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가장 존경하는 CEO는 예수”
‘샐러리맨 신화’ 그 치열한 삶을 통해 배운 진정한 리더십
- ▲제17대 대선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그는 오직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들은 이명박을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화는 그것을 신화라고 부르는 밖에서 보는 이들만의 신화일 뿐이다. 그의 인생은 가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치열한 위기의 삶이었다.
해방된 조국을 찾아 고향마을로 돌아온 가족에게 맞이한 것은 혹독한 가난과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은 물러설 줄 몰랐다.
학창시절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해야만 했고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 빈손으로 상경해 달동네 일당 노동자가 되었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재래시장을 청소하며 학비를 벌었고 6.3사태 주동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에 입사해 30대에 사장이 되고 40대에 회장, 두 번의 국회의원을 거쳐 서울시장, 그리고 결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행정 수반의 자리에 올랐다.
겹겹의 위기와 안팎의 도전들로 둘러싸인 냉혹한 현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나간 그의 삶은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성공신화’로 비춰지곤 한다. 하지만 치열한 삶의 여정 그 진짜 이면에는 그가 온몸으로 품어낸 보석, 바로 ‘예수’를 닮은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헌신의 솔선을 보인 진정한 리더
단칸방에 살며 재래시장 생선가게 앞에서 바구니에 생선 몇 토막을 팔면서도 사람됨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에게 ‘헌신’의 솔선을 보인 진정한 리더였다.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맨몸으로 올라와 낮에는 일용노동자로 일을 하며 밤에는 청계천의 헌책방을 오가며 공부했다. 대학에 합격만 하면 중퇴를 하더라도 고졸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대학으로 가야 할지 몰라 종로 학원가의 한 친구를 따라 무작정 고려대 경영학과 원서를 넣었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자신은 붙어버렸다.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서 어머니께 전했는데 기뻐하신 것도 잠시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등록금과 입학금 걱정 때문이었다. 시험만 친 것이라고 위로하는 그를 어머니는 며칠 뒤 급히 부르셨다. 시장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 시장사람들이 힘을 모아 6개월간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이는 것’, 21세기 리더십은 헌신적이야 한다는 그에게 먼저 앞장서서 봉사하고 솔선하는 삶은 그가 어머니께로부터 배운 ‘예수의 리더십’이었다.
‘힘있는 사람의 용서야 말로 진짜 용서’
서울 시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 사람은 “봉투 안에 청계천 복원 공약을 내세울 당시 반대하고, 여당 후보사무실에서 선거운동 했던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들을 쳐내야 시장 직을 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일단 거절했지만 이틀, 사흘 계속 찾아왔다. 열어서 보기라도 하라는 걸 끝까지 거절했다.
결국 잘 한 것이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취임 후 1년 만에 복원사업을 착공하고 2년 3개월만의 완공은 일류민간기업의 속도와 대등할 정도로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다. 하나같이 열심을 다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이들 중에 복원사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봉투를 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 저 사람은 상대후보를 지지했던 사람이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상대 후보에게까지 도움을 줄 정도였다면 상당히 우수한 실력의 공직자였을 텐데.” 반대했던 사람과 찬성했던 사람 모두 힘을 모아 일했기에 어려운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용서’를 깨달았다. “세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힘을 나쁜 곳에 사용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복잡해지겠는가.” 힘 있는 사람의 용서야 말로 진짜 용서라는 깨달음은 그가 배운 또 하나의 ‘예수의 리더십’이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사명을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 비록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그 길을 통해 성장하게 하셨다고 믿는다.”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는 22만 명의 상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야당 시장인 그에게는 흔한 공권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어 오로지 말로 설득할 뿐이었다.
서울시 공직자들이 생존권을 담보로 내세우는 상인들을 만나 설득한 횟수만 4천2백번에 달한다. 물질적인 보상도 문서로 하는 약속도 없었다. 하지만 또 만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진심이 통하고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결국엔 ‘결사반대’를 외치며 목숨을 걸고 막았던 상인 대표가 감사패까지 전달해오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는 “결코 나 혼자의 힘으로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주어진 소명 중에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럴 때일수록 그는 “리더에서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나아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기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을 때 전기를 유용하게 쓸 수 있듯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류는 믿음이란 전원에서만 유일하게 흐르기 때문이다. 오직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외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CEO는 예수”라고.
(참고: 믿음으로 성공한 이 시대의 사람들 ‘내가 가장 존경하는 CEO 예수’(이명박 著.2006) <가이드포스트>)
이명박 당선자 뒤엔 ‘신실한 어머니’
▲이명박 당선자의 모친인 故채태원 여사 |
2007년 12월 19일 오후8시. 이명박 후보가 제 17대 대통령으로 확정되는 순간,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그를 비췄다. 오후 12시, 531만표차로 사상 유례없는 압승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언론사들은 일제히 그의 과거 사진들과 경력들을 함축해서 보도하며 심지어는 초등학교 학생 기록부에 나온 출석 기록까지도 기재할만큼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초점이 됐다.
그러나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는 한결같은 신앙심으로 지독한 가난을 헤쳐온 어머니(故채태원씨)가 큰 산처럼 그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이명박 당선자는 교회에서 간증을 할 때마다 어머니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낸 집은 단칸방에다 가족 7명이 끼여 살아야 했던 절 터였다. 옆 집에 사는 거지를 부러워 할 만큼 그와 가족들은 가난의 비참함 속에 살았다.
그러나 새벽 4시. 행상으로 품을 팔던 어머니는 그 시각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와 형제들은 20여년을 어머니의 이 한결같은 기도를 듣고 자랐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막내 아들도 그냥 재워놓지 않았다. 깨워 엎드려서 다리를 접혀 꿇어 엎드리게 해 놓았다. 그러면 무릎을 꿇은채로 형제들은 다시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에는 늘 자기 자신을 위한 제목이 없었다고 말한다. 노점상을 하는 이웃들 중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해달라는 기도가 우선이였다. 마지막에 가서야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자신과 여동생이 건강하고 예수를 믿게 해달라는 기도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하루는 어머니가 부잣집 아들이 몸이 아파서 학교를 못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아들이 몸이 빨리 나아 학교를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 중보 기도를 들을 때마다 형제들은 어머니께 화를 냈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은 몸이 아프면 병원엘 가면 되고, 약을 사먹으면 되는데 왜 부잣집 아들을 위해 기도하느냐고 그는 따져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어머니는 정신나간 어머니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자기를 위해 간구하지도 않고, 더 급한 일이 있더라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한 무렵에는 어머니를 따라 행상을 다녀야 했다. 그가 맡은 일은 여자고등학교 앞에서 뻥튀기를 파는 것이였다. 숨어도 보고 피해도 봤지만, 하는 수 없어 밀짚 모자를 쓰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에게 들키고 만다. 무엇이 창피해서 모자를 쓰고 있느냐고 어머니가 나무라자, 그는 어머니께 따져 묻는다. 그는 “어머니가 무식해서 자식이 챙피한 것도 모르고는 욕을 한다”며 대꾸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나무랬다.
하루는 어머니가 그를 불러, 중학교를 다닐 정도로 컸으니 남의 일을 도울 줄 알아야 한다며 부잣집 잔치에 가서 일손을 거들어 주는 일을 시켰다. 당시만해도 누가 자신에게 더러운 헌 옷이라도, 밥 한끼라도 주는 사람이 없는지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그 집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이나, 그 이후에도 물 한모금도 얻어먹지 말고 나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먼훗날 어머니가 말한 조건없는 봉사의 의미를 깨닫는다. 어머니는 서울 이태원 시장으로 올라와 자판에 생선을 파는 일을 하면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매일 매일을 주변 시장 바닥을 쓸고 닦았다고 기억한다.
그는 지금에 와서야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보여준 분은 어머니”라고 고백한다. 행함으로 믿음을 고백한 어머니의 신앙이 그에겐 가슴깊이 자리잡게 된다. 시장 상가에서는 ‘저런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틀림없이 신용이 있을거다’란 믿음 때문에 계약서 한 장없이 고려대를 다닐 등록금을 선금으로 마련해 준다.
그러나 1964년,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보내야 했다. 형무소를 나선 뒤에야 어머니가 단칸방에서 운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단칸방에서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자식들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자신도 그 옆에서 기도하던 어머니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가 끊이지 않던 때에도 집안에는 어머니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께서 돌아가시던 날에 어머니의 기도는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형제들은 모두 다 대학을 나와 자기의 위치에 서게 됐으며 무엇보다, 온 가족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송경호·김근영 기자 khsong@ch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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