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우리의 성과 성곽에 대하여

예인짱 2009. 1. 28. 10:22

 

 

 

한국의 성 종류 및 구분



① 입지조건
·고로봉(  峰) : 산의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아 넓은 지형, 즉 분지형으로 그 전형은 남한산성이다. 이런 지형은 성 밖에는 성 안의 동정을 살필 수 없고, 충부한 수원과 넓은 활동공간을 갖는 장점이 있다.

·산 봉 (蒜 峰)  : 꼭대기가 평탄하고 넓으며 사방이 절벽처럼 급격한 경사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문자 그대로 마늘모양으로 생긴 것.

·사모봉(紗帽峰) : 배후에 장용대(將臺用) 봉우리가 있고 산이 마치 밀짚모자 혹은 사모관대처럼 생겨, 그 아래 민중을 수용하게 된 산새.

·마안봉(馬鞍峰) : 2 좌(座)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양쪽 끝이 높으며 그 가운데가 약간 낮고 잘록하게 들어가고 낮아져서 마치 고개나 말안장처럼 생긴 지형으로 이런 지형에 축조된 산성은 그 여건에 따라 산정식·포곡식·복합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② 축조방식
·산정식(山頂式) : 테뫼식이라고도 한다. 산봉우리를 돌려 쌓은 작은 산성들이 많은데, 옆에서 본 모습이 테를 맨 모양 같고 흡사 시루 번을 바른 것 같아서 지방에서의 호칭이 시루메, 테뫼, 퇴메라고 부른다.  

·포곡식(包谷式) : 계곡을 포함한 2개 이상의 산꼭대기를 두른 산성으로, 가운데 시내나 개울이 있으며, 성문이 그 수구에 있다. 이와 같이 성 안에 계곡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농성을 할 때, 생활에 필수적인 물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이다. 위에서 말한 고로봉 형이 이에 속한다.

·복합식(複合式) : 테뫼식과 포곡식의 중간 형태로서, 정문 방향의 성벽을 산중턱까지 내려서 밖은 험하고 안은 평평하게 만든 형태이다. 테뫼형이 발전된 형태여서 변테뫼형이라고 부르는 견해도 있는데,  위에서 말한 사모봉형이 이에 속한다.  

③ 산성의 기능 (서애 유성룡의 설명)  
·적의 장기인 조총(鳥銃), 창도(槍刀), 돌투(突鬪)가 소실되고, 아군의 단점이 보강된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는 입보(入保)농성(弄聲)으로 민심이 흔들리거나, 적에 붙거나, 적에 징발되어 돕는 이적행위를 못하게 한다.
· 전투수행의 정신면에서 소극적인 수비용만이 아니라, 진격하여 적을 타파하는 공격적인 방법을 쓸 수 있다.  
·교전시의 효용으로 군·관·민이 같이 입보(入保)하여 농성 사수함으로써 일치 단결하는 협화정신이 생겨 죽음으로써 적을 막는다.
·그 기능에 있어 이웃 나라인 중국·일본과 서유럽의 성의 차이가 있으니, 그들의 성곽이 지배자만의 저택이나 거성이었던데 대해, 우리의 산성은 모두가 같이 들어가 지키는 서민적 의의가 있었다.
·적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에도 전국적인 전쟁준비를 갖출 동안 임전태세가 끝날 때까지 적의 예봉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적이 아군의 강력한 항전이나 전선을 피하여 우회하여 직진해올 때, 그 배후를 차단하거나 포위할 수 있다.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으로서, 성곽은 방어용 축조물이어서 그것을 쌓을 당시까지 도달한 모든 정치·경제·사회·문화·기술의 일체를 동원하여 사회 문화상을 반영하게 된다.

구분에 따른 성 분류
① 거주 주체
·도성(都城) 또는 경성(京城) : 도읍 주위에 쌓은 성. 또는 왕궁에 있는 성. 재성·행재성.
·읍성(邑城) :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고을 즉, 읍 전체를 둘러쌓은 성.

② 지형
·평지성(平地城) : 바닥이 편평한 평지에 쌓은 성. 옛 성지에 많다.
·평산성(平山城) : 평지와 산에 걸쳐 쌓은 성. 뒤에 산성을 의지하여 앞에 평지를 가진 성.
·산성(山城) : 하나의 산을 두르거나 두 개의 산과 그 사이의 계곡을 둘러 싼 우리나라 전형(典型)의 성으로 주로 산에 의거해 쌓았다.

③ 지리적 위치
·국경성(國境城) : 국경의 방비(관방(關防))를 위해 국경지대에 쌓은 성.
·해안성(해안성) : 적이 침입하기 쉬운 해안의 요소에 쌓은 성.
·강안성(강안성) : 강을 방비하기 위해 강가 언덕에 쌓은 성.
·내륙성(내륙성) : 해안지대에 대하여 바다에서 널리 떨어져 있는 육지에 쌓은 성.

④ 축성 재료
·목책성(木柵城) : 나무 말뚝을 촘촘히 세워서 박아 울타리처럼 만든 성으로 가장 초기에 토성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
·토성(土城) : 흙으로 쌓은 성으로, 순수한 토축성을 말한다.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 토성 중 그 견고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속에 막돌이나 판돌을 섞어서 다져 쌓은 성이다.
·토석성(土石城) : 일부 구간은 토성으로 쌓고, 계곡이나 유실되기 쉬운 곳에는 석성으로 하여 견고하게 쌓은 성이다.
·석성(石城) : 돌을 재료로 하여 쌓은 성인데, 돌은 막돌(자연석·호박석)과 다듬은 돌 등이 있어 종류가 많다.
·전축성(塼築城) : 벽돌로 성벽을 쌓은 성을 말하지만, 시대와 제작용도에 따라 다르다. 성벽의 일부분 즉, 여장이나 전체의 공심돈(空心墩) 등에 쓰이며 아주 견고하다.

⑤ 구조의 평면 형태
·방형성(方形城) : 평면 형태가 네모 반듯한 정사각형의 성으로 평지성에 많다.
·원형성(圓形城) : 평면 형태가 둥그런 원형의 성으로 역시 평지성에 많다.
·부정형성(不定形城) : 평면 형태가 바탕이 되는 지면의 제약으로 부정형인 성이다.
·장성(長城) : 국경지대 같은 곳에 길게 연달아 있는 성. 고구려와 고려의 천리장성, 신라의 관문성이 있다.
·차단성(遮斷城) : 국경이나 요새지 등을 가로막아 적을 방비하기 위해 길게 쌓은 성으로 평야나 중요한 고개, 산맥에 쌓여 있다.

⑥ 성의 중복도
·단곽(單郭) : 성의 둘레를 단 한 겹으로 쌓은 것을 말하며 대개의 작은 성들이 이에 해당되고 있다.
·중곽(重郭) : 큰 둘레의 단곽 안에 성 안의 주요 부분을 둘러 싼 작은 성이 한 가운데나 한쪽 귀퉁이에 치우쳐 있는 2중 성곽이다.
·외성(外城) : 성이 2중으로 되어 있는 경우의 바깥 성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산꼭대기에 있는 내성은 석성, 외성은 토축이 많다.  
·나성(羅城) : 본성의 한쪽에서 시작하여 돌아나간 성이다.


조선의 성곽



가. 조선전기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 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연해(沿海)읍성의 축조가 계속되었으며, 한편 북방 변경에서는 행성(行城)의 축성이 이루어졌다. 우선 새 왕조의 창업에 따른 도성의 축조가 있은 뒤 여러가지 제도와 문물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국방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각지에서 읍성이 활발하게 축성되었다. 특히 세종, 성종대에 읍성 축조가 활발해져 이제까지 읍성이 없던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고려시대의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는 한편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한성부의 경우 고려때 南京 또는 漢陽이라고 부르던 것을 태조 3년(1394년) 10월에 궁궐 및 종묘, 諸관아 등의 조영이 착수되고 다음해에 완성되면서 한성부로 개칭되었다. 천도전의 한양은 楊洲라고 불리는 寒村으로 고려조에 「道詵密記」에서 “개국후 106년이 지나서 도읍을 木覓壤으로 옮기라”는 도참사상에 따라 이 곳을 문종21년(1067년)에 남경 유수부로 승격하고 신궁을 창건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한성부의 계획은 주례「고공기」에 따르는 것으로 나타나며 1鄕을 9聚로 1聚를 9區로 구분하였고 진산은 白岳을 중심으로 좌측용, 우백호를 따라 성을 축조하여 이를 안산인 木覓山에 연결시켜(약18km) 도성의 범위를 결정한 후 백악을 배경으로 주궁인 경복궁을 앉히고 부주산격인 鷹峯을 배경으로 창덕궁을 배치한 다음 경복궁의 동쪽인 연화방에 종묘를 건설, 서쪽인 仁達坊에 사직을 경복궁 전면에 6조를, 그 후면에 시전을 배치하였다.
성곽 축성 기술도 세종 때에 이르러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도성의 축성에서 화강암 뿐만 아니라 철과 석회를 사용하기도 했다. 세종 때에는 두만강 연변과 압록강 상류 유역을 개척하여 6진과 4군을 설치하게 되었고 영토의 확장에 따라 압록강, 두만강 연변을 따라 장성을 축조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산성 축성이 크게 유행하였다. 창녕의 화왕산성, 선산의 금오산성, 나주의 금성산성 등이 수축되고 성주의 흘골산성(紇骨山城), 덕주의 금성, 삭주성 등이 신축 또는 개축되었다.

나. 조선후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의 심상치 않는 동정에 우리 조정에서는 비로소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경상, 전라, 충정도의 방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주로 평지에 산성을 쌓았던 관계로 임진왜란에서 패전을 겪고 나서 조정에서는 서둘러 험준한 산에 성곽을 설치하고 산성을 수축하였다. 남원의 교룡산성, 정읍의 입안산성, 건달산성, 합천의 이숭산성 등이 이때 축조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종래 우리나라 성곽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어나면서 그 개선책이 논의되었는데 특히 실학자들은 돌보다는 중국의 벽돌로 성을 쌓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뒤 실제로 축성을 벽돌을 사용한 것은 수원 화성을 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수원 화성은 벽돌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성곽 사상 가장 완벽한 제도를 갖추었으며 거중기와 활차 등 근대 과학기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增補文獻備考」와 「新增東國輿地勝覽」을 기초로 읍성을 정리(1982년 김의원 조사)하여 보면 전국적으로 읍성은 194개에 이른다. 이중 수도 한성부와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開城, 江華, 華城, 慶州는 중앙의 직할로 유수부를 정하고 京官職을 배치함으로써 왕실의 호위와 수도의 안전을 꾀하였다.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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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城郭)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과 창신동 일대
지정번호: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전쟁을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시설이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듬해인 1396년에 모두 20만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그로부터 26년 후인 세종4년(1422)에 모두 돌로 쌓은 한편,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으며, 그 후 몇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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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곽은 높이가 12M, 둘레가 약18KM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잇고 있는데 그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 성곽에는 각각 동쪽과 서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과 돈의문(敦義門), 남쪽과 북쪽에 숭레문(崇禮門)과 숙청문(肅淸門)의 사대문(四大門)을 냈으며, 북동쪽과 남동쪽에 홍화문(弘化門)과 광희문(光熙門), 북서쪽과 남서쪽에 창의문(彰義門)과 소덕문(昭德門)의 사소문(四小門)을 냈다.

*.중구와 종로구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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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은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도시계획의 명목아래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한국전쟁 혼란기에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1975년부터 종합적인 서울 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울 성곽은 우리 선조들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쌓은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 길이 보존해야 할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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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은 역사유적지로서의 가치도 귀중하지만 도시경관적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성곽이 있는 낙산일대에 세워졌던 낙산아파트등의 노후화된 주택들을 헐고 동쪽축의 수림대를 조성하여 날로 콘크리트숲으로 변해가는 삭막한 도시풍광을 자연친화적인 삶의 장소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낙산에서 바라다보는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서울의 경관을 전망 할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서의 입지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러한 귀중한 장소가 역사와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에서 서울성곽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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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 성곽. 둘레 약 17 킬로미터. 면적 59만 6,812제곱미터. 1396(태조5년)에 축성되었는데 성벽은 백악, 낙산, 남산과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그 길이는 영조적으로 5만 9,500자인데 이길이를 천자문의 97자 구획으로 나무고 매자구간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로 시작되었다.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구역으로 끝났다. 이 때 쌓은 성벽은 석성 1만9200자, 평지의 토성 4만 300자이며 수구에는 홍예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 높이는 16자 석성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자였다. 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을 냈다. 홍인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으나 남대문은 1396(태조5년)에 동대문 옹성은 99년에야 완성을 보였다. 1422년의 도성수축공사때에는 토성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성벽의 수리는 51년에도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참변을 당하였고 1616년에 일부가 수리되었다. 그 후에도 1704년,43년에도 수술을 받았으며 1869년의 동대문의 개축을 끝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현재에는 삼청동,성북동,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있다.

남한 산성

 

 사적 제 57호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인조때 쌓은 산성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중의 하나로 신라문무왕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의 기록에 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 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26년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들이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고 인조때부터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73간반 하궐 154간이었다. 재덕당은 1688년에 세워졌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천이 세워졌다. 그리고 사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워졌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에 수리되었다. 관아로서는 좌승당,일장각,수어청,제승헌등이 군사기관으로서는 비장청,교련관청,기패관청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마랑,뇌옥,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서낭당, 여단등이 들어서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는 승려 각성의 도총성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 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남단의 7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의 수리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라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현재는 서장대 하나만이 남아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간, 측면 3간이고, 위층은 정면 3간,측면2간이다. 지붕은 팔짝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있다. 성문은 홍예문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올려세웠는데서문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 이시백이 축성후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를 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으니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남한산성지도>


수원 화성

 

원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정조가 동왕 13년(1789) 그의 생부인 장헌세자(속칭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후에 융릉으로 추증함)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부왕인 장조에 대한 효심과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료되었다.

 이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여 거중기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암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심돈 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대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18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가 파손되어있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남각루까지의 491m구간과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하였다. 1997년12월 4일 이태리 나폴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불국사(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전), 종묘(제례)에 이어 네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韓國의城

 水原 華城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1794년 1월에 착공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八達門과 옹성(甕城) (보물 제420호)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문으로 규모와 형태면에서 중국의 장안문과 거의 같다

長安門

이 문은 화성 4대문의 북쪽 문으로서 정조 18년(1794년) 건축되었으며

중국의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이를 정조가 북문의 이름으로 정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중국 漢,唐의 서울이었던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

이름을 장안문이라 하였다.

長安門

華西門  (보물 제 403호)

 華西門

  蒼龍門

西將臺

西弩臺

 西北空心墩

東二砲樓

東南角樓

烽墩 (봉화대)

 화홍문 (華虹門)

 

訪花隨柳亭

訪花隨柳亭

 

 

 

華城行宮

 

 

 

 

 

 

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대서문이 남아 있으며, 성체(城體)는 복원되어 완전히 보존되었다.

 

 

 

 

 

 

 

 

 

 

 

 

 

 

 

 

 

  南 漢 山 城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신라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그러나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남문 -지화문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

연주봉옹성

 

낙서장

 

 

 

 

 

 

  남한산성행궁지

  

   

  산성에서내려다본 서울

장녹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