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金弘道 (1745∼ ? )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 또는 첩취옹(輒醉翁) 등 다얀하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으로 그의 나이 29세 때인 1773년 영조어진(英祖御眞) 제작에 참여했고, 81년에는 정조어진익선관본 (正祖御眞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동하여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찰방으로 있을 때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정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 등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으며, 산수ㆍ도석ㆍ인물ㆍ풍속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91년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의 동참화사로 참여하여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延豊縣監)에 임명되어 95년까지 봉직하였으나 퇴임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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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은 당대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 장면을 포착하여 등장 인물들의 성격 묘사 에서부터 성별, 계층, 연배, 직업에 걸맞는 복장, 자세, 표정 등을 밀도 있게 다 루어 우리 선조들의 삶을 표현하는 양식적 모범을 완성하였다. 토속미 넘치는 풍속화인 씨름과 무등 등에서 보여준 해학은 바로 우리의 모습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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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화법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의 철저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50대 이후 사경풍속의 평범한 언덕, 길, 들녁, 나무, 잡풀 묘사에서는 김홍도의 무르익은 완숙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림 뿐만이 아니라, 그는 음악의 대가였 고 빼어난 시인이었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자자했던 서예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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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귀가-이 그림은 담백하게 우린 연한 먹색을 바탕으로 시원하게 부감한 공간감, 간일한 필치의 유연한 농담 구사, 얼기설기하면서도 분방한 독필의 사용 등 50대의무르익은 원숙미와 회화적 깊이를 뽐내고 있다. 현감에서 파직된 다음 해에 그린 것으로 사경풍속도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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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옥순봉, 사인암 등 단양 풍경과 산수 인물, 화조, 영모 20점으로 꾸며진『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중의 작품으로 50대 초반 김홍도의 자신감 넘치는 수묵 감각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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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기로세연계도는 개성 지방의 은퇴한 관리들이 송악산의 만월대에서 잔치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전체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250여 명의 사람들 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이, 마부, 그리고 술에 취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취객, 심지어는 벙거지를 쓰고 밥 빌러 온 거지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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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필치와 한적한 분위기가 50대 이후 김홍도의 심상을 유감없이 말해 주 고있는 포의풍류도 에서는 지필묵과 파초, 칼, 술, 책 등과 함께 앉아 비파를 켜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김홍도 자신을 그린 자화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