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에베소,서머너,버가모,두아디라교회

예인짱 2008. 2. 28. 11:26

1.에베소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 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 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PAUL)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리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 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64년 사도 바울기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너마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해,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피살 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 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베소는 지진으로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2.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장 8절)

서머나는 주전 3,000년부터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주전 800년 경 도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그리스로부터 쫓겨난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터키 중서부에 걸쳐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였다. 유명한 장님 서사시인 호머(Homer)가 태어나 활약한 곳도 바로 이곳 서머나였다.

서머나교회 (폴리캅 기념교회)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 반대로 많은 박해를 받았을뿐 아니라 유대의 적대 세력을 만났지만 주님께 충성했기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교회이다.
(계 2:9-10)

요한계시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것들 즉 가난, 비방 그리고 고난 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 며 이들이 부요함과 역사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 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시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서머 나 교회(폴리갑 기념 교회)는 17세기에 새로 지어진 건물 로 여러가지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캅은 115-116년 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 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 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 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3.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장 12절)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나, 도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인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시대부터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인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버가모가 천연적 요새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고 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아크로폴리스를 형성 하였다.

리시마쿠스가 죽자 버가모 왕국이 탄생하였고, 이후 버가모는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이곳의 부의 근원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 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 였다.

양피지는 이곳에서 처음 제조 되었으며, 특히 유메네스 2세(B.C. 197~159)에 의하여 창설된 도서관에는 약 20 만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신전 건물은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BC 133년 로마의 속주 아시아의 수도가 된 버가모는 천혜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황제신의 숭배를 거절한 기독교인들에게 대표적인 박해의 장소가 되었던 것을 배경으로 말씀한 것으로,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추측 된다.  그러나 속주 아시아의 수도는 후에 세력이 커진 에베소로 옮겨지게 된다.

아스클레피움

 

▲ 환자는 이 긴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을 수 있다는 암사를 받는 고도의 정신요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주전 4세기에 세워진 병원으로서 그 후 AD 400년대 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세계 최초로 정신요법을 중심으로 한 치료 방법을 써서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걷기 요법, 음악요법 등으로 치료 하였다.

지진으로 대파 되었으나 아직도 그 잔해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아크로폴리스

SERAPIS를 위한 신전이 남아 있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RED HALL에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신전 밑에는 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 되었다.

 

4.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3장 18절)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대 주께서 그 마을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한지라 (사도행전 16장 11절- 14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장 8절)

버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B.C. 7세기 경 리디아(Lydia)인들이 거주하며 "펠로피아(pelppia)"라 불렀다.  

B.C. 3세기경 SELEUCUS 1세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 시켰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버가모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위치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두아디라의 역사적 중요성은 군사적인 것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이다. 두아디라는 지형상 훌 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6:11-15 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빌립보에서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루디아는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현재 두아디라는 과거의 어떤 유적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도시의 한 귀퉁이에 아마도 아폴로 신전으로 보이는 신전 하나와 회랑이 있는 길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비잔틴 교회 기둥들만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