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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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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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한강 이북의 일부와 한강 이남 전역을 차지하였다. 669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니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으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이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백제, 고구려 멸망 및 그 직후의 신라문화의 황금기이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혼란해져 기울어간 시기이다. 신라의 왕은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되었다.
[편집] 국호
계림, 사로,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편집] 역사
[편집]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편집]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편집] 신라의 팽창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편집] 신라의 삼국통일(남북국 시대)
-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의 삼국통일입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670년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편집] 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편집]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말미암아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이들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는 반면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러한 해적의 출몰은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간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편집]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편집] 신라의 멸망
고려 태조는 실각한 전(前) 임금인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무혈 정복할 수 있었다.
[편집] 통치 제도
[편집] 삼국 시대
신라는 원래 육부(六部) 연맹에서, 출발 근처의 작은 부족 연맹을 병합·정복하여 국세가 점점 강성하여져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 신라를 이룩했다. 따라서 지방 관제도 그 국세의 확장에 따라서 확대·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증왕 때는 주군(州郡) 제도가 처음 생겼고, 영토의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된 법흥·지증왕 때에는 그 지방관제가 확립된 듯하다. 신라의 지방 행정조직은 군사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중요한 곳은 주(州)로 삼았다. 주에는 군주(軍主)를 두어 그 영역의 군정을 맡아서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군주 밑에는 여러 성주가 있었다. 또 《양서》신라전에 따르면, 신라가 동해 남단에 편재(偏在)할 당초에는 경주 부근에 6부(六部)[1]가 있었고, 기외(畿外)에는 52읍륵(邑勒)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차차 주현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한편 중요한 곳, 즉 아시촌(阿尸村)[2]과 국원(國原)[3]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지방장관인 사신(仕臣)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편집] 남북국 시대
삼국 통일 후 신라는 확대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보다 강력한 왕권 아래 정치 체제를 재정비해야 했다.
통일 사업의 단서(端緖)를 마련한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왕족의 혈연적 제약을 벗어나, 종래 ‘성골(聖骨)’의 신분만이 계승한 왕위는 이후 ‘진골(眞骨)’로 바뀌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골품제는 진골을 제1급으로 하여 확립되었다. 또 종래의 불교식 왕호 대신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의 존엄성을 높였다.
모든 관료는 엄격한 신분 제약을 받아야 했고, 율령정치(律令政治)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족장 회의제의 정치 체제는 관료 정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중앙 관료를 감찰하는 기관을 위시하여 여러 중앙 관서가 분화·확충되었다. 골품제와 더불어 신라의 17관등(官等)의 관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실제로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가 진덕왕 5년(651년)에 설치되고, 형률(刑律) 사무를 관장하는 이방부(理方府)의 규범 60여 조가 새로 정해지고, 감찰 기관인 사정부(司正府)가 신설되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주·군에 외사정(外司正)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이 밖에도 조부(調部)·예부(禮部)·선부(船部) ·위화부(位和府)·사록관(司祿館)·병부(兵部)·창부(倉部)·승부(乘部)·예작부(例作府)·영객부(領客部) 등을 설치했고, 도성(都城)의 수축이나 사찰을 영조(營造)할 때마다 소관의 관서가 세워졌다.
왕권의 강화의 추세에 따라 군현의 명칭과 관호(官號)가 전면적 중국식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료 체제의 지향은 진골 신분의 반발 때문에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다시 원래의 칭호로 환원되었고, 이후 진골 신분 간에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야기되었는바 선덕왕·원성왕은 모두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는 영토 확장에 따라 신문왕 때 9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갔고, 또 정치·군사상의 요지에는 5소경(五小京)을 두었다. 종래 전략상의 의의가 컸던 주의 장관인 군주(軍主)는 문무왕 때에는 총관(摠管)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어 점차 지방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주 밑에는 군(郡)을 두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장관을 각기 태수(太守)·현령(縣令)이라 칭했다. 이들 지방 장관은 관계(官階)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을 일정한 제한 밑에서 신라의 관료 체제에 흡수하였다.
군현 외에 신라에서 특수한 것으로는 일종의 천민 집단(賤民集團)인 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지방의 호족은 지방 관서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검찰하고 번상(番上)·시위(侍衛)케 하여 그들의 지방에서 발호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통일 후 신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이 필요하자 종래의 6정을 개편·확충하고 중앙의 군단 조직인 9서당(九誓幢)과 지방의 군대 조직인 10정(十停)을 배치하여 복속민을 회유·견제했다. 또 5주서(五州誓)와 3무당(三武幢) 등을 두어 군제를 보충 내지 확충하였다.
[편집] 통치 조직과 운영
통일기에 접어들어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민(民)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삼국 후기부터 지방 통치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전국의 민과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점차 강화되었는데, 이는 통일기에 들어서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 신라 행정 조직의 말단 단위는 촌(村)으로, 이는 자연적인 경계에 따라 형성된 촌락이었다. 이런 촌을 단위로 3년마다 경작지의 면적, 호구, 가축, 과실수, 뽕나무 등이 조사되어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 기간 내에 변동된 사항도 그때마다 보고되어 문서에 추기(追記)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매년 조세와 역역(力役)이 부과되었다. 각 촌의 위에는 이 같은 자연촌락 몇 개가 묶인 행정촌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촌주(村主) 한 명이 있어 행정 업무를 도왔다. 촌주는 현지인이 되었는데, 삼국 시기와는 달리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각 행정촌은 상급 기관인 현에 귀속되었으며, 현은 군에 속하였다. 그리고 소경과 군에 직접 귀속된 촌들도 있었다. 군의 상급 기관이 주였고, 주와 소경은 조정에 직속되었다. 업무에 따라 중앙에서 군에 직접 하달하고 군에서 중앙으로 직접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밖에 부곡(部曲)과 향(鄕)이 있었다. 이들의 성격에 대해선 일반 군·현의 주민과는 달리 천민 신분에 속하는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특수 행정 단위화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어왔는데, 근래에는 군·현으로 편제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지역을 부곡과 향으로 삼았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각급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주와 군에는 각각 감찰관을 따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10정(十停)이라 하여, 전국의 주요 지점 열 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대를 상주시켰다.
그밖에 지방민의 신앙과 의례(儀禮)의 대상이 되어온 전국의 주요 산과 하천에 대한 제사도 정비하여 중앙에서 간여하였다. 이들 제사는 지방민의 결집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중앙의 각급 관서들도 확충되었다. 그중 왕 직속의 집사부(執事部)가 행정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또 감찰기구인 사정부(司正部)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확충된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군의 핵심으로 9서당을 두었고, 왕실의 경호를 맡는 시위부(侍衛府)를 개편, 강화하였다. 이들 기구는 왕권과 중앙권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물리력이었다.
삼국 시기 이래 관리에 대한 주된 보수 지급 방법은 녹읍(祿邑)을 주는 것이었다. 녹읍은 촌 이상의 단위로 주어졌고, 녹읍의 거주민들이 국가에 내야 하는 조세를 관리가 대신 받아가게 하였다. 이 같은 녹읍은 7세기 후반 신문왕대에 폐지되고, 대신 관리들에게 녹봉(祿俸)이 매달 지급되었다. 이는 녹읍지의 민으로부터 관리가 직접 조(租)를 받는 데 따른 민에 대한 경제외적 침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역시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757년 다시 녹봉제가 폐지되고 녹읍제가 부활하였다. 이는 행정적인 번거로움과 함께 귀족 세력의 반발 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일단 외형상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국가 권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깊숙이 뻗쳤다. 하지만 국가 권력이 촌락 사회에 작용한 정도는 아마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삼국 시기와 비교할 때 집권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비된 통치 조직을 바탕으로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귀족 회의는 존속하였으나 권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왕은 전제군주의 면모를 지녔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전면에 내세워졌고, 충과 효가 주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왕호도 유교식이어서, 6세기에서 7세기 중반까지의(中古期) 불교식 왕명과 차이를 보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시기 구분하면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에서부터 그의 직계 후손인 왕위를 이어간 통일기의 1백여 년간의 시기를 중대(中代)라 하였다. 이런 구분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관료 조직이 정비되고 왕권이 전제화되었지만, 중대의 집권체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관료제는 그 실제 운영에 있어 신분제에 의한 제약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출신 신분에 따라 관직의 임용에서 차별을 받았고, 비(非)진골 신분의 인사들이 승진하는 데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중요 관서의 장은 진골 귀족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 권력은 소수의 진골 귀족 출신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관리의 선발은 보편적인 제도 없이 궁술(弓術)과 추천에 의거해서 이루어졌다. 활이 주요 병장기였던 고대 초기에는 궁술이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주는 기준이 될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결국 관리가 되는 주된 길은 귀족의 천거를 받는 것이었다. 천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 중앙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았다.
이런 관리 선발 방식은 왕권과 중앙 정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근원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진골 귀족의 정치권력을 증대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7세기 후반 통일 전쟁과 새로운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층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귀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골 귀족의 세력이 재차 강화되었으니, 이는 신라 중대의 지배체제를 기저에서부터 위협하는 것이었다.
관부 이름 | 직무 | 장관 |
---|---|---|
집사성(執事省) |
국가 최고 정무 |
중시(中侍) |
[편집] 사회
[편집] 삼국 시대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 만큼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화백회의를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면서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다.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 때문에 중앙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들은 금일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영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우고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도록 하여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펀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몸과 마음을 연마하였다. 화랑은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황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4]
백성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 상당했는데,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척을 넘지 못한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하고, 우물천장을 만들지 못하며, 당기와를 덮지 못하고, 짐승 머리 모양의 지붕 장식이나 높은 처마 등을 두지 못하며, 금이나 구리 등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또 보를 가설하지 못하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대문와 사방문을 만들지 못하고 마구간에는 말 2마리만을 둘 수 있다.
[편집] 남북국 시대
삼국 통일 후 관료 체제가 확충되는 데 따라서 토지 제도상으로도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부 귀족·관료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의 형식으로 토지·인민 또는 노비가 분배되었다. 한편 관리에게 특수한 경우에 세조(歲租)가 지급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소(大小) 족장이었을 관리들은 토지와 인민을 녹읍(祿邑) 형식으로 사여(賜與)받아, 그들 원래의 생활 기반을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끔 보장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화의 추세에서 이와 같은 토지 사여 형식은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왕 때(689년) 내외 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일종의 녹봉제(祿俸制)로서 관료전(官僚田)[5]을 급여하였다.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정전제(丁田制)가 실시되었다. 또한 최근에 와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 문서(民政文書)를 통하여 수취 체제 확립을 위한 신라 왕조의 노력을 엿보게 해준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은 정치 중심지로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여 수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인 5세기 말에 조정에서는 상인으로 하여금 좌상점포(坐商店鋪)[6]를 개설케 하였으나,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시전(市廛)을 갖추게 되고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를 감독케 하였다.
지방에는 행상(行商)에 의한 향시(鄕市)가 일찍부터 벌어져서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한편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이 더욱 성행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역된 물화(物貨)는 각종 금은세공품(金銀細工品)·직물을 위시하여 신라의 인삼, 당나라의 차(茶)와 서적 등이었다. 왕실·귀족과 관서의 수요 물품은 향·소·부곡민의 노역으로 운영된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으로써 생산되었고, 마포(麻布)나 견직물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하였다.
[편집] 농민 생활
평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소수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농민은 촌락 단위로,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정(丁)과 정녀(丁女)인 20세에서 59세 사이의 남녀를 중심으로, 그 이하의 사람들을 조자(助子)·조여자(助女子), 추자(追子)·추여자(追女子), 소자(小子)·소여자(小女子)로, 그리고 60세 이상은 제공(除公)·제모(除母), 노공(老公)·노모(老母)로 분류되었다. 이런 분류에 따라, 노동력 징발 시 각 촌에 부과될 인원이 정해졌다.
촌락 내에 있는 농민의 토지는 논과 밭으로 구분되어 각각 결부법(結負法)에 따라 면적이 조사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세 부과량이 정해졌다. 결부법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조세 부과량을 산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였다. 결부법에서의 계산 단위는 결(結)·부(負)·속(束)·파(把)[7]이다. 파는 한 움큼의, 속은 한 묶음의, 부는 한 짐의 곡식 줄기를 뜻하였으며, 또한 각각 10배씩 증가하였고 다만 100부가 1결이었다. 나아가 각 단위는 곧 그만큼의 수확을 내는 토지 면적을 가리킨다. 아직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농토에 따라 비옥도의 차이가 컸고, 산과 계곡이 많은 자연지형이었으므로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농토의 측량이 여의치 않았던 조건에서, 비교적 손쉽게 면적을 산출할 수 있고 조세 부과에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결부법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 이 같은 결부법에 의거한 양전 사업(量田事業)이 널리 이루어졌다. 이후 결부법은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면적 산정 방법이 수차에 걸쳐 보완되면서 19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당시 농토는 전반적으로 상경화(常耕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토, 특히 그중 밭의 경우는 2~3년에 한 번 경작되었다. 농민들은 조세를 내고 부역을 지는 외에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현물세로 내야 했다.
토지는 국유제가 표방되었고, 722년에 백성에게 토지인 정전(丁田)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 황무지와 같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분여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전국적인 토지 분급이 행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서원(西原)[8] 소경 부근의 네 개의 촌락에 관한 기록을 담은 장적 문서(帳籍文書)에서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沓)’이라 하여, 농민이 가지고 있는 땅을 모두 국가에서 분급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전국의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따른 표현일 뿐이다. 왕토사상은 국가에서 조세 수취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명목이었고, 실제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널리 행해졌다. 단 농민의 토지 소유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편집] 노비
당시 일반 농촌에는 노비가 많지 않았다. 위의 장적 문서를 보면, 전체 인구 462명 중 노비가 25명뿐이었다. 그리고 노비 중 정남과 정녀가 19명이었고, 3년간 태어난 노비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노비가 자신의 호(戶)를 이루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외거 노비(外擧奴婢)가 아닌 솔거 노비(率居奴婢)였을 것이며, 당시 일반 농촌에서 노비의 노동력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을 것이다.
노비의 주된 소유층은 진골 귀족이었고, 왕실이 최대의 노비 소유자였다. 숫자가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신라의 재상가(宰相家), 즉 진골 귀족이 노비를 3천 명이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각지에 농장과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부려 그곳에서 경작과 가축 사육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경우 노비의 예속 형태는 외거 노비였다. 지역적으로 노비가 제일 많이 있었던 곳은 역시 수도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귀족의 대저택이 있었고, 그런 집에는 다수의 노비가 있었다. 수도에 사는 귀족의 노비들은 가내 노동과 귀족의 사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수공업품 생산에도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사찰이 소유한 노비의 경우도 예속 형태가 비슷하였을 것이다.
[편집] 수공업과 상업
신라의 국가 체제 정비와 함께 종래의 재지(在地) 수장층(首長層)이 소유하고 있던 수공업 생산 수단과 기술 인력이 국가와 왕실 및 일부 귀족에 귀속되었다. 지방 장인(匠人)들의 경우 생산품을 특산물 현물세(調)의 형태로 공납하였고, 중앙에선 이들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면은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의 수공업은 장인들의 소속처에 따라, 내성(內省) 산하의 궁실 수공업, 주요 관서에 귀속되었던 관영 수공업, 귀족들의 사영 수공업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장인들의 처지는 국가의 통제하에서 신분화되었다. 장인 중 하급 관등을 받아 골품을 지닌 이들이 있었고, 기술 노역만 제공한 평민도 있었다. 노비로서 생산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궁실 수공업의 주된 노역자였다. 궁실 및 관영 수공업은 국가와 왕실에 소요되는 물품을 할당받아 생산하였다. 귀족의 사영수공업도 주로 골품제의 의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는 등 귀족집안 자체의 수요에 부응하는 형태였다. 이와 같이 수공업은 시장을 상대로 한 상품 생산의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외에 일반 농민의 가내 수공업은 농업과 함께 결합되어 농민층 자신의 수요를 충당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통일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상업이 발달해갔다. 긴 평화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농업 생산이 늘고 계층 분화가 진전되었으며,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인구의 이동이 있게 되고 수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졌으며, 일부 상품의 질도 고급화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초기 당나라와의 조공 무역에서 신라가 보낸 물품은 주로 자연산 특산품이었는데, 이후 점차 고급 비단과 금속 공예품 등이 많아졌다.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금속 제품과 모직물 등을 수출하고, 풀솜과 견직물을 수입하였다. 당시 고급 물품은 주로 수도의 궁실 및 귀족에 소속된 공장(工匠)들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조정도 상업을 장려하여, 수도에 시장이 두 곳 더 개설되었다. 당시 상업에 주요 교환매체였던 견포(絹布)의 길이를 정하는 등의 조치는, 상업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상행위는 금지하였지만 일반 신도들의 상업 활동은 인정하였다. 그리고 유가론(瑜伽論)의 ‘공교명사상(工巧明思想)’이 유포되었는데, 이는 배우고 익힌 기술로 적은 노력을 들여 많은 재보(財寶)를 만들어 모아, 이것을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이익을 줄 것을 강조한 사항이었다. 이는 승려들이 장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논거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실제 당시 유명한 승장(僧匠)이 적지 않았고, 불교 사원에서도 수공업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8세기 후반 이후 집권 체제에 동요가 생기고 국가의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 해외 무역은 조공 무역 외에 점차 민간인이 행하는 사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새로운 부원(富源)을 찾아, 그리고 좀 더 자유로운 인간관계하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바다로 나가 활동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해안 지대 각지에 신라방(新羅坊)이란 집단적인 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신라 상인들에 의한, 신라와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도 성행하였다. 남부 중국의 무역항을 거쳐 수입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산 사치품들이 수도의 귀족층 사이에서 애용되었고, 신라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하기도 하였다. 신라에 대한 지식이 아랍 지역에 알려진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듯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서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신라 하대에 기존의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편집] 문화
[편집] 삼국 시대
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하였다. 반면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도 발전하였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또한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공예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서남아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특기할 만하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왕이나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한편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편집] 남북조 시대
통일 신라의 문화는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통일 신라의 문화가 그처럼 난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경주 부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혜초(慧超)가 대표적으로 이들은 당나라 또는 인도에 가서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했으며, 혜초는 인도에 가서 불적(佛跡)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당시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고승의 배출과 함께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었으니,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 외에 새로이 화엄종(華嚴宗)과 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어 이른바 5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들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족들 사이에 신봉되었다.
원효(元曉)는 여러 종파의 대립·상쟁(相爭)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하려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에 따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 신앙을 대중 속에 널리 유행시켰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선종(禪宗)의 유행이 그것이다.
통일 신라 왕조의 지배층은 불교의 장려와 동시에 유교 사상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지배층이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신문왕 2년(68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으며, 원성왕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學閥)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유학의 보급에 따라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9]이 증가되고, 강수(强水)·설총(薛聰)·김대문(金大問)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당나라의 과학 기술이 수입되어 천문 관측기구가 제작되었으며,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화와 전설이 기록되었고, 통일 전에 발생한 향가(鄕歌)는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삼국 시기의 초기 향가는 아마도 가야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그 시초 형태였던 것 같고, 따라서 민요적인 소박성을 지녔으며, 주술적 기원을 담은 주가(呪歌)의 요소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통일기의 향가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면이 보이나, 주술적 기원을 불교 신앙을 빌려서 행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향가는 신라인의 우아하고 숭고한 이상과 기원을 담은 아름다운 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소개하는 〈제망매가(祭亡妹歌)〉는 그러한 한 예이다. 여기서 작가인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누이와의 사별(死別)을 서러워하면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신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 시기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抒情性)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處容歌)〉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향가의 형식은 원래 4구체(四句體)였던 것 같다. 통일기에도 4구체 향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 다수의 향가는 10구체(十句體)의 정형시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8구체(八句體)의 향가도 지어졌다. 이러한 향가는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 한시로서는 최치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삼교(三敎)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뿐 아니라 변려체(騈儷體)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발달한 미술은 통일 신라의 문화 중 가장 큰 특색을 지니고 그 빛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뛰어난 제작 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신라 미술품 중 가장 정채(精彩)를 발휘하는 것은 석굴암(石窟庵)이다. 조각 미술의 전당을 이룬 석굴암은 김대성(金大城)이 발원(發願)함으로써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미술의 대표적인 것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는 귀족 김대성(金大成)의 원찰(願刹)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된 것이다. 정문인 자하문(紫霞門)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층계와 석축은 신라 당대의 것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대웅전 앞의 좌우에 서 있다. 이 중 석가탑은 통일기 신라 탑의 일반형인 3층 석탑의 대표적인 것이다. 통일기 초에 등장한 3층 석탑인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에선 웅장하고 강건한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석가탑 단계에 오면 극도로 세련된 미적 감각과 절제된 균형미가 무르익어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3층 석탑은 이 단계를 지나면서 세련미가 과도해져 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신라 귀족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의 변화와 유관한 것이다. 다보탑은 신라 석탑의 특수형에 속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려한 모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편집] 군사
신라에는 당(幢)과 정(停)이라는 군제의 기본을 이루는 일종의 군단이 있었다. 당·정은 어떤 표지(標識)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드는 집단, 혹은 단체를 의미한 말로 특히 당에는 크고 작은 많은 종류의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대당(大幢)과 귀당(貴幢)이었다. 대당은 수도 부근에 설치된 듯한 대군영(大軍營) 또는 대군단(大軍團)이며, 귀당은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관구에 두던 군영이었다. 정은 대당·귀당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만 지방 군관 내의 본부·본영으로서 거의 각 주치(州治)에 설치되었다. 당과 정은 지방의 중요성 여하에 따라 개칭되기도 하고 폐지되었다.
[편집] 9서당
9서당(九誓幢)은 신라 삼국 통일 이후 군대 편제의 하나이다. 진평왕 5년(583년)부터 증설되어 신문왕 7년(687년)에 완성된 중앙의 군단(軍團)으로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 부대였던 듯하다. 이는 이국민(異國民)에 대한 반란의 위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한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으로, 금색(衿色)에 의하여 부대를 구별하였다.
[편집] 10정
10정(十停)은 통일 신라의 군대 편제 가운데 하나이다. 9주·5소경의 완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되며, 지방에 배치된 중요한 부대였다. 10정은 가장 지역이 넓고 또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漢山州)에만 2개 정을 설치했으며, 다른 8개 주에는 1개 정씩을 배치했다. 이 10정은 국방만이 아니라 경찰의 임무까지도 담당한 듯하다.
[편집] 신라의 대외 교류
신라의 교역은 주로 상업이나 외교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676년의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며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신라의 주 교역 상대는 당나라과 일본이었고, 발해와도 교역을 했다.
- 수입품
- 당나라 : 비단, 약재, 공예, 서적
- 일본 : 풀섬, 견직물
[편집] 삼국사기의 3기
신라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상대·중대·하대로 나눌 수 있다.
- 상대(上代: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 중대(中代: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 하대(下代: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밖에 제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후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10]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육탁평(六啄評)
- ↑ 지금의 경남 함안
- ↑ 지금의 충주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91~193쪽.
- ↑ 직전(職田)
- ↑ 시전(市廛)
- ↑ 악(握)
- ↑ 지금의 청주
- ↑ 숙위학생(宿衛學生)
- ↑ 신라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8년 7월 8일에 읽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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