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수사관 정약용 ㅡ신중하고 신중하라

예인짱 2008. 9. 30. 12:50

 

다산의 삶과 자취
정약용은 1762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의 4남1녀 가운데 4남이다.

1836년 세상을 뜨기까지 다산의 삶은 500권이 넘는 저술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대한 저술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시문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선도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가 다산의 외증조부인데, 다산이 “내 정분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고 할 정도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 집안 덕일까, 약전·약종·약용 형제가 다 놀라운 인물이다. 둘째 형인 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쓴 ‘자산어보’의 저자로, 셋째 형인 약종은 천주교의 순교자로, 약용은 대학자이자 시인으로, 모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갔으니 말이다. 더욱이 약전과 약용의 저술이 대부분 유배 속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하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알다시피 다산은 긴 유배를 살았다.

그래서 벼슬 18년, 유배 18년, 해배 18년으로 그의 삶을 요약한 연극도 있었다.

다산은 1783년에 조정으로 들어가 나랏일을 하고 1800년부터는 유배를 살고 1818년 고향에 돌아와 1836년에는 세상을 뜬다.

 

그동안 다산의 삶은 천주교 공부로 내내 흔들린다.

조정에 나가 있을 동안도 천주교 전력을 트집 잡는 모함과 견제를 늘 받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바람막이가 돼주던 정조는 더불어 학문도 논하던 최상의 임금이었다.

그런 정조가 1800년에 세상을 뜨자, 다산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셈이었으니 그 직후 유배에 처해진 것이다.


하지만 다산의 학문과 사상은 유배로 더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유배지의 궁핍 속에서 학문과 사상을 더 깊이 다지고, 간간이 세상에 나가 실정을 살피면서 그것들을 책으로 썼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강한 정신력과 초인적 의지에는 절로 마음이 가다듬어진다.

강진현의 첫 유배처는 시끌벅적한 주막집이었는데, 다산은 거기서도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이후 다산초당에 이르기까지 제자 혹은 당대의 지성들과 학문을 논하며 다산은 끊임없이 저술을 해나갔던 것이다.


다산의 학문적 관심은 경학부터 실학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었다.

의술에 대한 연구도 깊어서 심지어는 순조의 병환에 부름을 받고 갔는데, 그만 절명이 앞서는 바람에 실력 발휘할 기회를 잃었다고 한다.

그런 연구는 모두 중요한 저작으로 남아 현재 ‘다산학’의 새로운 태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