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내시

예인짱 2008. 2. 8. 10:03

조선시대 내시를 막강한 권력 집단으로 묘사한 TV드라마, <<왕과 나>>가 방영 중이다.

정설은 중국에서 는 내시들이 국가 재정이나 군사력 동원 등에 힘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시의 기원은 상(商)나라(=은나라)까지 올라간다.

그 시대 유물인 갑골문자에 내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적국의 왕자를 거세하고 궁중에서 시중을 들게 하여 승리를 만끽했다는 것이다.

 

성경 다니엘서에도 바빌로니아 왕국의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등장하는 등 동양에서 내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집단이었다.

내시에 대한 우리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흥덕왕 원년(서기 826년)이다.

왕이 즉위하자마자 왕비가 사망했다. 신하들은 계비를 맞을 것을 권했지만, 왕은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을 안다”며 시녀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채 오직 내시(환수·宦竪)만이 자신을 돌보게 했다.

내시는 이처럼 ‘궁중에서 일하는, 남성 역할을 못하는 자’였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명확히 구분됐다. 내시는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의 젊은 엘리트 비서관이었다.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젊은 문관 중 아직 부서 발령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국왕의 측근 자문을 했던 인물들이다.

당연히 고자가 아니었다.

 

반면 환관은 고자로, 궁중에서 청소나 궁녀 관리 등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초기에 환관은 10명 내외였다.

고려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싶다면 내시를 거쳐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를 지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도 내시를 지냈다.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도 마찬가지였다. 내시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이가 22명이었다.

 

내시가 100% 문관으로만 충원되자,

무신의 난(1170년) 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관들은 “우리도 내시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후 ‘무관 내시’도 생겼다.

하지만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서 환관이 내시가 되기도 했다.

최초의 ‘내시 환관’은 정함(생몰년 미상)이었다. 그는 의종(재위 1146~1170)의 유모를 부인으로 두었다.

의종에게 충성을 다한 그를 위해 의종이 파격적으로 내시직을 주었던 것이다.

13세기 이후 원나라 간섭기에 환관들의 힘은 더욱 커졌다.

원에서는 고려에 환관이나 궁녀를 보내달라고 자주 요청했는데, 원에 환관으로 간 이들이 원 황제와 황후를 받들면서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이들은 황제의 사절로 고려를 방문하면서, 자신들의 고향이 천민 마을인 향, 소, 부곡이면 이를 ‘현(縣)’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공민왕 때는 환관들로만 구성된 ‘환관내시부’까지 생겼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내시는 다시금 고자들만이 맡았다.

내시들은 그러나 결혼도 했고, 남자 아이를 입적해 대를 이었다.

 

중요민속자료 245호인 ‘경북 청도 임당리 김씨 고택’은

16세기 이후 내시가 대대로 정착해 살던 곳인데,

성(姓)이 다른 아이를 입적해 대를 이었음이 가첩(家牒·한 집안의 혈통을 적은 족보)에서 확인됐다.



하지만 이 집은 다른 한옥과는 구조가 다르다. 바깥 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는 사랑채는 대문을 아예 바라보고 있으며,

부인이 거주하는 안채는 작은 사랑채에 난 왼쪽 문(중문·中門)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다.

‘남성’ 구실을 못하는 남편이 안채로 누가 드나드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게 학계의 해석이다.

1200여 평 대지에 한옥 7동이 자리한 널찍한 집이지만, 안채 등 주된 건물(몸채)의 앉은 방향은 빛이 잘 들지 않는 서북향이다.

비록 궁을 나왔지만 임금이 계신 한양을 항상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 2007년 10월 15일 월요일, 27면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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