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 종류 및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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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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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城郭)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과 창신동 일대 지정번호: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전쟁을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시설이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듬해인 1396년에 모두 20만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그로부터 26년 후인 세종4년(1422)에 모두 돌로 쌓은 한편,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으며, 그 후 몇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 성곽은 높이가 12M, 둘레가 약18KM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잇고 있는데 그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 성곽에는 각각 동쪽과 서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과 돈의문(敦義門), 남쪽과 북쪽에 숭레문(崇禮門)과 숙청문(肅淸門)의 사대문(四大門)을 냈으며, 북동쪽과 남동쪽에 홍화문(弘化門)과 광희문(光熙門), 북서쪽과 남서쪽에 창의문(彰義門)과 소덕문(昭德門)의 사소문(四小門)을 냈다. *.중구와 종로구 파노라마서울 성곽은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도시계획의 명목아래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한국전쟁 혼란기에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1975년부터 종합적인 서울 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울 성곽은 우리 선조들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쌓은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 길이 보존해야 할 유적이다. 서울성곽은 역사유적지로서의 가치도 귀중하지만 도시경관적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성곽이 있는 낙산일대에 세워졌던 낙산아파트등의 노후화된 주택들을 헐고 동쪽축의 수림대를 조성하여 날로 콘크리트숲으로 변해가는 삭막한 도시풍광을 자연친화적인 삶의 장소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낙산에서 바라다보는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서울의 경관을 전망 할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서의 입지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러한 귀중한 장소가 역사와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에서 서울성곽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
서울 성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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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0호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 성곽. 둘레 약 17 킬로미터. 면적 59만 6,812제곱미터. 1396(태조5년)에 축성되었는데 성벽은 백악, 낙산, 남산과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그 길이는 영조적으로 5만 9,500자인데 이길이를 천자문의 97자 구획으로 나무고 매자구간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로 시작되었다.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구역으로 끝났다. 이 때 쌓은 성벽은 석성 1만9200자, 평지의 토성 4만 300자이며 수구에는 홍예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 높이는 16자 석성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자였다. 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을 냈다. 홍인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으나 남대문은 1396(태조5년)에 동대문 옹성은 99년에야 완성을 보였다. 1422년의 도성수축공사때에는 토성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성벽의 수리는 51년에도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참변을 당하였고 1616년에 일부가 수리되었다. 그 후에도 1704년,43년에도 수술을 받았으며 1869년의 동대문의 개축을 끝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현재에는 삼청동,성북동,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있다. |
남한 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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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57호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인조때 쌓은 산성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중의 하나로 신라문무왕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의 기록에 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 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26년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들이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고 인조때부터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73간반 하궐 154간이었다. 재덕당은 1688년에 세워졌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천이 세워졌다. 그리고 사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워졌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에 수리되었다. 관아로서는 좌승당,일장각,수어청,제승헌등이 군사기관으로서는 비장청,교련관청,기패관청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마랑,뇌옥,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서낭당, 여단등이 들어서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는 승려 각성의 도총성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 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남단의 7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의 수리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라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현재는 서장대 하나만이 남아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간, 측면 3간이고, 위층은 정면 3간,측면2간이다. 지붕은 팔짝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있다. 성문은 홍예문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올려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 이시백이 축성후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를 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으니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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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지도> |
수원 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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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정조가 동왕 13년(1789) 그의 생부인 장헌세자(속칭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후에 융릉으로 추증함)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부왕인 장조에 대한 효심과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료되었다. 이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여 거중기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암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심돈 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대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18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가 파손되어있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남각루까지의 491m구간과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하였다. 1997년12월 4일 이태리 나폴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불국사(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전), 종묘(제례)에 이어 네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
韓國의城
水原 華城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1794년 1월에 착공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八達門과 옹성(甕城) (보물 제420호)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문으로 규모와 형태면에서 중국의 장안문과 거의 같다
長安門
이 문은 화성 4대문의 북쪽 문으로서 정조 18년(1794년) 건축되었으며
중국의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이를 정조가 북문의 이름으로 정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중국 漢,唐의 서울이었던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
이름을 장안문이라 하였다.
華西門 (보물 제 403호)
華西門
蒼龍門
西將臺
西弩臺
西北空心墩
東二砲樓
東南角樓
烽墩 (봉화대)
화홍문 (華虹門)
訪花隨柳亭
訪花隨柳亭
華城行宮
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대서문이 남아 있으며, 성체(城體)는 복원되어 완전히 보존되었다.
南 漢 山 城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신라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그러나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남문 -지화문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
연주봉옹성
낙서장
남한산성행궁지
산성에서내려다본 서울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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