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선교 9년만에 안식년 맞아 귀국한 양영자 선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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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미 기자 jbm@kidokongbo.com [조회수 : 3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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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테이블의 여왕' 양영자 선수(42). 그녀가 돌아왔다. 하지만 탁구선수나 코치가 아닌 이번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거룩한' 선교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도 지난 9년간 선교 사역에 온 힘을 기울인 뒤 1년 6개월간 안식년을 맞기 위해서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한 그녀는 '훌륭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명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5학년 때 전국대회에 출전해 입상하고 중학교 시절 고등학생들을 제치며 여러차레 상패를 거머쥔 그녀에게 큰 시련이 닥쳐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팔을 올리거나 펴고 구부리지도 못할 만큼 갑작스런 통증이 찾아왔다. 그 통증의 원인은 '테니스 엘보우'라는 병이었고, 의료진은 탁구를 그만두면 나을 거라고 했다.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6년간 진통제를 맞으며 선수생활을 계속했고 국가대표로 선발돼 83년도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단식 준우승'이란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진통제의 효과는 점점 떨어져갔다. 그때 동료 어머니의 권유로 기도원을 찾았고 놀랍게도 안수기도를 통해 거짓말처럼 병이 말끔히 낳는 기적을 경험했다.
양 선교사의 표현에 따르면 그후 '피나는 훈련'을 하며 연습에 매진했다고 한다. 연습의 결과는 86년도 서울 아시안게임 복식 금메달, 87년 인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개인단식ㆍ복식 금메달, 88년도 서울 올림픽 금메달로 나타났다. 정상에 있던 그녀는 8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을 마감하며 명예롭게 은퇴했다. 이후 탁구지도자로서 멋진 삶을 살아보고자 대학원에 입학해 체육 이론을 공부하며 선수 양성에 매진했다. "모든것이 탄탄대로 였습니다. 내 힘으로 모든걸 해결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 사이 내 영혼과 마음은 메말라 가고 있었죠." 그랬다. 양 선교사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등으로 은퇴 후 2년동안 무기력증에 휩싸여 우울증을 앓았다. '난공불락의 중국탁구를 이긴 양영자, 이제는 양영자 시대'라며 양 선교사를 부각시키던 매스컴에서도 '왕년의 탁구여왕 양영자 은둔의 방황생활'이라며 그녀의 '우울한' 근황을 보도했다.
또 그녀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말씀을 통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작은자들을 섬기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새롭게 주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선교의 비전이 있던 남편 이영철 선교사를 만나게 됐고 부부는 한국WEC국제선교회 파송으로 몽골로 떠나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15년전 기독교 복음률이 0퍼센트였던 몽골은 현재 총 인구 280만명 중 2.5퍼센트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 양 선교사 부부는 2년간 몽골어를 익히고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동쪽으로 4백50㎞ 떨어진 고비사막 지역 '셍산들'에 정착해 사역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탁구를 가르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사역의 어려움도 많았다. 약속도 없이 아무때나 집으로 '불쑥' 찾아오고, 공산국가라 '니것 내것' 이라는 소유개념이 없는 몽골인들과의 문화적 차이가 그것이었다. 또 한창 사역중이던 2000년 2월에는 입술이 엇갈리며 왼쪽 안면근육에 마비가 왔다. 몽골 연세친선병원을 찾으니 바이러스로 인한 마비라며 열흘간 약을 먹으면 나을거라 했단다. 그때 남편 이 선교사가 "당신의 입술이 평생 삐뚤어져도 난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한 말이 큰 힘이 되었다고 전했다. 다행히도 마비 증세는 서서히 사라져 갔고 고린도전서 4장 1절 말씀을 통해 양 선교사는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내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매일 새벽 동트기전 큐티를 하며 한 영혼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 중보기도를 해나갔다. 그 결과 양 선교사 부부와 자녀 2명, 현지인 1명 총 5명이 드리던 주일 예배 참석인원이 평균 40여 명을 넘어서게 됐다. 지금 '셍산들'엔 4개의 교회가 추가로 지어지고 현지인들이 사역자로 일하며 동고비지역에 복음의 물결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 믿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는 양 선교사.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만져주심을 체험했어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영적으로 침체를 느끼신다면 저처럼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회복을 체험하시길 소망해요." 오늘도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실 복을 기대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온가족, 선교 역량 강화위해 분주 현재 양 선교사는 서울에 거주하며 이듬해 8월 다시 떠나게 될 몽골선교사역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전문기관에서 성경과 언어를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준비하며 현재는 일주일에 한번씩 목회자들에게 탁구를 가르친다. 남편 이 선교사는 성경을 몽골어로 번역하기 위해 한동대 통역번역대학원 응용언어번역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두 딸 반재(13)와 윤재(12)는 대전기독국제학교(TCIS)에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때문에 가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난다. 주말가족인 셈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니 외로울 법도 한데 반재와 윤재는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씩씩하게 생활한다. 처음 몽골로 선교를 떠났을 때 두 아이들은 4, 5세 였다. 자녀 교육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던 양 선교사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부터 고민됐다고 한다. 자신이 소속돼 있는 WEC국제선교회 홈페이지에 자녀교육에 관한 기도제목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외국인 여성이 교과서를 들고 양 선교사의 사역지를 찾았다. 그녀는 다름아닌 9년간의 초등학교 교사경력을 지닌 교육전문가 로즈메리 우드 씨였다. 우연히 WEC홈페이지에서 기도제목을 검색하다 양 선교사의 글을 보게 됐고 학교를 그만둔 뒤 자원봉사자로 온 것이다. 양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3년간 아이들의 홈스쿨링을 담당해준 우드 선교사는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께 고민을 털어놔 보세요.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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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공보 입력 : 2006년 10월 24일 13:37:21 / 수정 : 2006년 10월 25일 15:02:17 |
출처 : 예수를전하는사람들
글쓴이 : 예수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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