 ≪임나일본부와 왜≫, 야마오(山尾幸久)의 ≪고대의 일조관계≫, 오오야마(大山誠一)의 〈소위 임나일본부의 성립에 대하여〉, 스즈키(鈴木英夫)의 ≪고대의 왜국과 조선제국≫ 등의 논저가 그것이다.

그 뒤 1980년대 이후로 문헌사료와 고고학자료를 연관시켜 가야의 자체 발전과정을 논급하는 연구경향이 나타났다. 각각의 연구들은 가야연맹체의 범위와 내부 구조, 왜국과의 관계를 보는 시각 등에 있어서 서로 일정한 차이가 있다.

김정학(金廷鶴)의 〈가야사의 연구〉, 이현혜(李賢惠)의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다나카(田中俊明)의 ≪대가야연맹의 흥망과 임나≫, 이영식(李永植)의 ≪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 김태식(金泰植)의 ≪가야연맹사≫, 백승충(白承忠)의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 이희진(李熙眞)의 〈4∼6세기 가야를 중심으로 본 국제관계의 전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가야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조사는 1910년대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어 일련의 〈조선고적조사보고〉가 출간되었다. 이에 의해 가야 지역 문화에 대한 대강의 윤곽은 드러났다.

그러나 발굴 조사한 양에 비해 그 결과가 보고된 것이 거의 없고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해도 그 내용이 너무 소략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연구는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컸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 이후 국내 고고학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연구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가야문화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발굴보고서로는 문화재관리국의 〈마산외동 성산 패총 발굴조사보고〉, 고령군의 〈대가야고분 발굴조사보고서〉, 국립박물관의 〈거창 말흘리 고분〉·〈합천 반계제 고분군〉·〈고성 패총〉, 부산직할시립박물관의 〈부산 노포동유적 Ⅱ〉, 계명대학교 박물관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고령 본관동 고분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남원 월산리 고분군 발굴조사보고〉,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김해 부원동 유적〉·〈합천 삼가 고분군〉·〈합천 봉계리 유적〉·〈합천 창리 고분군〉·〈창녕 교동 고분군〉, 부산대학교 박물관의 〈부산 화명동 고분군〉·〈동래 복천동 고분군 Ⅰ∼Ⅱ〉·〈김해 예안리 고분군 Ⅰ∼Ⅱ〉·〈함양 백천리 1호분〉·〈합천 저포리 E지구 발굴조사보고〉·〈부산 노포동 유적〉, 창원대학 박물관의 〈창원 도계동 고분군 Ⅰ〉·〈합천 저포리 B 고분군〉·〈마산 현동 유적〉,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합천 저포리 고분 A 발굴조사보고〉·〈창녕 계성리 고분군〉·〈경산 북사리 고분군〉·〈경산 임당동 고분군 Ⅰ〉,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합천 옥전 고분군 Ⅰ∼Ⅴ〉·〈진주 가좌동 고분군〉·〈하동 고리리 유적〉·〈의령 예둔리 분묘군〉·〈의령 중동리 고분군〉·〈함안 황사리 분묘군〉, 경남대학교 박물관의 〈고성 연당리 고분군〉,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의 〈김해 퇴래리 유적〉, 경성대학교 박물관의 〈김해 칠산동 고분군 Ⅰ〉, 효성여자대학교 박물관의 〈합천 저포리 C·D지구 유적〉 등이 있다.

이러한 활발한 발굴조사에 힘입어, 가야토기·묘제 등의 비교 및 편년에 대한 종합적 연구들도 상당히 진척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연구성과들을 소재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토기에 관한 연구로는, 이은창(李殷昌)의 〈신라·가야토기 편년에 관한 연구〉, 신경철(申敬澈)의 〈부산·경남출토 와질계토기〉, 최종규(崔鍾圭)의 〈도질토기 성립전야와 전개〉, 우지남(禹枝南)의 〈대가야고분의 편년 -토기를 중심으로-〉, 안춘배(安春培)의 〈가야토기와 그 영역의 연구〉, 이희준(李熙濬)의 〈토기로 본 대가야의 권역과 그 변천〉 등이 있다.

고분 묘제에 대한 종합적 연구로는 윤세영(尹世英)의 〈고신라·가야고분의 편년에 관하여〉, 이은창의 〈가야고분의 편년 연구〉, 김종철(金鍾徹)의 〈대가야묘제의 편년연구〉, 김세기(金世基)의 〈수혈식묘제의 연구-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임효택(林孝澤)의 〈낙동강하류역 가야의 토광목관묘 연구〉 등이 있다.

가야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을 새로운 방법론에 의해 살펴본 연구로는 이남규(李南珪)의 〈남한 초기철기문화의 일고찰〉, 권학수(權鶴洙)의 〈가야제국의 성장과 환경〉, 박천수(朴天秀)의 〈정치체 상호관계로 본 대가야 왕권〉 등이 있다.

이처럼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이후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상당한 문제점들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특히 가야사와 연루되어 자주 언급되는 임나일본부의 문제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가야문화의 분포범위, 가야의 정치성장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아직 연구되지 못한 상태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앞으로 여타 학문분야, 특히 백제사·신라사·일본고대사 및 고고학 분야 등의 학문성과가 좀더 축적되어 나감으로써, 그와의 관련 아래 하나하나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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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83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