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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년,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

예인짱 2009. 3. 7. 21:07

[제13회] 2부작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제1부】 639년,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


▣방송 :2009. 3. 7 (토) 21:40~22:3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김형운 PD
▣글 : 지현주

 

1400년 만에 발견된 미륵사 사리장엄.
미륵사지 석탑1층 해체 조사를 추진하던 중 발견된 유물 683점.

이 중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 창건 주역으로 알려진 선화 공주 대신 사택적덕의 딸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 무왕이 선화 공주의 요청으로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허구였던 것일까?

미륵사 사리장엄의 발견은 백제사를 뒤흔드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639년 익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
▲해체되기 전, 미륵사지 석탑 ▲ 사리공(구멍)에서 출토된 유물들

미륵사지석탑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장대하다. 또 석재를 사용하여 목재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 그 가치가 크다.

◀ 사리호를 X-ray 촬영한 결과, 내부에 사리병이 있음을 확인했다.

2009년 1월 14일 1층 해체 조사를 추진하던 중 미륵사지 석탑의 심주석(탑의 기둥돌)에서 사리공(구멍)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이 발견되었다. 목탑의 경우 심주는 그냥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기 때문에 비록 석탑으로 만들었지만, 목탑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심주에서 무엇이 나올 것이란 예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금제사리봉안기’에 실린 의문의 내용

미륵사와 왕궁지에는 무왕의 소망이 들어있다. ‘미륵사’는 백제의 부흥을 위한 무왕의 마지막 노력이자, 살아있는 백제를 보여 주는 마지막 유물인 것이다.
▲ 금제사리봉안기(앞면과 뒷면)

이번에 발견된 봉안기에는 미륵사 건립 발원자가 “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나 백제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이번 사리장엄의 출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


◀'중부덕솔지율시금일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 라는 명문이 새겨진 <금제소형판> ‘중부 덕솔이 금덩어리 한 개를 바쳤다'는 의미로, 백제의 4품 벼슬인 덕솔이 사리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주는 첫 유물이다.

백제시절 왕이 주도하는 사리 공양에는 몇 급 관리까지 참여했을까. 사리장엄에서 발견되는 금제소형판은 백제의 4급 관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 주는 유물이다. 이는 사리 공양에 참가하는 백제 관리들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양 참가자의 직위가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이를 통해 관료 중에서 4급 인물이 사리 공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은제 관식> 얇은 은판을 겹쳐 대칭되게 제작한 관식이다. 중심 줄기 좌우에 당초문과 꽃봉오리 형태로 장식하였다. 관식은 당초문과 꽃봉오리 장식 1단과 2단의 2종이 확인되었다.

사리장엄에서 출토된 은제관식
2개를 분석하면서 한 개는 매우
정교하게 세공돼 있고, 다른 하나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점에 비춰, 1,2,3급이 착용하는 은제관식과 4,5,6급이 차는 은제관식으로 나눠졌을 가능성이 있어 백제의 관등 조직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물이 되고 있다. 사리기에서 무왕은 ‘대왕폐하’로 아내는 ‘왕후’로 지칭하고 있어 당시 백제의 자주적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물고기알 무늬(어란문: 魚子紋)를 가득 찍는 것은 중국 수·당 때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퍼진 서역 기법인데, 삼국시대 사리기에서 온전히 표현된 사례는 처음이다.

과연 서동요 설화는 허구인가?

미륵사와 왕궁지에는 무왕의 소망이 들어있다. 관세음응험기와 익산 천도, 왕궁리 석탑의 사리장엄은 무왕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미륵사’는 마지막 백제의 부흥을 위한 무왕의 애끓은 증표이자 살아있는 백제를 구현해 주는 마지막 유물인 것이다.
▲ 출토된 유물들

《삼국유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왕자가 왕이 된 후 용화산 아래 미륵사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왕이 ‘서동요’를 퍼뜨려 결혼한 왕비 선화 공주가 절을 발원했다는《삼국유사》기록은 진실일까? 그러나 이번에 석탑 조성의 내력을 밝힌 금제 사리봉안기를 통해, 미륵사 창건 주체가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짐에 따라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 자체도 의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그들은 설화처럼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2부에서는《백제판 사랑과 전쟁-서동, 선화공주를 버렸나》편이 방송됩니다.

2부작,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제2부《백제판 사랑과 전쟁-서동, 선화공주를 버렸나》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깨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 1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 발굴로 등장한 사택왕후는 누구이며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의 진실은 무엇인가? 삼국유사 무왕조에 담긴 진실과 백제무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익산 경영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