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예인짱 2008. 12. 17. 14:27

1912년 5월 25일 덕수궁.

이 날,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탄생합니다.


덕혜옹주의 돌 사진입니다

아버지 고종황제를 쏙 빼어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요.

일제 강점기 하에서 우울하게 지내던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굉장히 사랑하여

그녀를 낳은 궁녀 양씨에게 즉시 복녕당 당호를 내리고

태어난 다음날 아기를 보기 위해 복녕당으로 친림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행차했을때 덕혜옹주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 변복동이

황제 앞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1916년에 고종황제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함녕전 옆의 즉조당을 개조해 만든 유치원인데,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 중 가운데 앉아 있는 소녀가 바로 덕혜옹주입니다.



황실 가족사진 -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는 이 사진에 대해 모두 모여 함께 일본 요리로 식사를 한 후 찍은 사진이라고 전한다. 즉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는 가족사진인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당의 차림의 덕혜옹주.

이 흑백 사진을 바탕으로 동강 권오창 화백이 아래의 진영을 그렸습니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일출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 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덕혜옹주와 동급생, 선생님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덕혜옹주(오른쪽)가 다른 학생들보다 높은 좌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대박물관 '마지막 황실,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쪽에 학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조선 내의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학교라서 덕혜옹주도 때때로 일본옷을 입곤 했습니다.


 


소녀 시절의 덕혜옹주.

명목상으로는 유학이었지만 반강제로 일본에 온 덕혜옹주는

오빠인 이은 황태자 부부의 거처에서 지내며 우울함을 달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순종황제가 붕어할 때마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괴로워했고

이게 훗날 그녀를 정신병으로 몰고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얻은 스트레스도 그것에 일조했겠지만요


결혼식날의 덕혜옹주.

1931년 5월 8일에 덕혜옹주는 대마도주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식을 합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양친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 다케유키는 그의 후견인인 구죠 공작(다이쇼 국왕의 왕비 사다코의 친정 오빠입니다.) 부부,

덕혜옹주는 이은 황태자 부부, 이런식으로 결혼식을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결혼은 일본에서 주도해 억지로 맺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남편 소 다케유키(종무지)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속 두 사람은 다정해 보입니다.

항간에는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못살게 굴어서 그녀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금슬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마사에라고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양쪽의 이름을 합한 의미를 지니는 이름이 바로 마사에(정혜)...)

하지만 대체 이렇듯 행복해보이는 부부가 왜 종국에 가서는 파경에 치달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아무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발병해 도쿄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되고,

남편과의 관계도 끝납니다.

1951년 경에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서 처음 만난 김을한 기자는

(이 사람은 훗날 이은 황태자 부부와 덕혜옹주의 한국 귀국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웁니다.)

큰 충격을 받습니다.


 

감옥 모양으로 쇠창살이 쳐진, 아무도 없는 독방에, 11월인데도 맨발로 앉아 있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버린 덕혜옹주.


 

나중에 김을한 기자가 동분서주하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도움으로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생존해있던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고,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덕혜옹주를 본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풀각시처럼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 상태에서 아래 사진을 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부축을 받으며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가는 덕혜옹주.

이 때 순정효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덕혜옹주는

정신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상황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궁중 예법대로 절을 올려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마치 정상인이 행동하는 듯이 그랬으니까요.


덕혜옹주의 회갑날.

가장 왼쪽은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그녀 옆에 앉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저 할머니가... 바로...

'덕수궁의 꽃'이라고 불리던...

덕혜옹주...


왼쪽에서 두번째가 덕혜옹주입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나들이를 하거나, 상궁들과 화투를 치기도 했습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얼마 전에 훙서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가리킵니다)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홍유릉 뒷편에 모셔집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의 곁으로...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