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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산성.^^

예인짱 2020. 3. 8. 23:10


검단토성 (북구 검단동, 복현동)

 

검단동

   

   대구 북구 검단동과 복현동 일대에 있으며, 대구분지의 북쪽을 흐르는 금호강의 하안구릉에 위치

하고, 봉무토성과는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1.3Km인데, 동편은 금호강에 접해서 형성된 자연단애를 이용하였고,북쪽과 남쪽은

구릉의 능 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으며,서쪽은 넓은 침식곡을 가로질러서 쌓은 포곡식 이다.

   현재는 도로와 공단으로 인해 서쪽은 파괴되어 그 흔적을 잃고 있다.

   검단토성의 낮은 구릉을 따라 남으로 1Km 미만의 거리에 복현동 고분군이 있고, 또 가까운 하안

구릉지역에 민무늬토기나 석기가 산재(散在)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일대에는 선사시대부터

하나의 취락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그 집단이 이 토성을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토성의 안에는 취락이 형성되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넓은 공지가 있다.실제로 성안의 낮은 지

에서 민무늬토기,석기,그리고 도질토기편이 산재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이 토성이 원삼국시대

처음 축조되었고 그 후에도 입보성으로서 계속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금호강 서편의 절벽에 있으며 검단동 주민센터에서 성광고등학교사이에 있다.

 


 

고산토성, 성동토성 (수성구 성동)


고산토성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에 있으나 옛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산군 고산면이었었다.

   대구 분지로는 벗어난 지역이며, 성이 축조되어 있는 곳은 금호강과 그 지류인 남천의 합류

지역 주변에 된 넓은 충적 평야에 접하고 서쪽 일부만이 계곡을 두고 금호강변을 따라 형성되

어 있는 구릉과 하고있으며 성동토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둘레는 약 15km이고 포곡식(包谷式)과 산정식(山頂式)이 혼합된 형태를 지녔다.

   처음부터 이러한 모양으로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이차적으로 결합된 것인지는 지금의 외형만으

알 수가 없다.

   성이 있는 구릉의 남쪽 산록에는 고산 고분군(孤山古墳群)이 있고 동쪽 산록에 접하여 흐르는

을 따라 약 1km 가량 올라간 상류쪽 구릉에는 욱수동 고분군(旭水洞古墳群)이 있다.

   또 남천 지역는 고인돌이 다수 분포한다.

주변에서는 삼국시대 고분군과 토기조각, 민무늬토기, 반달돌칼, 흠자귀, 흠다리접시 등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의 성이었을 것이다.

- 반야월에서 영대로 가는 금호강의 안심교에서 서쪽으로 내려어면 금호강과 남천의 합류 지점 부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달성 (중구 달성동)

 

대구달성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면적 약 10만 8300m2 이며 성의 둘레 1,300m, 높이 약 4m이고, 성의

상은 경주()의 월성()과 비슷하며,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삼

시대() 이래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생활근거지에 쌓은 자연발생적

성곽이다.

   한국의 성곽 중에서 가장 오래 된 형식의 하나이다.

   1968년 10월 지금의 달성공원 입구에서 남쪽으로 150m 지점의 성벽 일부를 절단하였을 때 아

쪽 암반() 위에서 김해회현리패총()과 같은 시기의 유물층()을 발견하였으

며, 위쪽의 토성 축조 기반이 되는 층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성곽

은 삼국시대에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하였으나, 상층부의 석괴()들로 보아 흙과 돌로 축조한 것 같다.

   성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내당동() 일대의 구릉에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있었으나,

  1923년 일부가 발굴되었을 뿐이고 지금은 시가지 확장으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 달성공원 부근 전체이다.

 

 

 

 

 

대구읍성 (대구시 중심가 전체)

 

대구 읍성                                                   <대구읍성 남문(망우공원) >

   대구의 중심지에 있던 성으로 4개의 읍성로가 있으며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다. ‘읍성로’

해도 성을 볼 수는 없다.

   대구 도심지 한가운데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은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기구였다.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대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은 뒤 대구는 줄곧 영남지역의 중

심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대구 읍성은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됐다.

   대구 읍성이 헐린 것은 1906년의 일이다.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 일본 거류민단의

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성을 허물어버렸다.

   1906년 1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본인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허망하게 헐린 성곽 자리에 길을 놓았다. 지금의 4성로가 생긴 연유다.

  -대구시의 한 복판이다.

 

 

 

대덕산성 (남구 대명동)


대구 대덕산성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대덕산에 축성된 포곡식 산성(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이다.

   대구의 진산()인 대덕산은 동남쪽으로 산성산()과 비슬산()으로 연결되고 서북

은 낙동강과 금호강의 평야와도 연접된다. 속칭 안지랭이라 부르는 골짜기를 중심으로 석축하였

며 축조수법이 조잡하다.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또는 고려시대의 기와편 및 토기편이 흩어져서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일신라 후기에 축성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태조왕건()이 파계사()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패하여 반야월을 거쳐

대덕산() 은적사()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말여초()에

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신라의 산성이다.

   이 산성과 관련되는 기록으로는 《대구읍지》의 성불산유고성 금무( ) 즉 성불산에는 옛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뜻이고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불산 고성 재수성

서십리석축 주삼천오십일척 폐금 ( 西 廢) 즉

성불산에 옛성이 서쪽으로 십리 석축과 둘레는 3,051척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성벽 자체도 많이 없어졌을 알 수 있다.

 

-앞산공원에 있다.  

 

 

 

문산산성 (달성군)


다사 문양역근처 문양소류지..... | 카페

                                                   <문산리 들판>

   대구시 달성군 다사면 문산리에 있었던 성으로 자취를 찾을 수는 없지만 그 성터 주변에 문산리

 

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봉무토성 (동구 봉무동)

대구봉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금호강을 낀 30여 m의 높은 절벽과 언덕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으로 길

이는 약 350m인데 동북쪽만 5m 정도의 성벽을 쌓았고, 나머지는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소규모의 성이나 성 안에 작은 촌락이 형성될 수 있는 넓이이다.

   군사적 목적에서 쌓은 것은 아니며, 금호강과 팔공산을 배경으로 거주하던 대규모 세력집단이 도

용 산성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에서 남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봉무동 고분군과 불로동 고분군이 있으며 금호강을 사이

에 두고 검단동 토성과도 연결되는 지역적 특성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이다.

  성 안에서 발견된 기와와 토기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로 미루어 3∼4세기경 삼국시대 초기에 축

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문산성 (달성군)

 

사진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석문산과 진등산의 두 기슭있었으며 계곡 앞에 암석이 우뚝서서 마치

석문처럼 보인다 하여 석문산성이라 부르게 되엇다. 구전에 의하면 이 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장 곽

재우가 낙동강을 따라 달성 고령의 내륙지방으로 쳐들어오는 왜병을 막기 위해 축성하였다고 전하

며 진등산과 석문산의 두산기슭을 포함하여 정상으로 길게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지금은 거의 붕괴되고 양 500m 가량의 석축벽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으나 당시에는 성의 둘레가

2,759자였다고 한다.

 

 

 

 

설화산성 (달성군)

 

설화리고분

                                                        <설화리 고분>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부근에 있었을 산성이지만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서 현재는 찾을 수

는 없지만 이 지방에는 고분이 있는 곳에는 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로므로 설화리 고분이 발

견되었으므로 설화리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우산성 (달성군)

 

사진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초곡리와 양리에 걸쳐있는 이 산성은 둘레가 약 1530m의 석성으로 개구리

모양처럼 생긴 산에 완전히 잘 보존되어 있지는 않으나 성터의 모습은 역력히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1.587km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내성 2km, 외성 1,800km로 총 3.8k

m에 이른다.

  이 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곽 재우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곽 재우장군이 이 성에서 맞은편 대니산에 줄을 이어 허수아비를 매달아 각종 조화

와 재주를 부리게하여 왜병을 놀라게 하였는가 하면 밤에 사람마다 횃불을 두 자루씩 들고 한 자루

에 불을 세가지씩 켜서 일제히 북을 두드리게 하여 기습할 듯이 보이게 하다가 불을 끄고 고요하게

하기를 반복하여 왜병으로 하여금 겁을 먹고 도망가게 하였다고 한다.

 

 

 

 

 

용두산성 (남구 봉덕동)

 

대구 용두산

 

  대구시 남구 봉덕동 고산골의 용두산에 있는 산성으로 축조 방법이 달성산성과 비슷하므로 삼국시

대의 산성일 것이다.

  산성의 남북길이가 150m, 폭은 역 50m이고 둘레는 400m이며 길게 뻗어내린 산기슭을 정점으

로 타원형 성축되어있다. 동편은 신천 냇가와 접해 있어서 저절로 높은 단이 형성되어있고 축조는

에서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벽을 쌓았고 성 전체가 급경사이므로 흙과 돌을 혼합한 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주거지너 저수지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시에만 일시적으로 사용한 산성이었을 것이다.

 

 

 

용암산성 (동구 도동)

 

대구 용암산성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이 산성은 불로동에서 도평동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고도 380m의 용암산 중심으로 가파른 경사면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상 당시 군사적 요

충지로 여겨지는 안심()과 하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대구지역에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성은 대체로 대구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하천

변의 낮은 구릉상에 축조된 것과, 교통요충지가 되는 도로변의 높은 산에 축조된 것이 있다. 낮은그

상에 쌓은 성은 대체로 규모가 작은 토성이며 물 가까이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비교적 이

른 시기의 것들이다. 이에 비해서 높은 산에 쌓은성은 넓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교통요충지에 위

치하는데, 이는 발달된 무기나 대규모의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지세를 택하여 쌓은 것이다. 용암산성

은 후자에 속한다.

  용암산성은 성벽의 둘레가 1,300m 정도의 큰 규모이다. 산 정상은 평평하며 동서 양쪽이 45도 가

량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쪽의 산기슭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대규모

의 인공절벽을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다. 이 인공절벽에는 성문지()로 추정되는

입구가 있다. 산성의 주변에서 신라의 토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축성 시기는 삼국시

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으로 대구지방이 초토화되었을 때 인근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이곳에 모여 활동했다는 구

전으로 보아 그 후대에까지 사용되었던 산성이라 할 수 있다. 성안의 동북쪽에는임진왜란 때에 팠다

는 옥천()이라는 우물터가 남아있다.

 

 

 

 

 

욱수산성 (동구 욱수동)

 

대구.성암산 | 블로그

 

  대구시 동구 욱수동의 골서편에 까꾸랭이, 범둔골 등을 망월곡이라 하며 동·서 한가운데 옛성터인

자산성 혹은 욱수산성 또는 자양산(450m)에 있어 자양산성이라고도 하며 포곡식 산성으로 길이 약

2㎞이며 고산토성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북면()은 자연암벽과 심한 비탈면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남동면에는 돌을 쌓고 남서면에는

돌과 흙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포성()으로 추정되는데 주민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박응

성()이 쌓은 것으로 알고 있다.

 

 

 

죽곡산성 (달성군 다사읍)

 

모암봉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의 죽곡산 일명 모암봉 8부 능선엔 동서로 길게 뻗은 산성이 있

다.

죽곡은 우리말로 풀면 ‘대실’인데 이 지명과 관련된 얘기들이 전해진다. 5세기 무렵 신라는 이곳에

산성을 쌓고 가야와 대치했다.

전쟁 때 쓸 화살을 만들기 위해 산에 대나무를 심었는데 죽곡(竹谷), 대실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되

었다고 한다.

당시 다사, 문양 일대에는 상당히 큰 정치 세력이 존재했었다. 신라처럼 국가 단계로 발전하지 못

하고 부족, 성읍(城邑)단계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별로는 화원 성산리, 불로동 고분군,

봉무동 고분군들과 연대를 같이하는 삼국시대 산성일 것이다.

 

 

초곡산성 (달성군 유가면)

 

초곡산성

 

대구 달성군 유가면 초곡리에 유존하는 산성으로서 비슬산 정상에서 현풍면쪽으로 뻗은 큰 산각들

가운데 사면의 경사가 아주 가파르면서 정상부에 넓은 평지가 있는 산세를 택하여 축성된 산성으로

속칭 "성말랭이" 라고도한다. 성곽은 능선상의 평지를 고대로 하여 타원형으로 돌려져 있으며 총길

이가 1.2km나 된다.

현재 몇개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붕괴되어 외관상 돌무지개가 연속된 것처럼 되어있다.

성벽은 평할석으로 외면을 수직에 가깝도록 하여 쌓아 올렸으며 완전하게 잔존하는 부분을 보면

높이6∼7m, 폭을 3m 내외로 적석했다. 그리고 돌무더기처럼 붕괴된곳도 하부 벽은 아직도 남아있

다.

읍지에 "삼국상쟁시 일과녀분의 축성어적병운"이라 한 것을 보아 조선 이전의 축성이라 짐작되고

또 성내에 수지가 없는점, 평활석으로 적석한 점, 고식축성기법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에 초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팔거산성 (북구 노곡동)

 

대구팔거산성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함지산은 높이 290m의 산으로, 북동쪽으로는 팔공산에 연결되고 북서쪽

은 동명천 유역의 넓은 충적평야에 접하며, 남서쪽은 동명천을 따라 금호강까지 형성된 연봉으로 이

어진다. 그 정상에서는 금호강의 상류와 하류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생김새가 마치 함지박을 엎어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함지산 또는 티산이라고 불린다. 정월 대보

름이면 인근 주민들이 달맞이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의 정상에 구축된 팔거산성은 일명〈독

모성〉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가산산성이 구축되기 전까지는 대구 북방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팔거산성은 분지형태의 평지를 이루는 함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일정한 공간을 성벽으로 둘러

싼 산정식 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동쪽은 정상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고, 서쪽은 평지를 지나

그 바깥쪽 둘레에 판축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성벽의 길이는 1.5㎞ 정도이고,

높이는 바깥쪽에서 5m 내외이다.

산성의 서쪽 중턱에 대형 고분군이 있고, 성 내 여기저기에 삼국시대의 토기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 축조되었을 때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서편

성벽에 망루가 있고 일부에 석축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추측된다.

 

 

 

화원토성 (달성군)

 

화원토성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화원동산의 가장 우뚝한 장소인 성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이는

신라 선덕 왕때 축조한 것으로서 그 모양이 잔과 같이 생겼다하여 배성 또는 잔 뫼라고도 하며, 성산

이란 명칭도 이때 산에 성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상화대가 있으며 배성 주

위 일대에는 30여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는데 당시 호족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조시대에는 이 성이 봉화대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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