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십자가 죽음의 신비

예인짱 2008. 3. 20. 00:23
십자가 죽음의 신비
(마가복음 15:33-41, 신약 84)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3,34)●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어떻게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가 어른이 되어 숨쉬고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죽음은 아주 신비합니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물론 다른 신비한 사건들도 많지만, 특히 예수님의 출생과 죽음, 부활은 모두 신비입니다. 그 중에도 <죽으심>은 신비의 극치입니다. 그 죽으심의 결과가 너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영생한다고 믿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놀라운 진리야말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바로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실 때 처형당하신 형틀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주님의 놀라운 죽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에게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편에서는 최고의 영광이요, 축복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지옥의 자식들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사닥다리입니다. 십자가는 형벌이 기다리는 죄인들에게 내려진 사면장(赦免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을 제일 좋아합니다.

1. 어둠 속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봅니다.

막15:33-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제 삼시>, 요즘 시간으로 하면 오전 아홉 시입니다. 그 때 양 손에 굵은 대못이 박혔습니다. 그 못은 길이가 약 12.5cm에서 17.5cm정도 되는 쇠못이랍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우리는 손에 작은 가시 하나만 들어가도 아파서, 그 것을 빼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굵은 대못이 양손에 박혔습니다. 아픔을 견디기 위해 몸부림 치지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두 발에도 못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뿐아니라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손발과 머리에서 피가 쏟아집니다. 사람이 어떤 일로 피를 좀 흘려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이마와 머리, 두 팔과 두 발에서 피가 흐릅니다. 웬만큼 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정없이 쏟아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몸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체중을 못이겨 찢어집니다. 피가 더 쏟아집니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살 소망은 끊어지고 온 몸의 진액이 다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질식사(窒息死), 혹은 탈진사(脫盡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6시가 되었습니다. 정오입니다. 이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공관복음 전체가 “제 육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했다”고 합니다. 하늘의 해가 빛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주님 죽으심의 고통을 보면서 자신의 머리를 들 수 없었습니다. 빛이신 주님의 죽으심이 세상의 빛을 잃게 하는 순간입니다. 이제 주님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두움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살던 곳, 인생들이 살고 있던 곳은 캄캄한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백적인 복음성가에는 “캄캄한 인생 길을 홀로 걸어가다,,,”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성가에는 “내가 어둠 속에서 헤매일 때”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다”고 합니다. 그 어둠 속으로 주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있는 인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의 빛이 죽음이 지배하고 있는 캄캄한 세상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어두움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세상을 대신해 심판을 받으러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소방대원이 불 속에 갇힌 사람을 구하려면, 그 불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수상 안전 요원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전쟁의 포화에 갇힌 사람을 구하려면 포탄이 쏟아지는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 죽음과 심판 속에 있는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봅니다.

막15:34-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어두움이 절정에 달하던 9시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Eloi Eloi lama sabacthani?”하셨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로 부르던 하나님을 처음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구약 시편 22편에 메시아의 고난 예언인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두움의 끝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버림받는 장면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버림받을 짓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였습니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도 하늘에서 똑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때도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끼고 기뻐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털끝만한 죄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주님은 무슨 죄 때문에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 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들의 죄를 뒤집어 쓴 것입니다.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진 죄 덩어리를 차마 보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아들이라도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땅에 있는 수십 억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형벌로 죽으셨습니다. 그 엄청난 죄를 육체에 안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짊어진 죄 때문에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 16장에 보면 <아사셀 / scapegoat>염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숫염소 둘>과 <수양 하나>를 취합니다. 두 염소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뽑힌 염소는 속죄제로 하나님께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염소는 산대로 두었다가 광야로 보냅니다. 어떻게 보냅니까? 제사장 아론이 두 손으로 염소의 머리에 백성들의 죄가 옮겨지도록 안수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를 고하고, 안수를 통해 모든 죄를 염소의 머리에 옮겨지게 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끌려갑니다. 광야의 무인지경(無人之境)에 이르면, 염소를 광야에 놓습니다. 그러면 염소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울며 방황하다가 짐승에게 잡혀 먹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죄를 지고간 <아사셀> 양은 백성의 죄값으로 맹수의 밥이 되어 죽는 것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사셀> 양의 죽음은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그가 죽음으로 백성들이 얻는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다 전가(轉稼)시켰기 때문에, 염소가 죽음으로 백성들의 죄 값은 치러진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사셀> 양입니다. <아사셀/Azazel>이란 사면(赦免)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죽을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대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 이상 버림받지 않고, 주님이 죽으심으로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저주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버림을 받는 순간, 어떤 이들이 그를 희롱하면서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고 했는데, 그 희롱하는 이들이 받을 저주를 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이 받을 저주요, 그를 심판한 이들이 받을 저주였습니다. 죄 때문에 영원히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인생들을 위해 버림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그가 버림받음으로 우리가 취함을 입었습니다.

3. 사역을 다 이루신 예수님을 봅니다.

막15: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요19: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주님이 죽으실 때에 땅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죽으시면서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이는 마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마치 <휴전선>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그 분 앞에 나아갈 길이 수천 년 동안 차단되어 있었는데, 주님이 죽으심으로 그 길이 열렸습니다. 분리된 장소, 차단되었던 공간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마태와 마가에 보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누가 찢었습니까? 위로부터 찢어졌습니다. 주님이 찢으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이성(理性)으로 판단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주님은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그 것은 이 땅에서 할 일을 다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도 승천과 재림은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다 이루셨다>는 말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구원의 길을 다 닦으셨다는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둘이 되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지지 않았으면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휘장처럼 찢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찢어진 휘장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바람에, 그 사이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휘장을 찢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누구든 나를 만나려면 만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다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무 것도 하신 것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이 세상에 오셔서 예배당 한 채라도 지었습니까? 평생 동안 여러 개의 예배당을 지으신 분들이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수천 명, 수만 명의 교인들을 모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열 두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그 중에 하나는 밀고자가 되었고, 한 제자는 부인(否認)했고, 또 한 제자는 의심했습니다. 나머지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의 성도들을 섬기며 목회하는 분들이 볼 때, 예수님의 목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담임 목사를 위해서도 충성하는 교인들을 볼 때도 주님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책 한 권도 안 남기셨습니다. 한 권은 커녕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석(註釋)이며 설교집, 수필집 같은 것을 수 십 권씩 남기신 목사님들이 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주님은 아무 것도 이루신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신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그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의 화해입니다. 멸망 받을 인간들의 구원입니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두움이 그를 둘러쌈으로 우리는 빛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외면 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은 이들이, 정작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놓으신 것이 없지만, 인생들을 위해서는 다 이루셨습니다. 자신은 무덤 한 평도 없으셔도, 우리가 거할 집을 넉넉하게 마련하셨습니다. 자신은 버림받은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우리는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때문에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추가로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피 흘리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 피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피를 흘리는 것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를 단에 뿌려 우리의 생명을 속하게 하셨습니다.

전에는 짐승의 피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피로 용서받습니다. 그 일을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은 주님의 죽음 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분이 단 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숙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의 죽음이 주는 가장 큰 신비는, 그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처: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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