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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속에서 도전의 역사를 펼친 1960년대

예인짱 2020. 5. 14. 16:32


흑암 속에서 도전의 역사를 펼친 1960년대

 

 

이 민족에게 전쟁의 상처를 안겨준 빈곤의 세월인 50년대를 넘기고 1960년대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전개 됩니다. 자유당 정권에 의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외침은 사회적 운동으로 펼쳐져 갔으며, 419는 자유와 민권을 쟁취하기 위한 시민항쟁이란 점에서 3.1운동에 비견되는 커다란 민족사적 사건이었습니다.

 

1960419혁명은 민중의 힘으로 시작되었으며, 419가 중요하게 논의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혁명적 열정은 부정에 대한 항거로 표출되었으며, 불의에 대항하는 민족적 진취성에 의한 신성한 힘이 4.19를 통해 드러났다고 판단되기도 합니다.

 

419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자유와 민주라는 이념 아래 시민들 힘으로 새로운 공화국의 출범을 가능케 했다.

 

이렇게 국민이 선택한 민주 정부인 장면정권이 들어섰지만, 새로운 정부에서는 정권을 잡은 민주당이 구파 신파로 나뉘어 연일 대립하였고 데모는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생 고등학생 교수 심지어 중등학교학생도 데모에 나서는 상황에 정부는 상황타개책을 내놓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었으며 당시 국내 경제사정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로 끼니를 연명하던 비참하던 시대였습니다.

 

분단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 다음해인 19615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렇듯 1960년대 초는 모순과 갈등의 시대였다. 식민지시기를 뒤이은 분단비극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419혁명과 516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건을 연이어 겪었던 암울한 시대 이였습니다.

 

이때 우리의 일인당소득은 세계최빈국수준인 65달러 수준이었습니다. 군사정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중장기 계획을 입안 실행했습니다.

 

전쟁의 상처로 패배주의에 머물고 있던 국민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주고 국민의 힘을 결집시켰던 것 입니다. 열악한 환경, 저임금등 당시는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60년대는 불행하고 암담한 환경이었으나 미래를 향한 도전과 꿈이 있고 희망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오늘에 칠십대가 이 시대에 교복을 입고 혼돈의 와중에서 살아온 산 증인들이기도 합니다.

 

 

 

 

1960년도 초반의 부산지역 주택환경입니다. 부산역에서 근거리이던 영주동 산비탈 달 동내 였다. 부산은 원래 일본인들이 자기들에게 살기 좋게 20만 명 수용할 수 있는 계획도시였습니다. 잘 짜인 서구 대신동에서 초량동 평지에 그들이 거주 하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그들이 물러간 후 적산가옥은 당시 사회 지도층이 물어 받아서 살았다 . 불행하게도 6.25사변이 발발하여 서울에서 피난민이 몰려오게 되어 기존 도시계획이 파괴 되었습니다. 전국 피난민들이 모여 들어서 공지와 산비탈에 판자촌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수복 이후에는 판자촌에는 다시 시골에서 살길 찾아서 모여 들어온 사람으로 대체되어 부산은 오래 토록 판자촌 도시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래의 산비탈 주택지구의 집은 1970 이후 새마을 사업으로 주택이 정비되어 가던 때 모습입니다

 

 

1960 년도 중반 시장의 모습 입니다.

 

 

5.16군사정권이 종식되고 새 헌법에 의한 63년도 직선제 5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보인다.

 

선거 결과 박정희(46.6). 윤보선<전 대통령>(45.1) 오재영(4.1%) 변영태(2.2%) 장이석(2.0%) : 허정, 송요찬 [중도 사퇴] 였다.

 

시장입구 노점에서 어머님들이 생선을 판매 하였으며 일부 어머님들은 머리이고 행상을 하시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생업에 보탬이 되었고 그 돈으로 공부 한 세대가 오늘날 70 전 후 어른들이다.

 

뒤돌아보면 얼마나 먹고 사는 것이 절박했던 시절이었던가? 일부 가정에서는 자녀 교육 같은것 생각도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부모님을 도우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사양하지 아니했다.

 

일하려고 해도 일자리도 없었으며 노동으로 품팔이하기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박대통령이 한일 국교 정상화와 서독방문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후  사회가 서서히 번화하기 시작하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급속한 인구 이동과 산업화가 시작되고 일자리가 생겨났다.

 

야근이고, 시간외 근무이고 따질 것이 못되었고, 취업된다면 사용주 발바닥에 입마춤 할 정도 기쁨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골목길마다 담벼락은 동내 극장에서는 영화 벽보포스트가 되었다.

이 한편의 영화들을 관람한다는 것은 일 년을 두고 학생들에게는 큰 선물이었습니다.

 

 

특별한 읽을거리가 귀한 시절이라 동내만화 방은 최고 문화공간으로 학생들이 활용 했다.

 

 

한국 전쟁 종료 이후1963년까지 산비탈 달동내 살아가는 일부 시민들 중 먹는 것을 해결 못하였으며, 내가 살았던 서대신동 승학산 산비탈 서산조 피난민촌 마을에서는 과년한 처녀들이 서대신동 주택가에 내려와 저녁밥을 얻어가는 모습과 부잣집 대문에서 "밥 좀 주이소. "하고 외치던 그 애절한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과 비극은 당장 무엇을 먹을 것인가 먹을거리가 없는 것이 최대 비극이고 슬픔입니다. 우리는 역대 대통령에 대하여 독재자로 매도하여 무조건 욕부터 하지만 하늘이 우리를 도와 위정자 덕택으로 먹고 사는 것에서 해방된 것만 해도 하늘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친북좌파가 지지하는 북한을 두고 우리와 비교해 보면 당장 수긍할 수 있습니다.

 

적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큰 것을 주어도 절대로 감사할 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큰 경제적 혜택을 누리며 생활하고 있는지 당시의 국민소득 수준과 비교하면 알수 있지 아니 합니까?  우리는 지금 모두 너무도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있습니다. 국가에 대하여 자기이익에 반한다고  불만과 불평보다 건설적 발전을 위하여 때로는 감내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60년대를 뒤돌아 보면서 오늘을 이끌러준 역대 정권과 지도자들에게 감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북한 대남방송에서는 고주파 전력으로 매일 밤 남조선에서는 미제 때문에 거리에 거지가 넘쳐난다고 했으며, 자신들은 트랙타를 제작하여 농사를 짓는다고 기계음을 방송하는 때도 있었다. 분명히 우린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못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나름데로  고난의 역사를 슬기롭게 헤쳐나온  지금은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부하고 내가 먼저 조국 내민족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것인지 스스로 실천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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