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종교개혁의 교회

예인짱 2020. 3. 7. 17:30

종교개혁의 교회



스위스 개혁

울리히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루터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루터가 받은 교육은 스콜라 신학이었고, 츠빙글리는 르네상스의 영향권 아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에라스무스처럼 교육을 통해 점차적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루터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점점 에라스무스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츠빙글리는 특히 루터의 라이프치히 논쟁과 교황 칙령을 불태운 그의 용기에 큰 감동을 받아 로마 교회를 향해 체계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교회 내에 있던 그림들과 형상들을 제거하였고 미사와 제단과 유물들과 종교 행렬을 없앴다. 교회 관리 및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관공서에 의탁하였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차이점은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라“는 주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은 이제 하늘에만 있으며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즉, 주님을 기억하는 기념 예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장 칼뱅(1509-1564년)


프랑스 누아용 출신 1533년 파리에서 공부하던 칼뱅은 “모든 성자의 날”을 기념하는 연설을 한 니콜라 콥 목사의 연설문에 참여하였다는 소문으로 인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가는 곳마다 비밀 장소에서 소수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1535년 스위스 바젤에서 안식처를 찾으면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데 모든 시간을 사용하였다. 이듬해 1536년 봄에 기독교강요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빠른 시간 내에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표준이 되었다.

칼뱅은 독일의 스트라스부르로(학자로서의 조용한 삶을 살기 위해) 가기 위해 제네바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제네바에서는 기욤 파렐이라는 복음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렐은 혼자의 힘으로는 이러한 개혁들이 힘겨움을 느끼고 하룻밤 머물기 위해 제네바에 온 칼뱅을 영입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제네바에서의 그의 사역은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제네바는 이 세상 도시 가운데 칼뱅의 위대한 개혁 운동에 가장 잘 맞는 도시였던 것이다.

그의 교회 관리의 핵심은 장로제도로 장로는 교회 회원 중에 선출한다. 장로는 목사나 사역자와 함께 교회 의회를 형성하고 교리의 순결을 지키며 회원과 목회자의 삶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의회는 교인들을 권징하고 출교까지 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루터가 지방 영주들에게 교회의 일들에 참여할 권한을 크게 부여한 것과는 다르게, 칼뱅은 교회의 자유는 정부의 간섭 없이 교회가 출교의 권한을 갖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뱅의 강한 권징은 많은 반발을 불러와 또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해졌다. 이때 세르베투스 사건과 다른 나라로부터 넘어오는 칼뱅을 지지하는 난민들이 대거 넘어오면서 그를 지지해 주었다.

또 다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제네바 아카데미(왕이나 정부가 아닌, 시민들의 기증에 의해 세워짐)를 설립하여 많은 사역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이렇게 복음의 빛은 칼뱅을 통해 제네바의 작은 도시로부터 유럽의 모든 곳까지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1564년 그는 모든 수고를 마치고 타오르는 심장을 붙든 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칼뱅과 루터의 차이점


두 사람은 예정설에 대해 함께 공감한다. 이 예정설은 바울로부터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는 다른 의견을 보였다. 루터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한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칼뱅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한 것만 허락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설교를 교회 예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교회의 형태에 있어서 칼뱅은 루터보다 교회의 권징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교육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성만찬에 대한 견해에 있어,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이었고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식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칼뱅은 성만찬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그 시간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함께 계시며 참여자들은 믿음으로 몸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입장이었다. 루터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핵심을 두었고 칼뱅은 예정 교리가 핵심이었다. 따라서 루터는 구원의 문제에,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강조하였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을 통해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에 큰 도약을 이루었다. 루터와 칼뱅, 그리고 츠빙글리 등, 이 개혁자들은 혁명과 분리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과 사도 교회로 돌아가고자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의 조직으로 연합되는 것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였다.

재세례파

종교개혁 운동의 영향으로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 재세례파 운동은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연결된 점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즉, 시의회 또는 군주가 종교개혁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 그 안에 포함된 시민들은 모두가 교회 회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세상의 요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많은 개신교 회원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취하였지만 오히려 이것을 안일한 삶을 사는 구실로 삼았다. 재세례파들은 교회의 회원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된 자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는 카톨릭이나 개신교 모두가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으로 거짓 교훈이나 이단은 교회뿐만 아니라 정부까지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단은 범죄 행위로 가장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이들은 모든 부패가 교회와 국가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과 유아세례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스위스에서는 “스위스 형제단”으로 네덜란드에서는 “메노파 사람들”로 알려졌다. 또한 이들은 사도시대와 같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엄격한 공동체 생활과 훈련을 도입하였다. 이들은 개신교와 카톨릭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교회와 국가가 서로 협력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 또한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므로 그들에 대한 박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재세례파의 소수 무리의 광신과 과격한 행위들 때문에 그들의 운동은 힘을 잃었지만 화란 개혁자 메노 시몬스의 지도하에 온건 재세례파가 등장하면서 16세기 후반 다시 번창하였다. 이들을 “메노파 교도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부지런했으며 흠 없는 시민의 삶을 살았다. 이들은 모든 곳에서 거절당하였지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와 국가를 분리한 점과 교회의 개념을 신자들의 모임으로 규정한 점 등은 기독교 역사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부 유럽의 개혁

1) 프랑스

다른 나라들처럼 프랑스에서도 종교 개혁을 위한 큰 사건들이 있었다. 그 사건들로는 “바벨론 포로 사건”(교항 보니파티우스8세가 필립왕에게 패배하여 모욕을 당한 이후 교황들의 거처를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긴 사건-대략 70년)과 대분열(2명의 교황이 존재한 사건 1378-1417년), 세 차례의 교회 총회의, 그리고 르네상스와 에라스무스의 활동이 있었다.

종교 개혁에 대한 뿌리는 이미 여러 세기 동안 준비되고 진행되었는데 카톨릭과 교황의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르네상스로 인해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이 읽혀지으면서 현재의 교회가 많이 변형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경의 번역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는데, 자크 르페브르는 신약 대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고, 로마 서신 주석을 통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주장하였다(1512년).

1518년 루터의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프랑스에 들어오면서 루터의 추종자가 파리에서만 3만 명을 넘을 만큼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로마교회의 부패에 대한 항의 정도에 불과했다. 이들은 아직 조직적이지 않았고 지도자가 부재하였다.

1536년 에라스무스와 르페브르가 사망하면서 르네상스 운동이 끝났음을 알렸는데, 그것은 이들의 목표가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쇄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칼뱅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되면서 많은 추종자가 생겨났다. 칼뱅은 그 책을 통해 종교 개혁의 명분을 훌륭하게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과 투명한 교리, 예배 형태 및 교회 관리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로마 교회가 프랑스에서 칼뱅을 따르는 위그노 교도를 고문하며 박해하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로 그의 사상을 추종자들의 마음에 뚜렷하게 새겨내는 특이한 재능이 있었다. 1559년 즈음에는 프랑스 내에서도 비밀리에 수많은 개신교회가 섰는데 인구의 1/6이 될 정도로 많았다. 이 해에 파리에서 종교 회의를 가졌는데 “갈리아 신앙 고백”이라 불리는 교리를 채택하였다. 이 회의는 국가적인 규모의 개신교 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칼뱅이 그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 회의 이후로 프랑스의 개신교 교도들은 역사에 알려지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위그노 교도들”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2) 네덜란드

1350년 헤이르트 흐로테는 “공동생활 형제회”를 창설하여 훌륭한 교육제도를 통해 많은 인물을 배출해 내었다. 그중 베셀의 존은 면죄부를 공격하였고, 훗날 있을 루터의 칭의 교리를 이미 이때 가르쳤다. 그러나 네덜란드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프랑스보다 오랫동안 혼동 가운데 있었다. 루터의 글들이 많은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츠빙글리와 재세례파 또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1550년이 되어서야 칼뱅의 사상이 들어오고 충격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알려지자 그들은 신속한 승리를 얻었다. 1561년에 작성된 “벨직 신앙 고백”은 칼뱅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의 요리 문답”도 화란어로 번역되어 교회의 지침이 되었다. 1571년에 열린 개신교 총회는 제네바 규칙을 모델로 하는 교회 규칙을 채택하였다.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는 뒤늦게 칼뱅의 사상을 접하였지만 신속하게 그리고 든든히 서갔다.

3) 스코틀랜드

힘없는 왕이 다스리는 가난한 나라로 영주들은 쉬지 않고 싸우고 있었으며 성직자들은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부패해 있었다. 여러 젊은 청년들에 의해 루터의 글이 들어오고 틴들과 커버데일의 영어 성경이 퍼지면서 개신교도들은 개인 집에서 모여 예배드리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데 힘쓰기 시작했다.

존 녹스


칼뱅의 가르침을 받은 “존 녹스”는 칼뱅의 영향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포로에서 석방된 후, 영국의 개혁자 “토마스 크랜머”를 도와 개신교 신조로 받아들인 42개 조항을 작성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여러 지역을 돌면서 종교 개혁의 원칙과 목적들을 사제들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조국의 개혁당의 동료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다. 녹스가 1559년 동료들의 요청으로 스코틀랜드에 돌아 오자 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우상의 장소들은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기념비들은 불에 탔으며 사제들은 참람한 미사를 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60년 스코틀랜드의 국회는 국교를 카톨릭에서 칼뱅주의 신앙고백을 채택한 개신교로 바꾼다고 선포하였다. 정부의 주된 의무는 참 종교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선포되었다. 존 녹스의 인생은 폭풍이 치는 것처럼 거칠고 용맹스러웠다. 그의 위대한 싸움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까지 변화시키는 위대한 싸움이었다.

4) 영국(1534-1563년)


영국에서 종교 개혁의 샛별은 존 위클리프로 영국의 개혁을 이끈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위클리프의 글을 잘 알고 있었으며, 종교 개혁이 터지자 여러 면에서 위클리프의 노선을 따랐다. 헨리8세가 통치하던 초기(16세기 초) 에라스무스의 교회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글들이 널리 읽혔다. 또한 영국교회는 루터의 글들과 그의 용감한 행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위클리프는 4세기 후반의 인물인 제롬의 “불가타”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루터는 독일어로, 칼뱅은 프랑스어로 틴들 또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들은 종교 개혁을 증진하는데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이 특이한 점은 루터나 칼뱅. 츠빙글리. 녹스 같은 지도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직분자에 의해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왕에 의해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헨리8세


영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강한 국가주의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미 세속화되어있는 교황은 이탈리아의 군주로 보일 뿐이었으므로 교황의 통치에 점점 더 반감을 갖게 되었고 로마에 돈을 보내는 것조차 싫어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헨리8세의 이혼 문제가 터지자 즉각적으로 교황에게 반발하게 되었다. “수장령” 즉, 왕이 영국교회의 최고 수장이며 또한 수장이어야 함이 마땅하며 공평하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영국 성공회는 왕을 머리로 하여 주교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구조가 되었다. 수도원들은 문을 닫고 유물들은 더 이상 전시되거나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유물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제들이 조정하던 기구가 발견되는 등 중세 시대의 미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네 사람의 통치하에 네 단계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가 헨리8세로 수장령을 공포하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에드워드6세로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종교 개혁은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것은 교리와 예배 형태로 1547년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교회 내에 모든 형상을 제거하고 사제들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였다. 악령을 쫓는 행위와 기름을 붓는 행위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금지되었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42개 조항도 이때 만들어졌다. 영국에서의 종교 개혁은 완벽한 승리를 이루는 듯하였다.


손을 먼저 태우면서 화형으로 순교하는 "토마스 크랜머"


세번째는 피의 메리 여왕의 통치로,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그의 누이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로 영국의 종교 개혁을 25년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개혁을 선호했던 많은 성직자들과 주교들은 추방되고 많은 개혁자들이 화형을 당하였다. 이들 중 용감하게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이 “토마스 크랜머”로 헨리8세 이후 중심세력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다. 피의 메리 여왕이 집권하던 1555년 말에 크랜머는 출교 당했고, 메리는 그가 죽기 전에 개신교를 부인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화형 직전에 크랜머는 개신교 신앙을 부인하는 서류에 서명한 자신의 오른손을 바삭하게 탈 때까지 견디는 위대함을 보이고 결국 믿음의 영웅으로 세상을 떠났다. 피의 메리는 그녀가 사망하는 1558년까지 쉬지 않고 개신교도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이에 그녀는 “피의 메리”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네 번째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크랜머에게 교육을 받은 그녀는 마음으로는 이미 개신교도가 되어 있었다. 피의 메리의 박해는 개신교를 완전하게 멸절시키려는 것이었지만 도리어 더 강한 반-로마 카톨릭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터전이 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르자 다시 수장령을 통과시켜 다시는 교황의 권위가 영국 교회 위에 서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엘리자베스는 카톨릭과의 타협을 통해 개혁주의에서 후퇴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첫 번째가 성만찬 앞에서 무릎 꿇는 행위가 성체 숭상이라는 언급을 뺀 것이었다. 그리고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가 된다는 교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 등이었다. 카톨릭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타협을 하게 된 것이다. 42개 조항 또한 39개 조항으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의 개혁은 당분간 정지 상태가 되었다.