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영계의 세계

구속사에 있어 마귀의 역할

예인짱 2008. 10. 6. 19:53

구속사에 있어 마귀의 역할

                           이근호 목사


Ⅰ. 서론

구속이라니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지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넓게 볼 줄 안다.
성경이라는 것이 인간의 필요나 인간 세상의 문제점을 치료하는 참고서 역할이나 하는 책이 아니다. 그런 각도의 이해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다 초점을 맞춘 잘못된 이해이다.
신약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아마 마귀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면 자칫하면 그런 조롱을 받을 수 있다.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고 모호하고 애매한 주제로 들려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구속사적 기능을 알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로 파악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의미와 우리들의 구원의 가치도 이해 못하게 된다. 잘못된 예수관과 구원관은 기실 마귀가 바라고 또 바라던 바였다.
마귀가 소원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소위 목회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고 있는 실정에 있다. 물론 배후에는 마귀의 작전이 개재되어 있다. 하나님보다 교회를 복음의 기쁨보다 교회 봉사에서 오는 노동의 보람을 강조하는 식으로 교훈하고 있다. 모든 교회 행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진리보다 교회라는 조직을 더욱 중요시하게 만들었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라는 조직체의 힘이며 질서이며 권위이다. 이러한 사탄의 위세에 교인들이 눌려 있으면서도 진리네 눈이 어둡고 또 그 진리를 배타시 하며 자청해서 마귀의 종이 되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보이는 질서와 권위로부터 지배받는 쾌감으로 교회에 다니고 또 거룩하다고 믿고 싶은 조직에 소속이 되었다는 안도감을 구원의 안도감으로 이해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문제를 쉽게 가져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편이 되질 못하고 더욱 더 마귀의 분위기로 교회가 급속히 바뀐다. 마귀는 더욱 더 교묘하게 광명의 천사 짓을 하면서 자기 세력을 교회의 요소 요소에 잠입을 시켜 나가게 된다. 이렇듯 개탄할 만한 현실에 대해 마귀의 성경적 입장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다.
그리고 하나 주의할 점은 오늘날 마귀의 활동을 단순히 정신 병리 현상에 국한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Ⅱ. 본론

1. 마귀의 역할
마귀가 인류 역사 전면에 등장해서 인간과 관계하는 시점은 에덴 동산에서 살던 시절부터이다.
뱀을 통해서 마귀가 노린 점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왜 마귀가 이런 시도를 하게 되는가? 우선 마귀가 어떻게 해서 선악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귀가 선과 악에 괸여하는 천상적인 존재인 것이 스가랴 3:1에 나와 있다. 거기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를 비난하는데 단순히 마귀는 자기가 이왕 타락한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신세로 인간들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 고자질한다고 여겨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욥기 1:7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세상을 탐지하고 형편을 알아보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사찰(査察)의 역할은 마귀의 고유 기능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땅을 사찰 하는 기능의 천사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다. 마귀가 조사한 것을 근거로 해서 심판의 천사, 죽음과 저주의 천사를 세상에 보내어 불의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 19장에서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기 위해 두 천사가 파견된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역할은 명확히 정리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의 선과 악을 조사하여 하나님께 보고하는 역할이다. 그러면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 마귀가 왜 여자에게 다가와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부추기는가? 이것도 이 천사의 고유 권한인가?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자를 유혹한 것에 대해서 뱀에게 저주가 떨어진 것을 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귀가 여자를 유혹한 것은 자기의 권한을 벗어난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왜 마귀가 이런 왜곡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지를 창세기 3장의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마귀의 속성이 노골화될 때 나타난 바에 의하면 [교만]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여 진다. 세상을 선악 체제 안에 묶어 둘려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점은 신약에 가서 에수님의 구원의 의미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날 것이고 우선 창세기 3장에 국한해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마귀에 대한 저주는 왜곡된 성품이 아니라 그 성품으로 인해 인간 역사의 검은 점을 남게 한 결과를 가지고 저주하고 있다. 그래도 그 이후 마귀는 변함없이 여전히 고소하고 고발하고 죄악들을 탐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왜 하나님은 당장에 여자를 유혹한 죄로 영원한 멸망으로 안 데려가는가? 그것은 마귀를 봐 주기 보다는 구원사에 있어 마귀의 고유 기능이 요긴했기 때문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에 담겨 있는 비밀을 밝히는데 마귀의 선악에 근거한 고발 기능과 고소 기능이 동원된다.
만약 참으로 인간들이 하나님께 범죄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고소하는 마귀의 말을 듣고 자기 백성이라도 심판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사탄 앞에서 칭찬한 것을 봐서 능히 선악의 굴레를 이길 참된 인간도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도 자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선악을 이긴다는 것 자체가 곧 사탄을 이기는 것도 되는데 이는 사탄이 파 놓은 선악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게 됨을 뜻하며 동시에 사탄의 고발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경우이다. 이처럼 인간과 마귀의 싸움 장으로 변해 버린 세상의 모습은 창세기 3:15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죄악의 굴레로 뒤집어 씌어 인간들로 하여금 심판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조처하는 마귀와 그런 와중에서도 여호와께서 제공하신 은혜의 손길로 나아가는 인간들의 갈등과 싸움이 인류 역사의 주제가 된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두 편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하나는 여자의 후손 편이고 다른 하나는 뱀의 후손 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세상을 두 패로 나누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왜 하나님은 저주받지 않도록 보호하시는가? 그것은 아벨에게 담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가치를 부각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 증거가 노아때 가서 제대로 보여진다.(창세기 5:29) 가인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아벨을 택한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선과 악이 추구하는 것은 물론 공정한 심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 안에서 자기들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고자 한다. 그래야만 안식이 유지되기 때문이다.(창세기 2:1-3) 여기에 마귀의 고발 기능이 필요한 것이다. 마귀의 고발 기능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정당화되고 영광을 받으신다. 인간은 세상의 저주와 자기의 실패를 근거로 해서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 죄의 삯은 사망으로 돌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 약속의 내용 속에는 인간의 죽음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저주와 멸망도 들어 있다. 하나님은 고발 자의 멸망 속에서 고발이나 정죄의 범주를 벗어난 새로운 방식의 창조를 마련하실 정당성도 생기게 된다. 뱀의 유혹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겨진다. 즉 고발자, 그 자체에 대한 심판이 성립되면 두번 다시 정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재가 탄생할 근거가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약속을 기초로 하여 마귀를 멸할 구원자의 파견도 정당성을 갖게 되는데 이 구원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새로운 질서의 차원은 은혜의 차원에 의해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될 것이다.

2. 마귀의 타락 본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점

사실 마귀는 천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지상의 인간들에 의해서 지배받거나 지시를 받지 아니한다.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지시를 받는 그런 천상적 존재(천사)의 위치에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 천사들을 이용한다. 천사들은 하늘의 지시에 따라 천체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동원된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자연적인 모든 현상들과 우주에 떠 있는 천체들의 운동도 그 배후에는 천사들이 조종하고 있다. 그러기에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들이 볼 때에 그들의 움직임이 징조가 되고 하나님의 의중을 파악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체들의 질서 정연한 운동들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비의 심사를 보여주는 것이며 노아 계약의 변함없는 유지를 말해 준다. 그러나 천체의 이상스러운 변동 사항이 나타나면 이것은 하나님의 화내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불안정한 세상의 조짐은 심판을 경고하는 그림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 전달에는 그 수단으로 천사들이 분주하게 동원되는 것이다.(창세기 28:12에 보면 야곱언약을 이루기 위해 천사들이 부지런히 사다리 위에서 움직인다.)
또한 천사들은 국가들을 지탱하고 그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움직이는 역할도 담당한다. 신명기 32:8에 이런 말씀이 있다. "지존하신 이께서 만방에 땅을 나누어주시고 인류를 갈라 흩으실 때, 신의 아들들의 수효만큼 경계를 그으시고 민족들을 내셨지만"
위의 구절에서, 하나님이 이 지상의 사람들을 각 나라로 갈라놓으실 때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만큼 나라를 만드셨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다스릴 하급의, 열등한 신들의 수효만큼 그 나라의 수로 제한하셨다는 것이다. 각 나라는 그 나라를 다스릴 하나님의 부하 하나씩을 배당 받았다. 하나님의 대리자 한 사람마다 나라 하나씩이 주어졌고, 하나님의 아들(여기서는 천사) 하나 하나가 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 다시 말하면 열등한 천상적 존재들을 통해서 세상 나라를 다스렸다. 물론 이스라엘만은 대리자 없이 직접 하나님 자신이 계약을 통해서 통치하려 했다. 물론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이 이방 종교를 찾을 때 이미 스스로 이스라엘 됨을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타 민족을 통제하는 천사들을 지시하여 동원시켰는데 그 천사들이 도에 넘치는 징벌로 말미암아 그들로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오죽하면 다니엘에서 짐승이라고 표현이 될까? 노골적으로 마귀의 본색이 드러나는 시점이 바로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을 통해 하나님께 징계 받는 시점이다.
유대, 이스라엘이 망할 때 주변 국가들은 하나님의 몽둥이로만 제 자리를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앗수르를 비롯하여 보듯 주변 국가들은 언약의 국가의 멸망과 쇠퇴를 기뻐하면서 놀리고 조롱하기 시작했다.(이사야 10:15-16, 13장-23장/ 오바댜 전체)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단호하게 저주와 멸망을 경고했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교만 때문이다. 평소에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은혜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니 그들은 좋아라 하고 그 징계의 기능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자기네 세상으로 장악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제대로 세상 종말론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 등장된다.
이방 나라에 대한 단호한 멸망 선포는 모두 다 그들이 언약의 공통체인 이스라엘에게 행한 태도로서 가름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퇴폐 하기를 학수 고대 했던 민족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는 곧 여호와에 대한 저주로 이어진다. 창세기 12:1-3에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멸망의 대상을 가려내신다. 사실 마귀는 그 배후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숨어 있는 배후 조종자를 역사 전면에 들추어내는 작업은 기존의 선악 체제에 기초한 국가와는 달리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국가를 세상 한가운데 던져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출애굽기와 민수기 23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의 천덕꾸러기의 나라로 대우받는다. 특히 민수기 23장 21절에서"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 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특별히 배려하는 국가의 형태로 이스라엘은 세상 가운데를 지나간다. 아무리 발람 선지자가 저주를 하려고 해도 오히려 하나님은 그 저주를 복으로 돌려놓는다. 이런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던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하나님의 계약이 순수하게 유지되지 못하게 되자 역사적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붕괴되고 만다. 그런데 역사적 이스라엘의 붕괴가 곧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소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인 왕의 실패로 붕괴가 된 언약 공동체의 약점이 초월적인 왕의 등장으로 회복된다.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점령했던 민족들의 교만을 누가 징벌할 것인가? 기존의 이스라엘의 왕은 사라졌는데? 다니엘에 보면 금 신상으로 보여진 이스라엘과 관계한 왕들의 입장이 짐승으로 되어 있고 그 짐승의 서열들을 난데없이 하늘에서 날라온 돌이 깨뜨리는 예언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왕의 부족으로 성취되지 못한 안식을 반드시 성취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단언하셨다. 물론 70이레가 지나면 그렇게 된다.
지상의 인간 왕들과 초월적 천상의 왕과의 싸움은 곧 지상에 대한 천상의 선전 포고와도 같은 것이어서 지상 나라의 소멸을 뜻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며 하늘나라의 지상화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지상에는 언약대로 시행되는 국가만 존재할 것이다. 천상 존재의 갑작스러운 개입은 이미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겨냥한 공격의 모습이 될 것이다. 멸망당할 신의 특징은 다니엘 11:36-39에 나와 있는 것처럼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는 곧 보이지 않는 신을 대신하여 자기가 보이는 신으러 군림하는 것이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모든 역사상의 왕들을 느부갓네살 왕의 후예로서 그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가 한 행세를 흉내내며 등장된다. 이들의 왕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여호와 언약의 무의미성이다. 언약 공동체의 초 역사성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력권밖에 세워지는 국가를 철저히 저지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그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새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인간들이 주도가 되어 세워지는 그 국가 밖으로 그 어떤 인간도 새어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자비의 나라라는 명목의 그 어떤 나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대상인 이스라엘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다른 체계의 국가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이미 기존의 체제를 고수할려는 세력이 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은혜와 정면으로 충돌되는 사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선악의 체제이다. 그러면,러면 이 선악의 체제의 담당자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뱀이요 마귀이다. 마귀의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배타 경향은 실제로 역사상으로 심어져서 여타의 민족이 언약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싫어하도록 중요한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귀결되는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대리 전쟁의 양상을 띈다는 것이다. 이 싸움이 우주 질서가 정돈된 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질서의 대 격변을 동반하면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배후에 천사와의 연관성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주 질서의 대 변동은 옛 인류를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는 역사의 한계와 결함을 노출시켜 주는 일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패망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계기도 된다. 아브라힘 언약의 성취적 차원에서 세워졌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사실상 역사의 유일한 희망이요 소망이었다. 그 민족이 드리는 제사로 인해 세상의 모든 자연 질서도 원만하게 움직여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제사장 기능과 왕의 기능과 선지자적 기능으로(요나) 세상은 그 동안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 안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세우신 열와의 범죄로 인해 자체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빛이 꺼져 버린 경우에 비유될 것이다. 세상 여타의 열왕들은 결코 좋아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근원지가 말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왕이 아닌 영원하신 분이 직접 공동체의 왕으로 등극하는 날에는 세상은 새날을 맞이하게 되며 세상은 전혀 다른 방식에 의해 통제되고 새 질서로서 정돈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천상의 영원하신 분인 인자에게 소속된 용사들이라면 세상의 짐승들은 자연의 질서를 쥐고 있는 천사들에게 소속된 용사들이다. 그전에 이스라엘을 돕던 천사들이 이스라엘의 패망 이후 여타 민족의 천사들에게 역사의 주도권을 잠정적으로 허용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천사 미가엘의 놀라운 활약으로 다시 주도권을 되찾게 될 것이다.(다니엘 10:13, 12:1) 그리고 이러한 미가엘 천사의 활약도 어디까지나 언약의 성취라는 범주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이제 남은 문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출을 위해 새 언약의 실패를 극복하고 어떻게 등장되느냐에 있다. 모든 천사들은 이 새 언약에 기준 하여 움직이니깐 말이다. 그리고 마귀는 이때가 되면 새로운 은혜 질서로 인해 자신들의 임무와 타락된 본성이 징벌 받는다는 것을 알고 기어이 새로운 왕의 등극을 저지할 것이다. 그 저지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마귀의 고유한 방법인 정죄의 기능이 될 것이다. 이 정죄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인간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옛 언약을 고수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인간들로 하여금 선악의 체제 안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옛 시대, 옛 역사, 옛 언약, 옛 질서에 대한 고수.
과연 새로운 천상적 신분의 왕은 이 체제 속에서 어떻게 은혜의 질서를 조성할 수 있을까?
그것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완성시키면 된다. 구약에서 인간 왕이 실패했던 그 대목을 무사히 성취해 놓으면 되는 것이다. 다윗왕에서 언약한 그 다윗 언약을 온전히 완수하면 그것으로 세상은 새로운 체계 속에 모이게 된다.
이스라엘 왕이 해야 하는 일은 백성들의 죄를 위해 왕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하는데 있다. 그러나 선악 체제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 어느 인간도 마귀의 종 노릇이 다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참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마귀의 수하에서 빼내기 위해 백성의 대표 자격으로 선악의 체제 속에 손수 들어간다. 만약 거기서 그리스도 마저 죄를 짓는다면 세상은 영원히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귀는 선악을 감찰하여 고발하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무사히 죄를 짓지 않고 의를 이룬다면 그리스도에게 예속된 백성들에게는 다윗 언약에 따라 그 속에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게 된다. 그 질서란 은혜의 왕 노릇이다.(로마서 5:12-21)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예수님은 주저 없이 희생의 재물이 되었다. 이것은 율법의 완성인 동시에 의 창출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나타나신 이후로 마귀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활동을 막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귀는 자기 수하에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한다.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을 등장시켜 그리스도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나서는데, 예수님의 죄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하여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나서서는 하나님의 속성과 모순된다고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 넣는다. 죄인에게 해당되는 보응은 당연히 징벌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활동은 非神的 행위라고 간주한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비에 근거한 율법의 완성도를 가지고 반박한다. 하나님도 죄인에게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 형제를 보고 화를 내는 것이 곧 살인이다고 말씀하시면서(마태복음 5:22, 43-48) 원수에 대한 사랑과 자비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동안 죄의 대가로 마귀에게 예속된 병자와 저주받은 자에게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심으로서 마귀의 예속을 무색케 한다.(누가복음 13:11,16) 서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러한 현상은 곧 마귀의 권력이 붕괴되었다는 증거이며 마귀의 선악 체계가 더 이상 실효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그리고 성령의 강림 이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단편적인 기적의 나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전달로 이루어진다. 복음이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새로운 사상은 그 사상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매달리고 헌신함으로 은혜의 질서 속에 들어가게 된다. 단순한 병고침이나 건강의 회복이 아니라 전인적인 헌신과 복음을 맞바꾸는 상황 속에서 구원은 이루어진다. 사상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설립된 교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상과 부합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책망의 대상이 되며 촛대를 옮겨 교회를 안되게 할 수 있는 시대 속에 놓여 있다. 보이는 것은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니 믿음 그 자체가 믿음의 확실성의 근거로 작용한다. 사도는 죽어 버린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 판국에 그 어떤 인물에다 영원토록 매달릴 수 없다. 진리라는 것, 참된 복음이라는 것, 참된 계시라는 것으로 신앙을 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귀는 이러한 복음의 시대에 그들 나름대로의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들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여 교회 가장 깊숙한 곳까지 관여하고 개입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경고한 바 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어떻게 우리들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가? 그들의 열매를 보라고 하셨다. 그 열매를 어떤 기준에 의해 분석하란 말인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뜻이란 바로 산상보훈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질서로 개편된다. 그 예수님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계약 체제에 마귀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방해 공작에 나서는 것이다.(고후 11:1-15) 그들은 그리스도 말씀 중심의 복음 전달 체제에 도전하기 위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사하면서 달려든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현혹될 것이다.(데후 2:9-10, 계 16:14/ 13:13-15) 주여 주여를 외치면서 귀신을 추방하고 선지자 노릇을 단단히 하겠지만 예수님의 결론은 너를 모른다 하는 것이다.(마태복음 7:22-23) 사도 바울이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도됨은 오직 고난이었고 순교였으며 사도 요한의 경우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그것이었다. (요한일서 3:16)
마귀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이라고 정의 내린다.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은 성령이 하고자 한 일의 궁극적인 내용물이며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다.(고전 2:1-16)
광명한 천사이냐 아니면 참된 복음의 사역자냐의 판가름은 십자가의 바른 정신의 소유이냐 아니면 왜곡된 십자가 정신의 소유이냐로 판가름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표상은 순교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어린 양' 이다. 이것은 희생의 최종 승리를 의미하며 재림할 때까지의 진정한 언약의 공동체의 모습을 정리시켜 주는 표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하여금 희생의 길을 가로막던 그 마귀가 이제는 온갖 비법으로 교회에서 희생의 모습이 비쳐 나오는 것을 막고자 한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실체가 그 희생 정신을 통해서 흘려 넘치기 때문이다.
좁은 길로 가야 한다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하지만 마귀는 교회로 하여금 넓은 길로 가도록 유도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한 적이 있다.(마태복음 16:23)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고 책망하는 식이 되었다. 이래도 이단이 아니라고 발뺌할 텐가?
눈에 보이는 거대한 교회라는 조직을 위해 몸바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보고 교인들로 하여금 그 조직을 위해 봉사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조직이 아무것도 아니며 진정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 이래도 마귀의 집단이 아니라고 할 텐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능력이다.

Ⅲ. 결론

마귀의 구속사적인 역할이란 선악 체제를 끝까지 고수하는 기능을 두고 말한다. 이러한 체제는 곧 기존 역사에 대한 미련과 애착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역사 밖의 새로운 질서 하의 세계를 거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비록 극락 같은 세계를 주장해도 그 세계는 여전히 지금의 세계와 똑같은 선악의 체제가 유지되는 세계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어느 인간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은 미완성으로 끝난다.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이 율법과 신앙을 비교한 것은 새로운 세계가 기존의 역사 세계 이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필연적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언약에 기초한 세계가 등장된다는 구약의 예언에 근거한 주장이다. 가롯 유다의 등장은 예수님의 제자 군의 성격과 섞이면서 예수님이 구상하는 세계가 이 세상과 연속성이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자 오늘날에 있어서 마귀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눈에 보이는 교회주의로 대체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의 질서가 은총과 사랑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법과 통치술로 유지되게 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왜곡된 구원관과 천국 관과 예수관을 세뇌시키기에 열중한다.
이러한 가룻유다가 다스리는 교회의 존재를 허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참된 백성들을 참된 영생의 길인 좁은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도록 배려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